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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 & 漢文&漢文法

먹 갈라 게으른 종 부르니 귀 먹은 척 대꾸도 않네

by taeshik.kim 2018.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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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주최 '대고려전' 매장을 돌다가 이 고려청자 3점을 마주하고선 무심히 지나치려 했다. 상설전시실 있는 걸 내려다봤구만 했더랬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류 고려청자는 수량이 적지는 하지만, 그 폼새가 뛰어나다 해서 이런저런 자리에 자주 불려나가는가 하면, 특히 국립박물관에서는 상설전시품으로 빼는 일이 없는 까닭이다. 



 

 

특히 맨 왼편 소위 '동자 연적(童子硯滴)'은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었다. 하긴 저들 석 점 다 내 눈에 익기는 했다. 저 비스무리한 연적을 어디서 봤을까나는 차지하고, 그리 무심히 지나치면서 안내판을 읽어보니, 어랏? 석점 모두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서 빌려왔네? 어쭈구리? 여튼 우리 국박은 일본이라는 사족을 못 쓰니, 뭐, 이래저래 교유도 많고, 서로 먹고 살아야 하니, 좋은 물건 빌려왔겠구나 했더랬다. 


정작 내가 주의깊게 본 것은 이 근방 어디인가 전시실 비름빡에 붙은 이규보 시였다. 천상 저 동자 연적과 같은 류 물건을 보고 읊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멋드러진 그의 시가 걸렸더라. 음, 좋군, 하고는 그것을 폰카로 찍어두었다고 조금 전 생각이 나서 그걸 찾아봤다.  





이규보(李奎報, 1169∼1241) 사후 그의 시문을 망라해 나온 문집 《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全集)》 제13권 고율시(古律詩)가 수록한 '안중삼영(案中三詠)'은 글자 그대로는 서재에서 마주하는 세 가지 사물을 소재로 읊은 연작시다. 이 세 가지를 순서대로 보면 '소분석창포(小盆石菖蒲)'와 '녹자연적자(綠甆硯滴子)', 그리고 '죽연갑(竹硯匣)'이다. 이규보는 시에 환장해 매일매일 시를 써제꼈으니, 놀라운 점은 그렇게 다작을 하면서도, 그 작품 대다수가 주옥을 방불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런 다작 중에서도 작품성이 특히 뛰어난 것만 고른 편집방침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바람에 수준 덜 떨어지는 작품들이야 나가 떨어졌겠지만, 그 막대한 수작秀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 '안중삼연'도 그렇다 할 만하니, '소분석창포(小盆石菖蒲)'는 작은 화분에 키우는 석창포라는 식물을 노래함이요, '녹자연적자(綠甆硯滴子)'는 푸른 색깔 나는 자기 연적을 제재로 삼았으며, '죽연갑(竹硯匣)'은 확실치는 않으나 벼루 보관함 같은데, 그걸 대나무로 만들었나 보다. 혹 아시는 분은 교시 바란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작품은 두 번째 '푸른 자기 연적'이다. '녹자(綠甆)'란 푸른 빛이 나는 자기를 말함이니, 말할 것도 없이 요새 청자라 부르는 기물이다. '연적자(硯滴子)'란 연(硯), 곧 벼루에 물을 따르는 도구를 말한다. 기물 중에 子를 접미사처럼 붙이는 일이 많거니와, 요새는 주전자라 하는 주자(注子)가 대표적이다. 이를 줄여 흔히 연적(硯滴)이라 하거니와, 옛날 먹 글씨를 쓸 적에는 반드시 벼루에다가 물을 부어 먹으로 갈아야 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 터이거니와, 그 물을 대는 주전자가 바로 연적이다. 


먹 가는 일....이거 고역이다. 요새는 이조차 편리를 추구해, 아예 먹물을 병에다가 담가서 판다. 하지만 그 옛날에는 이 먹 가는 일도 무슨 거창한 수양이 되는양 해서 지질이 똥폼을 잡았지만, 글쎄, 실상은 글을 쓰는 놈이 먹을 직접 간 일은 없고, 이 고된 일은 언제나 동자나 종놈 차지였다. 쉴 새 없이 먹을 갈아야 했으니 그 고통 말해서 무엇하랴? 더구나 그 주인이 시 쓰기에 환장한 이규보 같음에랴? 


그렇다고 종놈이 고분고분했겠는가? 사극이나 사극 영화를 보면, 으레 종놈은 주인한테 옴짝달짝 하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일이 많으나,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깍지라, 그것도 주인 성향에 따라 달라, 예컨대 주인이 후덕하면 종놈도 요래조래 주인을 갖고 논다. 이 고역을 피하는 고전적인 수법은 그때나 지금이나 일단 튀고 보자다. 


한데 이규보 이 시에는 이런 저간의 사정이 무척이나 정겹게 등장한다. 그러면서 그가 사용한 연적이 어떤 모양이고, 그 효능이 무엇인지도 익살스럽게 읊었으니, 이규보를 괜히 천재라 하지 않는다. 마침 이 시 일부 구절을 국립중앙박물관이 근자 개막한 '대고려전' 한 코너 비름빡에 걸쳐 놓았으니, 그것이 무척이나 재미가 있어 그 전문을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서 찾아 옮긴다. 다만, 그 번역은 내가 왕창 뜯어고쳤음을 밝힌다. 


푸른 옷 작은 아이 

흰살결 백옥 같네 

꿇은 모습 무척 공손하고

이목구비 뚜렷하네 

종일토록 게으름 없어 

물병 들곤 벼룻물 주네

난 본디 읊조림 좋아해 

시 쓴 종이 날마다 천 장  

벼루 말라 게으른 종 부르니

게으른 종 부러 귀먹은 척  

천번이나 불러 대답 없어

목이 쉬어서야 그만두네 

네가 옆에 있어 준 뒤로 

내 벼루 마를 날 없다네

네 은혜 어찌 갚을까나

고이 지녀 깨지 말아야지


幺麽一靑童。緻玉作肌理。曲膝貌甚恭。分明眉目鼻。競日無倦容。提甁供滴水。我本好吟哦。作詩日千紙。硯涸呼倦僕。倦僕佯聾耳。千喚猶不應。喉嗄乃始已。自汝在傍邊。使我硯日泚。何以報爾恩。愼持無碎棄。


이 시 일부 구절을 박물관에서 따서 걸어놓은 것이다. 덩그러니 번역만 붙이고, 그것도 일부만 싹뚝 짤라내니 영 그렇다. 이리 한 까닭이야 뭐 안봐도 야동이라, 한자 덕지덕지하고, 전문을 소개하면 관람객들이 질색한다 해서 그리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를 통해 이규보 절창 하나를 만나고, 그것을 새기에 되었으니, 고맙고 고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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