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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전경과 홍련봉 제1, 2보루..왼편이 2보루.



2013년 12월 서울 광진구 보도자료 


고구려 성곽축조 기술의 결정체를 확인

- 12.3. 오후 3, 홍련봉 제12보루 발굴 조사 2차 현장설명회 -

 

광진구청(구청장 김기동)이 발주하여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한국고고환경연구소(소장 이홍종)에서 발굴조사를 진행 중인 사적 제455호 아차산 일대 보루군(홍련봉 제12보루) 2발굴조사 현장설명회를 123() 오후 3시 조사 현장에서 개최한다.


<홍련봉 2보루 전경>


홍련봉 제1보루와 제2보루는 2004년과 2005년도에 각각 내부 건물지를 중심으로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으나 추가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복토 후 임시보호 중이었다. 20127월 광진구청에서 문화재 복원정비를 위한 자료 확보를 위하여 발굴조사를 의뢰하였고, 201341차 조사가 마무리되어 홍련봉 제1보루와 제2보루에서는 고구려의 성곽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흔적들이 확인되었다


<홍련봉 2보루 외황 및 부교시설>


1차 조사에서는 홍련봉 제1보루 성벽을 전면 노출 조사하였으며, 홍련봉 제2보루는 2005년도에 조사된 내부 건물지를 제외한 전체 내부 건물지와 성벽 및 주변지역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결과 2보루는 북서쪽 일부 지점을 제외한 성벽 외곽으로 폭 1.5~2m의 외황(外湟:마른해자)이 설치되었는데, 국내 고구려 성곽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보루 내부는 북쪽과 남쪽으로 구분되며, 남쪽은 석축으로 둘러싸여 있는 특이한 구조임이 확인되었다. 이에 문화재 자문위원회의를 거쳐 추가 발굴이 결정되었고, 2차 조사에서는 내부시설에 대한 추가조사, 외황의 전체적인 구조파악, 지난 2005년 발굴했던 북쪽 평탄지의 추가 조사가 실시되었다


<홍련봉 2보루 남동편 외황 토층>


조사결과 외황은 북서쪽 일부구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구간에서 확인되었으며, 규모는 전체길이 204m 1.52m, 깊이 0.62.5m이다. 단면형태는 ‘U’자형과 ‘V’자형에 가까우며,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생토면을 굴광하여 내외벽을 이루고, 동쪽과 서쪽의 경우 내벽은 석축성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벽의 높이는 2.43.5m(1725)을 이루고 있다. 외벽은 일부 배수로가 설치된 구간을 석축으로 쌓거나 따로 배수시설은 연결하여 배수하였다.


<홍련봉 2보루 북서편 배수시설>


북쪽 평탄지에 대한 추가조사 에서는 2기의 석곽 저수시설이 확인되었는데 생토면을 굴광하여 점토를 바른 뒤 석축으로 벽면 축조하였다. 1호 석곽 저수시설의 경우 바닥면 목재를 깔았던 흔적이 확인되었고, 2m 가량의 대형 고구려 철제 깃대가 처음으로 출토되었다. 이들은 다른 토광형 저수시설과는 달리 저장시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또한 2005년 조사된 소성유구의 하층에서 온돌시설 3기가 확인되었는데, 온돌시설 폐기 후 사질토를 정지하여 소성시설 조성한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보루 내부에서 성벽 외부로 이어진 완벽한 배수시설 구조를 확인하였다.

 

<홍련봉 2보루 1호 석곽저장시설>


또한 1보루와 2보루 사이 시굴구간을 일부 제토하여 조사한 결과, 구릉의 경사면을 자로 굴광한 후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축 시설이 확인되었다. 대부분 유실되어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으나 1보루와 2보루를 연결하는 형태를 띄고 있으며, 이는 보루 사이 도로 시설로 추정된다


<홍련봉 2보루 석곽저장시설>


출토된 유물은 기존의 홍련봉 보루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각종 고구려 토기류가 주를 이루며, 대도, 철촉, 삽날 등의 철기류 등도 다양하게 확인되었다


<홍련봉 2보루 1호 석곽저장시설 내부 철제 깃대 출토 장면>


지난 2005년 홍련봉 제2보루 발굴조사에서 서기 520년에 해당되는경자(庚子)명문 토기가 출토되어 홍련봉 보루가 6세기 전반에 사용된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또한 홍련봉 제1보루에서는 아차산 일대 보루군 중 유일하게 와당과 기와가 출토되어 조사단에서는 이 보루에 중요인물이 기거하였던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홍련봉 2보루 1호 석곽저장시설 출토 철제 깃대>


이번 조사에서는 지난 20127월부터 20134월까지 이어진 1차 조사에서 확인된 홍련봉 보루의 성곽구조와 외곽 구조를 더욱 자세히 밝혀 아차산 일대 보루 중 유일하게 성곽의 전체모습을 노출 조사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번 발굴조사 결과는 향후 6세기 전반 고구려 군의 조직과 운영 및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관련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전체적인 규모와, 성격, 구조 등을 파악하여 문화재 복원 정비에 좋은 기초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홍련봉 1,2보루 연결도로>


현장설명회에 관한자세한내용은광진구청(윤성호 학예연구사 02-450-7593), 한국고고환경연구소(이정범 연구원 010-xxxx-xxxx)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2013년 4월 19일 서울 광진구 보도자료


고구려의 새로운 성곽 구조 확인!

아차산 홍련봉 제1,2보루 발굴조사 설명회


- 광진구, 오는 23일 오후 2시 아차산 홍련봉 발굴현장서 홍련봉 1,2보루 발굴조사 현장설명회실시

- 기존에 확인되지 않은 새로운 고구려의 성곽 구조가 확인되는 등 향후 6세기 전반 고구려 군의

조직과 운영 및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관련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



<홍련봉 1, 2보루...사진 왼편이 2보루> 


과거 삼국시대의 전략 요충지이며 고구려의 군사기지였던 서울 광진구 아차산 남쪽 기슭의 홍련봉 1·2보루(소규모 부대의 주둔위한 작은 규모의 성곽) 발굴조사 결과 새로운 고구려의 성곽 구조가 확인됐다고 광진구가 19일 밝혔다.

 

<아차산과 홍령봉 1,2보루..왼편이 2보루>


광진구(구청장 김기동)오는 23일 오후 2시 사적 제455호 아차산 일대 보루군(홍련봉 제1·2보루) 발굴조사 현장에서홍련봉 제1·2보루 발굴조사 현장설명회를 개최한다.

 

<홍련봉 1보루>


홍련봉 제1보루와 제2보루는 지난 2004년과 2005년도에 각각 내부 건물지를 중심으로 부분적인 발굴조사를 진행했으나 추가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복토한 후 임시보호 중이었다. 이에 광진구는 문화재 복원정비를 위한 자료 확보를 위해 지난해 7월부터 추가 조사를 발주했다.

 

<홍련봉 1보루>


이번 발굴조사는 국·시비를 포함해 총 69천여만원이 투입됐으며, 지난해 7월부터 이달까지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한국고고환경연구소(소장 이홍종)에서 성벽 내·외부 및 홍련봉 1·2보루 사이 진입로 등 총 12,830의 면적을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고구려의 성곽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흔적들이 확인됐다.

 

<홍련봉 1보루 목책렬>


이날 현장설명회는 그동안 홍련봉 제1·2보루의 발굴조사 성과에 대한 전문가 학술 자문 결과를 브리핑하고 향후 발굴 방향에 대한 논의와 함께 일반인에게도 현장을 공개할 예정이다.

 

<홍련봉 1보루 치>


홍련봉 제1보루의 성벽 전체에 대한 노출조사 결과 성벽 둘레는 140m, 잔존 높이는 최대 1.8m로 성벽 기저면은 사질토, 점질토 등을 정지한 후 두 겹으로 축조한 것으로 확인됐다. 안쪽 성벽에서는 주동(柱棟)이 일부 확인됐고, 성벽이 유실된 구간에서는 방어시설의 하나인 목책열과 통일신라시대 석곽묘 2기도 확인돼 성벽 붕괴 시점이 고구려 후퇴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임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성벽 축조방식과 관련된 많은 자료가 발견됐다.

 

<홍련봉 2보루 전경>


홍련봉 제2보루는 지난 2005년도에 조사된 곳을 제외한 전체 내부 건물지와 성벽 및 주변지역에 대한 조사로 진행됐다. 성벽은 치를 제외한 둘레가 총 204m, 잔존 높이는 최대 2.5m, 성벽 주변 시설로는 총 7개의 치가 확인되었으며, 곡부 구간의 경우 성벽 외곽으로 3~5m 지점에 1열의 성벽을 추가로 축조한 구조가 확인됐다특히 북서쪽 일부 지점을 제외한 성벽 외곽으로 폭 1.5~2m, 길이 204m 의 해자(성곽이나 고분의 둘레를 감싼 도랑)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국내 고구려 성곽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홍련봉 2보루>

 

내부시설로는 건물지가 5기 확인되었는데, 온돌시설과 함께 단야시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지도 함께 확인됐다. 이와 함께 가마유구 1, 저수시설 2, 집수정 1, 기타 석축시설 3기와 계단시설 3, 배수시설 2기 등과, 기존 홍련봉 보루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각종 고구려 토기류와 대도, 철촉, 삽날 등의 철기류 등도 출토됐다.

 

<홍련봉 2보루>


이번 조사 결과 두 보루의 성곽구조가 자세히 밝혀졌으며, 특히 홍련봉 제2보루에서는 기존에 확인되지 않은 새로운 고구려의 성곽 구조가 확인됐다. 2보루 남쪽구역의 석축시설 내부에서 조사된 토기 가마는 고구려유적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이와 함께 단야시설도 조사되었으며, 금속제품을 만드는 일련의 작업공정에 사용되는 연장인 철제 집게 등 각종 단야구도 출토됐다.

 

<홍련봉 2보루 집수지>


()한국고고환경연구소 관계자는홍련봉 제1보루는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 중 가장 위계가 높으며, 2보루는 무기와 군수물자의 생산과 보급을 담당하던 시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이번 발굴조사 결과는 향후 6세기 전반 고구려 군의 조직과 운영 및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관련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홍련봉 2보루 집수지와 건물지>


한편 홍련봉은 아차산 줄기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독립 구릉으로 서기 500년경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구려 군사시설로써 한강 이남과 중량천변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홍련봉 제1보루는 남쪽 봉우리에 전체둘레 120m 남북최장 46m 동서 37m, 홍련봉 제2보루는 북쪽 봉우리에 둘레 179m, 넓이 458평의 소규모 석성으로 축조돼 있으며 서로 150m 가량 떨어져있다.

 

<홍련봉 2보루 출수구出水口>


지난 2005년에 실시한 홍련봉 제2보루 발굴조사에서 서기 520년에 해당되는경자(庚子)명 토기가 출토되어 홍련봉 보루가 6세기 전반에 사용된 것으로 밝혀진 바 있으며, 홍련봉 제1보루에서는 아차산 일대 보루 중 유일하게 기와와 연화문 와당이 출토되어 이 보루에 중요인물이 기거하였던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홍련봉 2보루 내부 건물지>


김기동 광진구청장은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한 고구려 역사왜곡에 대응하기 위해 고구려 역사 유적을 체계적으로 정비·보존하고, 문화재 훼손을 막는 등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우리구는 아차산 일대 홍련봉 보루를 새롭게 복원·정비하여 소중한 문화유산을 잘 관리하고 풍부한 역사문화 관광자원으로 적극 활용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홍련봉 2보루 내부 건물지와 생산시설(가마 등)>


[참고자료]

 

홍련봉 12보루 발굴조사용역 중간 보고

 

용역개요

명 칭 : 홍련봉 제12보루 발굴조사 용역

면 적 : 12,830

- 발굴조사 : 10,738(성벽 외부 10m, 성벽 및 내부)

- 시굴조사 : 2,092(홍련봉 12보루 사이 진입로)

용역기간 : 2012. 7. 10 ~ 2013. 4.30 (실조사일수 180)

소요예산 : 696,390천원

발굴기관 : ()한국고고환경연구소

 

추진실적 :

‘12.7.12~7.31 : 유적지 입구 및 등산로 정비

‘12.7.12~ 8.4 : 홍련봉 12보루 진입로 시굴조사(2,092)

- 조사 결과 성격 미상 석렬 1단 확인

- 복토 후 야적장 및 탐방로 활용 예정

‘12.7.12~현재 : 홍련봉 1보루 발굴조사

- 성벽 외부 10m지점 벌목 및 제초작업 완료

- 성벽 발굴조사 완료, 실측 작업 진행 중

‘12.8. 6~현재 : 홍련봉 2보루 발굴조사

- 임시복토 토사 제거 및 성벽 외부 10m지점 벌목작업 완료

- 성벽 내부 건물지 조사 중, 실측 작업 진행 중

 

향후일정 :

‘13. 4.23 : 자문회의 및 현장설명회

‘13. 4.30 : 발굴조사 준공

‘13.5월중 : 최종보고회(광진구청)

2005.03.31 08:32:57


<기자수첩> '동맥경화' 걸린 고구려(2005.3.30)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요즘 고구려가 짜증난다. 더 엄밀히 말해 그 연구가 짜증난다. 


    중국이 동북지방 경제개발을 위해 추진하는 소위 '동북공정'에 고구려를 자국사로 편입시키려는 노골적 의도가 개입돼 있다 해서 국내에서는 이에  분개한  반(反)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잇따랐고 현재도 나오고 있다.


    가장 대표적 성과물이 지난해 3월에 출범한 고구려연구재단 결성이다. 이 거창한 기구 출범만이 아니라 그에 즈음해, 또 '동북공정'이 국내에서 이슈화하고 난 지난 약 2년 동안 ‘고구려 구출’을 표방한 각종 행사가 봇물을 방불할 만큼 이어지고 있다.


    그에 동반해 고구려 관련 출판물도 눈에 띄게 늘었다. 한국역사상 이와 같은 ‘고구려 붐’은 보기 힘들었다. 조선후기 이른바 실학자들이 고구려를 외쳤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고구려 호황'은 없었다.


    문제는 양이 아니라 질이다. 지난 2년 동안 쏟아져 나온 고구려 관련 연구성과는 한 마디로 잘라 말해 '재방송'에 지나지 않는다. 어림잡아 90% 이상이 흘러간 옛 노래를 마치 같은 음반을 계속 틀어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늘 그 소리가 그 소리다. 고구려는 북방을 호령하고 중국에 대항하며, 때로는 중국을 위협까지 한 ‘강성대국’이었다는 주장도 새로울 게 없고,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느니,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으므로 발해사는 한국사 영역에 속한다느니 하는 말도 이젠 귀가 아플 지경이다. 


    동북공정에 대항하겠다며 고구려연구재단을 비롯한 각종 기관이라든가 단체에서 발주한 '고구려 프로젝트'들도 제목만 뜯어보아도 "또 그 소린가?"라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바야흐로 고구려는 '동맥경화' 상태다. 그럼에도 중국에게서 고구려를 구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말한다. 고구려 연구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연구가 부족한 것인가, 아니면 그 질이 부족한 것인가? 둘 다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더욱 문제가 심각한 것은 후자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고구려 동맥경화'가 일어나는가? 무엇보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 혹은 십수 년 동안 같은 목소리를 내는 연구자들이 연구를 독점하고 있고, 그들이 흐름을 여전히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석ㆍ박사 논문에서 맴도는 그들이 과연 고구려 구출을 논할 자격이 있는가?


    탈진 상태의 고구려는 그래서 슬프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王莽의 新 왕조가 참살했다는 고구려 초기 왕이다.  이런 내용은 『漢書』 王莽傳에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다만 이곳에서는 추(騶)로 표기했다. 표제는 『三國志』에 등장한다. 두 글자는 모양이 비슷한 데서 따라 혼동이 일어난 듯하다. 두 표기 중 전자가 오래된 문헌이라 해서 이쪽을 따르는 견해가 우세하나, 이는 위험하다. 전대 기록을 후대 기록에서 바로잡는 일은 흔한 데다, 후자가 참고한 전자 판본에는 그렇게 되어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쪽이 옳은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三國志 권30 魏書 30 東夷傳 高句麗 : 王莽 初에 고구려 군사를 징발하여 胡(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고구려가 胡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국경을 넘은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遼西 大伊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살해되었다. 州ㆍ郡ㆍ縣이 그 책임을 구려후(句麗侯) 추(騊)에게 전가시키었다. 엄우(嚴尤)는 “貊人이 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騊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지금 잘못하여 큰 罪를 씌우게 되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王莽은 그 말을 듣지 않고 尤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명하였다. 尤는 [高]句麗侯 騊를 만나자고 유인하여 그가 도착하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長安에 보내었다. 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天下에 포고하여 高句麗란 國號를 바꾸어 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이 때에 侯國이 되었는데, 漢 光武帝 8년(32. 高句麗 大武神王 15)에 高句麗王이 사신을 보내어 朝貢하면서 비로소 王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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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절 탐하는 개로왕에게 월경 핑계 대고 도망쳐

[중앙선데이] 입력 2017.06.04 01:44 수정 2017.06.04 16:23 | 534호 23면

  

서기 475년. 이 해는 백제 제21대 개로왕(蓋然性鹵王) 재위 21년째요, 고구려는 100세 장수를 누린 장수왕 재위 63년째가 되는 해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장수왕본기를 보면 “(가을 9월에) 왕이 군사 3만을 이끌고 백제를 들이쳐 그 왕이 도읍한 한성(漢城)을 함몰하고 백제왕 부여경(扶餘慶)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포로로 삼아 돌아왔다”고 돼 있다. 백제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까닭에 왕족은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 부여경이란 개로왕의 이름이다. 500년 사직이 거의 문을 닫을 위기에 놓인 백제는 신라의 도움을 얻어 허겁지겁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의 충남 공주 부근 웅진에 터를 새로 잡았다.


개로왕, 남편에게 누명 씌워 추방

도미 부인 불러 욕보이려던 순간

“온 몸 더러우니 다른 날 …” 모면

남편과 극적 상봉, 고구려로 도망


많은 죽음이 그렇듯이 한성백제의 최후 또한 비참하기만 했다. 『삼국사기』 백제 개로왕본기에 그 처참한 광경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이를 보면, 고구려군이 한성을 네 갈래로 나누어 포위하자 개로왕은 성문을 걸어 잠근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기병 수십 명만 데리고 성문을 탈출해 도망가다가 사로잡혀 결국 지금의 서울 광진구 아차산 아래에서 참수되고 말았다.


개로왕, 고구려군에 잡혀 참수

그런데 백제를 누란의 위기로 빠뜨린 적국 고구려군 수뇌부에는 뜻밖에도 백제에서 도망친 두 사람이 있었다. 고구려군에 사로잡힌 개로왕은 참수 직전 이들에게서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겪는다. 그것을 개로왕본기는 이렇게 적었다.


“이때 고구려의 대로(對盧·제1등 관직)인 제우(齊于)와 재증걸루(再曾桀婁)·고이만년(古尒萬年)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왕도 한성의) 북쪽 성을 공격해 7일 만에 함락시키고, 군사를 옮겨 남쪽 성을 공격하자 성안이 위기와 공포에 빠지니 임금이 탈출해 달아났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임금을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는 임금 얼굴에다가 세 번 침을 뱉고는 죄를 헤아린 다음 묶어서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한 자들이다.”


개로왕에게 치욕을 가한 재증과 고이는 복성(複姓, 2음절 이상으로 된 성씨)이다. 『삼국사기』에는 이들이 본래 백제에서 어떤 죄를 지어 고구려로 도망쳐야 했는지 언급이 없다. 한데 그렇게 도망쳐 고구려 침략군 앞잡이가 되어 돌아온 그들이 개로왕을 사로잡은 뒤 침을 뱉고 어떤 죄를 지었는지 따졌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로서는 백제에서 대단히 억울한 일을, 그것도 개로왕에게서 직접 당한 게 아닌가 하는 심증을 깊게 한다. 얼마나 원한이 사무쳤으면 한때의 주군을 그리 대했겠는가.


같은 개로왕 시대, 재증·고이와 비슷한 운명을 걸어온 부부가 또 있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고구려로 도망친 일은 같으나, 이들은 복수는커녕 비참한 최후를 맞은 점이 다르다. 『삼국사기』에 열전 형태로 그 행적이 정리된 그 유명한 도미(都彌) 부부가 그들이다. 이 열전은 도미라는 남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주인공은 그 부인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도미는 개로왕 시대를 산 평범한 백성이다. 그러나 그에겐 매우 아름답고 지조가 있는 아내가 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미모가 그만 비극의 씨앗이되고 말았다. 소문이 퍼져 나가 마침내 왕이 아내를 탐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사실 개로왕은 단순히 도미 부인의 아름다움을 탐한데 그치지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에게는 특유의 ‘여성 정절 파괴 본능’ 같은게 있었던 것 같다. 왕은 도미부인에 앞서 도미를 먼저 불러 이렇게 말한다. “흔히 부인의 덕은 정결을 으뜸으로 친다지만 으슥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달콤한 말로 유혹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여자는 드물다”고 말이다. 제아무리 정절을 외치지만 유혹에 넘어오지 않는 여자는 없다는 뜻이다. 더구나 왕이 부르는데 정절을 바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느냐는 투였다. 개로왕은 그 정절을 거꾸러뜨리고 싶은 심리가 발동했던 것이다.


이런 개로왕이지만 막상 쉽사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안달이 난 그는 남편인 도미에게 죄를 덮어씌워 두 눈을 뽑아 버리고는 강배에 실어 강제 추방해 버렸다. 그러고는 기어이 부인을 불러다가 강제로 욕보이려 했다. 그러나 지혜로웠던 도미 부인은 이 위기에서 빠져나온다. 도미 열전에 따르면 도미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남편을 잃어 혼자는 부지할 수 없는데다 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제가 월경으로 온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을 기다려 깨끗이 몸을 씻고 오겠습니다.”


이 말을 곧이 믿은 왕은 그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도미 부인은 그 길로 배를 타고 강물로 탈출해 천성도(泉城島)라는 섬에 이르러 풀뿌리를 캐 먹으며 연명하다가 장님이 된 남편과 극적으로 재상봉했다고 한다. 이후 부부는 배를 타고 고구려 땅 산산(䔉山)이라는 곳으로 가서 그곳에서 구차하게 살다가 생을 마친 것으로 열전은 전하고 있다. 비장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엔 월경 중인 여성의 몸은 더럽다고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온몸이 더럽다’에 해당하는 『삼국사기』 원문을 보면 ‘혼신오예(渾身汚穢)’다. 오예란 간단히 말해 오물(汚物)이다.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소설 중에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이 있는데, 예덕 선생이란 수도 한양에서 인분을 푸는 일로 살아가는 사람을 극화한 표현이다. ‘예덕’은 글자 그대로는 ‘똥의 덕’이다.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떠오른다. 첫째, 월경을 지금 흔히 쓰는 용어 그대로 ‘월경(月經)’이라 했다. 둘째, 그러한 월경이 혼신오예라 해서 더러운 일로 인식됐다는 사실이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조선시대에 편찬된 문헌들에도 그대로 전재됐지만 용어에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은 저 도미 열전을 그대로 베끼면서도 ‘월경’ 대신에 ‘월사(月事)’라는 말을 썼다. 이러한 용어 변경이 시대별 단순한 선호도 때문인지, 혹은 ‘월경’에 비해 ‘월사’라는 말이 덜 직설적이었다고 생각했음인지는 언뜻 판단이 서지 않는다.


또한 월경 중인 몸은 더러우며, 그런 까닭에 그런 여자는 남자를 모시지 못한다는 스토리는 고대 일본 정사인 『일본서기』에도 보인다. 이곳 제7권 경행천황(景行天皇) 4년 봄 2월 갑자일(甲子日) 조에는 미농(美農)이라는 곳으로 행차한 천황이 이곳에 근거지를 두었다고 추측되는 팔판입언(八坂入彦)이라는 황자(皇子)의 첫째 딸인 팔판입원(八坂入媛)을 만나 비로 삼게 된 사연이 흥미롭게 소개돼 있다. 이에 의하면 천황은 입원(入媛)의 동생인 제원(弟媛)을 먼저 만나 추파를 던졌다. 하지만 장막까지 불러들이는 데 성공한 제원은 막상 다음과 같은 말로 천황의 수청 요구를 거부한다.


“첩은 성격이 교접(交接)의 도를 바라지 않으니, 지금은 황명(皇命)의 위엄에 못 이겨 잠시 장막 안으로 들었습니다만, 마음이 내키지 않고 모습 또한 더럽고 누추해 오래도록 후궁에서 모실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지만 첩의 언니 팔판입원은 얼굴이 아름답고 마음이 정결하니, 후궁에 넣게 해 주십시오.”


『일본서기』 형자예루도 월경의 은유


이에 마침내 그 언니가 천황비가 되었다고 한다. 모습이 추하고 더럽다는 말에 해당하는 『일본서기』 원문을 보면 ‘형자예루(形姿穢陋)’다. ‘형자’란 몰골이란 뜻인데 그것이 예루하다 했으니, 도미 열전에서 본 ‘오예(汚穢)’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다시 말해 ‘형자예루’라는 말은 ‘월경 중’이라는 은유적 표현인 것이다.


이와 유사한 스토리는 ‘추적, 한국사 그 순간’ 의 제1편 ‘김춘추와 문희의 혼인’(2016년 6월 26일자)편에서 다룬 바 있다. 김유신이 처음에는 큰누이 보희를 김춘추와 짝지어 주려 했으나 그가 월경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급히 작은누이 문희를 대타로 삼았다는 내용이었고, 이 대타 작전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다.


김춘추의 배필이 될 뻔한, 나아가 왕비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한꺼번에 날린 보희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를 짐작케하는 흥미로운 대목이 『화랑세기』 18세 풍월주 춘추공 전에 보인다.


“(춘추와 문희가) 포사(鮑祀·포석정)에서 길례(吉禮·결혼식)를 치렀다. 얼마 안 있어 (김춘추 조강지처인) 보량궁주(寶良宮主)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문희가 뒤를 이어 정궁(正宮)이 되었다. 이에 이르러 화군(花君·풍월주 부인)이 되어 아들(법민)을 낳았다. 보희는 꿈을 바꾼 일을 후회해서 다른 사람에게는 시집가지 않았다. (춘추)공이 이에 (보희를) 첩으로 삼아 아들 지원(知元)과 개지문(皆知文)을 낳았다. 이 이야기는 『문명황후사기(文明皇后私記)』에 나온다.”



김태식 소백산맥 기슭 산골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영문학과에 들어가 한때는 영문학도를 꿈꾸다 가난을 핑계로 접었다. 23년간 기자로 일했는데, 특히 역사와 문화재 분야에서 한때 ‘최고의 기자’로 불리며 맘껏 붓끝을 휘두르기도 했다. 무령왕릉 발굴 비화를 파헤친 『직설 무령왕릉』을 비롯해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풍납토성』 등의 단행본을 냈다.

기사) 시신 도굴 미천왕, 그 영광과 비극


고조가 아니라 증조다 기사 내용 수정 바람 미천왕은 광개토대왕의 증조부임 미천왕의 아들이 고국원왕이고 고국원왕의 둘째아들이 광개토대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이다 고조는 개뿔 고조는 미천왕의 아버지인 돌고가 고조임 수정 바람” 

이 지적이 맞다. 아래 계보에서 보듯이 광개토왕에게 미천왕은 증조다. 고조라는 내 기사는 오류다. 
  
미천왕 –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 광개토왕 – 장수왕 




시신 도굴 미천왕그 영광과 비극
(서울=연합뉴스김태식기자 최근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부친 묘 도굴사건은 지금으로부터 꼭 1657년 전인 고구려 고국원왕 12즉 서기로는 342년 2(양력으로는 3)에 일어난 고구려 미천왕 시신 도굴사건과 흡사 닮아있다.
  
우리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산 인물 중 한명인 고구려 15대 미천왕(美川王재위 서기 300~330)은 제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재위 331~370)의 부친이면서 정복군주로 이름 높은 광개토왕(재위 391~412)에게는 고조할아버지가 된다.(注-붉은고딕 글씨 부분을 증조로 수정해야 한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권력투쟁에서 밀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소금장수 생활로 연명한 그지만 폭군 봉상왕(烽上王)을 몰아낸 쿠데타 세력에 의해 일단 왕위에 옹립되고 나서는 광개토왕 못지않은 눈부신 정복활동을 펼치게 된다.
  
한나라 때부터 설치된 현도군을 침입해 8천 명을 생포해 평양으로 옮겼고 요동군의 서안평을 습격해 취했으며 313년에는 4백여 년간이나 계속된 중국의 낙랑군을 드디어 멸망시키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재위시절에는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복군주였다는 광개토왕이나 신라 진흥왕 못지않은 영광된 삶을 살았지만 죽고 난 뒤에는 이만저만한 모욕을 당한 게 아니었다.
  
그의 시신은 미천원(美川原)이란 언덕에 모셔졌다생전 이름이 을블(乙弗) 혹은 우불(優彿)이었던 그가 미천왕이라는 시호(죽은 뒤의 이름)를 얻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인 고국원왕 재위 12(서기 342) 2월 북방유목민족 선비족이 건국한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愰)은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서울인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미천왕릉을 도굴해 그 시신을 꺼내 왕모(王母)를 포함한 고구려 남녀 포로 5만여 명과 함께 끌고 돌아갔다.
  
치욕을 당한 고구려는 미천왕 시신과 왕모를 돌려받기 위해 전연에 구걸 외교를 펴는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2월 고국원왕은 친동생을 보내 모용왕 앞에서 보물 수천 점을 바치면서 스스로 ()’이라 낮추는 치욕을 감수하고 나서야 겨우 미천왕 시신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모용왕은 여전히 왕모즉 미천왕의 왕비이면서 고국원왕의 어머니는 13년 동안이나 인질로 붙잡아두고 있다가 고국원왕 재위 25년째에야 돌려보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무덤을 도굴해 시신 일부를 베어간 뒤 돈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번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부친 묘 도굴사건이 미천왕 도굴 사건과 흡사 닮아있다는 것은 두 사건 모두 아무 말이 없는 시신을 볼모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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