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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금관가야의 마지막 유산 김해 원지리 고분군(1) 그 지리 특징과 의미

by taeshik.kim 2019.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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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官加耶の最後の遺産 金海元支里古墳群(1)その地理特徴と意味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원지리 산 2-2번지를 표시한 다음 지도다. 이를 같은 지도 스카이뷰로 좀 더 자세히 들어가 보기로 한다. 이곳에 우리가 찾는 금관가야시대 무덤이 떼로 분포하는 까닭이다. 





김해 시내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치우친 북쪽 지점에 위치함을 안다. 낙동강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동남쪽으로 크게 감돌아 흐르는 지점이다. 지금의 김해 시내는 그 동남쪽으로 평야지대에 자리잡았음을 본다. 


원지리는 낙동강이 감돌아 흐르는 그 안쪽 산야 지대 한쪽 끄터러미를 차지했음을 확인한다. 뭐 딱 봐도 김해 시내를 중심으로 자리잡았을 왕조가 있다면, 그들에게 이곳은 북망산 자락이다.  





좀 더 자세히 들어가니 김해 시내 서북쪽 귀퉁이 지점 계곡간을 들어간 지점임이 드러난다. 





더 들어가니, 원지리가 차지하는 그 지리적 특징이 확연해진다. 무덤 쓰기 딱 좋은 곳이다. 동네 뒷산이다. 





그 현재의 모습을 보니 계곡간으로 툭 튀어나온 지점이다. 다만 하나 고려해야 할 점은 이런 자연 환경이 이곳에 우리가 만날 원지리 고분군이 자리잡은 그 시점에도 저랬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대단히 달랐을 것으로 본다. 


저 일대에 삼국시대 무덤이 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보고되기는 1984년이었다. 경남 金海市와 金海郡이 부산대박물관에 의뢰한 가야문화권유적 정밀지표조사를 통해 존재가 드러났으니, 동 박물관은 그해 제출한 《伽倻文化圈 遺蹟 精密調査 報告書(金海市·金海郡)》을 통해 이 무덤떼를 그 소재지를 따서 '김해 원지리고분군(金海 元支里古墳群)'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다가 2005년에는 김해시시설관리공단과 김해 대성동고분박물관이 다시 지표조사를 실시해, 저들 무덤이 5~6세기 석곽묘石槨墓와 고총고분高塚古墳임을 확인하는 한편, 무덤떼가 분포하는 면적은 대략 5만6천㎡임을 주장한다. 그 결과 보고는 두 기관이 그해에 펴낸 '김해 원지리 지표조사'에 정리됐다. 


원지리 고분군은 해발 377.2m인 경운산 한 자락 중 남서쪽으로 흘러내린 구릉 말단부 해발 34~36m 지점에 분포한다. 그 서쪽으로 해발 376.3m인 금원산에서 발원하는 원지천이라는 작은 시내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새터소류지에서 발원하는 작은 하천이 흘러내린다. 두 하천은 현재 주촌면을 관통하는 조만강과 합류한다. 


그렇다면 왜 원지리 고분군인가? 


웃기는 얘기지만, 그래서 믿거나말거나지만, 이 고분군이 현재까지 알려진 금관가야 시대 유일한 고총고분군이라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일본 고고학계에서 수입되어 한국 역사고고학에 마구잡이로 통용하는 고총고분高塚古墳이라는 용어를 경멸한다. 


고총고분이란 무엇인가? 대따시 봉분이 큰 무덤을 말한다. 봉분이란 무엇인가? 사람이나 무엇을 매장하고선 그 보호시설로 위를 덮은 시설물을 말한다. 보통은 흙이나 돌로 쌓아올린다. 


그렇다면 고총고분을 규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무엇을 "대따시 크다"고 규정할 것인가? 놀랍게도 그 기준이 없다!!!!! 


어느 정도 되어야, 그것이 대따시 커서 고총고분이 되는지 그 기준이 없다!!!!! 


없을 수밖에 없잖은가? 그럼에도 고총고분이라는 국적 불명 용어를 남발한다. 누가? 한국 고고학계가 그렇다. 


아무튼 그렇다 치자. 그래 봉문이 큰 무덤을 고총고분이라 한다고 치자. 그래서 원지리 고분군은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금관가야 고총고분이다. 


가야 제국諸國 중에서도 그마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은 왕국이 김해에 기반을 둔 금관가야다. 이 금관가야는 서기 42년 건국해 신라 법흥왕에게 합병된 서기 532년까지 물경 500년을 존재한 왕조다. 그렇게 장구한 역사를 자랑한 금관가야가 남긴 흔적 중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소위 고총고분이 오직 원지리 고분군 한 곳뿐이라니?


믿거나 말거나 그렇단다. 


원지리 고분군이 차지하는 막강한 위치는 바로 이에서 말미암는다. 고총고분이라는 저 허무맹랑한 말은 버린다 해도, 아무튼 저 무덤이 금관가야 말기, 혹은 신라 병합 직전, 혹은 그 직후 조성된 공동묘지라는 사실, 이것이 보고된 것이다. 


이런 원지리 무덤을 마침내 깠다. 까고서 그 속내를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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