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출처 : 《시사IN》 2016년 08월 19일 금요일 제465호


대통령이 경주 개발에 적극적인 이유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0년대 국책사업으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추진했다. ‘경주 역사문화 창조도시 조성’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박근혜 대통령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주 개발에 적극적이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webmaster@sisain.co.kr  2016년 08월 19일 금요일 제465호


경주는 지금 온통 발굴 현장이다. 경주 시내 남쪽 월성(신라의 천년 수도 월성이 있었던 곳)처럼 훼손 위험 등으로 인해 예전에는 감히 발굴하지 못했던 곳까지 속속들이 파헤치고 있다. 신라 왕성(王城)의 구조를 확인한다며 굴삭기를 동원해 시루떡 떠내듯이 표토(表土)를 걷어내는 중이다. 성벽 바깥을 두른 도랑 겸 방어 시설인 해자(垓字) 구역 역시 발굴 과정에서 나온 흙더미 천지다. 월성 남쪽을 감돌아 흐르는 남천에서는 ‘신라 시대 월정교’라는 다리가 느닷없이 출현했다. 교각 터만 남아 있던 유적을 관광 문화재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월성 서북쪽에 인접한 드넓은 황룡사 터 인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황룡사 터 남쪽 담장 외곽 구역에서 발굴이 한창 진행 중이다. 절터 한쪽 구역에는 조만간 공식 개관을 알릴 ‘황룡사지 전시관’이 어느새 우뚝하니 건립되었다.

2~3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익숙했던 월성과 황룡사 터의 경관은 온데간데없다. 황룡사 금당 터에서 감상할 수 있었던 서쪽 선도산 너머 낙조의 장관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볼썽사나운 전시관이 가로막고 섰기 때문이다.

지금 천년 고도 경주는 무엇엔가 쫓기는 듯 그야말로 전광석화를 방불케 하는 발굴 속도전이 전개 중이다. 다만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나라를 통치하던 시절에도 경주는 온통 발굴로 꿈틀거렸다. 부녀간인 두 대통령에게는 뭔가 공통분모가 있는 모양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75년 7월, 박정희 대통령(가운데)이 국립경주박물관 개관 테이프를 끊었다. 
ⓒ연합뉴스
1975년 7월, 박정희 대통령(가운데)이 국립경주박물관 개관 테이프를 끊었다.

그동안 경주에서는 언제나 지역 인사들을 중심으로 개발을 요구하는 아우성이 터져 나오곤 했다. 황룡사 터를 가리키며 ‘볼 것이 뭐가 있느냐’ 혹은 허허벌판인 월성에 가서 ‘신라의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경주의 관광업체 종사자들은 주로 유럽의 유적지에 견주면서 ‘경주가 어떤 곳이며 역사적으로 어떤 내력을 가졌는지 관광객에게 입으로만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목이 아플 지경’이라고 말한다. 결국 볼거리를 내놓으라는 요구다. 명색이 천년 왕국 신라의 수도인데 ‘감동을 줄 만한 볼거리가 없다’는 볼멘소리는 언제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불만은 어느 정도 타당한 측면도 있다. 유럽 유적지의 경우, 석조 건축물의 흔적이 뚜렷한 곳이 많다. 이에 비해 눈에 드러나는 신라의 흔적은 우람한 왕릉급 무덤과 첨성대를 빼면 적어도 경주 분지에서는 찾기 힘들다. 결국 보고 느낄 수 있는 문화재를 요구하는 여론은 천년 왕국 신라의 흔적을 찾아 지하로 내려가라는 압박으로 발전한다. 이렇게 찾은 흔적 위에 ‘볼만한 것’을 세우라는 요청도 나온다.

박정희 정부가 1970년대에 국책사업으로 추진했던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은 볼 것이 없는 경주에서 볼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한 시도였다. 국내 고분 중에서 가장 크다는 황남대총을 팠다. 이 사업을 연습하기 위한 교보재가 바로 천마총 발굴이었다. 황룡사 터를 매입해 주민을 이주시키고, 인근의 안압지 및 그 주변에 대한 대대적 준설과 발굴 작업을 벌인 것도 이 시기다. 월성 내의 마을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고 이를 에워싼 해자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발굴 조사에 착수하기도 했다. 국립경주박물관도 다시 세워 대대적으로 재단장했다. 박물관 개관식 테이프 커팅은 박정희 대통령 혼자서 거행했다. 이뿐 아니다. 경주 남산에는 신라의 삼국통일 정신을 계승한다며 화랑의집과 통일전을 이른바 ‘민족 성지’로 세웠다. 때마침 개통한 경부고속도로 경주나들목에는 화랑 동상을, 황성공원에는 김유신 장군 동상을 건립했다. 보문관광단지도 이때 개발되었다.

역사적으로 경주라는 지역 명칭이 탄생한 시기는 고려 초기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경주는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다. 그 역사는 40년에 지나지 않는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2015년 9월7일, 경주의 신라 왕경(월성) 발굴조사 현장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앞줄 가운데)이 나선화 문화재청장(앞줄 맨 왼쪽)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2015년 9월7일, 경주의 신라 왕경(월성) 발굴조사 현장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앞줄 가운데)이 나선화 문화재청장(앞줄 맨 왼쪽)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이같이 ‘박정희 시대 경주 만들기’의 표상이라 할 만한 곳이 바로 불국사와 안압지다. 지금의 불국사는 석가탑과 다보탑을 제외하면 신라 시대 불국사와 큰 관련성 없는 건물이다. 박정희 시대에 새롭게 건설된 불국사로 봐야 할 것이다. 불국사의 중심인 대웅전 역시 조선 후기 건축물에 지나지 않는다.

통일신라 시대의 대규모 정원 유적인 안압지도 마찬가지다. 박정희 시대에 발굴 조사가 완료되었을 뿐 아니라 그 연못 주변에 건물 몇 개를 상상해서 복원(?)해놓았다. 현재의 안압지 및 주변 건물 모습이 통일신라 시대의 그것과 비슷한지에 대해서는 어떤 고증도 없다. 하지만 지금의 안압지와 주변 건물들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굉장하다. 관광객들은 그 아름다움에 통일신라 시대의 영광을 투영시킨다.


‘신라 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 사업에 거액 투입

이처럼 경주에서 ‘눈과 손으로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감동을 캐내려는 욕구가, 박정희의 딸 박근혜 시대에 다시 용솟음치고 있다. 박정희는 경주 지역 문화재 발굴 현장만 세 번 찾았다. 그는 경주를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로 간주했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모친 육영수 여사의 비극적 죽음 이후 아버지를 수행해서 경주를 자주 방문했다. 경주 시민들 역시, 딸이 아버지 못지않은 애정을 ‘천년 왕성’에 쏟아주리라 기대했다. 박근혜는 ‘경주 역사문화 창조도시 조성’이라는 공약을 내걸고는 화려하게 청와대로 입성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 공약을 내걸 때 실행 의지와 욕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길은 없다. 그러나 경주 관련 공약들은 비교적 착실하게 이행되었다. 경주 시민들 역시 대통령 공약을 무기로 삼아 가시적인 실행을 끊임없이 요구해왔다.

2013년 10월21일 경주시청에서는 문화재청과 경북도 그리고 경주시가 ‘신라 왕경(王京) 핵심유적 복원·정비’를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세 기관을 대표해 변영섭 당시 문화재청장과 김관용 도지사, 최양식 경주시장이 협약서에 서명했다. 경주시 등 세 기관은 지금까지 왕경의 발굴·복원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며 비교적 구체적인 다음과 같은 전망을 제시한다. “신라 왕경의 조사·연구와 정비를 위해 2014년부터 2025년까지 약 9400억원을 집중 투입하여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함으로써, 우리 문화의 저력과 가치를 재발견하고 문화 융성의 모멘텀이 되어 21세기 실크로드의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도록 추진할 예정이다.”

박정희 시대의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부활해서 기지개를 켜는 장면이다.

출처 : 《시사IN》 2016년 07월 29일 금요일 제462호


두 박 대통령이 사랑했던 곳, 경주

박정희 대통령은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유별났다. ‘단군 이래 그랬던 적이 없었다’고 할 만큼 문화재가 각광을 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자 문화재계는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숭례문 부실 복구로 물거품이 되었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2016년 07월 29일 금요일 제462호
집권 4년차인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후 문화재 현장을 최소한 세 번 찾았다.  2013년 5월4일 숭례문 복구공사 완공 기념식, 지난해 9월7일 경주 월성 발굴 현장에 참석한 데 이어 올해 3월18일 아산 현충사를 방문했다. 물론 세 차례 방문을 근거로 박근혜 대통령이 우리 문화재에 유별나게 애착을 가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역대 한국 대통령 가운데 박 대통령만큼 문화재 현장 방문 기록을 남긴 이가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론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첫 방문지인 숭례문 복구 완공 기념식의 경우, 어떤 대통령이라도 참석했을 행사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두기는 힘들다. 2008년 2월 ‘숭례문 방화’는 국가적 사고였던 만큼 복구 완공을 기념하는 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복구된 숭례문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준 내상(內傷)은 적지 않은 듯하다. 떠들썩하게 복구를 완료했다고 발표한 직후, 전통 방식으로 재현했다는 숭례문의 단청이 벗겨지고 만 것이다. 더욱이 단청을 재생한 방법 역시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 곧이어 드러났다. 이는 결국 단청뿐 아니라 숭례문 복구공사 자체가 총체적으로 엉터리였다는 지적으로 이어진다. 심지어 숭례문을 넘어 한국의 문화재 현장 전반이 부실 덩어리로 간주되는 상황까지 확대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해(2013년) 11월11일, “숭례문 부실 복구를 포함해 문화재 보수 사업의 관리 부실 등과 관련한 문화재 행정 전반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통해 문제점을 밝히라”고 지시하게 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2015년 9월 경주의 신라왕경(월성) 발굴조사 현장에서 조사단의 설명을 듣는 박근혜 대통령(오른쪽). 
ⓒ연합뉴스
2015년 9월 경주의 신라왕경(월성) 발굴조사 현장에서 조사단의 설명을 듣는 박근혜 대통령(오른쪽).


그런데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를 단지 ‘언제나 있는 일’ 정도로 봐서는 안 된다. 시점이나 경로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었다. 당시 서유럽 순방에서 막 돌아와 공식 일정도 잡지 않은 상황에서 김기춘 비서실장을 통해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 ‘특별 지시’를 전달한 것이다. 박 대통령의 지시를 전파한 이정현 당시 홍보수석의 어조도 매우 강경했다.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것을 보면 (문화재 복원·관리 문제가) 원전 비리 못지않게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박 대통령도 원전 비리 커넥션이나 그로 인한 문제점 못지않게 굉장히 심각하게 이 사안을 보신 것 같다.”

발언 그대로만 보면, 문화재 비리를 당시에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원전 비리에 견준 이가 박근혜 대통령 본인인지, 아니면 이정현 수석인지 애매하기는 하다. 하지만 두 사람 중 누가 그 발언의 장본인인지에 상관없이, 그 이후 진행된 경과를 보면 문화재 계통의 비리는 원전 비리만큼 취급을 받았다. 경찰과 감사원이 대대적인 문화재 비리 수사·감사에 착수하면서 문화재계는 그야말로 쑤셔놓은 벌집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박근혜 대통령과 문화재계의 관계는 출발부터 심상치 않았다. 사실 문화재계는 박 대통령이 취임하자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왜 그랬을까?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 때문이다.

문화재계에 대통령 박근혜의 등장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물론 문화재계에도 다양한 정치 성향의 인물과 흐름이 있기 때문에 하나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저변에 ‘박정희의 재림’이라는 기대가 짙게 깔려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어떤 지도자였나? 독재자, 경제발전의 역군 등 그를 지칭하는 상징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적어도 문화재계에서 그는, ‘단군 이래 그랬던 적이 없었다’고 표현될 만큼 문화재가 각광받는 시대를 연출한 대통령이었다. 문화재계는, 그런 아버지에게 적지 않은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데다 실제로 아버지를 따라서 경주 등 여러 문화재 현장을 다니기도 했던 박근혜 ‘신임 대통령’에게 그 아버지 같은 모습을 기대했던 것이다. 특히 숭례문 복구 완공 기념 행사장에 노란색 한복 차림으로 나타났던 박근혜 대통령의 당시 모습은 문화재계가 또 다른 박정희로 반길 만한 풍모를 지니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문화재계의 기대가 숭례문 부실 사업의 폭로와 그 여파인 수사 확대로 인해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73년 경주의 천마총 발굴 현장을 찾아 상황 보고를 받고 있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가운데, 주머니에 손 넣은 사람). 
ⓒ연합뉴스
1973년 경주의 천마총 발굴 현장을 찾아 상황 보고를 받고 있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가운데, 주머니에 손 넣은 사람).

‘박정희의 재림’을 기대했던 문화재계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실제로 문화재계를 원전 비리급 인사가 득실거리는 공간이라고 생각했을까? 이후 행보를 보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박 대통령은 한동안 문화재 쪽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년4개월여 만에 문화재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 지난해 9월 경주 월성 발굴지였다. 박 대통령의 행보가 그동안 원전 비리급 집단으로 비친 문화재계에 대한 사면복권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속내가 어떠하든, 박 대통령의 경주 월성 발굴 현장 방문 자체는 문화재계에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비로소 완연한 ‘박정희의 재림’으로 보이기도 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고고학 발굴 현장을 찾은 이는 오직 박정희 전 대통령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에 이어 두 번째였다. 더욱이 그 많은 발굴 현장 중에서도, 아버지가 생전에 그토록 지극정성을 기울였던 경주를 그 딸이 다시 밟은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경주 월성 조사는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의 세부 과제 중 하나다. 경주를 ‘역사문화 창조도시’로 조성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 박근혜 후보는 경주 현장에서 “전통문화 자원이 문화 융성을 견인하는 핵심 자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아무튼 박근혜 대통령의 방문은 ‘역사도시 경주’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움직임에 가속페달을 밟아준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문제가 노출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다만 독자들께, 대한민국 역사상 현직 대통령이 고고학 발굴 현장을 찾은 두 번째 사건이 지난해 9월 경주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그 두 대통령이 공교롭게도 부녀간이라는 것도 함께….

박근혜 대통령의 세 번째 문화재 현장 방문은, 올해 3월18일 현충사 참배였다. 아산 경찰대학에서 열린 경찰대학생·간부후보생 합동 임용식에 참석한 뒤, 청와대 참모진을 대동하고 이순신 장군 사당인 현충사를 참배했다. 방명록에는 “충무공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반도의 번영과 평화의 기틀을 만들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이 일을 두고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오늘 참배는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사이버 테러 등으로 안보 현실이 엄중한 상황에서 조국 수호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국민의 단합된 국가안보 의지를 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현충사가 어떤 곳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가를 위해 충(忠)하는 ‘국민’의 이상형으로 이순신을 발견해내면서 이곳을 추모 시설로 재단장했다. 이런 곳을 그의 딸이 찾았다. 대통령 박근혜에게 아버지 박정희의 짙은 그림자가 늘 따라다닌다는 지적을, 우리는 현충사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김태식

경북 김천 출신으로 연세대 영어영문학과를 나와 1993년 1월, <연합뉴스> 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디뎠다. 1998년부터 지난해까지 문화재 역사 전문기자로 일했다. <풍납토성>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직설 무령왕릉> 같은 단행본을 냈으며, 한국 고대사와 문화재 정책 관련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덕동댐은 1971년 박정희 정권이 입안하고, 이듬해 시행에 들어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일환으로 건설됐다. 경주를 古都 분위기에 어울리게 개발한다는 취지를 표방한 이 개발계획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됐으니, 하나가 경주 분지 일대에 산재하는 신라시대 유적 환경을 정비하는 ‘사적지구 정비계획’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을 관광과 연계한다는 취지에서 그것을 뒷받침하는 배후 시설인 ‘관광시설 계획’이 그것이니, 보문관광단지 개발은 두 번째 계획의 핵심이었다. 물론 이 두 계획을 위한 도로와 상하수도 정비 등 ‘관광환경 및 기반시설조성’ 계획도 다른 주축을 이룬다. 

 

덕동댐은 이 중에서도 보문관광단지 개발과 직접 연동한다. 1971년 건설부가 작성한 《경주관광개발종합계획》을 보면 먼저 관광시설 계획 투자 방향으로는 “첫째, 보문지(普門池) 일대를 국제적인 관광지로 조성하며, 둘째, 감포 유원지는 해병 사장(沙場)과 송림(松林)을 활용하여 해수욕장 및 청소년 하계운동지구로 조성하고, 셋째, 남산과 토함산에는 관광호텔과 유스호스텔을 제외한 그밖의 숙박시설이나 유원시설의 건설을 허용하지는 않되, 다만, 관광이나 등산에 편의를 제공하는 전망대나 휴게소 등의 간략한 시설만 허용한다”(동계획 84쪽) 것이었다.결과로 보면, 이 중에서도 보문관광단지에만 투자가 집중되고, 감포 유원지는 실상 백지화나 다름 없이 흐지부지하고 만다. 

 

보문관광단지는 애초 이 개발계획서에서는 이름이 ‘보문유원지’였으니, 그 골자를 보면 1962년 저수지로 조성된 면적 480천평 보문지 주변 일대를 관광시설로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00천평 규모의 종합관광센타를 위시하여 300천평 규모의 골프장, 100천평 규모의 어린이공원, 유스호스텔, 낚시터, 케불카, 전망대, 휴게서를 계획하는 동시에 유흥단지를 조성한다”는 것이었으며, 아울러 보문지를 준설해 그에서 나오는 토량으로 용지 75, 200평을 매립 조성하여 시설용지로 사용하기로 했다. 



보문지 동측에 위치할 종합관광센타에는 1,100실 규모의 관광호텔을 건설할 계획이며, 외국인 관광갱을 위한 쇼핑센타를 건설함으로써 관광수익 증대를 기획했다. 


한데 1971년 이 계획에는 덕동댐 건설계획이 보이지 않는다. 혹 내가 찾지 못했는지는 모르겠다. 사업을 추진하면서 그 필요성이 대두함에 따라 나중에 끼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이 사업에는 17개 기관이 참여하고, 발주한 공사는 170여 건이며 120여 개 건설회사가 참여한 대규모 개발사업이었다. 그 효율적인 추진을 위해 각 기관에서는 임시기구를 설립했으니, 사업을 총괄한 건설부가 1972년 1월 5일 경주개발건설사무소를 개설하고, 1973년 3월에는 문화공보부에서 사적관리사무소 개소했으며, 그 외에도 농업진흥공사에서는 경주사업소를, 국제관광공사(훗날 한국관광공사)에서는 경주관광개발공사를 설치했다. 

 

이 사업 종료 시점은 좀 묘하다. 1981년까지 추진할 계획이었지만, 1979년 6월 30일 건설부 경주개발건설사무소가 폐지된 시점을 종료 시점으로 봐얄 듯하다. 그 과정에서 사업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1978년까지 추진한 1단계 사업에는 760억 원을 토입해 13개 사적지구를 정비하고 도로 120킬로, 하천개수 38킬로미터를 건설했다. 이에는 199만명이 동원됐다. 



농업진흥공사가 이 사업에서 맡은 일은 덕동댐 건설과 경지정리였다. 덕동댐은 “농업용수와 관광이수(이수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음-인용자주) 개발을 위한 다목적 댐으로 축조되었다. 특히 덕동댐은 보문호의 수위 조절기능을 갖는 한편 경주시가지와 보문지구 및 불국사 지역에 하루 3만톤의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불국사 주변의 농경지 1,140ha 관개용수를 공급하게 되는 바, 여기까지에는 2,160m의 터널을 뚫어 용수를 공급함으로써 농가소득증대에도 기여”함을 표방했다. 


경주개발은 당시 경제 여건 상 국내 자체 추진이 불가능했다. 그에 따라 1974년 1월 4일 세계은행과 체결한 경주관광종합개발 차관 협정에 따라 외자를 도입한다. 협정 체결 당시 1달러당 환율은 483원이었다. 대통령 공고 제52호로 공포된 차관 협정에 의하면 차관 총액은 25.000천불이었고, 이를 5년 거치 20년 분할 상환한다는 조건이었다. 이자율은 연 7.25%였고, 상환 기간은 1981~2000년이었다.  


기관별 차관 배정액 중 농진공은 총사업비 4.830천원 중 2.650천원을 배정받았다. 그 구체적인 사업 내역을 보면 길이 169미터, 높이 50미터인 덕동댐 건설과 경지정리 330ha, 그리고  용지매입 기타였다. 다른 자료에 보면 농업진흥공사에 배당된 총사업비는 총 4.918.7백만원이라는 수치도 있는데, 그 차이가 왜 빚어지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덕동댐 건설에는 댐을 만들고, 주민들을 이주하며, 토지를 보상하는 일만 포함된 것이 아니었다. 그 주변을 우회하는 도로가 필요했다. 이 도로 건설은 건설부 몫으로 돌아갔다. 그에 따라 총 4.7킬로미터(4.8킬로라는 기록도 있다)에 이르는 덕동이설로 신설에는 총사업비 1.271천원 중 외자 차관 1.441천원이 배정됐다. 


한데 덕동댐 이설도로는 건설 이후 절개지가 무너지기도 했다. 그 비탈면 보수는 내무부 예산으로 집행하되 경주시 산림과에서 직영보수토록 했다. 이 지방 토질이 자갈과 모래가 섞인 특수토질이므로 사방공법으로 처리했다. 


덕동댐은 현대건설이 시공했으며, 이설도로는 삼부토건이 맡았다. 이설도로 건을 보면 총구간 4.8킬로미터에 폭은 12미터였고 투자액은 866.0천원이었고 이 중 순공사비가 745.0천원이고 74년 10월에 시작해 77년 9월에 완공했다.  


덕동댐은 75년 2월 3일에 시작해 77년 12월 28일에 완공했다. 


덕동댐 건설에 따른 그 수몰 예정지 '고선사지 발굴조사보고서'는 아래 원문을 제공한다. 


http://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jsessionid=jh0gFEa1DAjJmytyEcv0CVOh10Ayit014DipuYxgNWbBO2SUgEduUg2UbsRADaEj?nttId=18995&bbsId=BBSMSTR_1021&pageIndex=411&pageUnit=10&searchCnd=&searchWrd=&ctgryLrcls=&ctgryMdcls=&ctgrySmcls=&ntcStartDt=&ntcEndDt=&searchUseYn=&mn=NS_03_07_01


이 장소를 Daum지도에서 확인해보세요.
경상북도 경주시 보덕동 |
도움말 Daum 지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