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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낮은 포복으로 기자들이 기어왔다

by taeshik.kim 2018.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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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사IN》 2016년 12월 01일 목요일 제480호


낮은 포복으로 기자들이 기어왔다

정부가 보도 통제를 했지만 천마총 발굴과 황남대총 발굴 과정에는 기자들의 특종 경쟁도 심했다. 전화국 교환수를 동원해 정보를 빼내기도 하고, 기록영화 촬영기사들을 접대하며 발굴 정보를 듣기도 했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2016년 12월 01일 목요일 제480호



경주관광개발계획이 시행 중이던 1970년대 중반, 발굴단원들만큼이나 바쁘고 긴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기자들이었다. 당시 <한국일보> 우병익 기자(현재 83세)는 다른 언론사 기자들과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특종 경쟁을 벌였다. 특히 <조선일보>의 경주 주재 기자와는 사생결단 수준이었다. “하루하루가 전쟁터였지. (박정희) 정권은 정국의 어려움을 타개하는 데 고고학 발굴을 이용했고, 언론은 언론대로 문화재 특종 경쟁에 휩싸였다. 그러다 보니 오보(誤報)도 엄청나게 쏟아졌어.” 

당시 <한국일보>는 문화재 취재 부문에서 다른 언론사들을 압도하던 신문사였다. 경주 개발 이전인 1971년, 공주에서 백제 무령왕릉이 발견되었을 때도, 이 신문은 연일 특종을 이어갔다. 문화재 기사는, 장기영 당시 <한국일보> 회장이 직접 챙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신문의 경주 주재 기자가 우병익이었으니 그의 부담감은 엄청났을 것이다. 

ⓒ연합뉴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어린이들이 1973년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관을 살펴보고 있다.

경주 발굴 서막을 알린 1973년의 155호분(천마총), 98호분(황남대총) 발굴 등에서 우병익 당시 기자는 단독 기사를 연이어 쏟아냈다. 천마총에서 금관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세상에 가장 먼저 알린 기자도 그였다. “금관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1면 톱’으로 실리던 시절이었거든.”

이렇게 천마총 관련 보도를 선도하던 우병익 기자에게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특종’ 거리를 잡는 경우 일단 전화로 서울 본사에 보고해야 했다. 그런 다음에 추가 취재를 통해 기사를 작성해서 송고했다. 이제 다음 날 조간에 게재될 기사를 느긋하게 기다리면 되었다. 그런데 “(내 ‘단독 보도’와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조선일보>에도 똑같이 실려 있는 거야.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어떻게 된 것일까? 이후, 한국 ‘고고학 저널리즘’의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진상이 밝혀진다. <조선일보> 측이 전화국 교환수를 동원해 정보를 빼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일보> 경주 주재 기자인 황 아무개씨의 아내가 공교롭게도 경주전화국 교환수 책임자였다. 천마총 발굴 때 조사보조원을 맡았던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의 회고를 들어보자. “당시엔 시외 전화를 하려면 전화국 교환을 통해야 했다. 그런데 (조선일보) 황 기자 부인이 전화국 교환수란 사실을 몰랐던 거야. 천마총 발굴 성과는 매일 문화재관리국이나 청와대로 보고되고 있었어. 황 기자가 그 보고 내용을 전화국에서 부인을 통해 캐치해서 기사를 쓴 거지.”

ⓒ경주포커스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 당시 특종 기사를 많이 썼던 우병익 전 <한국일보> 기자.

<조선일보>는 경쟁 언론사 기자들의 동태도 ‘취재’하고 있었나 보다. 기자들 역시 취재 내용을 일단 전화로 서울 본사에 보고하기 때문에 그 단계에서 정보를 빼낼 수 있다. 우병익 기자의 단독 취재 내용이 흘러나간 것도 이런 경로를 통해서다. 이후 우병익 기자는 “포항으로 가서 서울 본사에 보고한 뒤 밤새 기사를 써서 보내야 했다”라고 말했다. 

<조선일보>가 ‘도청 취재’로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렸는지는 세세히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천마총 발굴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건(금관·천마도 발견) 가운데 ‘금관 특종’의 영광은 <한국일보> 우병익 기자에게 돌아갔지만, 천마도 발견은 <조선일보>의 특종으로 남았다. 번번이 <한국일보>에 밀리던 <조선일보>가 천마총 발굴에서 엄청난 성과를 올린 것은 ‘특별한 방법의 노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박정희 정부도 문화재 관련 보도를 통제하고 있었다. 정권에 유용한 시기에 보도를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발굴단에서 ‘언론 접촉 창구(요즘 용어로는 홍보 담당)’를 맡았던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에 따르면, “포항에서 나온 중앙정보부 조정관이 천마총 발굴 현장에 아예 상주했는데, 봉분 정상에 의자를 갖다놓고 턱하니 앉아서 모든 발굴을 통제했다”. 발굴단도 언론을 경계했다. 김동현 부단장의 경우, 천마총 등의 조사 내용을 서울에 보고할 때 발굴단 숙소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전화를 걸었다. 

그랬는데도 발굴 정보가 계속 언론으로 새어나갔다. 당시 조사보조원이었던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민망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루는 김정기 단장이 조사단원을 모두 불러놓고 눈을 감으라 하시더니 ‘누가 (발굴) 정보를 흘렸는지, 조용히 손을 들면 내가 봐주겠다. 혹시 피치 못할 인연으로 정보를 흘린 사람은 손을 들어라’고 말씀하시는 거야.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지.” 

중앙정보부 정보관이 봉분 위에 앉아서 감시 

당시 조사보조원 윤근일에게는 더욱 아픈 기억이다. 발굴단원들 사이에서 ‘유출자’로 의심받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내가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술도 잘해서 조사원들 사이에서 많은 의심을 받았는데, 그때 마음고생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 

기자들로서는 보도 통제가 심하다고 취재를 멈출 수 없는 일이다. 발굴단원들이 입을 다문다고 취재가 불가능하지도 않다. 그래서 어떤 기자들은 현장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윤근일이 털어놓은 일화. 

“하루는 어떤 기자가 (천마총 인근) 황남대총 쪽에서 망원렌즈로 천마총 발굴 현장 보존처리 작업을 촬영하다가 여의치 않자 발굴 현장 안으로 낮은 포복으로 몰래 들어왔다. 우리가 (천마도 장니가 들어 있는) 부장품 수장궤(나무상자)를 약품으로 처리하는 장면을 촬영해서 기사로 내버렸지. 그때 우리가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기자가 현장에 들어와 사진을 찍는데도 아무도 몰랐다니까.” 

기록영화 촬영기사들도 기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천마총 발굴은 한국 고고학 사상 처음으로 기록영화로 제작되었다. 촬영은 국립영화제작소가 맡았다. 정권 차원에서 고고학 발굴을 어떻게 활용하고자 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연히 영화제작소 촬영기사들은 발굴 현장을 생생히 접할 수밖에 없다. 또한 발굴단원들이 입이 봉쇄된 반면 촬영기사들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기자들은 촬영기사들로부터 깨알 같은 정보를 캐낼 수 있었다. 다음은 우병익 기자의 말이다. 

“<조선일보>가 특히 나한테 ‘물을 많이 먹었어(다른 회사에 특종을 빼앗겼다는 의미의 언론계 속어).’ (조선일보는) 그걸 만회하겠다고 국립영화제작소 촬영기사들에게 거의 매일 밤 술을 사다시피 했지. 결국에는 나를 스카우트하겠다며 찾아왔어. 월급 두 배로 줄 테니까 <조선일보>로 오라더군. 장기영 (한국일보) 회장과의 의리도 있고 해서 안 갔어.” 


천마총 발굴은 이처럼 언론계에서도 엄청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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