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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하산길 잘못 들어 발견한 아라가야 왕궁터

by taeshik.kim 2018.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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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지난 6월 7일, 아라가야 실체를 드러낼 왕궁 추정지를 찾아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아라가야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나아가 일본서기 등지에 아나가야(阿那加耶), 아야가야(阿耶伽耶), 안라(安羅)와 같은 여러 표기로 등장하는 가야 제국(諸國) 중 하나로 그 중심지가 지금의 경남 함안이고, 삼국 중에서도 특히 신라와 백제가 쟁패한 6세기 무렵 중요한 정치체라는 편린 정도만 남겼을 뿐이다. 


한데 연구소에 의하면, 이러한 아라가야가 궁전으로 삼았을 법한 고고학적 증거를 마침내 찾아냈다는 것이었다. 이날 발표에 의하면, 그간 문헌이나 구전을 통해 아라가야 왕궁터로 지목된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 289번지 일원에서 진행한 발굴조사 결과 5∼6세기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토성과 목책(木柵) 시설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조사결과 토성은 현존하는 높이만 8.5m에 달하고 상부 폭은 20∼40m에 이른다. 구릉을 따라 조사대상지에서 대략 40m 구간이 확인된 토성 성벽은 본래 높이는 10m에 이를 것으로 추정됐다. 



아라가야 왕궁 성벽



흙으로 성벽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나무기둥을 설치하고, 차곡차곡 흙을 쌓아 올리는 판축기법을 쓴 것으로 나타났다. 강동석 가야연구소 학예연구관은 그날 현장을 찾은 기자들에게 "동시기 가야 토성으로는 높이가 약 4m인 합천 성산토성, 양산 순지리토성과 높이 2.8m인 김해 봉황토성이 있다"면서 "다른 가야 토성보다는 확실히 크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백제 왕성으로 확실시되는 풍납토성 높이가 13.3m이고, 몽촌토성 높이가 6m라는 점을 고려하면 가야리 토성도 왕성급 유적이라는 것이 연구소 설명이었다. 더불어 성벽을 다짐하고자 나뭇가지나 잎을 올리고 태운 목탄층이 성벽 기저부에서 드러났다. 당시 연구소는 나뭇가지로 층을 만드는 부엽층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 바가 있으나, 목탄층이 나오기는 처음이라 했지만, 실은 목탄층은 연천 호로고루성과 같은 곳에서 이미 발견됐다. 


성벽 위에서는 방어시설인 목책으로 짐작되는 나무기둥 2개 열이 일정한 간격으로 길게 드러났고, 더불어 그 근처 성벽 안쪽 평탄대지에서는 건물터와 구덩이 유구가 발견됐다. 목책 나무기둥 구멍은 직경 약 30㎝ 안팎이고, 나무기둥 사이 간격은 1m 정도였다. 좌우 나무기둥 열 폭은 2m. 


이에서 드러난 건물터에 대해 연구소는 "바닥이 지면보다 높은 고상(高床)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기둥 구멍 배열이 불규칙적이어서 정확한 건물 형태와 규모를 추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아라가야 왕궁 성벽 바깥면



건물터를 비롯한 이 일대에서는 통형기대(筒形器臺)와 손잡이가 달린 주발, 붉은색 연질토기가 드러나기도 했다. 이들 토기는 현재의 한국고고학 편년에 의하면 대략 5세기 중반∼6세기 중반 유물로 평가됐다. 


이 지역은 조선 선조시절인 1587년 편찬한 읍지 함주지(咸州誌)와 조선총독부 고적조사보고에는 아라가야 왕궁 추정지로 기록됐고, '남문외고분군', '선왕고분군', '신읍'(臣邑)과 같은 지명이 전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성과를 총괄하면서 연구소는 "이번에 나온 토성은 아라가야에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권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며 "그동안 아라가야 유적 발굴은 고분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왕성 유적이 나오면서 최고지배층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이상이 당시 가야연구소 발굴성과 개략이다. 아라가야 왕궁터로 지목되는 흔적을 발굴조사를 통해 찾아냈으니, 이 얼마나 흥분할 만한 성과인가? 이를 발판으로 연구소가 계속 발굴을 진행한 결과 이곳이 아라가야 왕궁터임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후대에 이 사건이 어찌 기록될지 알 수는 없으나, 21세기 한국 역사고고학 제1의 금자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발견이요 발굴이다. 



2018. 6월 당시 성벽 절개 상황



그렇다면 이 왕궁터는 어찌해서 발견되었는가? 


지난 4월 11일 무렵, 함안군 학예연구사 조신규는 이 왕궁터 뒤편 삼봉산이라는 곳을 오른다. 거기에 가야가 쌓았을 가능성이 있는 봉산산성을 살피기 위한 산행이었다. 산을 내려오던 조신규는 그만 길을 잘못 들고 만다. 한데 저쪽에 공사 장비가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다가가 살피니 토지 소유주가 밭 모양을 잡으려고 장비를 불러 경사면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한데 그렇게 표토가 날라간 땅속을 살피니 토층이 영 이상했다. 성벽일 가능성이 컸다. 


이에 조신규는 즉시 작업을 중지케 하고는 관련기관에 연락해서 자문회의 한 다음에 가야연구소에 정식 조사를 의뢰한다. 군에서 별도 조사기관을 선정해 하려고도 했지만, 성벽이 너무 잘 남은 모습인데다 나중에 잘하면 사적 지정도 가능하다는 판단에서 국립기관에 정식 조사를 의뢰했다는 것이다. 



함안군 학예연구사 조신규..일본 녹용 노리는 듯. 그의 페이스북에서 무단 전재.



모든 위대한 발견이 그렇듯이 아라가야 왕궁 역시 우연의 소산이다. 그날 조신규가 삼봉산을 오르지 않았더라면? 그때 조신규가 제대로 길을 찾아 하산했더라면? 그때 조신규가 공사 장비를 보지 못했더라면? 아라가야 왕궁은 지금도 지하에서 잠을 자며, 나아가 그 상당 부분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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