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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각덕(覺德)

by taeshik.kim 2018.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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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진흥왕시대 활약한 신라 고승. 양(梁)으로 유학하고는 진흥왕 10년(549)에 신라에 파견된 양나라 사신을 따라 부처 사리를 지니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4 진흥왕본기 : 10년(549) 봄에 양나라에서 사신과 입학승(入學僧) 각덕(覺德)을 파견하여 부처의 사리(舍利)를 보내왔다. 왕이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에서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다.


해동고승전 권 제1 법운(法雲) 전 : (진흥왕) 10년(549)에는 양에서 사신과 입학승 각덕(覺德)을 보내면서 부처님 사리도 함께 보내왔다. 왕은 여러 신하에게 흥륜사 앞 길까지 나아가 받들어 맞이하게 했다. 


해동고승전 권제2 유통지2(海東高僧傳卷第二 流通一之二) : 승려 각덕(覺德)은 신라 사람으로 총명하고 박식했으며, 범인인지 성인인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신라는 이미 불교를 받들어 행했으므로 사람들이 다투어 귀의하고 믿었다. 스님은 요달(了達)한 지혜로 세상을 교화할 수 있음을 알고 말하기를 "높은 곳으로 옮기려면 반드시 골짜기에서 나와야 하고, 도를 배우려면 스승을 구하기에 힘써야 한다. 만일 편안하게 지내고 느리게 행한다면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모의 은혜를 저버리고 〔출가한〕 본뜻에 어긋난다” 하고는 곧 배를 타고 양(梁)나라로 들어가 법을 구하는 데 선봉이 되었다. 다만 〔이것이] 어느 해이었던가는 알 수는 없지만, 이것이 신라 〔사람으로] 유학은 처음이다. 마침내 고명한 스승들을 두루 찾아 섬기면서 그 가르침을 갖추어 받으니, 마치 눈자위를 가린 막을 벗긴 듯하고, 귓속 귀지를 파내버린 듯했다. 시작이 있고 마침이 있었으며, 등한하지도 않고 태만하지도 않았으며, 덕은 높고 행은 뛰어나 도덕과 인망은 갈수록 높았다. 〔그러나〕 보배를 캐는 것은 단지 나 혼자만이 쓰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마땅히 고국으로 돌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널리 구제해야 한다 하고는 진흥왕 10년(549)에 양나라 사신과 함께 부처님 사리를 가지고 본국 서울로 돌아왔다. 왕은 급히 유사(有司)에 명하여 곧 백관으로 하여금 예의를 갖추어 흥륜사(興輪寺) 앞길에 나가 맞이하게 하였으니, 이 또한 사리가 [들어온〕 시초다. 옛날 승회(僧會)는 오(吳)나라로 가서 소원성취를 기원한지 7일 만에 비로소 신기한 징험을 얻었다. 〔각덕〕스님은 마침 임금이 불교를 신봉하던 때 양나라의 중대한 임무를 띤 사신을 따라 본국에 돌아왔으므로 어떠한 어려움도 없었다. 또 법수(法水)로써 바다[신라] 끝까지 두루 적시어 게으른 사람들을 모두 똑바로 세워 널리 〔불도에〕 귀의하고자 하는 뜻을 품게 하였으니, 그 공적과 이익이야말로 또한 어찌 뛰어난 도(道)가 아니겠는가? 그 뒤 〔진흥왕] 26년(565)에 진(陳)나라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입학승 명관(明觀)을 보내면서 불교의 경론도 무려 2700여 권이나 보내 왔다. 처음에는 즉 신라가 불법의 교화를 처음으로 폈을 때는 경전과 불상이 빠진 것이 많았지만 이때에 이르러서야 모든 것을 다 갖추게 되었다. 두 스님의 끝마침에 대해서는 다 자세히 듣지 못했다...찬(贊)한다. 계찰(季札)은 주나라 왕실에서 樂을 보았고, 중니(仲尼)는 노담(老聃)에게서 禮를 물었으니, [이분들은] 처음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원래 근본이 있음을 보인 것이다. [각]덕과 같은 분들이 중국을 왕래하면서 道를 묻고 돌아왔으니, 이 또한 사람은 다르나 돌아간 길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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