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공주 단지리 횡혈식 석실묘 출토 백제토기류>


한국고고학이 지나치게 토기 중심이고, 나아가 그 토기를 포함한 각종 유물 유구에 대한 다대한 분류 중심주의거니와, 언뜻 세밀하게 보이는 이 과정에서 정작 고고학이 저버릴 수 없는 인간을 팽개치는 결과를 낳았거니와,  


그런 한국고고학이 신주단지 받들듯 하는 토기 분류에서 그 기종을 중심으로 나눌 적에 '개(蓋)'라는 항목으로 배열하는 것이 있으니, 이는 글자 그대로 그릇 뚜껑을 말한다. 한데 작금 한국고고학 토기 분류를 보면 이를 호(壺)니, 옹(甕)이니, 병(甁)이니, 완(碗)이니, 발(鉢)이니 해서 동등한 가치를 두어 병렬로 나누는 경우를 너무 자주 본다. 


하지만 개는 저들 토기의 부품이지 기종이 아니다.  따라서 이를 포함한 기종 분류는 분류학 근본조차 망각한 오류다. 같은 논리대로라면 받침인 대(臺)나, 귀퉁이 불룩 장식인 이(耳) 따위도 별도 분류항목으로 독립해야 한다. 


<풍납토성 미래마을지구 출토 백제토기류>


이런 지적에 동신대에서 고고학을 강의한 이정호 선생은 "당연히 뚜껑을 기종으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것으로 설명해야 할 뭔가 있기 때문에 별도로 취급하는 것 아닐까 하며, 나 역시 그런 식으로 변명하기도 한다"고 한다. 


혹자는 몸체와 분리된 가운데 저들 개가 별도로 출토되기도 하는 점을 들어, 기존 토기 분류체계를 옹호할지 모르나, 사람 팔뚝을 떼어내어 방망이로 썼다 해서, 그것을 온전한 인체 1개체로 인정할 수 없는 논리와 같다. 다시 말해, 뚜껑만 떼어내어 그것을 예컨대 김치를 담는 그릇으로 썼다 해도, 그것은 엄연히 애초에는 그릇 전체를 구성하는 일부분이었기에, 별도 분류 항목으로 독립하는 일은 절대로 불가하다. 


이거 나도 이곳저곳에서 여러 번 얘기했지만, 오늘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있다가 김태식의 압제를 견디지 못하고 전북대 교수로 탈출한 김낙중 선생이 이 문제를 오늘 다시 거론했으므로, 새삼 재방송에 가까운 이야기를 또 해 볼까 한다.

비단 김 교수만이 아니라 현직 대학 고고학 전공 교수 사이에서 팽배한 불만 중 하나가 왜 명색이 고고학과 혹은 관련 전공과인데도 대학에서 발굴을 못하게 하느냐라 할 수 있다.

이들이 대학 발굴을 하게 해달라고 하는 이유는 교육적 목적에 따른 것이다. 명색이 고고학 혹은 관련 전공이라 하는데 막상 이들이 발굴을 가르칠 현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작금 대학 고고학 실습은 문화재발굴전문조사기관들에 의지해야 하지만, 이들이 교육을 제대로 시킬 리는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볼멘소리, 나는 그것을 부당하다고 얘기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음을 우선 밝혀둔다. 그들의 요구 혹은 불만은 상당 부분 정당하다.

하지만 이들이 내세우는 교육 목적을 위한 발굴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선결해야 할 문제 또한 적지 않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첫째, 이들이 말하는 교육 목적 발굴은 엄격히 그 목적에만 부합해야만 한다.

이것이 어떤 식으로건 전제되지 않는 발굴은 현행과 같은 족쇄를 불러온 근본적인 대학 발굴의 문제점을 되풀이할 뿐이다.

대학이 종래와 같이 종국에는 돈벌이 수단으로 고고학 발굴에 나설 수는 없다. 작금과 같은 대학 발굴 족쇄를 불러온 원인은 다름 아닌 대학 발굴 자체의 문제점에 큰 원인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나는 본다.

둘째, 그것이 충족되려면 무엇보다 그 발굴은 구제발굴이 아닌 학술발굴이어야 하며, 그 기간은 한달 내외의 단기간 발굴이어야만 한다. 이를 뛰어넘은 그 어떤 대학 발굴도 교육 목적에서 벗어날 뿐이다. 

구제발굴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순 없다.

셋째, 그 기간 다른 수업과의 충돌 문제는 어찌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고고학 전공 학생이라 해서 고고학 수업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네들도 다른 교양 수업도 받아야 하며, 나아가 복수전공 혹은 개인의 관심사에 따른 다른 과 수강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교육 목적을 위한 발굴은 필연적으로 학기 중에 개설되어야만 하는데 이 기간 발굴 현장에 학생들이 투입함에 따른 다른 수업과의 상충은 어찌할 것인가가 해결되어야만 한다.

이를 피하고자 방학기간 발굴을 생각할 수가 있다. 하지만 학기중 발굴이건 방학기간 중 발굴이건 다음과 같은 네번째 문제를 초래한다.

그에 따른 발굴 조사 제반 경비는 누가 부담할 것인가가 문제로 대두한다.

합교육목적이라면 당연 빠따로 그 발굴 제반 경비는 당연히 해당 대학, 혹은 해당 학과가 자비 부담해야 한다. 이를 누구한테 떠넘기려 하는가? 물론 이를 위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기관에서의 기금 조성을 대안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섯째, 이런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수업 시간 외의 학생들 노력봉사 비용은 어찌 처리할 것인가도 생각해야 한다.

어찌할 것인가? 나는 당연히 학교측에서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본다.

나는 교육 목적을 앞세운 무료 봉사는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이는 내가 언뜻 생각한 문제들이거니와, 실제 이를 실행하는 단계에서는 적지 않은 문제점들을 더 초래케 할 것이 뻔하다.

이런 고민을 발판으로 하는 대학 교육 목적 발굴을 생각해 봤으면 한다.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이며 기사 입력시간은 2016년02월22일 14시15분이다. 


고려를 창건한 신라인 

 

 왕건은 고려 왕조를 개창한 까닭에 그 이름만 들으면 우리는 대뜸 ‘고려인’으로 단정하기 십상이지만, 실은 뼛속까지 신라인이다. 그가 태어나기는 당 희종(僖宗) 건부(乾符) 4년이니 이해는 신라 헌강왕(憲康王) 3년(877)이다. 청장년기를 신라에서 배반한 궁예에서 복무하기는 했지만, 그가 자발적 헌납이라는 형식으로 신라를 접수한 때가 59살 때인 935년이며, 그로부터 8년 뒤인 943년 향년 67세로 눈을 감는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왕건은 신라인이다. 이런 그가 고려라는 새로운 왕조 혹은 국가를 만들 때 그 절대적 토대는 신라의 그것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가 죽어 묻힌 곳을 현릉(顯陵)이라 하거니와, 이에는 그의 무수한 부인 중에서도 조강지처는 오직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 한 명뿐이니 같이 묻힌 여인은 오직 이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왕건이 복지겸, 신숭겸, 홍유 등과 더불어 쿠데타로 궁예 정권을 타도하고자 도모할 적에 그 반란 모의를 몰래 듣고는 장막을 걷어차고 나타나 남편한테 갑옷을 입혀 주었다는 그 여인이다. 유씨가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왕건보다 먼저 떠나 다른 어딘가에 묻혀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왕건이 세상을 떠나면서 내린 유언에 따라 유씨를 합장했다 하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가 묻힌 현릉이 정식 발굴조사나 도굴 등을 통해 타율적으로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으므로, 그 내부 구조를 우리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무덤이 석실분(石室墳)임을 안다. 더 정확히는 석실로 통하는 무덤길을 별도로 마련한 소위 횡혈식(橫穴式) 석실분임을 안다. 


 그것은 첫째, 그가 9~10세기를 살다간 신라인이기 때문이요 둘째, 그 무덤이 부부 합장릉이며 셋째, 이후 유사시에 툭하면 무덤 문을 따고는 그 재궁(梓宮)을 걷어냈기 때문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무덤은 석실분밖에 없다. 


 아직도 한국고고학계에는 밑도 끝도 없는 신화가 횡행하니, 무덤은 보수성이 강해서 잘 바뀌지 않는다는 말도 개중 하나다. 쉽게 말해 무덤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덤처럼 유행에 민감한 것도 없다. 말한다. 무덤은 유행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팽팽 옷을 잘도 갈아입어 그 형식은 순식간에 변모한다. 무덤이라고 유행을 싫어할 줄 아는가?


 우리에게 익숙한 석실분은 엄밀히는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라고 해야 한다. 석실분이라는 말은 무덤 주인공을 매장하는 무덤방 내부 구조가 돌로 만들어 쌓아올린 점만을 드러낸 것으로써, 이런 석실 위로는 흙으로 덮어 대체로 둥근 봉분을 만들기 마련이다. 나아가 그 전면에는 비교적 넓은 평탄 대지를 만들어 왕릉의 경우 이곳에다가 정자각이며 하는 각종 제향 관련 시설들을 만든다.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을 무슨 고대 일본의 전매특허처럼 선전하지만, 동아시아 고대 무덤은 거의가 실은 전방후원분이다. 현릉 역시 이에서 크게 어긋남이 없다. 

2018/01/18 - [기고문/기타] -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1편 묻힌 다음날 털린 원 제국 공주의 무덤

2018/01/18 - [기고문/기타] -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2편 왕건, 날아라 슈퍼보드 툭하면 문을 따는 왕릉 도굴에 응전하는 사람들

2018/01/18 - [기고문/기타] -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2편 왕건, 날아라 슈퍼보드 툭하면 문을 따는 왕릉 도굴에 응전하는 사람들

2018/01/18 - [기고문/기타] -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2편 왕건, 날아라 슈퍼보드 툭하면 문을 따는 왕릉 도굴에 응전하는 사람들

2018/01/18 - [기고문/기타] -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2편 왕건, 날아라 슈퍼보드 툭하면 문을 따는 왕릉 도굴에 응전하는 사람들


  지금은 굳게 닫힌 현릉은 안쪽으로 통하는 무덤길을 어디에다가 마련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내가 현장을 둘러본다면 낌새를 채지 않을까 하는 느낌도 있지만, 자신은 없다. 하지만 무덤길은 틀림없이 석실 남쪽에다가 마련했을 것이다. 다만 정남방인지 혹은 한쪽으로 비켜난 남쪽인지는 알 수가 없다. 현재 그 앞에 혼유석이 놓인 점으로 보아 여타 이 무렵 석실분 발굴 사례를 견주어 볼 때 동쪽으로 치우친 지점에다가 마련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상상해 본다. 여담이지만 이런 궁금증이 결국은 멀쩡한 무덤을 무수하게 파헤치지는 데 이르렀다. 고고학 발굴조사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왕건릉 구조가 어떠했을지 그것을 직접 들여다볼 수 없는 지금 그것을 짐작하기 위해서는 동시대 왕릉급 신라 무덤을 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 근자에 이런 발굴조사가 몇 군데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먼저 경주 남산 능선이 동쪽으로 흘러내린 한지봉 구릉 말단부에 소재한 헌강왕릉이 있다. 이곳이 헌강왕릉이라 알려졌지만 정말로 그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떻든 왕릉이 아니라 해도 그에 준하는 신라 말기 무덤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1993년 8월 초순 집중호우에 봉분 일부가 붕괴하면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이미 무덤은 무참한 도굴 피해를 여러 차례 본 것으로 드러났다. 그에 따라 돌로 만든 시신 발 받침대와 베개 그리고 금판과 금실 조각 말고는 내부에서는 이렇다 할 유물을 건지지는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무덤 구조는 확실히 들여다보게 되었으니, 역시나 석실분으로 드러났다. 봉분은 밑지름 기준으로 15.6m이니 그다지 규모가 크지는 않다. 석실은 남북 길이 2.9m, 동서 너비 2.9m이니 정방형에 가까우며 그 바닥에는 관을 놓는 시설인 시상(尸床)은 화강암 판석 2매로 만들었다. 이 무덤방으로 통하는 무덤길은 역시 남쪽이지만, 동쪽으로 치우친 지점에서 발견됐다. 아마도 합장분이었을 것이다. 


경주 천북 신당리 신라고분경주 천북 신당리 신라고분


경주 천북 신당리 신라고분경주 천북 신당리 신라고분


 또 다른 신라 시대 왕릉급 석실분으로는 계림문화재연구원이 2013년 공장 부지에 포함된 경주시 천북면 신당리 산7번지 일대에서 확인한 무덤이 있다. 원형 봉토 안에 석실을 마련한 이 고분은 봉분 바깥에다가 3단 석축으로 호석(護石)을 쌓아 돌리고, 일정한 구간마다 받침돌을 세웠다. 무덤 주인공을 매장한 석실은 봉토 중앙에서 발견됐다. 호석 기준으로 고분은 지름 14.7m이며, 둘레는 현재 4분의 1 정도가 유실되고 35.5m가량 남았지만 원래는 46.3m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라 받침돌은 원래 정확히 몇 개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현재 남은 상태를 감안할 때 모두 24개를 안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극심한 도굴 피해를 보아 출토 유물은 거의 없다. 호석에서 120㎝ 떨어진 남동쪽 지점에서는 돌로 만든 상석(동서 216㎝, 남북 133㎝)의 바닥 흔적도 완연히 드러났다. 이 고분은 8세기 무렵 축조했다고 추정됐다. 


경주 소현리 신라고분 발굴전경경주 소현리 신라고분 발굴전경 (사진제공=한울문화재연구원)


 이런 통일신라 시대 석실분이 2013년에 들어 울산-포항 복선 전철 구간에 포함된 경북 경주시 현곡면 소현리 야산에서도 발견됐다. 한울문화재연구원 조사 결과 호석 기준 동-서 11m, 남-북 11.2m 규모의 원형 봉분을 갖춘 이 무덤에서는 봉분 주위를 따라 12개 띠 동물을 넣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묘역(墓域)을 갖추었으며, 암반을 굴착해 대규모 배수로까지 완비한 것으로 드러났다. 호석은 정교하게 6단 이상을 축조했으며, 그 바깥으로 따라가며 일정한 간격으로 덧댄 돌인 지대석은 24개 받쳤지만 일부는 훼손되고 17개가 확인됐다. 12지 동물 조각은 방위별로 지대석 2칸마다 1개씩 배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주 소현리 신라고분 추정 토끼상경주 소현리 신라고분 추정 토끼상 (사진제공=한울문화재연구원)


 일부는 결실돼 말을 비롯한 7개 동물 조각이 드러났다. 남쪽에 마련한 무덤으로 통하는 길인 묘도(墓道) 입구에는 호석에 잇댄 상태로 만든 제단 흔적도 드러났다. 시신은 봉분 중앙쯤에 마련한 석실에다가 안치했다. 이곳에서는 대퇴골로 추정되는 인골까지 발견됐다. 내부에서는 극심한 도굴로 다른 출토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들 신라 시대 왕릉급 무덤이 바로 왕건 시대에는 해당한다고 볼 수는 없어 곧바로 이를 기준으로 왕건릉 구조를 대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왕건이 신라인이요, 고려 건국 초기에는 대부분 신라의 유산을 계승했으며, 여타 기록으로 보아 이와 비슷한 석실분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나아가 이런 석실분이었기에 처음 무덤을 만들어 무덤 문을 봉한 다음에도 수시로 열었던 것이며, 이런 편리성에서 주로 부부 합장에 사용됐다. 그에 더해 현릉의 경우 전란이나 반란과 같은 일단 유사시에 관을 통째로 꺼내어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살아있는 신 


 그렇다면 왜 역대 왕 중에서 고려 사람들은 유독 왕건에 그리 집착했을까? 더러 왕건의 아버지로서 나중에 고려 건국 뒤에는 세조(世祖)라는 묘호(廟號)를 받은 왕륭(王隆) 역시 같은 대접을 받기도 했지만, 왕건의 그것에 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순히 고려 태조이기에? 이렇게 만은 설명하기 힘든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왕건은 결코 죽을 수도 없고, 죽어서도 아니 되는 생신(生神)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귀신이 아니었다. 죽어서도 의지가 있고, 그런 까닭에 무엇인가 결단이 필요한 시점에는 후세들에게 그 방향을 점지하는 막강의 신이었다.


 역대 왕의 신주를 봉안하는 제사 시설을 종묘(宗廟) 혹은 태묘(太廟)라 한다. 한데 이 종묘 시스템은 역대 왕조가 조금씩은 달라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왕조는 어쩌면 가장 무식한 방법을 썼다. 태조 이성계 이래 역대의 왕들과 그 왕비에다가 각각 신실(神室) 하나씩을 주게 되니 무한정 폭이 늘어나는 기현상을 빚게 된다. 지금의 종묘 정전은 동서 폭이 120m에 달하게 된 이유는 조선왕조가 500년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종묘에 천자는 7묘(廟), 제후는 5묘라 해서 종묘에는 최대 7명까지만 신주를 모셨다. 신라가 신문왕 시대에 중국식 종묘 제도를 처음 도입하고는 오묘제를 도입한 이유가 당의 제후국으로 자처했기 때문이었다. 고려 왕조 역시 제6대 성종 시대에 종묘를 처음으로 만들면서 5묘제를 도입했다. 한데 실제 종묘 각 실(室)을 어떻게 꾸몄으며, 어떻게 안치했는지는 500년 장구한 왕조 역사만큼이나 변화가 무쌍해 나로서는 도대체 그 변화상을 종잡기가 힘들다. 종묘에 신주가 들었다가 나중에는 들어내기도 하는 등의 변화가 많다. 내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을 살피니 신주가 종묘에 들었다가 나중에는 산릉(山陵)으로 옮겨가는 일도 있는가 하면, 정전에는 들지 못한 왕들의 신주를 위한 별묘(別廟)도 있었던 듯하다. 조선 시대 종묘에 정전과 더불어 이런 왕들을 위한 신주 안치 공간인 영녕전이 따로 있듯이 말이다. 시대별로 넘다듦이 이렇게 변화무쌍하지만 단 한 사람만큼은 변동이 있을 수 없다. 조선 시대 가묘(家廟) 관점에서 보면 불천위(不遷位)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그가 바로 태조 왕건이다.


 앞선 글에서 말했듯이 왕건에 대한 추숭 작업은 누층적이었다. 종묘에다 모시고, 산릉인 현릉에다가도 모시며, 궁궐 안에는 그를 비롯한 역대 왕들의 어진각인 경령전(景靈殿)이 있었는가 하면, 그만을 위한 어진각인 효사관(孝思觀)도 있었다. 나아가 주요 사찰과 서경을 비롯한 주요 거점 도시마다 어진각을 별도로 세워 때마다 제사를 지냈다. 또한 이상하게도 왕건의 조각을 만들어 마치 부처님처럼 봉향하기도 했다. 이는 역대 왕 중에서도 태조가 차지하는 위치가 난공불락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 면모들을 편년체 고려사인 《고려사절요》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숙종 7년(1102) 12월에는 동전을 주조 유통케 하고는 그 사유를 태묘와 여덟 개 역대 왕릉에 고했다. 이어 예종(睿宗) 재위 2년(1107) 겨울 10월에는 북방의 골칫거리로 등장한 여진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태묘에 물어 결정한다. 좋게 달랠 것인가 아니면 군사를 동원해 토벌할 것인가를 두고 난상토론이 벌어진 것이다. 양쪽 의견이 하도 팽팽히 갈리니 왕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이럴 때 묘약은 역시나 태조 왕건이었다. 이 대목을 “왕이 망설이며 결정을 짓지 못하고는 최홍사에게 명하여 태묘에서 점치게 하였더니, 감(坎)이 기제(旣濟)로 변하는 괘를 얻자 드디어 출병하기로 의논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 점괘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나, 이 자리에서는 태묘에서 점을 친 결과 출병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만을 기억하기로 한다. 이에 의해 그 유명한 윤관과 오연총에 의한 여진 정벌이 있게 되고 그 결과 이른바 윤관 9성을 쌓게 된다. 태조가 중앙에 정좌한 태묘는 이처럼 죽어도 결코 죽지 않은 결단의 신이었다. 


 인종 4년(1126)에는 거란을 대신하고 북방의 패자로 등장한 여진족의 금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섬길 것인지 가부를 태묘에서 점을 쳐서 결정했다. 이어 고종 8년(1221), 점점 군사적 압박을 높이며 조여 오는 몽고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몰라 문하시중 이항(李抗)과 사천감(司天監) 박강재(朴剛材)를 태묘에서 점치게 했으며, 몽고의 군사적 압박이 극에 다다른 같은 왕 41년(1254) 겨울 10월에는 재신들을 보내 태묘에 빌며 “큰 재앙이 거듭 이르렀습니다”라고 고하면서 선령들이 하늘의 위엄을 내려주시어 “오랑캐 군사가 스스로 무너져 섣달이 되기 전에 돌아가고, 백성의 힘은 여유가 있어 봄이 되면 농사지어 안도하기를 전과 같이 하여 배부르게 먹고 모두 화평토록”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했다. 


 공민왕 2년(1360) 가을 7월에는 왕이 임진현 북쪽 5리 지점 백악(白岳)에 거둥해 이곳이 도읍을 옮길 만한 곳인가를 알아보았다. 이보다 앞서 공민왕은 지금의 서울인 남경(南京)으로 천도하려고 대대적인 공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에 따른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게 일자 할 수 없이 태묘에 사람을 보내 점을 친 결과 불길하다는 점괘를 얻어 남경을 포기했다. 그 대타로 고른 곳이 백악이었으니, 그런 까닭에 이곳을 신경(新京)이라 불렀다고 한다. 백악 천도 계획도 결국 무산되었지만, 도읍 옮기는 일에도 왕건을 포함하는 조상신들이 관여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핀 일화가 왕건이 다른 후대왕들과 더불어서 함께 결정한 사안이라면, 이제는 그 혼자서 내린 사안들을 본다.  


 공민왕은 재위 6년(1357) 봄 정월에 봉은사(奉恩寺)로 거둥해 그곳에 마련된 태조 진전을 배알하고는 한양 천도가 옳은 일인지 친히 점을 친다. 그 결과 안 된다는 ‘정(靜)’이라는 글자를 얻자, 다시 이제현한테 점을 치게 한 결과 천도해도 좋다는 ‘동(動)’ 자를 얻어 천도를 단행한다. 공민왕이 이미 남경 천도를 결정한 상태에서 점괘가 처음에는 안 된다고 나오자 당혹했을 것이다. 


 우왕 시대인 신우(辛禑) 원년(1375) 여름 4월에는 당시 실권자 이인임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태조 어진 봉안처인 효사관에 나아가 태조의 혼령한테 맹세하기를 “본국의 무뢰배들이 심왕(瀋王)의 손자를 끼고 북쪽 변방에 와서 왕위를 엿보니, 우리 동맹하는 신하들은 힘을 다하여 막아서 새 임금을 돕고 받들겠나이다. 이 맹세에 변함이 있으면, 천지와 종묘 사직이 반드시 은밀한 주벌을 내릴 것입니다”라고 한 일도 있다. 심왕은 원나라가 임명한 제후왕 중 하나로서 언제가 그 혈통은 고려왕의 잠재적 경쟁자였다.  


 이성계가 옹립한 공양왕은 즉위 원년(1389) 12월 계해일에 효사관에 나아가서 신돈의 아들들이라고 매도되어 쫓겨난 우왕과 창왕을 죽인 일을 태조 어진을 바라보며 고하기도 했다. 


 이는 왕건이 고려왕조가 계속하는 한 그 왕국과 후손 왕들을 보호하는 살아있는 신이었음을 보이는 증거들이다. 그런 까닭에 비단 신주와 어진뿐만 아니라 아예 그 생전 모습을 본뜬 동상을 만들어 봉향하기도 했다. 



송충이를 잡는 고려 태조 


 이런 전통은 종교로 보면 도교의 색채가 무척이나 짙다. 동상을 만들어 추숭하는 일로 보면 불교의 전통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죽어서도 죽지 않은 사람, 생전에 무수한 공덕을 쌓고는 죽어서도 천상의 절대 신이 되어 누군가를 보호하는 존재는 신선(神仙)에 다름 아니다. 실제 도교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무수한 신을 만들어냈다. 생전에도 신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드높았던 역대 제왕 중에서도 진 시황제와 한 무제 같은 이는 위진남북조 시대 도교에서는 천상을 지배하는 중요 신선들이기도 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왕건 역시 천상의 신이 되어 고려라는 왕국을 보호하는 후견인 노릇을 한 것이다. 


 이런 면모가 도교와 밀접하다는 점은 우선 왕건이 팔관회 개최와 구요당(九曜堂)이라든가 신중원(神衆院)과 같은 각종 도교 사원 창건으로 대표하듯이 도교에 심취했던 데다가, 그의 어진을 모신 궁궐 전각을 효사관(孝思觀)이라 했으니, 이는 효사관을 도교의 사원인 도관(道觀)으로 인식했다는 단적인 증거다. 


 이런 점에서 특이한 사건이 창궐하는 송충이 퇴치에도 왕건이 동원된다는 점이다. 《고려사절요》 숙종 7년(1102)조를 보면 이해 5월에 송충이가 무성하게 출현하자 왕이 금중(禁中), 곧 궁중에서 뭇 신하를 거느리고 상제에게 친히 초제(醮祭)를 올리는데 태조를 배향하고 사흘 밤 만에 파했다고 한다. 초제란 밤에 지내는 별 제사의 일종으로 도교를 대표하는 종교 행사다. 한데 이런 도교 행사에 태조를 초대해서 그 위신을 빌려 송충이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왕건이 도교의 신격으로 숭배받았다는 내 지적은 이래서 단적으로 증명된다. 


 송충이 얘기 나온 김에 그래서 어찌 되었을까? 왕건까지 동원했지만 송충이 퇴치는 실패한 듯, 그 다음달에는 재상에게 명해 5방(五方)의 산신과 해신에게 세 곳으로 나누어 제사 지내어 송충이 없어지기를 빌면서 죄수들을 사면했는가 하면, 그래도 여의치 못했던 듯 이번에는 군졸 5백 명을 풀어 송악산의 송충이를 잡도록 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박정희 시대에 송충이 잡으러 나간 어린 시절 기억이 새록새록 하기만 하다. 



<참고문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헌강왕릉보수수습조사보고서》, 1995



김태식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 

+ Recent post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