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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서자들의 두목 연암 박지원

by taeshik.kim 2018.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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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조선후기 영정조 시대 재야 문단의 영수지만, 실은 노론 적통에 재산 졸라리 많은 부자요 권력자였다. 뭐, 과거로 출사하는 길을 포기하고, 그러면서도 안의현감인지는 잘해 잡수시면서, 박제가 놀러 오니 안의현에서 관리하는 기생 중에서도 가장 앳된 애를 골라다 수청 들게 해 주는가 했으니, 이런 식으로 수하엔 말 잘 들을 수밖에 없는 또릿한 똘마니들 몇몇 거느리고 재야를 호령했거니와, 박제가 말고도 유득공도 있었다. 나이도 젤로 많고, 그 자신은 적통이지만, 똘마니들은 다 서출이라, 대장 노릇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럼에도 저이를 높이쳐야 하는 까닭은 그 속내가 무엇이었건, 그래도 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을 인간 대접했다는 점이다. 뭐 이런 동호회 그룹을 요새는 백탑 근처에서 많이 놀았다 해서 백탑파 그룹이라 하는 모양이다. 





한데 이런 연암으로서도 자존심 왕창 상하는 일이 있었으니, 그 똘마니 시다들이 모조리 중국 가서 선진문물 맛보고 온 데다 그걸 기초로 《북학의》니 하는 책 먼저 내서 왕창 성공을 거두었는데, 정작 오야붕인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니, 그래서 할 수 없이 본인도 나중에 연행길 나서는 육촌형님인지 쫄라서 쫄래쫄래 종사관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따라나선다. 


부담이 컸다. 엄청난 부담이었다. 왜인가? 이미 먼저 다녀온 박제가 유득공은 물론이요, 그 선배들이 기라성 같은 연행록을 냈기 때문이다. 늦게 갔으니, 그들을 모조리 뛰어넘어야 했다. 


그의 《열하일기》는 그래서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고충이 토로한 기행문이다. 이 《열하일기》를 대할 적에 나는 그의 이런 부담감을 고려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데 이런 그에게 천만다행인 점은 《열하일기》로 전대를 모조리 갈아 엎었고, 후대에도 그것을 뛰어넘는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열하일기》는 글자 그대로 선풍이었다. 대성공이었다. 다만, 이 때문에 그에 구사한 문체가 순정하지 못하다 해서 정조한테 쿠사리 쫑크 먹고 협박까지 받는 처지에 내몰렸지만, 그는 알았다. 정조가 그런 일로 사람을 죽이거나 유배에 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조는 성질이 더럽고 욱하면서 걸핏하면 화를 내곤 했지만, 그는 역시 호학의 군주요, 그런 까닭에 재목들은 잘 알아보았으니, 그러면서도 내가 저런 연암 같은 놈 유배 보내거나 죽여 역사의 오점을 남길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연암은 참말로 시대를 잘 만났다. 

연암처럼 공식 사절단 일원이 아니면서, 문물 맛보러 가는 사람들한테는 하나의 강박이 있었으니, 중국에서 문명으로 이름 떨치는 한 놈쯤은 사귀어야 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동아시아 세계의 간판급 주자라는 점을 각인해야 했다. 이를 위해 이들은 대개 그때까지 자신이 지은 시문 중에서도 짱꼴라들한테 내놓아서 부끄럽지 않은 것을 골라 여러 장 베껴가야 했다. 이걸 내밀며 나 이런 사람이요라고 소개하고, 그런 공작이 성공하면 "아! 동방에 이런 군자도 있었네"라는 소리 듣기 십상이니, 이런 방식으로 연암보다 후대에 대성공을 획책한 자가 추사 김정희다. 


그렇다면 연암은 무엇을 가져갔는가? 자기 자랑할 글을 한 편 골랐으니, 이것이 바로 아래 내가 2006년 기사에서 소개한 누이 제문이다. 이 제문은 그야말로 명문 중의 명문인데, 하필 연암이 이 글을 골라 베껴 간 까닭이 바로 이 정도 글이면 중국 식자층에서 뻑 갈 것이라 확신한 까닭이다.  


북역본 열하일기. 헌책방에 나온 것을 내가 쌔벼왔다.



<산문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

2006.04.05 15:36:30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강가에 말을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銘旌)이 펄럭이고 배 그림자는 아득히 흘러가는데 강굽이에 이르자 그만 나무에  가려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문득 강너머 멀리 보이는 산은 검푸른  빛이  마치 누님이 시집가는 날 쪽진 머리 같았고 강물 빛은 당시의 거울  같았으며,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수채화 같이 명징(明澄)하면서도 레퀴엠만큼 장중하다. 먼저 세상을 등진  손윗누이를 실은 상여가 배에 실려 사라져 가는 모습을 이렇게 읊고는 다시 노래한다.


"떠나는 이 정녕코 다시 오마 기약하지만/보내는 자 눈물로  옷깃  적시거늘/이 외배 지금 가면 언제 돌아오리/보내는 자 쓸쓸히 강가에서 돌아가네."


다시 돌아온다 약속하지만, 그 떠남이 죽음이며, 그가 떠나는 길이 상여이고 보면 어찌 떠난 자가 돌아오겠는가? 


300자에도 모자라는 이 짧은 만가(輓歌)에서도 왜 연암(燕巖)인지가 드러난다.


연암을 중점적으로 공부하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희병 교수는 이렇게 묻는다.


"이런 글을 명문이라 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글을 명문이라 할 것인가?"


하지만 이 글을 강평한 그의 문하생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1741-1793)도 만만치는 않다.


"지극히 작은 겨자씨 안에 수미산(須彌山)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겠다."


37세가 된 영조 37년(1773) 무렵, 박지원(朴趾源)은 이덕무 등과 함께 통행금지가 내려진 밤 12시가 넘어 운종가(雲從街)로 나아가 종각(鍾閣) 아래서 달빛을 받으며 거닐다가 수표교(水標橋)에 이르러 다리를 죽 뻗어 걸치고는 야경을 감상했다.


"개구리 소리는 완악한 백성들이 아둔한 고을 원한테 몰려가 와글와글 소(訴)를 제기하는 듯하고, 매미소리는 엄하게 공부시키는 글방에서 정한 날짜에  글을  외는 시험을 보는 것만 같고, 닭의 소리는 임금에게 간언하는 일을 자기의 소임으로 여기는 한 강개한 선배의 목소리만 같았다."


절친하게 지내던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1730-72)가 죽었다. 당파로는 소북(小北)이며 남인(南人) 계열 이가환(李家煥)의 처남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持平) 정언(正言)과 같은 간관직에 있었으니 친구만큼이나 적도 많았다.


이에 그의 죽음을 두고 연암은 이런 제문(祭文)을 지었다.


"석치에게 원한이 있던 자들은 평소 석치더러 병들어 죽어버려라고 저주를 퍼붓곤 했거늘 이제 석치가 죽었으니 그 원한을 갚은 셈이다. 죽음보다 더한 벌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는 한편) 세상에는 참으로 삶을 한낱 꿈으로 여기며  이  세상을 노니는 사람도 있거늘 그런 사람이 석치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껄껄 웃으며 '진(眞)으로 돌아갔구먼'이라 말할 텐데, 하도 크게 웃어 입안에 머금은 밥알은 벌처럼 날고 갓끈은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지고 말테지."


사람이 죽는 일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해 부인의 죽음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장자(莊子)의 우화를 빌려 연암은 석치의 죽음을 표현하고 있다.


'연암을 읽는다'(돌베개)는 박지원을 영문학의 셰익스피어나  독문학의  괴테에 비견하는 한국문학의 대문호로 간주하는 박희병 교수가 그의 산문 20편 가량을 골라 우리가 왜 연암을 다시금 봐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말로만 "연암! 연암!"을 외치면서도 정작 그를 외면하는 현재의 우리에 대한 저돌이기도 하다. 연암의 문학이 이토록 천의무봉(天衣無縫)한데, 어찌하여 당신들은 이걸 모르느냐는 박 교수의 분통이 느껴진다. 464쪽. 1만5천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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