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漢詩 & 漢文&漢文法

황도(黃滔) <궁중에서 흰사슴을 보이기에(內出白鹿宣示百官)>

by taeshik.kim 2018. 9. 26.
반응형

서성 선생 글이다. 


內出白鹿宣示百官

궁중에서 흰 사슴을 내어 백관에게 보이다


上瑞何曾乏? 상서(上瑞)는 언제나 있었으나

毛群表色難. 짐승이 잘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라

珍於四靈外, 네 가지 영물 이외에 진귀한 것인데

宣示百寮觀. 전시하여 백관에게 보여주는구나

形奪場駒潔, 모습은 흰 망아지보다 더 깨끗하고

光交月兎寒. 빛은 월궁의 토끼보다 더 차가워

已馴瑤草列, 벌써 길들여져 신선의 풀과 나란히 있고

孤立雪花團. 혼자 서 있으면 눈덩이가 뭉쳐진 듯해

戴豸慚端士, 해치관을 쓴 어사(御史)에게 부끄러우니

抽毫躍史官. 글을 써서 사관(史官)에 달려가 알리네

貴臣歌詠日, 높은 신하들이 태양을 노래하며

皆作白麟看. 모두가 흰 기린을 지어 내보이는구나


황도(黃滔, 840?-?)는 자가 문강(文江)이며 천주(泉州) 보전(莆田, 복건성) 사람이다. 과거 시험에 20여년 동안 낙제하다가 895년 비로소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사문박사가 되었다가 901년 오대 민(閩)을 세운 왕심지(王審知)의 징초를 받아 감찰어사 겸 위무절도추관(威武節度推官)이 되었다. 왕심지가 민 왕조를 유지하는데 황도의 공이 컸다. 황도는 시문에 뛰어났으며 특히 율부(律賦)를 잘 지었다. 당시 금석과 지명(誌銘)을 비롯하여 나라의 중요한 저작은 대부분 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또 「마외부」(馬嵬賦), 「경양부」(景陽 賦) 등은 ‘절조’(絶調)라는 칭송을 받았다. 황도는 교제도 넓었는데 특히 나은(羅隱), 임관(林寬), 최도융(崔道融), 서인(徐夤) 등과 친하여 자주 수창하였다. 당시는 혼란기여서 중원이 어지러웠는데, 한악(韓偓), 왕척(王滌), 최도융 등을 민나라에 오게 하여 문학의 번성을 이룬 것은 황도의 공이다. 『신당서』에 『황도집』 15권과 당대 민 지방 시인의 작품을 모은 『천산수구집』(泉山秀句集) 30권이 저록되어 있으나 현전하지 않는다. 『송사』에 『편략』(編略) 10권, 『보양황어사집』(莆陽黃御使集) 2권이 저록되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날 보이는 것은 『황어사집』(黃御使集) 권10만 있다. 그의 시는 『전당시』에 3권으로 묶여져 있으며, 문장은 『전당문』에 4권으로 모아져 있다. 『십국춘추』(十國春秋) 본전에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