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본문 바로가기

기고문

화랑세기 비사 - 신라시대의 분방한 성문화

*** 아래는 대한남성과학회 간행 기관지인 《건강한 성 행복한 삶》 2017년 15권 1호(간행일 2017-07-21) '성칼럼 : 화랑세기 비사 - 신라시대의 분방한 성문화'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고문으로 아래서 원문 PDF를 제공한다. 내가 이곳에 전재하는 원고는 이 학회 제출본이라, 혹 최종 간행본의 그것과 차이가 있을 수도 있음을 밝혀둔다. 


http://www.andrology.or.kr/pdf/2017_01/01.pdf



화랑세기 필사자 남당 박창화




화랑세기 비사 - 신라시대의 분방한 성문화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역사전문 언론인

 

어머니와 아들이 간음한 흉노보단 낫다

 

아내를 얻을 때 같은 성씨를 취하지 않음은 구별을 두터이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노()나라 공작이 오()에 장가들고, ()나라 후작이 성이 같은 네 첩을 취한 일을 진()나라 사패(司敗)와 정()나라 자산(子産)이 매우 나무랐다. 신라의 경우 같은 성씨를 아내로 맞이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형제의 자식과 고종·이종 자매까지도 모두 들여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은 각기 그 풍속이 다르다 하나 중국의 예법으로 따진다면 이는 커다란 잘못이라고 하겠지만 흉노(匈奴)와 같은 데서 그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간음하는 짓이 이보다는 더욱 심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가 신라 제17대 왕으로 내물니사금(奈勿尼師今·재위 356~402)이 즉위한 사실을 적으면서 그에 붙인 편찬 총책임자 김부식의 역사 평론이다. 이를 풀어보면 결국 동성동본, 요즘 민법 기준으로 보면 근친상간을 비판하는 논조다. 그렇지만 김부식은 그것을 옹호하기도 한다. 중국의 예법으로 보면 비판받을 일이겠지만, 외국에서는 풍속이 다르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어머니와 아들이 간음하는 흉노보다 신라는 그래도 낫다고 말한다


춘추전국시대 중국은 주 왕실을 중심으로 제후국들이 명목상 이 주 왕실을 종주국으로 받드는 모양새였지만, 실상 각기 다른 왕국을 경영했다. 주 왕실은 성이 희씨(姬氏)였고, 그 제후국 중 노()나라와 오()나라, 그리고 진()나라 역시 같은 성씨였다. 중국 예법에 의하면 희씨인 노나라 공작이 같은 희씨인 오()나라 왕실 여자를 취할 수 없고, ()나라 후작 역시 성씨가 같은 네 첩을 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이런 동성간 결합을 단순히 성씨가 같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일 역시 심하기 짝이 없다. 애초 주 왕실의 천자가 형제나 자식들을 제후들로 분봉한 이래 이때는 이미 수백 년이나 경과한 뒤였다. 나아가 근친간 결혼이 광범위하게 허용된 신라는 그래도 흉노에 비해서는 낫다는 김부식의 언급도 교정할 대목이 적지 않다. 그가 말한 흉노 사회의 어머니와 아들간 간음은 실상은 생모를 아들이 아내로 맞이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죽으면서 그 후궁이나 첩을 그 아들이 거둔 일을 말한다. 실상 이런 일은 고려사회, 특히 그 왕실에서는 광범위하게 있었다.


그렇다면 하필 이 대목에서 김부식은 이런 말을 했을까? 그것은 내물왕을 둘러싼 계보 때문이다. 이에 의하면 내물왕은 할아버지가 구도(仇道) 갈문왕이며, 아버지는 각간(角干)을 역임한 말구(末仇)라는 사람이다. 어머니는 김씨로 휴례 부인(休禮夫人)이라는 사람이다. 왕비 역시 김씨인데 신라 제13대 미추왕(味鄒王)의 딸이라고 한다. 언뜻 이에서 별로 문제가 될 만한 소지가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바로 내물왕의 왕비가 미추왕의 딸이라는 데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미추니사금(味鄒尼師今)은 아버지가 김알지 후손인 구도다. 내물왕 할아버지라는 바로 구도 갈문왕을 말한다. 그러니 신라사에서는 김씨 첫 왕인 미추는 구도와는 형제다. 둘 중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는 확실치 않다. 어떻든 내물왕은 할아버지 형제의 딸을 아내로 맞은 것이며, 이를 김부식은 비판한 것이다



이른바 화랑세기 모본母本


 


화랑세기가 폭로한 파천황의 성문화

 

역사, 그 중에서도 현대와는 더욱 거리가 먼 고대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현재에 대한 상대화에서 무엇보다 의미를 찾는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지금의 도덕과 철학이 유사 이래 아득한 옛날부터 그리했다는 착각에 살곤 한다. 하지만 시간과 장소를 조금만 옮겨도 사정은 딴판이라, 예컨대 지금에는 패륜이라 해서 법적으로도 단죄될 일들이 그때는 당연한 것으로 통용되던 시대를 마주한다.


이와 관련해, 요즘 성문화를 개탄하는 목소리가 많은 줄로 알지만, 이것만 해도 무대를 신라시대, 혹은 고려시대, 혹은 더 내려 조선시대 초기만 해도 그 개탄하는 성문화에 견주어 훨씬 더 개방적인 시대였음을 알게 된다. 신라시대가 이러했음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근자에 새로이 공개된 화랑세기(花郞世紀)를 보면 더욱 그러한 모습을 엿보게 된다. 이 화랑세기는 삼국사기 김대문(金大問) 열전에 의하면, 신라 성덕왕 3(704), 지금의 경기도지사 정도에 해당하는 한산주 도독(漢山州都督)을 역임한 그가 저술한 책 중 하나로 이름을 들이민다.


삼국사기에서는 그때까지 이 책이 전해진다 했지만, 후대에 망실된 것으로 간주됐다. 그러다가 1989년과 1995년 두 차례에 걸쳐 그것을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라는 사람이 필사했다는 두 종류 판본이 공개되기에 이르렀다.(그림1) 오랫동안 사라졌다가 갑자기 출현했기에 그것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전재한 것인지, 아니면 박창화(그림2)라는 사람이 그 이름을 빌려 지어낸 역사소설인지를 두고 한국고대사학계에서는 논쟁이 치열하다. 필자는 다각도로 그것을 분석한 결과, 위서(僞書)일 수 없으며, 신라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지어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화랑세기는 필사본 공개 이전에는 제목만으로도 역대 화랑들의 전기물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실제 공개된 화랑세기를 보니, 화랑 중의 화랑, 우두머리 화랑인 풍월주(風月主)의 전기임이 드러났다. 세기(世紀)라 했으니, 역임 순서대로 풍월주들의 행적을 정리했을 것이니, 실제 모습을 드러낸 화랑세기는 초대 위화랑(魏花郞) 이래 마지막 신공(信功에 이르기까지 역대 풍월주 32명의 전기를 순차적으로 싣고 있었다.


역대 풍월주들을 보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겨우 한두 번 이름만 들이미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아예 존재가 처음 알려진 이도 있다. 그런가 하면 사다함(5)이며 ()유신(15), ()춘추(18), ()흠순(19), ()양도(22)처럼 널리 알려진 인물도 풍월주를 역임한 것으로 드러난다. 훗날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가 풍월주를 지냈다는 사실도 무척이나 흥미롭다. 김흠순은 김유신의 친동생으로서 형을 도와 신라의 삼국통일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런 내용을 담은 화랑세기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의 근거는 여러 가지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이 이에서 드러나는 문란한 성풍속이었다. 이를 주장을 일삼은 어떤 고대사학자는 파천황(破天荒)의 성풍속이라 했다. 신라시대가 제아무리 성문화가 개방되었다고 해도, 이 정도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랑세기가 폭로한 신라의 성문화는 어떠했기에 현대에 대한 상대화를 사명으로 내세워야 하는 역사학자들까지 경악케 했을까? 나아가 과연 그에 드러나는 신라 성문화는 과연 무분별하기만 한가?



화랑세기에 나타난 양도良圖 관련 계보도



 

아버지가 세 명인 풍월주 김양도

 

백제·고구려 멸망 뒤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직접 지배 야욕을 노골화하면서 당과 일전을 겨루기 시작한 무렵인 문무왕 재위 9(669) 여름 5, 신라는 각간 흠순(欽純)과 파진찬(波珍飡) 양도(良圖)를 사죄사절단으로 보낸다. 이 중 김유신 동생인 김흠순은 무사 귀국하지만, 김양도는 당나라 서울 장안의 옥에 갇혀 있다가 사망하고 만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 과정에서 장군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린 김양도의 죽음은 양국 외교관계를 최악의 국면으로 몰고 간다. 물러설 곳이 없는 신라는 마침내 칼을 빼들고 당과 격전에 나선다.


화랑세기를 보면 그가 제22() 풍월주를 지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양도는 진평왕 32(610), 아버지 모종(毛宗)과 어머니 양명(良明)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이미 총명함을 드러낸 그는 17세 풍월주를 지내는 염장(廉長)을 따라 화랑에 들어가 33살 때인 선덕왕 11(642)에 풍월주에 취임해 4년을 일했다.


이에서 드러난 그의 계보에서 특이한 점은 아버지가 3명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생물학적 아버지는 모종(毛宗)이지만, 17세 풍월주 염장과 16세 풍월주 출신인 보종(寶宗)의 아들이기도 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그림3)


이에는 그 어머니 양명(良明)이 개입한다. 양명은 보명이라는 여인이 진평왕을 섬겨 낳은 딸로서 처음에는 보종과 결혼했다. 이런 상태에서 양명은 모종과 사통(私通)해 양도를 낳았다. 그래서 양도는 한동안 친아버지가 보종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친아버지인 모종을 숙공(淑公), 다시 말해, 아재비라 불렀다. 보종은 이런 양도를 양자의 일종인 사자(嗣子)로 삼았다. 그렇다면 염장과 양도의 관계는 어떠하기에 부자(父子) 관계가 성립할까?


염장은 보종이 16세 풍월주로 재임할 때는 그 넘버 2인 부제(副弟)로 있었고, 17세 풍월주를 이어받았다. 한데 양도의 어머니 양명은 모종에게서 양도를 낳기 전에는 염장과 사통해서 장명(長明)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따라서 장명은 양도에 대해 아버지는 다르고, 어머니는 같은 이른바 이부동모형(異夫同母兄)이었던 것이다. 염장과 양도 사이에 부자 관계는 양명 및 그 아들인 장명을 고리로 해서 생겨났다.


염장에게서는 장명을, 모종에게서는 양도를 각각 낳은 양명은 정식 남편인 보종에게서도 딸 하나를 두는데 보량(寶良)이 그 주인공이다. 보량은 양도보다 5살이 많은 누나였다. 요컨대 보량-장명-양도로 순서가 이어지는 자식들은 아버지는 각기 다르지만 어머니는 같은 이부동모(異夫同母) 형제자매였다. 이러한 복잡한 사통 관계는 그림으로 제시한다. 이를 보면 양도는 모종을 친아버지로 하고 보종과 염장에게는 일종의 양아들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모종과 보종, 염장은 여자들을 공유해 마치 스리섬(threesome) 비슷한 섹스를 하기도 하고, 또 서로에 대해서는 동성애 애인이기도 한 모습을 보인다.


한데 양도는 아내가 바로 누나 보량이었다.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는 같은 형제자매간 근친혼이다. 양도는 동기간 근친혼을 극히 싫어했다. 보종과 양명이 밀어붙이는 누나 보량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장면을 화랑세기 는 공은 본디 동기간에 결합하는 풍습을 싫어해서 따르지 않으려 했다. (어머니인) 보량이 그 때문에 병이 생겼다고 한다. 결국 부모의 설득에 못 이겨 누나와 결혼하게 된다. 그의 어머니는 이 결혼을 주선하면서 근친혼을 신국(神國)의 도()”라고 했다




화랑세기 관련 족도族圖인 소위 <상장돈장>


 

임산부를 바치는 사람들

 

화랑세기에 보이는 신라 성 풍속 중 압권은 이른바 마복자(摩腹子) 제도다. 화랑 집단에서 남편이 자기 아이를 임신한 아내를 상관에게 받치는 습속을 말한다. 이는 비단 화랑 집단에서만이 아니라 신라 사회 전반에 걸쳐 있었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간다. 이 제도는 정리하면 이렇다.


임신한 아내를 상관에게 바친다. 이때 산 꿩을 예물로 장만해 가져간다. 그 아내를 상관이 거두어 며칠 혹은 몇 달 안에 총애를 얻으면 물러난다. 물러날 때 남편은 다시 재물을 가져가 상관에게 바친다. 이를 사함(謝函)이라 한다. 감사의 뜻을 담은 예물 박스라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임신한 아내가 아들을 낳으면, 아내는 석 달 만에 다시 상관에게 들어간다. 이때는 양과 돼지를 예물로 바치니 이를 세함(洗函)이라 한다.


도대체 이런 일이 가능할까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결국 일종의 양자 시스템이랑 비슷하다. 상관과 그의 아내를 바친 남편은 이를 통해 결속체를 이룩하며, 그에서 난 아들은 상관의 양자가 된다. 상관으로서는 부하와 부하의 아들, 그리고 부하의 아내까지 자기 사람으로 거느리게 되는 것이다




신라 토우 장식 장경호長頸壺


 


아들을 낳고자, 남자 셋을 동시에 들인 선덕여왕

 

독특한 신분제 사회인 신라에서는 성골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누구나, 혹은 다수가 왕이 될 수 있으면, 그 사회는 그만큼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이에 신라는 성골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엄격히 제한했다. 하지만 이것이 제발을 묶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진평왕을 끝으로 남자로는 성골이 씨가 말라버린 것이다. 신라에 진평왕을 이어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2명이 나란히 배출된 이유가 이에서 말미암는다. 이를 끝으로 김춘추가 즉위함으로써 성골왕 시대는 영원히 종말을 고하고, 마침내 진골이 왕위에 오르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아직 여자 성골이 남아있던 선덕여왕 시대, 신라는 이 성골 여왕에게서 성골 왕자를 얻고자 무지막지한 노력을 기울인다. 선덕은 즉위와 더불어 용춘이라는 남자를 지아비로 삼았다. 하지만 이에서도 왕자를 낳지 못하자, 신하들이 논의한 결과 흠반(欽飯)과 을제(乙祭)라는 두 남자를 더 왕의 잠자리에 들였다. 세 남자를 동시에(실제로는 차례로) 들여 왕자 생산을 돕도록 한 것이다. 이를 화랑세기에서는 삼서지제(三婿之制)라 했다.


하지만 이 실험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선덕여왕이 원천에서 불임이었거나, 지나치게 고령이 아니었나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 선덕여왕을 신라 사람들이 성조황고(聖祖皇姑)라 불렀다 하는데, ‘()’()’ 같은 단어로 보아 고령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해서 선덕왕 사후 왕위는 이제 남녀를 통틀어 오직 한 명 남은 성골인 선덕왕의 사촌동생 진덕(眞德)으로 넘어간다. 진덕 역시 아들을 두지 못했다.


아들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 여인에게 남자 3명을 시봉케 하는 이런 습속을 현재의 우리가 언뜻 동의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천 수 백년 전을 거슬러올라가는 신라시대에는 전연 다른 맥락이 된다. 현재의 윤리를 잣대 삼아 신라시대를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음 보위를 이을 왕자 생산의 절박함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


비단 이뿐만이 아니라 앞서 본 대로 양도의 어머니처럼 한 여인이 세 지아비를 동시에 거느리거나, 임신한 아내를 상관에게 바치는 일은 무분별한 성 풍속이 아니라, 그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의 일종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