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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집(稼亭集)》 제1권 잡저(雜著)에 실린 ‘절부(節婦) 조씨전(曺氏傳)’을 가정이 쓴 까닭은 그의 손녀사위가 마침 친구인 이유도 있거니와, 이를 통해 가문을 현창해 주려는 의도 역시 다분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의 우리가 아래 텍스트를 그런 가정의 눈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이 절부전이 나로서는 몇 가지가 흥미롭거니와, 당시는 전란의 시대라, 그에서 어떤 여인이 겪은 참상이 무엇보다 드라마틱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주의를 끈다. 

이 절부전을 분석하면 수령현(遂寧縣) 사람인 조씨는 아마도 1265년에 출생해 가정이 저 글을 쓴 당시 77세라 했으니, 1341년까지는 생존이 확인된다. 아버지는 몽고 침략에 대비해 조정이 강화도로 옮겼다가 환국할 때 대위(隊尉)라는 군직에 있던 조자비(曺子丕)이니, 이 아비는 이듬해 삼별초 난 진압에 탐라로 출정했다가 신미년(1271) 겨울에 그곳에서 죽었다 했다. 사망 원인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지만, 어째 전사한 느낌이 있다. 

아비를 잃은 조씨는 13살에 대위 한보(韓甫)에게 출가하니 수령궁 녹사(壽寧宮錄事) 한광수(韓光秀) 아들이다. 이에서 조씨는 딸 하나를 낳는다. 한데 시아버지 한광수는 고려를 수중에 넣은 몽고 원 제국이 주도한 일본 원정에 동원되었으니, 신사년(1281, 충렬왕 7) 여름에 군중(軍中)에서 죽고 만다. 단순히 죽었다고만 해서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지만, 태풍에 휩쓸려 갔는지도 모르겠다. 

한데 조씨의 비극은 이에서 그치지 않아 신묘년(1291) 여름에는 남편 한보가 합단(哈丹)과의 전투에서 죽고 만다. 합단이란 원나라 반군(叛軍) 내안(乃顔) 수하였던 자로, 만주에서 반란했다가 원나라 장수 내만대(乃蠻帶)에게 몰려서 고려 동북변을 침입하니, 이는 다시금 고려 왕조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휘말리게 했으니, 친정아버지, 시아버지를 전쟁에 잃은 조씨는 남편마저 합단에 내주고 말았다. 

이 절부전에서 가정은 “내가 일찍이 중국에 가서 보니, 정절을 드러내려고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한 것이 서로 바라다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하기에 처음에는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 괴이하게 생각되었다. 한데 삼가 살피니, 실제 정절은 없어도 재산이 많은 집안에서 더러 정절이라는 이름을 훔쳐 정역(征役)을 교묘히 피하고 있기 때문에, 조정에서 매양 찰관(察官)과 헌사(憲司)로 하여금 유사에게 사실을 확인하도록 문책하고 있었으니, 이를 통해서 인륜을 후하게 하고 풍속을 돈독히 하려는 조정의 아름다운 뜻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말을 한다. 이 대목을 통해 우리는 절부가 탄생하는 통로 중 하나를 본다. 실제 정절과는 상관없이, 정절녀를 낳은 집안에는 군대 면제와 같은 특혜가 있었기 때문임을 안다. 가정이 말하는 이런 폐습이 비록 정도는 덜했겠지만, 고려 왕조 역시 그에 못지않았고, 조선왕조 들어서는 극성을 구가했다. 

원문과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6을 따랐지만, 몇 군데 어감을 살리고자 수정했음을 밝힌다. 

절부 조씨는 수령현(遂寧縣) 사람이다. 

지원(至元) 경오년(1270, 원종 11) 5월 26일에 충경왕(忠敬王)이 강화(江華)에서 송도(松都)로 환도할 적에 장군 홍문계(洪文系) 등이 나라를 그르친 권신을 죽이고 왕에게 정권을 반환했다. 6월 1일에 권신의 가병(家兵)인 신위(神衛) 등의 군대가 승화후(承化侯)를 옹립하고자 장차 반역을 도모하려 하면서, 미처 강을 건너지 못한 신료와 군사들을 강제로 이끌고 항해하여 남쪽으로 떠나니 배가 앞뒤로 서로 이어졌다. 이때 조씨는 태어난 지 6년이 되었는데, 부친 대위(隊尉) 자비(子丕)를 따라 그 일행에 있었다. 적이 노정 중간쯤 이르렀을 때 거짓으로 관료를 배치하고는 재집(宰執)에서부터 장교(將校)에 이르기까지 자기들을 따르라고 위협하면서 유인했다. 당시에 자비는 지모(智謀)와 여력(膂力)이 있다고 해서 특별히 자급이 뛰어 올라 별장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계책을 세워 그곳에서 빠져나와 서울로 돌아왔다. 뒤에 적이 패망할 적에 부녀와 소아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이 창칼에 희생되거나 바다에 빠져 죽고 나머지 생존한 사람들도 중국 군대에 포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지만, 오직 자비와 같은 배를 탄 사람들만이 늙은이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온전히 살아났다. 자비는 돌아오자마자 또 관군에 소속되어 적을 공격하며 탐라(耽羅)까지 갔다가 신미년(1271) 겨울에 그곳에서 죽었다.

조씨는 13세에 대위 한보(韓甫)에게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시부(媤父)인 수령궁 녹사(壽寧宮錄事) 광수(光秀)는 일본을 동정(東征)했다가 신사년(1281, 충렬왕 7) 여름에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그리고 신묘년(1291) 여름에는 한보가 또 합단(哈丹)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죽었다. 조씨는 과부가 된 뒤에 언니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딸이 출가를 하자 그 딸에게 의탁했다. 한데 그 딸이 1남 1녀를 낳고 또 일찍 죽자 손녀에게 의탁해서 지금까지 산다.

조씨는 나이 서른이 되기도 전에 남편과 부친과 시아버지가 모두 전장터에서 잇따라 죽었다. 그리하여 과부로 지내는 50년 동안 길쌈이나 바느질 같은 부녀자 일을 밤낮으로 열심히 해서는 딸과 손자 손녀를 먹이고 입히며 살아갈 터전을 잃지 않게 하고, 그 밖에 손님을 접대하고 혼례를 거행하는 일이나 상례와 제례에 소요되는 비용을 마련하곤 했다. 지금 이미 77세나 되었는데도 아직 탈 없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다 총명하고 지혜롭기까지 해서 적에게 사로잡혀 있을 당시 상황이라든가 근세의 치란, 혹은 사대부 집안 내력 등을 이야기할 때면 하나도 빠뜨리는 일이 없이 모두 기억한다.

내가 현재 거주는 데가 바로 조씨가 옛날에 살던 집이다. 마침 손녀사위가 전임 감찰 규정(監察糾正) 이양직(李養直)인데, 그는 나와 동년 수재(秀才)다. 그래서 내가 이에 대한 일을 매우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내가 일찍이 중국에 가서 보니, 정절을 드러내려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한 모습이 서로 바라다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하기에 처음에는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 괴이하게 생각했다. 한데 삼가 살피니, 실제 정절은 없어도 재산이 많은 집안에서 더러 정절이라는 이름을 훔쳐 정역(征役)을 교묘히 피하기에, 조정에서 매양 찰관(察官)과 헌사(憲司)로 하여금 유사에게 사실을 확인하도록 문책하니, 이를 통해서 인륜을 후하게 하고 풍속을 돈독히 하려는 조정의 아름다운 뜻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가령 조씨 일이 중국 조정에 알려지게만 된다면, 장차 대서특필하여 간책에 성대히 전해짐은 물론이요 주려(州閭)에 정표하여 광채를 발하게 할 것이니, 어찌 끝내 이름이 파묻혀 없어지고 말도록 하겠는가.

사씨(史氏)는 말한다. 부인은 삼종(三從)의 의(義)를 지킬 수 있어야 부인으로서의 도를 다하는 것이 된다. 조씨의 경우는 부친과 지아비가 모두 사직을 위한 전역(戰役)에 나아가서 전사하였고, 아들도 없이 묘년(妙年)에 과부가 된 뒤로 노년에 이르도록 절개를 지켰는데, 관에서 보살펴 주지도 않고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았으니, 아, 슬픈 일이다. 그러나 오직 천도는 어긋나지 않는 법이니, 조씨가 건강한 몸으로 장수를 누리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節婦曺氏傅

節婦曺氏。遂寧縣人也。至元庚午五月廿六日。忠敬王自江華復都松京。時將軍洪文系等。誅權臣誤國者。用復政于王。六月初一日。權臣家兵神衛等軍。擁承化侯將圖不軌。乃驅臣僚軍士未及渡江者。航海而南。軸轤相接。曺生六歲。隨其父隊尉子丕在行中。賊至半塗。僞置官僚。自宰執至于將校。以誘其脇從。以丕有智謀膂力。超授別將。丕以計得脫還京。後賊敗。至婦女小兒死鋒鏑溺海水殆盡。餘爲天兵所虜去。惟丕同舟人。老幼皆全活。丕卽還。又隷官軍。攻賊至耽羅。辛未冬。死之。曺十三。適隊尉韓甫。生一女。其舅壽寧宮錄事光秀。東征日本。辛巳夏。死軍中。辛卯夏。甫又死哈丹兵。曺旣寡從姊。及其女子適人。乃從女。女生一男一女而又早死。則從孫女。居至今。曺未三十。夫父舅連歿戰陣間。寡居五十年。日夜勤女工。衣食女若孫。使不失所。而賓婚喪祭之用是給。年已七十七。猶康強無恙。性又聡慧。說在賊中時及近世治亂衣冠族姓事。歷歷無遺失。余所居卽曺氏舊宅。又孫女壻前監察糾正李養直。與余同年秀才。故聞其事甚詳。余甞游中國。見以貞節旌表門閭相望。初恠其多也。伏惟朝廷以無其節有其財。或冒名䂓避征役。每令察官憲司責問有司。乃知厚人倫敦風俗之美意也。使如曺氏得聞于朝。將大書特書溢於簡冊。光於州閭。豈終湮沒者哉。史氏曰。婦人守三從之義。斯盡其道矣。曺父與夫皆死社稷之役而無其子。妙年而寡。抱節至老。官不爲恤。人不見知。悲夫。惟天道不僣。宜其康強壽考也。

고려말 문사인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왔으며, 어떻게 보완 유전되게 되었는지는 현전하는 이 문집에 붙은 네 시기 발()을 보면 여실하다. 아래는 그 시기별 발문이다.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 | 2007에 의한다.


1. 초간본(初刊本)

가정 이중보는 나와 똑같이 익재(益齋) 문하 출신이요, 또 한원(翰苑)에서 함께 노닐었던 인연도 있다. 무릇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그에게 물으면서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렀는데, 허망하게도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아, 애석한 일이다. 지금 그의 아들인 밀직 제학(密直提學) 이색(李穡)이 신축년(1361, 공민왕10) 파천(播遷)하는 창황(蒼黃)한 때를 당해서도 유고(遺稿)를 잃지 않고 20권으로 엮은 다음에 매부인 금주(錦州)의 수재(守宰) 박상충(朴尙衷)으로 하여금 이를 정서하여 판각하게 하였다. 내가 이를 얻어서 열람하고는 개연한 심정이 들어서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았는데, 그럴수록 그가 이와 같이 수립한 것에 대해서 더욱 탄복하게 되는 동시에 그의 아들이 또 이와 같이 한 것이 가상하게 여겨지기에 이렇게 쓰게 되었다. 지정(至正) 갑진년(1364, 공민왕13) 51일에 율정노인(栗亭老人) 윤택(尹澤)은 삼가 적다.

稼亭集後識[尹澤]

稼亭李中父與予俱出益齋門下又同游翰苑凡所質疑山斗是仰奄然先逝嗚呼惜哉今其子密直提學李穡於辛丑播遷蒼黃之際能不失遺藳編爲二十卷令妹夫錦州宰朴尙衷書以壽諸梓予得而閱之慨然圭復益歎其所樹立如此又嘉其有子如此於是乎書至正甲辰五月初吉栗亭老人尹澤謹識

() : 4편의 발문이 실렸다. 원문에는 구분이 없으나 내용을 참고하여 차례로 제목을 달아 주었다.

[-D001] 신축년……: 1361(공민왕10)에 홍건적 10만 명이 침입하여 개경(開京)을 함락시키자 12월에 왕이 복주(福州) 즉 지금의 안동(安東)으로 피난한 것을 말한다.


중간본(重刊本)

우리나라의 문학 하는 선비 중에는 중국의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부자가 서로 잇따라 고과(高科)에 발탁되고 사한(史翰)에 오름으로써 이름이 중국에 알려지고 세상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일컫는 경우는 오직 가정과 목은 두 선생뿐이라고 하겠다. 임인년(1422, 세종4)에 내가 명을 받고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 총제(摠制) 이종선(李種善)과 동지총제(同知摠制) 이숙묘(李叔畝)가 가정의 문집을 나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의 문집을 금산(錦山)에서 판각하였는데 불행히도 병화(兵禍)를 입고 말았으니, 바라건대 그대가 중간(重刊)하여 영원히 전하게 해 주었으면 한다.” 하였다. 나는 가정 선생에 대해서 조부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기꺼이 공장(工匠)에게 간행하도록 명하여 길이 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연침(淵沈)의 학문은 채서산(蔡西山)에게서 나왔고, 식철(軾轍)의 문장은 소노천(蘇老泉)에게서 근원하였다고 여겨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은의 아름다운 도덕과 문장도 실로 가정에게서 나온 것으로서, 그 교화를 받은 유래가 깊다고 할 것인데, 이러한 사실을 그 누가 알겠는가. 내가 뒤늦게 태어난 관계로 한가히 거하실 적에 옆에서 모시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무지몽매함을 깨뜨릴 수가 없었으니, 슬픈 일이다. 영락(永樂) 임인년(1422, 세종4) 10월 모일에 가선대부(嘉善大夫) 강원도 도관찰출척사(江原道都觀察黜陟使) 문성(文城) 유사눌(柳思訥)은 삼가 발문을 쓰다.

稼亭集跋[柳思訥]

吾東方文學之士登中朝科者多矣然父子相繼擢高科登史翰名聞中夏世稱其美惟稼亭與牧隱兩先生而已歲在壬寅余受命爲江原都觀察使揔制李種善同知揔制李叔畒廼以稼亭文集授余曰我 祖文集刊板在錦山不幸罹于兵燹將子重刊以示不朽余於 稼亭先生視猶祖父也故樂爲之命工鋟榟以壽其傳余惟淵沉之學出於蔡西山軾轍之文原於蘇老泉誰知 牧隱道德文章之美實由於 稼亭而化之所從來者遠矣吾生晚也未得侍閒居而目接耳受以破矇聾悲夫永樂壬寅十月 日嘉善大夫江原道都觀察黜陟使文城柳思訥敬跋

[-D001] 이종선(李種善) : 목은(牧隱)의 셋째 아들이다.

[-D002] 이숙묘(李叔畝) : 목은의 둘째 아들인 이종학(李種學)의 넷째 아들이다.

[-D003] 연침(淵沈)……여겨진다 : 연침은 채연(蔡淵)과 채침(蔡沈)으로, 서산선생(西山先生)으로 일컬어진 채원정(蔡元定)의 아들이다. 채원정이 주희(朱熹)에게 배우려고 찾아갔을 때, 주희가 그의 학문 수준을 알아보고는 크게 놀라면서 노우(老友)로 대우하며 함께 강론한 고사가 유명하다. 채연은 절재선생(節齋先生)이라고 일컬어졌는데, 역상의언(易象意言)주역괘효경전훈해(周易卦爻經傳訓解)를 저술하였다. 동생 채침은 구봉선생(九峯先生)이라고 일컬어졌는데, 스승인 주희의 부탁을 받고 침잠한 지 10여 년 만에 서경집전(書經集傳)을 완성하였다. 식철(軾轍)은 소식(蘇軾)과 소철(蘇轍), 노천(老泉)이라고 자호한 소순(蘇洵)의 아들인데, 세 사람 모두 당송 팔대가로서, 부자가 삼소(三蘇)로 일컬어진다.


삼간본(三刊本)

우리 선조인 가정 문효공(文孝公)과 목은 문정공(文靖公) 두 분 선생은 부자가 서로 이어 고려와 원나라에서 명성을 드날렸다. 두 분의 도덕과 공업이 사책(史冊)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가운데, 여사(餘事)로 지은 문장들도 고금에 유례가 없을 만큼 빼어났으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태산북두처럼 추앙하였다. 그래서 향기 넘치는 그 유편(遺編)들을 온 나라 사람들이 거의 집마다 소장함은 물론이요, 등단하여 문장을 주관하는 자들의 지남(指南)이 되어 왔다. 그러다가 임진년(1592, 선조25)에 이르러 병화를 입은 나머지 판본까지 모두 잃게 되었다. 후세 사람을 길이 감화시킬 영화(英華)와 백대토록 귀감이 될 사적을 찾아본다면 오직 이 유편 속에서 방불하게나마 상상할 수가 있었는데, 이제 장차 사라져서 전해지지 않을 위기에 처했으니 이는 우리 문중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사문(斯文)을 위해서도 애석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에 우리 종인(宗人)인 승지 이덕수(李德洙) ()가 지난번 승평(昇平 순천(順天) )의 수재로 있을 적에 목은의 문집을 구해서 얻게 되자, 이를 먼저 판각하여 간행한 다음에 한산(韓山)의 문헌서원(文獻書院)에 보관함으로써 길이 전할 수 있게 하였다. 그 뒤에 내가 영남(嶺南)의 방백으로 가게 되었을 때, 종장(宗丈)인 판부(判府) 이덕형(李德泂) 상공(相公)이 가정의 문집 1편을 수중에서 꺼내어 나에게 주면서 부탁하기를, “우리가 성씨를 얻게 된 뒤로 수백 년 동안 자손이 번성하는 가운데 벼슬아치가 계속 이어지고 문장과 절행의 인사가 대대로 사책에 끊어지지 않고 기록되었다. 그리하여 청백의 절조와 돈목(敦睦)의 가풍이 지금까지도 쇠해지지 않아 진신(搢紳)들 사이에서 아름답게 일컬어지고 있는데, 이는 실로 우리 선조의 깊은 인덕과 후한 은택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감화를 주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세월이 흐르다 보면 이 문집이 끝내 유실되어 동종(同宗)의 수치가 될까 나름대로 걱정이 된다. 그대가 지금 방백의 임무를 맡게 되었고 보면 어떻게 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니, 그대는 힘쓰도록 하라.”하였다. 이에 내가 공손히 무릎 꿇어 절하고 사례하면서 삼가 가르친 뜻을 받들었다. 그리고는 즉시 자재를 마련하고 장인을 모아 달성(達城) 객관(客館)에서 중간 작업에 착수한 결과 두 달 만에 일을 마치게 되었다. 다만 편집한 이 문집이 흩어져 없어진 뒤끝에 거두어 모은 것이라서 시문이 부분적으로 빠져서 완전하지 못한데, 목록 아래에 우선 그 수효를 기록해 두고, 잃어버린 것을 수습하여 보충하는 일은 후일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내가 선조를 추모하여 목은 문집을 판각한 승선공(承宣公)의 성의에 이미 감격한 데다가 판부 상공의 간절한 가르침을 또 받들어 행하고는 근본과 시원을 돌이켜 생각하며 선조가 남기신 자취를 어루만져 보노라니, 마치 직접 기침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면서 구구하게 경모하는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이 문집을 열람하는 우리 종인들이 만약 청전(靑氈)을 보존하는 것처럼 선조의 유업을 실추시키지 않고, 적선(積善)할 수 있는 바탕을 더욱 배양하면서 장자(長者)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일이 없게 한다면 어찌 일문(一門)의 보장(寶藏)만 될 뿐이겠는가. 실로 세상의 교화를 돕는 데에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감히 권말에 이런 군더더기 말을 덧붙여서 스스로 경성(警省)하는 자료로 삼고자 하는 바이다. 숭정(崇禎) 을해년(1635, 인조13) 하지일에 후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수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守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 이기조(李基祚)는 삼가 쓰다.

稼亭集跋[李基祚]

我先祖稼亭文孝公牧隱文靖公兩先生父子相繼蜚英麗元道德功業昭載乘牒餘事文章冠絶今古東人之仰之若泰山北斗其遺編剩馥擧一邦殆家有之而爲登壇操觚者之指南焉至壬辰兵燹並失板本英華之流及後人事蹟之儀式百代者獨賴此篇以想其彷彿而今將湮沒無傳不徒吾門之不幸亦斯文之所嘆惜也吾宗人李承旨德洙甫頃宰昇平求得牧隱文集先爲鋟梓藏諸韓山文献書院以壽其傳曁不佞按節而南也宗丈李判府德泂相公袖稼亭集一編囑余曰吾儕得姓數百年來子孫繩繼珪組不替文章節行之士代不絶書淸白之操敦睦之風尙今不衰稱艶于薦紳之間寔我祖之深仁厚澤愈久而愈不斬也竊恐此書淹延日月或竟遺亡爲同宗之羞子今膺專閫之任當有爲之地子其勉之哉不佞擎跪拜謝祇領敎意卽鳩材聚匠重刊于達城客館閱兩月工告訖功第編簡收集於散亡之餘詩文若干殘缺無存目錄之下姑記其數拾遺補亡以俟他日焉不佞旣感承宣公追遠肯構之盛意又蒙判府相公敎誨之丁寧原念本始撫摩遺躅怳若身承謦咳區區敬慕之心有不能自已也庶吾宗之覽斯集者若保靑氊不墜素業益培積善之地毋負長者之訓則豈獨爲一門之寶藏宲爲輔世之一助也敢贅斯語于卷末以自警省云爾時崇禎乙亥日北至後孫通政大夫守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李基祚謹識

[-D001] 청전(靑氈) : 선대(先代)로부터 전해진 귀한 유물을 가리킨다. ()나라 왕헌지(王獻之)가 누워 있는 방에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을 모조리 훔쳐 가려 할 적에, 그가 도둑이여, 그 푸른 모포는 우리 집안의 유물이니, 그것만은 두고 가는 것이 좋겠다.偸兒 靑氈我家舊物 可特置之라고 하자, 도둑이 질겁하고 도망쳤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王獻之


사간본(四刊本)

이상 총 20권으로 된 우리 선조 가정 선생 문효공의 유고는 모두 목은 선생의 산정(刪定)을 거친 것이다. 그런데 간행한 지 이미 오래된 데다 또 누차 병화를 겪어서 거의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는데, 다행히 종인인 상서(尙書) 이공 기조(李公基祚)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적에 잔결(殘缺)된 원고를 찾아내어 대구(大丘)에서 출판하였다. 하지만 자손의 입장에서는 전질을 얻지 못한 것을 항상 한스럽게 여겨 왔다. 그러다가 지난 무술년(1658, 효종9) 겨울에 내가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우연히 여행하던 도중에 전본(全本)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급히 간행할 계획을 세웠으나 곧바로 직임을 그만두게 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했으므로 끝내 전파할 수 없게 될까 항상 걱정하였다. 그런데 다행히 요즘 와서 또 성은을 입고 전라도 관찰사로 오게 되었다. 지금 마침 시절이 곤궁한 때를 당하여 자칫 사치스럽게 낭비한다는 혐의를 물론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기회를 놓치고서 도모하지 않다가는 두고두고 회한의 정을 품게 될 것도 같았다. 그래서 감히 봉록을 털어 완산(完山 전주(全州) )에서 판각 작업에 착수하였는데, 금산 군수(錦山郡守) 안공 헌징(安公獻徵)과 고산 현감(高山縣監) 이공 항진(李公恒鎭)이 또한 외손(外孫)으로서 함께 이 역사를 도와 한 달이 채 못 되어 일을 모두 마치게 되었다. , 우리 선조의 문장과 덕행이 사적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고 보면, 이 유고가 전해지고 전해지지 않는 것이야 별로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선조를 간절히 추모하는 자손의 심정에서 본다면 이것 말고 또 어디에 마음을 부칠 수가 있겠는가. 지난날 하마터면 유고가 완전히 없어질 뻔했다가 상서공 덕분에 그 반절을 얻었고, 지금 또 불초인 나를 통해서 완전해질 수 있게 되었으니, 잔결되기도 하고 완전해지기도 한 배후에는 이른바 현회(顯晦)의 운수가 작용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현재 내손과 외손을 막론하고 고위 관원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 역시 우리 선조가 덕을 쌓은 결과 후손이 받게 된 경사 아닌 것이 없고 보면, 앞으로 영구히 전해질 수 있는 것이 어찌 단지 눈에 보이는 이 시문들뿐이라고만 하겠는가. 이와 함께 나름대로 생각나는 것이 있다. 우리 동종이 지파(枝派)로 나뉘면서 이름이 드러난 자가 물론 많지만, 그중에는 또 쇠미해서 떨치지 못한 채 근근이 평민과 같은 생활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으니, 그들이야 어느 겨를에 선조를 위한 아름다운 계책을 도모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 인재공(麟齋公)의 후예는 그다지 쇠미하지 않아서, 우리 숙부인 참의공(參議公) 덕수(德洙)가 승평(昇平 순천(順天) )에서 정사를 행하던 날에 목은의 문집을 중간하였고, 공의 윤자(胤子)인 지금의 강원도 관찰사 홍연(弘淵)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당시에 인재의 묘소에 비석을 세워 세덕(世德)을 크게 드러내어 밝혔으며, 불초인 내가 공산(公山 공주(公州) )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인재유고(麟齋遺稿)를 간행한 데 이어 오늘날의 이 역사도 불초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비록 가정과 목은의 유택이 끝없이 자애롭게 후손들에게 내려진다고 하더라도, 이는 또한 인재공이 북돋워 키운 데 따른 것으로서 그 감응이 이와 같으니, 이 어찌 주부자(朱夫子)성년(盛年)의 고절(苦節)이 이제 그 보답을 받게 되었다.”라고 말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감개하며 비창(悲愴)한 심정을 가누지 못한 채 삼가 그 전말을 이상과 같이 적는 바이다. 갑신(甲申) 19년인 임인년(1662, 현종3) 3월 상순에 후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수 전남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전주부윤(守全南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全州府尹) 태연(泰淵)은 무릎 꿇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쓰다.

稼亭集跋[李泰淵]

右吾先祖稼亭先生文孝公遺稿捴二十卷皆經牧隱先生之删定者刊行旣久且屢經兵火幾乎泯沒幸賴宗人尙書李公基祚按節嶺南搜得其殘爛入榟於大丘而爲子孫者每以不得全帙爲恨矣頃在戊戌冬泰淵忝按湖西偶得全本於逆旅中亟謀鋟榟旋罷未果常惧其終不得傳布幸於今日又蒙 聖恩來按湖南適當時屈固有擧嬴之嫌而失今不圖恐抱無涯之恨玆敢損俸開板於完山而錦山郡守安公獻徵高山縣監李公恒鎭亦以外裔共相斯役不閱月而工告訖功吾先祖文章德行昭載史籍則遺稿之傳不傳雖若無所輕重而子孫羹墻之慕舍是而于何寓焉向日之幾乎永泯者賴尙書公而得其半今又因不肖而能得其全其或缺或完者似有顯晦之理而目今內外裔派之圭組嬋嫣者無非吾先祖積德之餘慶則其可傳於永久者豈特此咳唾之餘而已哉仍竊惟念吾同宗枝分派別名顯者固多而亦或有衰微不振僅同編氓何暇先懿之圖哉惟幸吾麟齋公之裔不甚陵替吾叔父參議公德洙視篆昇平之日重刊牧隱集其胤今關東伯弘淵曾按海西建石麟齋墓大闡世德不肖昔宰公山刊行麟齋稿而今日此役又成於不肖之手雖稼牧遺澤慈覆於無窮而亦由於麟齋公所封植者其應如此則豈朱夫子所謂盛年苦節且享其報者非耶不勝感愴之懷謹識其顚末如右云甲申後十九年壬寅三月上浣後孫通政大夫守全南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廵察使全州府尹泰淵拜手稽首謹識

[-D001] 인재공(麟齋公) : 인재는 목은의 둘째 아들인 이종학(李種學 : 1361~1392)의 호이다. 1392(공양왕2) 8월 정몽주가 피살된 후에, 그의 당으로 몰려 함창(咸昌)에 유배되었다가 장사현(長沙縣)으로 이배(移配)되던 중에 무촌역(茂村驛)에서 32세의 나이로 교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D002] 성년(盛年)……되었다 : 주희의 문집인 회암집(晦菴集)91부인여씨묘지명(夫人呂氏墓誌銘)사람들은 말했다. 부인이 젊었을 때 고생하며 지킨 절조가 이 아들을 둠으로 해서 이제 그 보답을 받게 되었다고.人謂夫人盛年苦節 以有斯子 今且享其報矣라는 말이 나온다.

[-D003] 갑신(甲申) : 1644(인조22)으로, 청 세조(淸世祖)의 순치(順治) 연호가 시작되는 해이다.

그의 사후 아들 이색(李穡)과 사위 박상충(朴尙衷)이 엮은 《가정집(稼亭集)》 所收 ‘가정선생연보(稼亭先生年譜)’에 의한 그의 일생은 다음과 같다.(출처 한국고전번역원 DB)   

대덕(大德) 2년 무술(1298, 충렬왕 24) : 7월 임인일에 공이 태어나다.

연우(延祐) 4년 정사(1317, 충숙왕 4) :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하다. 박효수(朴孝修)가 감시(監試)하다.

연우 7년 경신(1320, 충숙왕 7) : 가을에 수재과(秀才科)에 제2명(第二名)으로 합격하다. 익재(益齋) 선생 이제현(李齊賢)이 지공거(知貢擧)였고, 박효수가 동지공거(同知貢擧)였다. 복주 사록참군사(福州司錄參軍事)에 조용(調用)되다.

태정(泰定) 3년 병인(1326, 충숙왕 13) : 가을에 정동성(征東省) 향시(鄕試)에 제3명으로 합격하다.

태정 4년 정묘(1327, 충숙왕 14) : 경사(京師)에 가서 회시(會試)에 응시했지만 급제하지 못하다.

천력(天曆) 원년 무진(1328, 충숙왕 15)

천력 2년 기사(1329, 충숙왕 16)

지순(至順) 원년 경오(1330, 충숙왕 17)

지순 2년 신미(1331, 충혜왕 1) : 봄에 예문 검열(藝文檢閱)에 임명되다.

지순 3년 임신(1332, 충숙왕 복위 1) : 가을에 정동성 향시에 제1명으로 합격하다.

원통(元統) 원년 계유(1333, 충숙왕 복위 2) : 회시에 급제하다. 전시(殿試)에서 제2갑(第二甲)으로 뽑혀 진사 출신(進士出身)을 수여받고, 승사랑(承事郞)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제수되다.

원통 2년 갑술(1334, 충숙왕 복위 3) : 면려 학교(勉勵學校)의 조서를 받들고 사신의 신분으로 본성(本省)에 왔다.

지원(至元) 원년 을해(1335, 충숙왕 복위 4) : 경사(京師)로 돌아가다. 봄에 봉선대부(奉善大夫) 시 전의부령 직보문각(試典儀副令直寶文閣)에 임명되다. 

지원 2년 병자(1336, 충숙왕 복위 5) : 유림랑(儒林郞) 경정원관구 겸 승발가각고(敬政院管勾兼承發架閣庫)에 제수되다.

지원 3년 정축(1337, 충숙왕 복위 6) : 유림랑 정동행중서성 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郞)에 제수되다. 여름에 중현대부(中顯大夫) 성균좨주 예문관제학 지제교(成均祭酒藝文館提學知製敎)에 임명되다.

지원 4년 무인(1338, 충숙왕 복위 7)

지원 5년 기묘(1339, 충숙왕 복위 8) : 봄에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전교시사 예문관제학 지제교(判典校寺事藝文館提學知製敎)에 임명되다.

지원 6년 경진(1340, 충혜왕 복위 1)

지정(至正) 원년 신사(1341, 충혜왕 복위 2) : 개원(改元)을 축하하는 정동성의 표문(表文)을 받들고 경사에 가서 그대로 머무르다.

지정 2년 임오(1342, 충혜왕 복위 3)

지정 3년 계미(1343, 충혜왕 복위 4) : 봉훈대부(奉訓大夫)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에 제수되다.

지정 4년 갑신(1344, 충혜왕 복위 5)

지정 5년 을유(1345, 충목왕 1) : 상도(上都)에 순행하는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다. 겨울에 봉익대부(奉翊大夫) 판전교시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判典校寺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에 임명되다. 또 봉익대부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다. 관직(館職)은 전과 같다.

지정 6년 병술(1346, 충목왕 2) : 본성에 반삭(頒朔)하다. 봄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임명되고 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임명되다. 여름에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 진현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政堂文學進賢館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에 임명되다. 가을에 중대광(重大匡) 한산군(韓山君)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에 임명되다.

지정 7년 정해(1347, 충목왕 3) : 경사로 돌아가다. 겨울에 동지공거가 되어 김인관(金仁琯) 등 33인을 시취(試取)하다. 

지정 8년 무자(1348, 충목왕 4) : 중서성(中書省)이 감창(監倉)에 차임(差任)하다. 여름에 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都僉議贊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에 임명되다. 이해에 동방으로 돌아오다.

지정 9년 기축(1349, 충정왕 1) : 가을에 관동(關東)을 유람하다.

지정 10년 경인(1350, 충정왕 2) : 봉의대부(奉議大夫)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에 제수되다.

지정 11년 신묘(1351, 충정왕 3) : 정월 1일에 졸하다. 문효공(文孝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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