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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2일 오후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는 문화재청 주최 '덕수궁(사적제124호) 명칭 검토 공청회'가 있었거니와, 그에서 나는 토론자로 참여해 경운궁으로의 명칭 변경을 찬성하는 발표를 비판했거니와, 대회 개최 전에 주최측에 미리 제출한 내 토론문 '덕수궁德壽宮이 일제日帝 잔재殘滓라는 망언에 대하여'는 이미 이곳 블로그에 전재했거니와, 행사 당일 나는 현장에서 그 토론문과는 별개로 반대론을 보강한 추가 토론문을 현장에서 직접 제기했으니, 그것이 다음이다. 아래서 보듯이 나는 이 명칭 변경을 추진한 문화재청의 절차가 잘못되었으며, 나아가 맹렬한 찬성론을 전개한 홍순민 교수의 논거를 붕파하고자 했다. 결국 덕수궁을 경운궁으로 환치하고자 한 시도는 좌절됐다. 하지만 이 건은 언제건 다시 준동할 채비를 한다. 



덕수궁 명칭 변경론과 관련한 김태식의 토론 추가

 

1. 문화재청에 대하여 : 절차에 문제가 있다.


20119월 15일 문화재청은 덕수궁 명칭 변경 추진과 관련한 보도자료를 배포하면서 이르기를

 

문화재청은 올해 7월 국가지정문화재 중 사적 439건의 지정명칭을 변경하여 고시했으나, 당시 덕수궁의 명칭은 덕수궁으로 유지할 것인지, 경운궁이라는 옛 이름으로 환원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고 했다. 이에서 함께 다뤘다는 사적 439건의 지정명칭은 토론자가 알기로 주소를 부여하거나, 관할 행정구역 변경 등에 따른 것으로 안다한데 덕수궁은 왜 문화재위 안건에 올라갔는가안건에 올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올리는 이유가 타당성을 갖추어야만 한다. 하지만 덕수궁을 경운궁으로 돌려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아무 것도 학문적으로 엄밀히 검증되지 아니했다. 변경론자가 덕수궁이라는 명칭이 일제의 잔재라는 사실을 운운했지만, 그런 주장이 있다고 해서 곧바로 그것이 역사적 史實일 수는 없다. 이러한 주장은 검증을 거치기 전에는 의의 제기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일부의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주장에 대한 검증도 없이, 그런 검증되지 않은 이설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런 안건이 문화재위원회에 올라갈 수 있는가?


요컨대 덕수궁 명칭 변경과 관련한 문화재청의 절차 자체가 잘못되었다.

 

2. 홍순민 교수의 발제에 대하여

 

a. 홍 교수 발표에도 드러났듯이 덕수궁은 이미 태조 이성계의 退邸에 대해서도 사용됐다. 이로써 보건대 덕수궁이라는 명칭은 일제 잔재하고는 하등 관계없으며 퇴위한 帝王의 저택에 대해 사용하는 일반명사 같은 명칭임을 스스로 폭로한 것 아닌가?

 


b. 퇴위한 고종의 거처로 덕수궁이라는 궁호를, 그리고 부호를 승녕부로 정한 주체는 순종 아닌가? 무슨 일제인가?

 

c. 홍 교수

 

순종 즉위(1907)82일 궁호, 부호를 정할 때, 궁내부 대신 이윤용이 주도한 행태는 망()을 보통 삼망(三望), 곧 셋을 정하여 올려 임금이 그중에서 하나를 낙점(落點)하게 하는 이전의 관행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며, 그 후보 명칭조차도 새로 정한 것이 아니라 태조의 것을 그대로 빌어 한 것은 매우 무성의한 행위였다.”

 

홍 교수 견해에 따르면 덕수궁이라는 궁호는 태조 이성계의 선례를 빌린 것이다그렇다면 도대체 어찌하여 이것이 일제의 잔재란 말인가더불어 단수 후보로 궁호와 부호를 올린 것이 어찌하여 매우 무성의한 행위일 수 있는가?

 

d. 홍 교수는 이런 궁호 부호 책정을 주도한 인물로 이윤용을 지목하면서 이르기를

 

특히 이윤용이 이완용의 서형으로서 그의 친일 행각이 매우 현저함으로 볼 때 궁호, 부호를 정한 것은 고종과 대한제국 조정의 뜻이라기보다는 일제의 압박에 의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묻는다이런 언급이 과연 역사학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린가?

 

e. 홍 교수는 또 이르기를

 

덕수궁은 태조가 양위한 뒤 1408524일 승하하기까지 10년 가운데 8년간만 상왕태상왕의 거처 이름으로 쓰였고, 그 이후는 그 기능이 변질되었다. 성종 연간 어간에는 후궁의 거처보다도 서열이 낮은 궁궐에서 활동하다가 은퇴한 사람의 거처로 쓰이기도 했다.”

 

요컨대 그렇기 때문에 덕수궁이라는 명칭은 격이 낮다는 것이다묻는다.


창경궁은 애초 후궁을 위한 건물 아니었던가?


f. 홍 교수는 또 이르기를

 

이로 보건대 순종이 이어하였던 즉조당을 비롯한 본래의 경운궁 영역은 그대로 경운궁으로 불리었고, 덕수궁이 가리키는 공간 범위는 그 당시 고종이 머물던 중명전 일대를 가리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덕수궁 시대에도 경운궁하고 덕수궁이 따로 있었다는 의미로 홍 교수는 해석하면서 그 근거로 각주 18번에서 다음과 같은 황성신문 기사를 들었다

 

再昨日午前十時皇上陛下오셔 慶運宮에셔 德壽宮幸行오셧다가 午後四時二十分還宮오셧다더라.

 

홍 교수의 사료 해석 능력이 도처에서 의심이 되므로 알기 쉽게 내가 풀어준다.

 

再昨日午前十時皇上陛下오셔 慶運宮에셔 고종황제(德壽宮)幸行오셧다가 午後四時二十分還宮오셧다더라.”

 

위에서 말하는 德壽宮은 장소가 아니라 퇴위한 황제, 태황제 고종을 말한다. 황성신문시대에 무수하게 보이는 덕수궁 전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덕수궁(사적제124호) 명칭 검토 공청회  

□ 개요 

ㅇ 일 시 : 2011. 12. 2(금), 14:00 ~ 17:50 

ㅇ 장 소 : 국립고궁박물관 본관 강당 

ㅇ 내 용 : 덕수궁 지정 명칭 검토 

ㅇ 참가자 : 문화재위원, 문화재 관계자 등 120 여명 

ㅇ 발제․토론자 : 11명 

- 사 회 : 송석기(군산대학교 교수) 

- 발제자 

․역사속의 덕수궁과 현재의 의미(이민원 원광대 교수) 

․대한제국의 궁궐 경운궁(홍순민 명지대 교수) 

- 토론자 

․유지 : 김정동(목원대 교수), 김도형(연세대 교수), 김태식(연합뉴스 기자),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환원 : 이태진(국사편찬위원장), 김인걸(서울대 교수), 서영희(한국산업기술대 교수), 

이희용(전 경기예총 부위원장)


요약 

김태식 (연합뉴스기자) 

▪ 덕수궁은 잔재로써 경운궁을 말살한 것이 아니라 경운궁의 지난 100여년의 역사에는 경운궁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으며, 경운 궁 없이 덕수궁도 존재할 수 없음 

▪ 덕수궁은 경운궁의 흔적을 밀어내고 그것을 대신 차지한 찌꺼기가 아니므로 ‘덕수궁이란 간판을 떼어버리고 경운궁으로 돌려야 한다’는 주장에는 덕수궁의 지난 100년의 역사를 말살하고자 하는 의도가 개입되어 있음 

※ 덕수궁 명칭 설문조사는 역사적 사실인지 후 실시 필요 덕수궁 유지


“德壽宮은 日帝 殘滓와 하등 연관이 없다” - 이른바 덕수궁 명칭 개편과 관련한 토론문 - 

김태식 연합뉴스 문화부 기자 


1. 문제의 제기 


두 달 전쯤인 지난 9월15일, 문화재청은 느닷없는 소식을 들고 나왔다. 언론에 배포한 이날의 보도자료는 제목이 “덕수궁이냐 경운궁이냐”였고, 부제는 “시민의견 수렴을 거쳐 명칭 재검토키로”였다. 요컨대 사적 제124호인 德壽宮을 慶運宮으로 명칭 변경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는 것이다. 보도자료에 의하면 이를 위해 그에 앞서 이미 지난 7월에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서 국가지정문화재 중 사적 439건의 지정명칭을 변경하여 고시했으며, 이때 덕수궁 명칭 변경안이 논의가 되었지만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德壽宮을 慶運宮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며, 그리고 그 근거는 무엇인가? 


조선 후기사, 특히 대한제국시대를 전공하는 역사학계 일부에서 이런 주장이 있으며, 그에 더불어 민간운동 차원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꾸준히 이는 것으로 나는 안다. 하지만 이날의 문화재청 발표가 적어도 나에게는 느닷없이 다가오기만 한 까닭은 그 시급성이 있느냐는 의구심이 첫 번째로 들었고, 그리고 명칭 변경을 위해 내세우는 근거들이 설득력과 합리성을 갖추었는가 하는 데도 적잖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토론자 중 한 명으로 이 자리에 선 나는 오늘의 발표자 두 분 중 한 분과 같은 토론자 중 몇 분이 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신념을 지녔다는 사실을 익히 안다. 더불어 이들 명칭 변경론자의 논리적 근거도 劃一하지만은 않을 줄로 안다. 그럼에도 이들 명칭 변경론에는 그것을 떠받치는 主軸이라고 할 만한 공통분모를 두 가지 정도로 추출할 수 있으니, 대한제국과 고종에 대한 환상, 다시 말해 皇帝(emperor)와 帝國(empire)에 대한 욕망의 들끓음이 그 하나요, 德壽宮은 일제의 殘滓라 함이 나머지 하나라 할 것이다. 


이 중에서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 명칭변경이 여전히 추동력을 지니며, 그에 따라 때로는 이번과 같은 명칭 변경안을 실행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는 ‘殘滓論’이다. 실제로 이번 문화재청 보도자료가 극명히 증명하듯이 “1907년 경운궁 명칭이 덕수궁으로 개칭된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력으로 고종이 황제 자리를 순종에게 양위한 뒤 이전 황제의 거처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원래 명칭으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 다시 말해 皇帝와 帝國에 대한 욕망은 그것을 주장하고 지지하는 사람의 信念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이는 사상의 자유를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적어도 이 자리에서 나는 그것을 置之度外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덕수궁이라는 명칭은 과연 日帝의 殘滓인가? 


2. 高宗의 皇帝位 退位와 德壽宮 


이 자리에서 명칭 변경론과 관련해 또 하나 상기할 점은 그 뒤에는 이른바 역사환원주의라고 일컬을 만한 신념, 혹은 기반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그 역사를 추적해 그 근원, 혹은 뿌리, 혹은 기둥을 찾아가자는 욕망이 內在한다는 것이다. 이를 빌미로 지금의 명칭을 버리고 느닷없이 그 옛적 먼지 구덩이에 파묻힌 이름을 새로운 간판으로 내거는 추동력으로 작동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慶運宮과 德壽宮의 역사를 논할 적에 주의할 대목은 慶運宮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점이 1593년 10월, 임진왜란으로 의주 일대로 피난한 조선의 국왕 宣祖가 漢陽으로 還都한 이후 임시 궁궐인 時御所로 삼기 시작한 데서 비롯한 다는 점이다. 


戰亂으로 전체가 쑥대밭이 되다시피 한 漢陽에서 그나마 宮闕로 사용할 만한 건축 공간으로 남은 것이 成宗의 親兄 月山大君의 저택이었다. 궁궐이 다 타버리고 이곳에 行宮을 마련한 데서 비로소 이곳은 宮의 역사로 편입되기 시작한다. 


묻는다. 역사환원주의에 말미암는다면 차라리 덕수궁은 月山大君 私邸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필 慶運宮이리오? 


돌이켜 보면 慶運宮은 선조의 아들로 그 後嗣인 光海君이 이곳 西廳, 즉, 지금의 德壽宮 卽阼堂에서 卽位하고 2년 뒤인 1611년 10월에 慶運宮이라 개칭함으로써 비로소 그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하지만 그 무렵 창덕궁이 재건됨으로써 慶運宮은 곡절은 있기는 했지만 離宮의 일종이 되었다가 그나마도 1623년 7월에는 宣祖의 寢殿만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게 된다. 이로써 본다면 경운궁이 명실상부한 宮으로 기능한 것은 적어도 고종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단순 계산으로 두들겨도 30년 남짓할 뿐이다. 


이런 慶運宮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기는 익히 알려졌듯이 고종시대에 들어와서다. 이런 역사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선 다른 분들이 충분히 다룰 것이므로 그것을 重言復言하지 않는다. 다만 이 자리에서 논의가 집중할 大韓帝國의 선포 (1897.10)와 그 시대와 관련해 지적할 것은 고종이 이른바 헤이그 특사 사건에 휘말려 1907년 7월 퇴위한 장소가 다름 아닌 덕수궁 중화전이란 점이다. 고종은 생전에 황제위에서 퇴위했으므로 당연히 太上皇이라는 尊號를 받고 물러난다. 퇴임 뒤에 그가 머무른 곳이 바로 경운궁이다. 이런 경운궁이 그의 퇴위와 더불어 德壽宮으로 개칭해 오늘에 이른다. 


그를 뒤이은 대한제국 2대 황제 純宗은 1907년 8월에 덕수궁 돈덕전에서 皇帝位에 즉위하고 그해 11월 창덕궁으로 들어간다. 이런 경운궁과 덕수궁의 略史 어디에 日帝의 殘滓가 있다는 말인가? 고종의 강제퇴위와 덕수궁이라는 이름의 등장이 밀접한 관계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다시 묻거니와 그렇다고 해서 德壽宮이 일제의 殘滓라 함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가? 덕수궁은 강제퇴위한 고종의 거처로서 마련된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德壽宮이라는 명칭은 中國史에서 北宋과 南宋의 교체 혼란기에 즈음해 宋 왕조 高宗이 紹興 31년(1161)에 退位한 뒤에 지금의 浙江省 杭州市 望仙橋 동쪽에 있던 宰相 秦檜의 故第에 그 거처로써 마련한 德壽宮에서 비롯한다.28) 즉, 《宋史》 卷32, 本紀 第32 高宗9 그 32년 조에 이르기를 6월 “丙子에 皇太子에 詔하여 皇帝 位에 卽케 하고, 帝 자신은 太上皇帝을 稱하고 德壽宮으로 물러나 거처를 삼았으며, 皇后는 太上皇后라 칭하니 (이에) 孝宗이 卽位했다”29)고 한다. 


대한제국 황제 高宗이 퇴위하여 太上皇으로서 그 자신이 거처할 곳의 이름으로 하고 많은 이름 중에서도 德壽宮을 삼은 것은 바로 이런 전통에서 비롯한다. 어떻든 이로써 慶運宮은 이름이 간판만 바꾸었을 뿐이지, 宮으로서의 기능은 여전히 유지했다. 昌慶宮이 창경원이 되어 동물원으로 바뀐 것과는 차원이 분명히, 그리고 전연 다르다. 그럼에도 명칭변경론자들은 德壽宮이 日帝의 殘滓라 강변하면서, 그 이름을 바꾸어야만 殘滓를 청산한다고 주장한다. 


돌이켜 보면 德壽宮은 殘滓로써 慶運宮을 ‘抹殺’한 것이 아니다. 德壽宮의 지난 100년의 역사에는 慶運宮이 그대로 살아 숨쉰다. 慶運宮없이 德壽宮이 존재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德壽宮은 慶運宮의 흔적을 밀어내고 그것을 대신 차지한 찌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德壽宮이라는 간판을 떼어버리고 慶運宮으로 돌려야 한다는 주장에는 德壽宮의 지난 100년의 역사를 抹殺하고자 하는 ‘불온’한 의도가 개입돼 있다. 내가 이 자리에서 명칭 변경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때문이다. 


3. 日帝의 殘滓, 그 억울한 희생자들 


오늘 이 자리에는 德壽宮이 日帝의 殘滓라 해서, 慶運宮으로 명칭을 돌리기만 하면 그 殘滓가 淸算한다는 신념을 지닌 분이 있다. 


하지만 다시금 강조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역사 지식에서 비롯한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더불어 德壽宮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해서 德壽宮이 日帝의 殘滓라는 등식은 그 어디에서도 성립 기반이 없다.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은 단언하거니와, 피식민지시대, 혹은 사실상 그런 시대에 일어난 모든 일을 日帝의 所行으로 돌리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 시대에 일어난 일과 그런 일이 日帝의 所行이라는 것은 별개다. 


내 先親이 그 시대에 태어났다고 해서 선친 자체가 일제의 殘滓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돌이켜 보면, 日帝의 殘滓를 청산한다는 운동이 나름의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德壽宮처럼 전연 엉뚱한 피해자를 양산하기도 했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28) 張仲文이 쓴 ‘白獺髓’에 이르기를 “秦檜師垣故第, 卽今之德壽宮, 西有望仙橋 , 東有升仙橋”라 했다, 


29) 丙子, 詔皇太子卽皇帝位. 帝稱太上皇帝, 退處德壽宮, 皇后稱太上皇后. 孝宗卽位, 累上尊號曰光堯壽聖憲天體道性仁誠德經武緯 文紹業興統明謨盛烈太上皇帝. 淳熙十四年十月乙亥, 崩於德壽殿, 年八十一. 謚曰聖神武文憲孝皇帝, 廟號高宗. 


그런 보기가 너무나 많아 처참하기만 하거니와, 그 사례 몇 가지를 들건대 먼저, 2007년 2월20일자로 한자 표기를 ‘義王’으로 바꾼 ‘義旺’이 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했는지 나로서는 참말로 알 수가 없지만 ‘旺’이 ‘日王’이라는 코미디를 방불하는 주장에 힘입어 마침내 日帝의 殘滓로 지목되어 퇴출됐다. 


마찬가지 논리로 서울의 인왕산도 조선시대 각종 문헌을 보건대 仁王山과 仁旺山이 병립함에도 仁王山이어야만 한다는 주장이 실로 그럴 듯하게 통용한다. 더불어 ‘비로봉’과 더불어 전국 각지 산 중에서도 主峰을 일컫는 말로 더러 보이는 ‘天皇峰’이 일본의 天皇과 관련이 있으므로 日帝의 殘滓이며, 그것은 ‘天王峰’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더구나 그것이 권력이 되어 그 명칭 변경을 반대하는 사람은 새로운 친일파로 등극하는 실정이다. 


나아가 쇠말뚝이 日帝의 殘滓라 해서 매년 삼일절이나 광복절이면 그것을 주워 뽑음으로써 쾌감을 불러내는 희대의 쇼가 지금도 우리 사회 한편에서 버젓이 횡행하기도 한다. 이번 덕수궁 명칭 변경론을 밀어붙이고자 하는 분 중 적어도 역사로 밥을 빌어먹고 사는 직업적 학문 종사자 중에는 이른바 ‘창덕궁 後苑’을 ‘秘苑’에서 건져내는 데 단단히 一助한 분이 있다고 안다. 그들이 이르기를 後苑이 바른 이름이며, 秘苑은 日帝가 조선왕실을 격하하고자 맹글어 낸 말이라고 한다. 


돌이켜 보면 지금의 창덕궁 後苑을 일컬어 조선시대에는 압도적으로 後苑이라 부른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에 더불어 그것을 대신한 秘苑이라는 명칭이 일반화하는 것도 식민지시대에 들어온 이후의 일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後苑으로 쓰면 민족정기가 회복되고, 그 대 신 秘苑을 쓰면 민족정기가 훼손된다는 주장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말미암는가? 


이름이 시대에 따라 바뀌었을 뿐일진댄 그에다가 어찌하여 日帝의 殘滓라는 말을 끌어다 대는가? 


덧붙이건대 後苑이건 秘苑이건 같은 말이다. 실제 중국사의 여러 사례를 볼진댄 後苑에 해당하는 말로써 秘苑을 쓴 사례는 非一하고 非再하다. 또 하나 덧붙일 것은 後苑이건 秘苑이건 그것이 결코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든 집 건물 앞 공간을 ‘마당’이라 부르듯이 그 뒤켠 나무를 심은 공간을 秘苑 혹은 後苑으로 부를 뿐이다. 일반명사다. 고유명사도 아닌 줄도 모르고 그것을 그렇게 착각하여 그것을 되찾은 일을 마치 독립이나 쟁취한마냥 하는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묻는다. 德壽宮이 일재의 殘滓이므로 그 명칭을 ‘본래’로 돌려야 한다는 주장 또한 이런 무지막지한 역사의 폭거에 다름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그럴 자신이 있다면 바꿔라. 몇 가지 역사 지식 더 갖추고 있다고 해서, 左顧右眄하지 않고 자신이 아는 역사지식이 전부인양 착각해서 역사를 ‘抹殺’하는 일은 삼가고삼가얄지니라. 


欽哉欽哉라.

  1. 역문팬 2018.01.22 00:03 신고

    좋은 글입니다.

  2. 신건지 2018.01.25 10:56 신고

    아는 만큼 보이는거죠~

  3. 두소자 2018.01.31 22:36 신고

    당시 말도 안되는 짓이라고 하면서도 국편위원장 눈치 보느라 고사하던 교수들 면면이 떠오르네요. 당시 반대 토론자 찾느라 전화가 뜨거워질 만큼 전화했었죠.
    또 그전에는 반대였다가 찬성 주장을 했던 코미디 같은 일도 있었고.
    그때 고생 많으셨어요.

  4. 한량 taeshik.kim 2018.02.19 16:08 신고

    그러게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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