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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포항 중성리 신라비 발견자를 만나서

by taeshik.kim 2018.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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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중성리비 발견자 김헌도씨(오른쪽)를 인터뷰하는 김태식. 2009. 9. 3



사진은 2009년 9월 3일, 경주 보문단지 내 드림센터에서 열린 포항 중성리비 조명 학술대회장에서 이 비 발견자 김헌도씨(오른쪽)를 내가 인터뷰 하는 장면이다. 오세윤 작가한테 부탁해서 찍었다. 이 중성리 신라비는 이때를 즈음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 까닭에 이 분야 직업적 학문종사자를 비롯해 지역사회에서도 관심이 지대했다. 당시 학술대회장에 그가 참석했다. 이 인터뷰는 다음과 같이 기사화했다. 기사에서는 차마 토로하지 못했지만, 김씨는 뭔가 불만이 많았다. 


<사람들> 最古 신라비 발견 김헌도씨

"로또 당첨된 기분, 개인 아닌 국가의 보물"


(경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신라비석인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지난 5월 현지 주민이 발견해 당국에 신고함으로써 존재를 드러냈다.


3일 경주 보문단지 내 드림센터에서 국립경주주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가 마련한 이 비석 발견 기념 학술대회에 발견자인 김헌도(金憲道·46)씨가 참석했다.


비석이 발견된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가 고향이냐는 질문에 김씨는 "(이명박) 대통령과 같은 (포항) 덕실마을"이라고 대답했다. 비석 발견지점과 덕실마을은 대략 10리 정도 떨어졌으니 그가 비석을 발견한 곳이 그의 고향이라고 해도 무방한 셈이다.


어릴 때 고향을 떠났다가 5년 전쯤에 귀향했다는 그는 지금의 직업을 "1일 노동자"라고 소개했다.


5월 초순 어느날, 김씨는 포항시가 주민개선생활개선사업 일환으로 그가 사는 중성리 일대에서 추진하는 도로개설 작업장 한쪽에 놓인 넓적한 판돌 하나를 주목한다.


"파낸 흙을 모두 트럭이 실어나갔는데, 이틀이 지나도 그 돌은 그대로 있더군요. 생긴 게 조경석 돌로 쓸만하다 생각해서 집으로 옮겨다 놓았습니다. 집사람이 왜 그런 걸 쓸데 없이 가져왔느냐고 핀잔을 주더군요." 

그러다가 5월11일 김씨는 이 돌을 씻게 된다.


"물조리로 물을 뿌리면서 빗자루로 흙을 쓸어냈습니다. 한데 이상하게 (돌) 표면에서 뭔가 느껴졌습니다. 가만히 보니 한자가 잔뜩 적힌 비석이었습니다. 이에 제 친구인 지방신문 편집국장에게 제보를 하고, 포항공대 초빙교수인 배용일 선생을 비롯한 전문가가 탁본을 하고 판독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비석 발견 사실은 5월13일 포항시에 공식 신고가 이뤄지고, 포항시에서는 이튿날 오전 문화재청에 보고함으로써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한 공식 조사가 시작됐다.


이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추후 조사를 거쳐 최고의 신라비일 것이 확실시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성과에 김씨는 "로또 당첨된 것과 같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제가 비석을 발견했다고 하니깐 주변에서는 큰 돈을 벌게 된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비석은 개인 재산이 아니라 국가의 재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라사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 이상 제가 바랄 것은 없습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이날 학술대회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이 처리됐다. 


"포항 중성리비는 신라 지증왕의 판결문"

이성시 교수 "비문 첫줄에 '只折盧' 보여"


송고시간 | 2009-09-03 16:10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지난 5월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에서 발견돼 현존 최고(最古) 신라비로 분석된 '포항 중성리신라비'(浦項 中城里新羅碑)는 재산 분쟁과 관련한 판결 내용을 담았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발견 직후 이 비석을 경주로 옮겨 분석 중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는 2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이 비석 실물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하기 시작한 데 이어, 3일 경주 보문단지 내 드림센터에서는 이 비석의 가치를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비석의 발견 경위 보고와 그 발견 지역인 포항 흥해의 역사 및 고고학적 고찰에 이어 중성리비가 신라 금석학에서 차지하는 위치(선석열.부산대)와 비문의 어문학적 검토(권인한.성균관대), 비문 내용과 건립연대(이우태.서울시립대), 비문의 서체와 고신라 문자생활(고광의.동북아역사재단)과 같은 개별 발표와 이에 대한 개별 및 종합토론이 있었다.


몇 글자가 깨져 없어지고, 다른 몇몇 글자가 판독에 논란을 빚은 점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비문은 각 글자가 양호한 상태임에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어떤 발표자나 토론자도 자신있는 답을 내 놓지 못했다.


발표자 중 한 명인 이우태 교수는 "이런 의미로 생각했다가 돌아서면 다른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는 말로 해석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렇지만, 이 중성리비가 지금의 포항 흥해 지역에서 당시에 발생한 모종의 소송에 대해 신라 조정이 관여해, 그것을 결정한 판결문을 새겼다는 점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과연 이 비가 정확히 언제 건립되었으며, 소송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았다.


건립 시기에 대해 비문 첫 줄 맨 앞에 '신사'(辛巳)라는 간지가 보이고, 그 내용이 20년 전에 같은 흥해에서 발견됐으며 503년(지증왕 4년)에 건립됐다고 추정되는 영일 냉수리비와 흡사하다는 점에서 이 '신사년'이라는 해가 지증왕 때인 501년 혹은 그 이전이라는 데도 이견은 없었다.


이와 관련해 몇몇 발표자와 토론자는 신사년이 501년(지증왕 2년)일 것이며, 비문 첫줄 중간 이하에 보이는 글자를 지증왕을 지칭하는 이름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예컨대 선석렬 박사와 이우태 교수는 첫줄에 보이는 '○折盧'(○는 불확실한 글자)의 '折盧'(절로)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보이는 지증왕의 다른 이름 표기들인 '지철로'(智哲老)나 '지대로'(智大路), 혹은 '지도로'(智度路)의 '철로'나 '대로' 혹은 '도로'와 같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들이 가능성을 제기한 것과는 달리 이성시 교수는 이에서 한발 더 나아가 '○折盧'의 불완전한 첫 글자를 '只'라고 보면서, 결국 '只折盧'(지절로)는 지증왕의 다른 이름임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이 교수는 재판 소송의 대상으로 비문에 보이는 '宮'(궁)이라는 글자를 고대 일본에서 흔히 보이는 '미야케'('宮'이라고는 말로 자주 표기)와 같은 개념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면서, 결국 비문에서 말하는 '宮'은 경주에 기반을 둔 진골 유력 귀족의 식읍(食邑)과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기존 냉수리비에서는 '교(敎)', 즉, 판결 내용(결정 사항)을 내린 주체가 갈문왕을 비롯한 고위급 관리가 7명인 데 비해, 이 중성리 비문에서는 그 주체로 중간급 관위(官位)인 아간지(阿干支.6등) 2명만 등장하는 현상을 비교하면서, 이우태 교수는 "냉수리비문이 대법원 전원재판 판결(문)인 데 비해, 중성리비문은 대법원 단독심리 판결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그에 앞서 나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송고하기도 했다. 


"현존 最古 신라비는 재판 판결문" 

'포항 중성리신라비' 조사결과 발표


2009/09/01 10:05 송고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지난 5월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에서 발견돼 현존 최고(最古) 신라비로 분석된 '포항 중성리신라비'(浦項 中城里新羅碑)는 재산 분쟁과 관련한 판결 내용을 담았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발견 직후 이 비석을 경주로 옮겨 분석 중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는 이에 적힌 비문을 판독한 결과 기존에 발견된 영일 냉수리 신라비와 마찬가지로 "재물(또는 토지 등 재산)과 관련된 소송의 평결문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1일 밝혔다.


 

연구소는 비석에는 "과거에 모단벌(牟旦伐.인명으로 추정)의 것(재물)을 다른 사람이 빼앗았는데 그 진상을 조사하여 진실을 밝혀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며, 향후 이에 대한 재론을 못하도록 한다"는 평결 내용을 적었으며, 이런 평결에 나오기까지의 과정과 관련 인물 등을 밝혀 현지인 등과 후세에 경계를 삼는 내용을 담았다고 덧붙였다.


이 '중성리비'는 발견 당시에는 '학성리비'로 보고됐지만, 정확한 발견 지점이 학성리가 아니라 중성리로 확인돼 명칭이 교체됐다.


이 중성리비는 최대 높이 104㎝, 최대 폭 49㎝, 두께 12~13㎝, 무게 115kg인 부정형 자연석 화강암 판돌 중 한 면에만 음각으로 한자를 새겨 넣었다.


글자는 전체 12행이지만, 각 행(行)별로 새긴 글자 수는 차이가 있어 최대 20자까지, 모두 203자 정도가 확인됐고, 비석 하단부 약 20㎝ 정도의 공간에는 글자를 새기지 않았다.


비면 맨 위쪽 일부와 우측면 일부가 결실됐을 뿐, 글자 대부분은 판독 가능할 정도로 양호한 상태라고 연구소는 밝혔다.


이 비문이 제작 시기는 논란이 있지만 비문 첫 대목에 신사(辛巳)라는 간지가 보이며, 비문 내용이나 표기법 등으로 볼 때, 신라 지증왕 2년(501)보다 늦을 수는 없고, 이보다 60년이 빠른 또 다른 신사년인 441년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이 중성리비는 "지금까지 최고(最古) 신라비로 알려진 영일 냉수리비가 503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현존하는 최고 신라비가 된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연구소는 이 비문에 대한 조사 결과를 '포항 중성리신라비'라는 보고서로 발간하는 한편, 1일자로 연구소 홈페이지(www.gcp.go.kr)에 이 책자 원문을 모두 공개해 누구나 무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연구소는 관련 학술 심포지엄을 오는 3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경주 보문단지 내 드림센터 대회의실에서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는 비문에 대한 금석학적 검토(선석렬), 어문학적 고찰(권인한), 내용과 제작시기(이우태), 서체와 고신라 문자생활(고광의)에 대한 연구결과가 발표될 예정이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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