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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1권에 이르기를 

유의손(柳義孫) 선생, 권채(權採) 선생, 문희공(文僖公) 신석조(辛碩祖)와 남수문(南秀文) 선생 등이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그 문장이 다 같이 일세에 유명하였는데, 남(南) 선생을 더욱 세상에서 중하게 추대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초고는 대부분 남선생 손에서 나왔다. 제공(諸公)들이 모두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조선왕조가 개창한 직후 고려사 편찬 작업에 착수했으니,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그 성과라, 다만 절요라는 이름으로 전자가 후자의 절록이라 생각하기 쉽고, 실제 그런 측면이 있기는 하나, 세밀히 살피면 둘은 별도 별개 사서임을 보여주는 대목이 적지 않거니와, 그 이유를 편찬진이 다른 점도 심각히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이 증언은 《고려사》 찬수에 직접 관여하거나, 혹은 그것을 직접 보았을 가능성이 큰 인물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주시해야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제공하는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그의 항목에 의하면 남수문은 1408년(태종 8)에 나서 1442년(세종 24)에 사망했으니, 요절에 가깝다. 본관이 고성固城인 그는 字를 경질(景質), 경소(景素)  혹은 경재(敬齋)라 했으며, 집현전 부수찬, 집현전 응교, 집현전 직제학을 역임했다 했으니, 주로 문한文翰에 종사했음을 알 수 있겠다. 

할아버지는 공안부윤(恭安府尹) 남기(南奇)이며, 아버지는 병조참판 남금(南琴), 어머니는 부령(副令) 이춘명(李春明)의 딸이다. 1426년(세종 8)에 정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고, 1436년 중시 문과에 장원해 문명을 널리 떨쳤다. 문과에 급제한 해에 집현전의 정자(正字)가 되었다.

권채(權採)·신석조(辛碩祖) 등과 함께 사가독서하라는 명을 받고 학문에 정진했다. 1433년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으로서 김말(金末)과 함께 세종의 여러 대군에게 글을 가르쳤다. 1435년 간행한 『통감훈의(通鑑訓義)』 편찬에도 참여해 윤회(尹淮)·권채·정인지(鄭麟趾) 등과 『통감(通鑑)』을 주해하기도 했다. 

1436년 문과 중시에 장원한 직후 집현전 응교를 제수받았다. 1437년 집현전에서 편찬한 『장감박의(將鑑博義)』의 발문을 썼고, 이듬해한유(韓愈)의 문장에 대한 주석서의 발문도 썼다. 그 뒤 예문관 응교·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을 거쳐, 1442년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 지제교로 있을 때 왕명을 받아 많은 글을 지었으나 대다수의 글은 흩어져 없어짐으로써 전하지 않는다.

다만, 1442년흥천사(興天寺)를 짓고 경찬회(慶讚會)를 베풀 때 지은 설선문(說禪文) 등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전하고, 전(箋)·기·묘지 몇 편이 『동문선(東文選)』에 전할 뿐이다.

줄곧 집현전과 예문관 등의 문원(文苑)을 떠나지 않고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 윤회·권채·신석조 등과 시문을 겨루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남수문의 문장이 제일이라고 추앙했다. 술을 즐겨 도가 지나칠 때가 많았는데, 세종은 재주를 아껴 술을 석잔 이상 마시지 못하도록 경계했다는 일화가 있다. 저서로는 『경재유고(敬齋遺稿)』가 있다.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기사입력 시간은 016년03월02일 14시00분이다. 


이 《독사일기》 맨 처음에 나는 원나라 공주 눌륜의 무덤이 도굴된 일을 다루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때가 충숙왕(忠肅王) 재위 16년(1329) 여름 4월이다. 한데 이보다 한 달 전에는 금마군(金馬郡) 호강왕(虎康王) 무덤 도굴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고려사절요》  충숙왕 해당 년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3월에 도적이 금마군에 있는 마한(馬韓) 조상 호강왕의 능을 도굴했다. (도둑을) 붙잡아 전법사(典法司)에 구금했지만 달아났다. 정승 정방길(鄭方吉)이 전법관(典法官)을 탄핵하고자 했지만 찬성사 임중연(林仲沇)이 저지하면서 말하기를 “도적이 옥에 갇힌 지 2년이 되었지만 드러난 장물(贓物)이 없는데도 죽은 자가 많습니다”고 했다. 정방길이 말하기를 “(내가) 본래 무덤 판 놈들에게 금붙이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니 임중연이 부끄러워하면서도 성을 냈다.  


이를 세심히 훑어보면 뭔가 이상한 대목이 있음을 직감한다. 왕릉을 도굴한 일과 체포한 일 그리고 도굴범의 탈주에 대한 조정의 논의가 마치 한 시점에 일어난 것처럼 되어 있지만, 도무지 이런 일련의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고는 볼 수 없다. 더구나 탈주 사건 처리를 두고 두 관리가 다투는 와중에서 나온 말을 보건대, 도굴 사건 범인으로 체포된 자들이 무려 2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문맥으로 보건대 도굴범(들)은 확정 판결을 받고 소위 기결수로서 수감 생활을 한 지 2년 만에 쇼생크 탈출을 감행한 셈이다. 따라서 앞 기록만으로는 호강왕릉 도굴 사건 발생 시점이 3월인지, 아니면 탈주 사건이 3월인지 판가름하기가 심히 곤란하다. 다만, 전후 맥락으로 보아 발생이 이해 3월인데, 관련 기록을 한 군데에다가 몰아넣다 보니 조금은 복잡하게 정리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무강왕릉으로 알려진 익산 쌍릉 중 대왕묘무강왕릉으로 알려진 익산 쌍릉 중 대왕묘 (사진제공=차순철)


앞에 등장하는 전법사는 글자 그대로는 법을 관장하는 관청이라는 뜻이니 요즘으로 치면 경찰서나 감옥 정도로 보아 대과가 없다. 전법관은 그것을 담당하는 관리를 말하니 경찰관이나 교도관 중에서도 총책임자에 해당한다. 나아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많이 죽었다는 자가 도굴 공범들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에 간접으로 연루된 이들을 말하는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아무래도 공범들을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호강왕릉 도굴은 단독범 소행이 아니라 대규모 도굴단이 저지른 셈이 된다. 


한데 탈주 사건을 두고 정승 정방길과 찬성사 임중연이 치고받는 대목이 영 수상쩍은 느낌을 준다. 이에 따르면 전법관 처벌을 주장하는 정방길은 도망친 도굴범들이 진범임을 확신하면서 그 증거로 그들이 금붙이를 많이 갖고 있음을 들었다. 그 반면 임중연은 그들이 도굴범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맞선다. 2년 동안 수감해 놓고 족쳤지만, 그들이 훔쳐냈다는 장물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 탈주 사건은 묻어두자고 한 것이다. 이로 볼 때 이 도굴 사건 배후에는 임중연 혹은 그가 뒤를 봐주어야 하는 모종의 인물이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정방길이 묻어두자는 임중연을 호되게 몰아붙인 이유는 이 사건 배후에 다름 아닌 임중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이 사건도 그렇고,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눌륜공주 무덤 도굴 사건 역시 발생 시점이 고려가 원나라의 직접 지배나 다름없는 피식민 상태였고, 그에 따른 각종 중앙 정부 권력이 한창 이완된 시기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이 무렵 민생은 파탄 날 대로 난 상태였다. 그러니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주림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살 길을 찾아 도굴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이 기전체 사서인 《고려사》 중에서는 연대별 사건 일지로서 그 자체만 보면 《고려사절요》와 같은 편년체인 세가(世家)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앞에 나온 정방길의 행적을 정리한 그의 열전에서 이 사건이 보인다. 이에 따르면 정방길은 과거에 급제하고는 여러 벼슬을 거쳐 판전교사(判典校事)가 되었으며, 지금의 국립대 총장에 해당하는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옮겼다가 밀직사(密直司)로 들어갔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당하자 한종유(韓宗愈) 등과 함께 백관(百官)을 민천사(旻天寺)라는 사찰에다가 모아놓고는 원나라 황실에 글을 올려 왕을 환국시켜 달라 요청하는 한편 고려를 무고한 자들을 체포해 압송해 달라고 요청한 일도 있다. 


이 뒤에 이어지는 대목이다. 


그 뒤에 정방길은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때 금마군에 있는 마한의 조상 무강왕(武康王)의 묘를 도굴하다가 잡혀 전법사에 수감되어 있던 도적들이 탈옥하는 일이 벌어졌다. 정방길이 전법관을 탄핵하려 하니, 찬성사 임중연이 저지하면서 말하기를 “도적들을 2년이나 억류했지만 장물이 드러나지 않았고 죽은 자도 많다”고 했다. 정방길이 말하기를 “도굴범들이 금붙이를 많이 지니고 있음을 내가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또 말하기를 “거제(巨濟)의 전조(田租. 토지에 물린 세금)를 남몰래 쓴 자가 도대체 누구인가?”라고 하면서 임중연을 향해 여러 차례 모욕을 주니 임중연이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병이 있다고 하면서 사직해버리니 사람들은 정방길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당시 정방길의 나이가 일흔여섯이라 왕이 지팡이를 내려주고 김태현(金台鉉) 대신에 권행성사(權行省事)로 삼았다. 


이를 보면 확실히 《고려사절요》 관련 기록에 문제가 있음을 직감한다. 나아가 임준연이 이 탈주 사건의 실질적 배후임을 이제는 여실히 알 수 있다. 임준연이 도굴범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지만, 앞선 정방길 바로 뒤에 붙은 그의 열전을 보면 아무래도 이들에게서 뇌물을 받은 듯하다. 


임중연은 일찍이 의랑(議郞) 조광한(曹光漢), 응교(應敎) 한종유(韓宗愈)와 함께 인사 행정[銓注]에 참여했다.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으며, 장백상(蔣伯祥)과 함께 섭정동성사(攝征東省事)를 지내기도 했다. 충숙왕이 임중연을 꾸짖기를 “그대가 나의 정사를 어지럽게 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임권(林權)이라 지목한다”고 했는데, 정권(鄭權)이라는 자도 일찍이 인사 행정을 맡아 뇌물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왕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충숙왕이 말한 임권이란 바로 임중연과 정권이다. 나는 정방길의 논박을 볼 적에 아무래도 호강왕릉 도굴단도 임중연이 조직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나 확실한 점은 도굴단을 탈주케 한 배후는 임중연이라는 사실이다. 


이때 도굴된 무덤을 《고려사》는 무강왕릉(武康王陵)이라 하고, 《고려사절요》 에서는 호강왕릉(虎康王陵)이라 하지만, 같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는 무강왕릉이지만 왕건의 아들로 고려 2대 왕인 혜종은 이름이 무(武)인 까닭에 그 이름을 함부로 쓰지 못해 호강왕릉이라 했을 뿐이다. 이를 피휘(避諱)라 한다. 두 역사서는 모두 조선 초기에 나온 까닭에 ‘武’라는 글자를 ‘虎’자로 바꾸어 쓸 필요가 없었지만, 이를 알아챈 《고려사》는 본래 글자로 돌린 반면, 《고려사절요》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후자의 편찬진이 조금은 더 게으른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무강왕릉이 무엇이며, 그에 얽힌 더 많은 이야기는 다음 호를 기약하기로 한다. 참, 앞에서 나온 그 무덤 소재지 '금마'란 현재도 지명이 남았거니와 전북 익산시를 금마면 일대를 말한다.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이며 기사 입력시간은 2016년02월22일 14시15분이다. 


고려를 창건한 신라인 

 

 왕건은 고려 왕조를 개창한 까닭에 그 이름만 들으면 우리는 대뜸 ‘고려인’으로 단정하기 십상이지만, 실은 뼛속까지 신라인이다. 그가 태어나기는 당 희종(僖宗) 건부(乾符) 4년이니 이해는 신라 헌강왕(憲康王) 3년(877)이다. 청장년기를 신라에서 배반한 궁예에서 복무하기는 했지만, 그가 자발적 헌납이라는 형식으로 신라를 접수한 때가 59살 때인 935년이며, 그로부터 8년 뒤인 943년 향년 67세로 눈을 감는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왕건은 신라인이다. 이런 그가 고려라는 새로운 왕조 혹은 국가를 만들 때 그 절대적 토대는 신라의 그것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가 죽어 묻힌 곳을 현릉(顯陵)이라 하거니와, 이에는 그의 무수한 부인 중에서도 조강지처는 오직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 한 명뿐이니 같이 묻힌 여인은 오직 이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왕건이 복지겸, 신숭겸, 홍유 등과 더불어 쿠데타로 궁예 정권을 타도하고자 도모할 적에 그 반란 모의를 몰래 듣고는 장막을 걷어차고 나타나 남편한테 갑옷을 입혀 주었다는 그 여인이다. 유씨가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왕건보다 먼저 떠나 다른 어딘가에 묻혀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왕건이 세상을 떠나면서 내린 유언에 따라 유씨를 합장했다 하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가 묻힌 현릉이 정식 발굴조사나 도굴 등을 통해 타율적으로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으므로, 그 내부 구조를 우리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무덤이 석실분(石室墳)임을 안다. 더 정확히는 석실로 통하는 무덤길을 별도로 마련한 소위 횡혈식(橫穴式) 석실분임을 안다. 


 그것은 첫째, 그가 9~10세기를 살다간 신라인이기 때문이요 둘째, 그 무덤이 부부 합장릉이며 셋째, 이후 유사시에 툭하면 무덤 문을 따고는 그 재궁(梓宮)을 걷어냈기 때문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무덤은 석실분밖에 없다. 


 아직도 한국고고학계에는 밑도 끝도 없는 신화가 횡행하니, 무덤은 보수성이 강해서 잘 바뀌지 않는다는 말도 개중 하나다. 쉽게 말해 무덤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덤처럼 유행에 민감한 것도 없다. 말한다. 무덤은 유행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팽팽 옷을 잘도 갈아입어 그 형식은 순식간에 변모한다. 무덤이라고 유행을 싫어할 줄 아는가?


 우리에게 익숙한 석실분은 엄밀히는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라고 해야 한다. 석실분이라는 말은 무덤 주인공을 매장하는 무덤방 내부 구조가 돌로 만들어 쌓아올린 점만을 드러낸 것으로써, 이런 석실 위로는 흙으로 덮어 대체로 둥근 봉분을 만들기 마련이다. 나아가 그 전면에는 비교적 넓은 평탄 대지를 만들어 왕릉의 경우 이곳에다가 정자각이며 하는 각종 제향 관련 시설들을 만든다.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을 무슨 고대 일본의 전매특허처럼 선전하지만, 동아시아 고대 무덤은 거의가 실은 전방후원분이다. 현릉 역시 이에서 크게 어긋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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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굳게 닫힌 현릉은 안쪽으로 통하는 무덤길을 어디에다가 마련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내가 현장을 둘러본다면 낌새를 채지 않을까 하는 느낌도 있지만, 자신은 없다. 하지만 무덤길은 틀림없이 석실 남쪽에다가 마련했을 것이다. 다만 정남방인지 혹은 한쪽으로 비켜난 남쪽인지는 알 수가 없다. 현재 그 앞에 혼유석이 놓인 점으로 보아 여타 이 무렵 석실분 발굴 사례를 견주어 볼 때 동쪽으로 치우친 지점에다가 마련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상상해 본다. 여담이지만 이런 궁금증이 결국은 멀쩡한 무덤을 무수하게 파헤치지는 데 이르렀다. 고고학 발굴조사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왕건릉 구조가 어떠했을지 그것을 직접 들여다볼 수 없는 지금 그것을 짐작하기 위해서는 동시대 왕릉급 신라 무덤을 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 근자에 이런 발굴조사가 몇 군데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먼저 경주 남산 능선이 동쪽으로 흘러내린 한지봉 구릉 말단부에 소재한 헌강왕릉이 있다. 이곳이 헌강왕릉이라 알려졌지만 정말로 그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떻든 왕릉이 아니라 해도 그에 준하는 신라 말기 무덤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1993년 8월 초순 집중호우에 봉분 일부가 붕괴하면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이미 무덤은 무참한 도굴 피해를 여러 차례 본 것으로 드러났다. 그에 따라 돌로 만든 시신 발 받침대와 베개 그리고 금판과 금실 조각 말고는 내부에서는 이렇다 할 유물을 건지지는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무덤 구조는 확실히 들여다보게 되었으니, 역시나 석실분으로 드러났다. 봉분은 밑지름 기준으로 15.6m이니 그다지 규모가 크지는 않다. 석실은 남북 길이 2.9m, 동서 너비 2.9m이니 정방형에 가까우며 그 바닥에는 관을 놓는 시설인 시상(尸床)은 화강암 판석 2매로 만들었다. 이 무덤방으로 통하는 무덤길은 역시 남쪽이지만, 동쪽으로 치우친 지점에서 발견됐다. 아마도 합장분이었을 것이다. 


경주 천북 신당리 신라고분경주 천북 신당리 신라고분


경주 천북 신당리 신라고분경주 천북 신당리 신라고분


 또 다른 신라 시대 왕릉급 석실분으로는 계림문화재연구원이 2013년 공장 부지에 포함된 경주시 천북면 신당리 산7번지 일대에서 확인한 무덤이 있다. 원형 봉토 안에 석실을 마련한 이 고분은 봉분 바깥에다가 3단 석축으로 호석(護石)을 쌓아 돌리고, 일정한 구간마다 받침돌을 세웠다. 무덤 주인공을 매장한 석실은 봉토 중앙에서 발견됐다. 호석 기준으로 고분은 지름 14.7m이며, 둘레는 현재 4분의 1 정도가 유실되고 35.5m가량 남았지만 원래는 46.3m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라 받침돌은 원래 정확히 몇 개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현재 남은 상태를 감안할 때 모두 24개를 안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극심한 도굴 피해를 보아 출토 유물은 거의 없다. 호석에서 120㎝ 떨어진 남동쪽 지점에서는 돌로 만든 상석(동서 216㎝, 남북 133㎝)의 바닥 흔적도 완연히 드러났다. 이 고분은 8세기 무렵 축조했다고 추정됐다. 


경주 소현리 신라고분 발굴전경경주 소현리 신라고분 발굴전경 (사진제공=한울문화재연구원)


 이런 통일신라 시대 석실분이 2013년에 들어 울산-포항 복선 전철 구간에 포함된 경북 경주시 현곡면 소현리 야산에서도 발견됐다. 한울문화재연구원 조사 결과 호석 기준 동-서 11m, 남-북 11.2m 규모의 원형 봉분을 갖춘 이 무덤에서는 봉분 주위를 따라 12개 띠 동물을 넣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묘역(墓域)을 갖추었으며, 암반을 굴착해 대규모 배수로까지 완비한 것으로 드러났다. 호석은 정교하게 6단 이상을 축조했으며, 그 바깥으로 따라가며 일정한 간격으로 덧댄 돌인 지대석은 24개 받쳤지만 일부는 훼손되고 17개가 확인됐다. 12지 동물 조각은 방위별로 지대석 2칸마다 1개씩 배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주 소현리 신라고분 추정 토끼상경주 소현리 신라고분 추정 토끼상 (사진제공=한울문화재연구원)


 일부는 결실돼 말을 비롯한 7개 동물 조각이 드러났다. 남쪽에 마련한 무덤으로 통하는 길인 묘도(墓道) 입구에는 호석에 잇댄 상태로 만든 제단 흔적도 드러났다. 시신은 봉분 중앙쯤에 마련한 석실에다가 안치했다. 이곳에서는 대퇴골로 추정되는 인골까지 발견됐다. 내부에서는 극심한 도굴로 다른 출토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들 신라 시대 왕릉급 무덤이 바로 왕건 시대에는 해당한다고 볼 수는 없어 곧바로 이를 기준으로 왕건릉 구조를 대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왕건이 신라인이요, 고려 건국 초기에는 대부분 신라의 유산을 계승했으며, 여타 기록으로 보아 이와 비슷한 석실분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나아가 이런 석실분이었기에 처음 무덤을 만들어 무덤 문을 봉한 다음에도 수시로 열었던 것이며, 이런 편리성에서 주로 부부 합장에 사용됐다. 그에 더해 현릉의 경우 전란이나 반란과 같은 일단 유사시에 관을 통째로 꺼내어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살아있는 신 


 그렇다면 왜 역대 왕 중에서 고려 사람들은 유독 왕건에 그리 집착했을까? 더러 왕건의 아버지로서 나중에 고려 건국 뒤에는 세조(世祖)라는 묘호(廟號)를 받은 왕륭(王隆) 역시 같은 대접을 받기도 했지만, 왕건의 그것에 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순히 고려 태조이기에? 이렇게 만은 설명하기 힘든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왕건은 결코 죽을 수도 없고, 죽어서도 아니 되는 생신(生神)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귀신이 아니었다. 죽어서도 의지가 있고, 그런 까닭에 무엇인가 결단이 필요한 시점에는 후세들에게 그 방향을 점지하는 막강의 신이었다.


 역대 왕의 신주를 봉안하는 제사 시설을 종묘(宗廟) 혹은 태묘(太廟)라 한다. 한데 이 종묘 시스템은 역대 왕조가 조금씩은 달라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왕조는 어쩌면 가장 무식한 방법을 썼다. 태조 이성계 이래 역대의 왕들과 그 왕비에다가 각각 신실(神室) 하나씩을 주게 되니 무한정 폭이 늘어나는 기현상을 빚게 된다. 지금의 종묘 정전은 동서 폭이 120m에 달하게 된 이유는 조선왕조가 500년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종묘에 천자는 7묘(廟), 제후는 5묘라 해서 종묘에는 최대 7명까지만 신주를 모셨다. 신라가 신문왕 시대에 중국식 종묘 제도를 처음 도입하고는 오묘제를 도입한 이유가 당의 제후국으로 자처했기 때문이었다. 고려 왕조 역시 제6대 성종 시대에 종묘를 처음으로 만들면서 5묘제를 도입했다. 한데 실제 종묘 각 실(室)을 어떻게 꾸몄으며, 어떻게 안치했는지는 500년 장구한 왕조 역사만큼이나 변화가 무쌍해 나로서는 도대체 그 변화상을 종잡기가 힘들다. 종묘에 신주가 들었다가 나중에는 들어내기도 하는 등의 변화가 많다. 내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을 살피니 신주가 종묘에 들었다가 나중에는 산릉(山陵)으로 옮겨가는 일도 있는가 하면, 정전에는 들지 못한 왕들의 신주를 위한 별묘(別廟)도 있었던 듯하다. 조선 시대 종묘에 정전과 더불어 이런 왕들을 위한 신주 안치 공간인 영녕전이 따로 있듯이 말이다. 시대별로 넘다듦이 이렇게 변화무쌍하지만 단 한 사람만큼은 변동이 있을 수 없다. 조선 시대 가묘(家廟) 관점에서 보면 불천위(不遷位)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그가 바로 태조 왕건이다.


 앞선 글에서 말했듯이 왕건에 대한 추숭 작업은 누층적이었다. 종묘에다 모시고, 산릉인 현릉에다가도 모시며, 궁궐 안에는 그를 비롯한 역대 왕들의 어진각인 경령전(景靈殿)이 있었는가 하면, 그만을 위한 어진각인 효사관(孝思觀)도 있었다. 나아가 주요 사찰과 서경을 비롯한 주요 거점 도시마다 어진각을 별도로 세워 때마다 제사를 지냈다. 또한 이상하게도 왕건의 조각을 만들어 마치 부처님처럼 봉향하기도 했다. 이는 역대 왕 중에서도 태조가 차지하는 위치가 난공불락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 면모들을 편년체 고려사인 《고려사절요》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숙종 7년(1102) 12월에는 동전을 주조 유통케 하고는 그 사유를 태묘와 여덟 개 역대 왕릉에 고했다. 이어 예종(睿宗) 재위 2년(1107) 겨울 10월에는 북방의 골칫거리로 등장한 여진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태묘에 물어 결정한다. 좋게 달랠 것인가 아니면 군사를 동원해 토벌할 것인가를 두고 난상토론이 벌어진 것이다. 양쪽 의견이 하도 팽팽히 갈리니 왕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이럴 때 묘약은 역시나 태조 왕건이었다. 이 대목을 “왕이 망설이며 결정을 짓지 못하고는 최홍사에게 명하여 태묘에서 점치게 하였더니, 감(坎)이 기제(旣濟)로 변하는 괘를 얻자 드디어 출병하기로 의논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 점괘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나, 이 자리에서는 태묘에서 점을 친 결과 출병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만을 기억하기로 한다. 이에 의해 그 유명한 윤관과 오연총에 의한 여진 정벌이 있게 되고 그 결과 이른바 윤관 9성을 쌓게 된다. 태조가 중앙에 정좌한 태묘는 이처럼 죽어도 결코 죽지 않은 결단의 신이었다. 


 인종 4년(1126)에는 거란을 대신하고 북방의 패자로 등장한 여진족의 금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섬길 것인지 가부를 태묘에서 점을 쳐서 결정했다. 이어 고종 8년(1221), 점점 군사적 압박을 높이며 조여 오는 몽고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몰라 문하시중 이항(李抗)과 사천감(司天監) 박강재(朴剛材)를 태묘에서 점치게 했으며, 몽고의 군사적 압박이 극에 다다른 같은 왕 41년(1254) 겨울 10월에는 재신들을 보내 태묘에 빌며 “큰 재앙이 거듭 이르렀습니다”라고 고하면서 선령들이 하늘의 위엄을 내려주시어 “오랑캐 군사가 스스로 무너져 섣달이 되기 전에 돌아가고, 백성의 힘은 여유가 있어 봄이 되면 농사지어 안도하기를 전과 같이 하여 배부르게 먹고 모두 화평토록”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했다. 


 공민왕 2년(1360) 가을 7월에는 왕이 임진현 북쪽 5리 지점 백악(白岳)에 거둥해 이곳이 도읍을 옮길 만한 곳인가를 알아보았다. 이보다 앞서 공민왕은 지금의 서울인 남경(南京)으로 천도하려고 대대적인 공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에 따른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게 일자 할 수 없이 태묘에 사람을 보내 점을 친 결과 불길하다는 점괘를 얻어 남경을 포기했다. 그 대타로 고른 곳이 백악이었으니, 그런 까닭에 이곳을 신경(新京)이라 불렀다고 한다. 백악 천도 계획도 결국 무산되었지만, 도읍 옮기는 일에도 왕건을 포함하는 조상신들이 관여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핀 일화가 왕건이 다른 후대왕들과 더불어서 함께 결정한 사안이라면, 이제는 그 혼자서 내린 사안들을 본다.  


 공민왕은 재위 6년(1357) 봄 정월에 봉은사(奉恩寺)로 거둥해 그곳에 마련된 태조 진전을 배알하고는 한양 천도가 옳은 일인지 친히 점을 친다. 그 결과 안 된다는 ‘정(靜)’이라는 글자를 얻자, 다시 이제현한테 점을 치게 한 결과 천도해도 좋다는 ‘동(動)’ 자를 얻어 천도를 단행한다. 공민왕이 이미 남경 천도를 결정한 상태에서 점괘가 처음에는 안 된다고 나오자 당혹했을 것이다. 


 우왕 시대인 신우(辛禑) 원년(1375) 여름 4월에는 당시 실권자 이인임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태조 어진 봉안처인 효사관에 나아가 태조의 혼령한테 맹세하기를 “본국의 무뢰배들이 심왕(瀋王)의 손자를 끼고 북쪽 변방에 와서 왕위를 엿보니, 우리 동맹하는 신하들은 힘을 다하여 막아서 새 임금을 돕고 받들겠나이다. 이 맹세에 변함이 있으면, 천지와 종묘 사직이 반드시 은밀한 주벌을 내릴 것입니다”라고 한 일도 있다. 심왕은 원나라가 임명한 제후왕 중 하나로서 언제가 그 혈통은 고려왕의 잠재적 경쟁자였다.  


 이성계가 옹립한 공양왕은 즉위 원년(1389) 12월 계해일에 효사관에 나아가서 신돈의 아들들이라고 매도되어 쫓겨난 우왕과 창왕을 죽인 일을 태조 어진을 바라보며 고하기도 했다. 


 이는 왕건이 고려왕조가 계속하는 한 그 왕국과 후손 왕들을 보호하는 살아있는 신이었음을 보이는 증거들이다. 그런 까닭에 비단 신주와 어진뿐만 아니라 아예 그 생전 모습을 본뜬 동상을 만들어 봉향하기도 했다. 



송충이를 잡는 고려 태조 


 이런 전통은 종교로 보면 도교의 색채가 무척이나 짙다. 동상을 만들어 추숭하는 일로 보면 불교의 전통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죽어서도 죽지 않은 사람, 생전에 무수한 공덕을 쌓고는 죽어서도 천상의 절대 신이 되어 누군가를 보호하는 존재는 신선(神仙)에 다름 아니다. 실제 도교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무수한 신을 만들어냈다. 생전에도 신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드높았던 역대 제왕 중에서도 진 시황제와 한 무제 같은 이는 위진남북조 시대 도교에서는 천상을 지배하는 중요 신선들이기도 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왕건 역시 천상의 신이 되어 고려라는 왕국을 보호하는 후견인 노릇을 한 것이다. 


 이런 면모가 도교와 밀접하다는 점은 우선 왕건이 팔관회 개최와 구요당(九曜堂)이라든가 신중원(神衆院)과 같은 각종 도교 사원 창건으로 대표하듯이 도교에 심취했던 데다가, 그의 어진을 모신 궁궐 전각을 효사관(孝思觀)이라 했으니, 이는 효사관을 도교의 사원인 도관(道觀)으로 인식했다는 단적인 증거다. 


 이런 점에서 특이한 사건이 창궐하는 송충이 퇴치에도 왕건이 동원된다는 점이다. 《고려사절요》 숙종 7년(1102)조를 보면 이해 5월에 송충이가 무성하게 출현하자 왕이 금중(禁中), 곧 궁중에서 뭇 신하를 거느리고 상제에게 친히 초제(醮祭)를 올리는데 태조를 배향하고 사흘 밤 만에 파했다고 한다. 초제란 밤에 지내는 별 제사의 일종으로 도교를 대표하는 종교 행사다. 한데 이런 도교 행사에 태조를 초대해서 그 위신을 빌려 송충이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왕건이 도교의 신격으로 숭배받았다는 내 지적은 이래서 단적으로 증명된다. 


 송충이 얘기 나온 김에 그래서 어찌 되었을까? 왕건까지 동원했지만 송충이 퇴치는 실패한 듯, 그 다음달에는 재상에게 명해 5방(五方)의 산신과 해신에게 세 곳으로 나누어 제사 지내어 송충이 없어지기를 빌면서 죄수들을 사면했는가 하면, 그래도 여의치 못했던 듯 이번에는 군졸 5백 명을 풀어 송악산의 송충이를 잡도록 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박정희 시대에 송충이 잡으러 나간 어린 시절 기억이 새록새록 하기만 하다. 



<참고문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헌강왕릉보수수습조사보고서》, 1995



김태식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입력시간은 2016년02월01일 13시41분이다. 


비봉 기슭의 절터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우뚝 섰던 북한산 비봉 서쪽 기슭에 불광사라는 사찰이 있다. 이곳에서 북한산 봉우리 중 하나인 향로봉 정상을 향해 40분쯤을 올라가면 향림담(香林潭)이라는 작은 웅덩이가 나온다. 이곳에서 다시 40m가량을 오르다가 갈림길 왼쪽으로 돌아가면 제법 넓은 대지가 나타난다. 이 일대에는 누가 봐도 그 옛날에는 제법 큰 규모의 건물이 있었음을 웅변하는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향림사지 축대향림사지 축대 (사진제공=박현욱)


 제법 잘 남은 2단 축대가 있는가 하면, 7단인 돌계단도 있고, 대지를 비롯한 주변에는 건물 주초 혹은 탑과 같은 건축물 일부였을 법한 다듬은 돌들을 만나기가 어렵지 않다. 더불어 기와에 대한 조예가 좀 있다면, 고려 시대 유물임이 확실한 기와 유물도 곳곳에서 수습 가능하다. 또한 근처에는 ‘향림동(香林洞)’이라는 글자를 큼지막하게 새긴 암벽도 있다. 어떤 흔적일까? 어느 시대 어떤 건축물이 있었던 증거들일까? 


향림사지 향림동 암각향림사지 향림동 암각 (사진제공=박현욱)


 향림담이며 향림동과 같은 명칭이 언제 생긴 것인지, 그런 글자를 바위에 새긴 때가 언제인지 모르나 그것이 어떤 역사성을 반영할지도 모른다는 실마리를 삼아 접근하자. 


 조선 전기 때 팔도지리를 집대성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필두로 조선 후기 북한산 일대 지도와 북한산 역사를 정리한 조선 후기 지리지로 북한산성 역사를 정리한 《북한지(北漢誌)》 등을 종합하면 이곳이 바로 고려 시대 저명한 사찰 중 하나인 향림사(香林寺)가 있던 자리임은 거의 확실하다. 산 능선 하나 사이에 두고 승가사가 있다. 이 승가사 역시 고려 시대에는 걸핏하면 고려왕이 찾던 유서 깊은 곳이다. 


향림사지 석부재향림사지 석부재 (사진제공=박현욱)


 우선 향림사에 대한 증언을 보면 《승람》에서 어린아이를 업은 형상이라 해서 부아악(負兒岳)이라 하고 세 봉우리가 인상적이라 해서 삼각산(三角山)이라고 일컫기도 한 북한산을 형세를 기술하면서 그 “가지가 서쪽으로 달려 승가사(僧伽寺)의 비봉(碑峯)과 불암(佛巖) 향림사(香林寺)의 후봉인 백운봉(白雲峯)이 된다”고 해서 향림사가 북한산 중에서도 서쪽 기슭에 위치한다고 말한다. 기술 순서로 보아 승가사와 인접한다는 점도 확인한다. 


 나아가 1745년(영조 21)에 편찬한 《북한지》에서는 향림사가 비봉 남쪽에 있으며 “지금은 무너졌다”고 했다. 이로 보아 향림사는 영조 이전에 없어진 절임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지 기록과 현지 사정을 고려할 때 저 앞에서 본 절터가 향림사 자리라고 안심할 만하다. 물론 향림사가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디일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없지는 않지만, 어떻게 결론난다고 해도 우리가 가는 길에 크게 방해되지는 않는다. 왜 향림사인가? 


경성도(대동여도 1801~1822)경성도(대동여도 1801~1822)


왕건의 죽음과 그를 기억하는 방식  


 918년, 군사 쿠데타로 궁예 정권을 전복한 왕건은 여세를 몰아 935년에는 경순왕의 자발적인 귀부 형식을 빌려 늙은 천년 왕국 신라를 무혈 접수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에 휩싸인 후백제를 유혈 진압함으로써 후삼국 시대 혼란기를 끝내고 꿈의 일통삼한(一統三韓)을 이룩한다. 그로부터 7년 뒤이자 재위 26년째인 943년 5월 29일 병오(丙午)에 향년 67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죽은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하니 7월 4일이다. 


 그의 죽음에서 장사까지 주요 절차를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조정이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공식 공표하기는 이틀 뒤인 6월 2일 무신(戊申. 양력 7.6)이며, 빈전은 그 다음날 궁궐 안 건물 중 하나인 상정전(詳政殿) 서쪽 뜰에다가 마련한다. 새로운 왕인 혜종은 신하들과 논의해 같은 달 24일(양력 7.28) 경오(庚午)에 신성대왕(神聖大王)이라는 시호(諡號)와 태조(太祖)라는 묘호(廟號)를 올린다. 그러다가 왕건의 시신은 같은 달 26일(양력 7.30) 임신(壬申)에 현릉(顯陵)에 장사지낸다. 모든 장송(葬送) 절차는 이것으로 끝난 셈이다.  


 이런 정리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한다. 첫째, 왕건은 죽고 나서 딱 27일 만에 묻혔다. 한 달을 하루로 쳐서 27개월간 치러야 하는 삼년상을 27일 만에 끝낸 것이다. 이런 삼년상 방식을 날로써 달을 대신하는 제도라 해서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금 자세히 다룬다. 


 둘째, 빈소는 궁궐 안에 마련했다. 그것이 마련된 상정전(詳政殿)이 지금의 경복궁 근정전에 해당하는 궁궐의 정전(正殿)인지 아닌지 확실한 판단은 서지 않으나 정사를 잘 가린다는 뜻이니 정치를 삼간다는 근정(勤政)과 결국은 같은 말이니 아마도 정전인 듯하다. 


 셋째, 왕건의 제삿날은 매년 6월 1일이다. 후대 왕들을 보면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한 곳을 주로 이날을 즈음한 때에 집중적으로 하는 모습을 보거니와, 그것은 이날이 제일(祭日)이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넷째, 현재 개성에 남은 그의 무덤 현릉 규모를 볼 때 죽고 나서 27일 만에 축조하기는 도저히 힘들다고 생각되므로, 무덤은 왕건 생전에 미리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군주가 생전에 자기 무덤을 만드는 일은 중국에서는 보편적이었다. 이로 보아 왕건 역시 이 제도를 본받아 미리 자기 무덤을 만든 듯하다. 


 이번에는 이일역월제를 살펴보자.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이 제도를 제5대 경종(재위 975∼981) 때 처음 도입한 듯한 어조로 기록했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실제는 이미 태조 왕건 장례에 이 방식을 채용했다. 태조가 이리했으니 그 다음 왕들의 장례 역시 이 방식을 따랐을 것임이 자명하다. 


 고려왕이 이것으로써 장례를 치렀다는 명확한 흔적은 경종의 죽음에서 명확히 확인된다. 경종은 961년 7월 갑진일에 죽기에 이르러 후계자로 지목해 불러들인 사촌동생 개령군 왕치(王治)에게 유언을 한다. 이 유언이 저 두 사서에는 비교적 길게 수록됐다. 개중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었다. 


 상사(喪事) 기간의 경중은 한(漢)나라 제도를 본받아 달을 날로 바꾸어 13일을 소상(小祥)으로 하고 27일을 대상(大祥)으로 하며, 원릉(園陵)의 제도는 검약하게 하라. 


 이것이 바로 이일역월제다. 부모나 임금의 죽음은 흔히 삼년상을 치른다고 하지만 실제는 만 3년이 아니라 27개월 혹은 25개월이었다. 중국을 보면 25개월인가 27개월인가를 두고 장구한 예송 논쟁을 벌이지만, 고려는 27개월을 선택했다. 


 왜 27개월을 버리고 27일을 선택했는가? 생활의 불편함 때문이다. 왕이 죽으면 상주는 그 다음 왕이 되는데, 차기 왕이 27개월간이나 상중에 있으면 통치가 제대로 되겠는가? 더구나 임금의 만백성의 아버지라 모든 백성이 27개월간이나 상복을 입어야 한다. 


 불편은 이뿐만이 아니다. 저 기간에 왕은 장가도 갈 수도 없고, 민간에서는 풍악을 울려서도 안 되고, 시집 장가도 못 간다. 이런 현실적 필요성에 따라 공자가 그토록 원리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3년상을 헌신짝처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왕건 역시 죽으면서 “덧없는 생명이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다”는 사뭇 비장한 말과 함께 한나라 황제 문제(文帝)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장례식도 간소하게 치르라고 했다. 그의 아들인 3대 정종 또한 아버지를 본받아 자신의 산릉(山陵) 역시 한 문제의 고사를 따르라는 유언을 했다.


개성 왕건 무덤 현릉개성 왕건 무덤 현릉 (사진제공=오세윤)


 어느 왕조건 건국 시조인 태조가 차지하는 위치는 다른 후대 왕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왕보다 더욱 대대적인 추숭 사업을 벌이게 된다. 왕건 역시 고려 왕조가 계속된 500년 내내 특별대우를 받았다. 후손들이 그를 기억한 방식은 크게 네 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종묘에 신주를 안치해 그를 기린다. 이는 동아시아 어떤 역대 왕조건 같아 왕건만이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다. 둘째,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제작해 각처에 봉안한다. 조선 시대 태조 이성계 역시 이런 면모가 있었지만, 태조 왕건만큼 어진 봉안이 활발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셋째, 소상(塑像)을 제작해 추숭한다. 이는 현재까지는 고려만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넷째, 산소인 현릉 배알이다. 이는 현대의 우리한테까지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 네 가지 요소는 실은 그 시대 제1의 종교인 불교에서 부처를 추숭하는 방식과 똑같다. 그것을 간단히 정리하면 ‘종묘=대웅전, 산소=탑, 어진=불화, 소상=불상’ 관계가 성립한다. 특히 소상은 틀림없이 불상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이 점을 염두해 두고 또 하나 주목할 점이 왕건의 실제 시신이 있는 곳은 현릉이라는 사실이다. 어진이나 소상은 그 자체가 신주나 시신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이 중에서 어진은 궁궐 안에 별도 어진각이 있었음이 확실하고, 고려 수도 개경의 봉은사라는 사찰에도 어진각이 있었다. 이런 어진각을 진전(眞殿)과 같은 말로 표현하기도 하며, 고유명사도 있었다. 역대 왕들이 왕건을 배알하고자 가장 자주 찾는 곳 중 하나인 이유다. 제2 수도인 서경(西京) 평양에도 어진각이 있어 왕들이 서경을 순행할 때마다 이곳에 빠지지 않고 들른다.  


 고려왕조는 전란과 같은 유사시에는 옮길 수 없는 종묘와 산소만을 제외한 나머지 왕건과 관련한 것들로 옮길 수 있는 것은 가장 먼저 대피시켰다. 종묘는 건물 자체를 옮길 수 없으니 거기에서 신주와 옥책 같은 것만 빼낸다. 


 한데 산소라고 과연 옮길 수 없을까? 요즘 토목기술로는 조금은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산소 자체를 옮기는 일도 얼마든 가능하다. 하지만 그 시대에 산소 자체를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신 산소 안에서 관만 빼내어 그것을 옮기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다. 


 관을 들고 튄다? 조금은 기괴하나 이런 영화 같은 장면이 실제 있었다. 이것 역시 고려왕조만의 특징이다. 아마도 〈터미네이터〉시리즈 중 하나로 기억하는데, 근육질 배우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주연한 어떤 영화에서 관을 들고 총질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왕건의 관을 들고 피난 다니는 고려인들을 상상하면서 자꾸만 이 영화 장면이 오버랩한다. 


 유사시에 관을 꺼내 다른 곳에 옮기는 이유는 적이나 도둑이 침입했을 때 보물이 있다 해서 터는 곳으로 왕릉이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인들이 그런 무수한 역사의 교훈을 모를 리 없었다. 무수한 왕릉이 털렸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정복군주로 이름 높은 고구려 미천왕은 죽어서 시신이 전국의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었다는 역사가 있지 아니한가? 이런 수모를 막기 위해 고려는 유사시에는 관 자체를 무덤에서 꺼내 옮기는 기발한 방식을 생각한 것이다. 


 도전이 있으면 응전이 있는 법이다. 날아라 슈퍼보드는 끊임없는 도굴로부터의 도전에 대한 응전이었다. 그것이 비록 귀찮기는 하고, 품이 좀 많이 들기는 하지만, 넋 놓고 당하지만은 않았다. 너희가 하면 우리도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산을 오르는 혼(魂) 


 1010년, 고려는 미증유의 외세 침략에 사직이 백척간두에 달렸다. 그 전해 변방 장수 강조(康兆)가 쿠데타를 통해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세운 일을 구실로 당시 고려에 대한 종주국을 자처한 북방 거란족의 요(遼) 황제 성종이 직접 보병과 기병 40만 명을 친히 거느리고 고려 정벌에 나섰다. 그해 11월 신묘일에 압록강을 건넌 거란군은 그들을 막기 위해 출전한 강조를 통주 전투에서 이겨 사로잡은 다음 파죽지세로 평양을 지나 1010년 봄 정월에는 개경에 들이닥쳐 약탈 방화를 일삼았다.   태묘(太廟)와 궁궐, 그리고 도성 민가가 모조리 불탔다. 거란군이 평양에 도달할 즈음 개경을 탈출한 현종은 남쪽으로 몽진을 떠나 거듭 도망치다가 나주까지 내려갔다. 강조를 사로잡고 개경을 함몰했으니 그것으로 정벌 명분은 달성했다고 생각했음인지, 성종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고려로서는 타격이 극심했지만 이만하길 다행일 정도였다. 그래도 현종이 이번 패전을 통해 거둔 성과가 있었으니, 권신 강조를 거란이 처단해주었다는 점이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고마웠을지도 모른다. 


 거란군 침입에 개경이 불바다로 변한 가운데 그곳에 있던 왕건의 무덤 현릉은 온전했을까? 이런 의문을 풀 방법은 없다. 하지만 이 역시 고려로서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성공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현릉의 막힌 문을 뚫고는 왕건의 관을 꺼내어 미리 다른 곳에다가 대피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고려 조정이 언제 이런 조치를 취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도 극비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추진 과정은 남지 않은 듯하다. 이런 사실은 거란 침입이 있는지 5~6년 뒤인 1016년에 가서야 비로소 공개된다. 현종 재위 7년째인 이해 《고려사절요》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보인다. 


 (봄 정월) 태조의 재궁(梓宮)을 다시 현릉(顯陵)에 장사지냈다. 지난 경술년의 난리 때 부아산(負兒山)의 향림사(香林寺)에 옮겨 모셨다가 이때 와서 그 전대로 장사했다. 


 재궁이란 글자 그대로는 가래나무로 짠 궁전이라는 뜻이지만, 임금의 시신을 안치한 관을 말한다. 옛날에는 그것을 가래나무로 만든 까닭에 이리 부른다. 경술년의 난리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한 거란의 침략 전쟁을 말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려 조정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아마도 극소수만 아는 가운데 은밀히 현릉 문을 따고는 관을 꺼내어 몰래 향림사에 옮겨다가 놓았음을 알게 된다. 이 향림사가 바로 북한산 비봉 아래 터만 남은 그곳에 있던 사찰이다. 하필 이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비밀 보장이 잘 되는 곳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다행히 왕건의 재궁은 온전히 보전되었다. 그것을 이때 이르러 다시 옮겨다가 원래의 자리인 현릉에다가 봉안한 것이다. 왕건은 죽어서도 편치 못했지만, 다름 아닌 태조니깐 이런 특별대접을 받았다. 다른 임금의 무덤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한꺼번에 옮길 수 없었으니, 그 자리에 둔 듯하다. 도굴을 피하기 위한 방법 치고는 참으로 절묘했다. 


 한 번 닦아놓은 길은 반복하기 마련이다. 이때 다시 닫힌 현릉은 다시금 문을 열어야 하는 일에 직면한다. 재입관 2년 뒤인 같은 현종 재위 9년째인 1018년, 고려는 다시금 거란 침입의 위험에 봉착한다. 이해 12월 거란이 황제의 사위인 소손녕(蕭遜寧)을 사령관으로 삼아 10만 대군을 보내 다시 고려를 침략한다. 이 전쟁은 고려로서는 두 사람의 영웅적인 활약에 힘입어 결국 거란군을 궤멸하는 대전과를 낸다. 상원수인 평장사 강감찬과 부원수인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이 이끄는 고려군 20만 8천3백 명은 청천강을 중심으로 하는 지금의 평안도 일대에서 거란군을 박살낸 것이다. 


 하지만 이는 나중의 일이고, 거란군 재침 급보를 받은 고려 조정에서는 《고려사절요》 언급을 그래도 옮기면 다시금 “태조의 재궁을 받들어 부아산의 향림사(香林寺)에 옮겨 모셨다” 《절요》에는 이 일이 이해 12월이라 해서 정확한 날짜가 없지만 《고려사》에 의하면 신해일이다. 


 이렇게 옮긴 재궁이 언제 다시 현릉으로 돌아갔는지는 모르겠다. 기록이 있는데 내가 놓쳤을 수도 있다. 여하튼 다시 돌아갔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현릉이 다시금 문을 여는 사태가 생겼기 때문이다. 돌아가지 않은 현릉의 재궁이 다시금 문을 나서는 일은 없다.


 여진에 시달리던 거란은 순식간에 사라지지 않았다. 그 중심은 여진족의 금에 무너졌지만 생명력은 질겼다. 거란이 망하자 그 남은 종족을 이끄는 두 왕자가 있었으니 금산(金山)과 금시(金始)가 그들이다.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여진에 압박받은 이들은 아아(鵝兒)와 걸로(乞奴)라는 두 장수를 앞세워 지금의 황하 이북인 하삭(河朔)에 진출해 대요수국왕(大遼收國王)이라 일컫고는 연호를 천성(天成)이라 했다. 마침 이때는 몽고가 칭기즈칸 시대를 맞아 한창 팽창하기 시작하던 무렵이라 대군을 일으켜 대요수국을 친다. 


 몽고에 밀리자 거란 잔당은 동쪽으로 밀려들기 시작하니 고종 3년 8월에는 마침내 아아와 걸로가 이끄는 수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 영역을 침범했다. 이들이 개경까지 위협하자 고려에서는 다시금 현릉 문을 딴다. 이듬해(1217)에는 태묘에 봉안한 신주를 태상부로 옮기는 한편 태조만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왕륭의 재궁까지 함께 이번에는 봉은사(奉恩寺)로 옮긴다. 이 봉은사는 지금의 서울 강남 봉은사가 아니라 개경 근처의 절로서 태조 어진을 봉안한 곳이다. 


 이에 대한 묘사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약간 다르다. 즉, 《고려사절요》에서는 이해 3월에 “태묘의 신주를 태상부(太常府)로 옮기고, 태조와 세조의 재궁은 봉은사(奉恩寺)로 옮겼다”고 해서 이들 사건이 마치 동시에 일어난 듯 기술했지만, 《고려사》는 각기 다른 날에 일어난 사건으로 언급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먼저 3월 병술일에 동면도감(東面都監) 판관인 이당필(李唐必)을 보내 태묘에 봉안한 신주를 태상부(太常府)로 옮기게 하는 한편 장군 기윤위(奇允偉)는 현릉(顯陵)으로 보내서 태조의 재궁을 봉은사(奉恩寺)로 옮기게 했다. 태상부는 주로 제사와 관련한 업무를 담당한 정부기구다. 


 이어 같은 달 무자일에는 장군 신선주(申宣冑)를 세조가 묻힌 창릉(昌陵)으로 보내 세조의 관을 봉은사(奉恩寺)에 옮기게 하고, 또 개장후릉도감(改葬厚陵都監)을 설치했다가 얼마 후 없앴다고 한다. 개장후릉도감이란 강종의 능인 후릉을 옮기기 위한 총감독 (임시)기구라는 뜻이므로 이때는 강종 능도 문을 열어 그 관을 꺼내려했다가 중단한 셈이다. 왜 중단했을까? 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돈이 많이 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계속 《고려사》를 따라가다 보면 그 다음 달인 여름 4월 신유일에는 “태묘의 아홉 실에 안치한 신주는 공부청(工部廳)으로, 각 능의 신주는 고공청(考功廳)으로 각각 옮겼다”고 한다. 공부청은 토목공사 전담 관청이고 고공청은 관리들의 인사고과를 담당한다. 


 한데 같은 《고려사》에서 한 달 전에 옮긴 태묘 신주를 이때 다시 다른 데로 옮겼다고 하니 무슨 말인지 언뜻 나는 모르겠다. 한 달 전에 태상부로 옮긴 신주들을 도로 태묘에 갖다 놓았다가 이때 다시 옮겼다는 뜻인지, 아니면 기록의 착오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두 사서 사이에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요컨대 이해 3~4월 무렵 거란의 침입에 즈음해 고려가 다시금 태조를 비롯한 역대 왕릉 일부 문을 땄다는 사실을 여실히 확인한다. 태조는 벌써 세 번째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이쯤이면 요새 납골함 수준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바다를 건너는 시체 


 그렇다면 죽은 왕건의 유랑은 이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는가?  


 고려는 이제는 뒤안길로 사라진 거란, 그리고 그것을 대신해 새롭게 북방의 강자로 대두한 여진보다 몇 배, 아니 몇 십 배는 더 강한 세계제국 몽골의 원(元)이라는 강적을 만났다. 이때도 여전히 고종이 왕인 시절이다. 하지만 실권은 최씨의 무신정권에 있었다. 그 시초를 연 최충헌 이래 최우 등을 거쳐 장기 집권한 무신정권은 몽골에 대한 무력투쟁을 선언하고는 그 일환으로 개경을 버리고 바다를 건너 강화도로 들어갔다. 


 이 옹성 투쟁은 무려 30년을 계속했다. 칭기스칸 손자로 원 제국을 반석에 올려놓은 황제 쿠빌라이 칸이 훨씬 나중에 한 말을 빌린다면 그들에게 30년간이나 대항한 나라는 없었다. 그만큼 무신정권 하 고려의 대몽골 투쟁은 끈질겼다. 


 강화 천도는 고종 19년(1232), 최우 집권기에 있었다.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이번에도 고려는 현릉의 문을 땄다. 다른 건 다 포기해도 왕건만은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강화를 향해 고종은 7월 을유일에 개경을 출발해 이튿날인 병술일에 강화 객관(客館)에 도착했다. 이 즈음해서 현릉의 재궁 역시 빼서 강화도로 간 것이 분명하지만, 정확한 시점에 대한 언급이 없다. 《고려사절요》에서는 아예 이 사건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으며, 대신 《고려사》에는 이해 말미에다가 “이해에 세조와 태조의 재궁을 새 도읍으로 이장했다(是年, 移葬世祖大祖二梓宮于新都)”고만 언급할 뿐이다. 


 이때 두 재궁을 어디에다가 어떻게 모셨는지는 알 수가 없다. 향림사라든가 봉은사의 전례를 미루어 본다면 강화도 어떤 사찰에 안치했을 공산이 크지만, 간단치는 않다. 《고려사》에서는 분명히 이때 ‘이장(移葬)’했다고 했다. 이는 종래의 안치하고는 다르다. 관을 어떤 건물 안에 두는 행위가 아니라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어디엔가 묻은 것이다. 강화도에서 발굴조사한 왕릉급 무덤 중에는 예컨대 그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능내리 무덤이 있다. 전호에서 간단히 소개한 곳이다. 혹여 이런 곳이 왕건릉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이번 강화 피신에서도 왕건은 봉은사에서 그랬듯이 아버지와 함께했다. 한데 이번 유랑은 왕건에게는 좀 길었다. 이런 사실은 우리는 두어 군데 기록에서 간접 확인한다. 1232년 강화도로 들어간 고려 조정은 1259년 몽고에 공식 항복하면서 3년 안에 개경 환도를 약속했지만 질질 끌다가 마침내 1270년 원종 11년에야 마지못해 강화도를 떠나 뭍으로 다시 상륙한다. 


 이해 《고려사》 원종 세가 말미에는 발생 시점을 특정하지 않은 채 “이해에 이판동(泥板洞)에다가 건물을 지어 세조와 태조의 재궁과 봉은사의 태조 소상(塑像)과 구묘(九廟)의 신주를 임시로 안치했다”고 한다. 이판동은 개경(開京)의 나성(羅城) 안에 있던 지명으로, 십자가(十字街)에서 숭인문(崇仁門) 쪽으로 가는 방면에 위치했다고 하는데, 지명이 어쩐지 벽돌공장 밀집지역, 혹은 성을 쌓은 기술자들의 집단 거주 지역 같은 느낌을 준다. 


 이로 보아 개경 환도 때 왕건의 재궁 역시 같이 복귀했음을 알 수 있다. 38년 만이었다.


개성 왕건 무덤 현릉개성 왕건 무덤 현릉 (사진제공=오세윤)


 임시 안치한 왕건의 관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고려사》 충렬왕 세가를 보면 그 2년(1276) 갑진일에 “다시 세조(世祖)의 재궁을 창릉(昌陵)에, 태조의 재궁을 현릉(顯陵)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고려사절요》에는 날짜를 밝히지 않은 채 이해 9월조에 이와 같은 말을 적어놓은 다음 “이전에 (강화도로) 천도할 때 두 재궁을 강화로 이장했다가 이때 와서 모두 옛 능으로 회복했다”는 새로운 말이 보인다. 강화 천도가 고종 19년(1232)의 일이니, 왕건의 재궁은 정확히 44년 만에 다시 제집을 찾아든 셈이다.  


 이후에는 내가 현릉 문을 다시 국가의 공식 차원에서 땄다는 흔적을 보지 못했다. 1392년 고려 왕조가 패망하고 신왕조인 조선이 개창하면서 왕건도 이제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참고문헌>

대한불교조계종 불교문화재발굴조사단,  《북한산의 불교유적》, 1999 

한국역사연구회 편, 《고려의 황도 개경》, 창작과비평사, 2002


<도움주신 분>

김일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 고려 시대 일력 계산

박현욱 경기문화재연구원 주임 : 향림사지 관련 사진 등 자료 소개  

오세윤 문화재 전문 사진작가 : 태조 왕건릉 사진 제공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이다. 기사 입력은 2016년01월25일 12시16분이다. 


 근자에 《고려사절요》를 통독하며 고려사 500년을 훑다가 중·말기로 갈수록 짜증 혹은 분노가 치솟는 걸 보니 나 역시 어찌할 수 없는 한국 사람이다. 고려가 직접 지배나 다름없는 원나라 간섭을 무려 100년간이나 받으며 왕을 필두로 하는 고려인들이 갖은 굴욕을 감내해야 했던 데다 그 후기에 이르러서는 왜구가 주는 고통까지 덤터기로 썼으니 아마도 이때가 한국사 가장 참혹한 시대가 아니었던가 한다. 이런 감정은 비단 지금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줄로 안다. 굴곡의 근현대 한국이 겪은 참상이 아마도 고려 시대 그때로 오버랩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유의할 점이 있다. 역설적으로 나는 한국사가 이때만큼 세계를 향해 더 열려 있던 때가 없다고 본다. 전근대 언제나 그러했듯 중국은 그때도 세계의 중심이었고, 특히나 칭기즈칸의 유산으로 이룩한 원(元)은 그야말로 세계 제국이었다. 어쩌면 이 몽고 원 제국이 당시 세계에 미친 영향은 지금의 미국이 현대 세계에 가하는 영향보다 더 컸을 것이다. 원 제국이 주는 고통에 고려인들은 신음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듯하지만, 그 넓은 중국 대륙을 앞마당 드나들 듯 한 시대 역시 이때였음을 잊어서도 안 된다. 고려와 고려 사람들은 원 제국 일원으로 강제 편입되고, 그에 따른 혹독한 희생을 감내해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편입이 주는 열매 역시 그보다 더 달콤할 수는 없던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고려왕이나 왕족들은 인사권조차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처지에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르지만, 그 대부분은 원 황실의 사위가 되어 종래에는 누리지 못한 세계 권력의 중심에 들어서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를 증언하는 《고려사절요》를 훑다 보면 충숙왕 16년(1329)에서 이상한 사건 하나를 마주한다. 이에서 이르기를 이해 봄 정월에 “심왕(瀋王)의 공주 눌륜(訥輪)의 상(喪)이 원에서 도착했다(瀋王公主訥倫之喪, 至自元)고 했다. 이 경우 ‘상(喪)’은 그 시신을 실은 운구 혹은 상여 행렬을 말한다. 왜 이 기록을 이상하다 하는가? 느닷없기 때문이다. 눌륜이 누구인지 설명도 없고, 더구나 그 앞 어디에도 눌륜이 죽었다는 언급도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원문을 보면 ‘심왕 공주 눌륜’이라 해서 언뜻 보면 ‘심왕의 공주(딸)인 눌륜’처럼 읽힌다. 어떻든 눌륜의 운구가 원나라에서 이르렀다 했거니와, 이 경우 도착한 지점은 틀림없이 당시 고려의 서울 개경을 말할 것이다. 또한 눌륜이라는 이름도 영 생소하다. 한자 그 자체로도 도무지 뜻이 성립하지 않는다. 원 간섭기라는 시대 사정을 고려할 때 어쩐지 몽고 냄새가 짙다. 이런 궁금증들은 뒤에서 풀어보기로 하고 우선 그 뒤에 일어난 관련 사건을 같은 《고려사절요》 따라가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타난다. 

 

 “여름 4월에 눌륜공주(訥輪公主)를 장사지냈다. 이튿날 도적이 그 묘를 도굴했다.(夏四月, 葬訥倫公主, 翼日, 盜發其墓)”


 ‘발(發)’이라는 동사는 기본이 ‘드러낸다’는 뜻이다. 이 경우는 ‘도굴’을 말한다. 요즘 고고학도들이 땅을 파서 과거의 흔적을 찾는 일을 ‘발굴(發掘)’이라 하는데, 발굴이라는 말 자체가 실은 ‘도굴’과 이종사촌임을 여실히 확인한다.  눌륜공주 운구가 개경에 도착한 시점이 1월이고, 최종 매장된 때는 4월이니 대략 3개월간 어딘가에 임시로 모셨음을 알 수 있다. 죽어서 최종 매장하는 시점까지 어딘가에 시신을 두고 조문 등을 하는 행위를 ‘빈(殯)’이라 한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한 공간, 혹은 시설을 ‘빈전(殯殿)’이라 하거니와 요즘은 ‘빈소(殯所)’라는 말을 흔히 쓴다. 동아시아 세계의 각종 의례(儀禮), 곧 세레모니를 지배한 절대 경전인 《예기(禮記)》 왕제(王制) 편이라는 곳을 보면 “천자는 죽고 나서 7일 지나 빈(殯)했다가 7월이면 장사지낸다. 제후는 죽은 지 5일 뒤에 빈하고 5개월 만에 장자지내며 대부(大夫)와 사(士), 그리고 일반 백성은 죽은 지 3일 만에 빈했다가 3개월 뒤에 장사지낸다”고 했다.


 눌륜은 공주라고 했고, 또한 지금 심왕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원 제국의 제후왕임이 확실한 이상, 《예기》에 따른다면 5개월 뒤에 시신을 묘소에 최종 안치했어야 하겠지만, 보통의 관료라든가 일반 백성에 준해서 장례를 치렀다고 추정된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는 법이다. 법대로만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다만, 눌륜이 실제로 죽은 날을 기점으로 삼을 때는 빈 기간이 5개월일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눌륜의 운구가 개경에 도착하고, 3개월 뒤에 묻힌 일은 또 다른 고려 정사인 《고려사》에도 보인다. 《고려사절요》에는 운구가 개경에 도착할 날과 묻힌 날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고려사》에는 그것이 확실히 드러난다. 즉, 운구가 개경에 도착한 날을 정월 기미일이라 하고, 그를 묻은 날을 4월 경인일이라고 한다.


 이제 앞에서 미뤄둔 문제, 다시 말해 눌륜이 누구인지를 해명할 때가 되었다. 눌륜은 당시 심왕(瀋王)인 왕호(王暠)라는 사람의 정비다. 심왕이란 ‘심양(瀋陽)의 왕’이라는 뜻이니 원 황제가 고려왕 혹은 그 왕족에게 책봉한 제후 칭호 중 하나다. 나는 앞에서 원의 본격적인 간섭을 받게 된 일이 고려에는 고통이기는 했지만, 그 열매 역시 달콤했다고 말했다. 충선왕은 당시 원 제국 서울에 체류하면서 황위 계승에도 깊이 관여해 결정적인 공을 세우게 된다. 그 대가로 새로 즉위한 원 제국 황제 무종에게서 심양을 중심으로 지금의 중국 동북지방 일대를 통치하는 심양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왕호는 삼촌인 충선왕에 이은 제2대 심왕으로 재위한 기간은 1316년 이래 1345년까지 무려 30년에 이른다. 그 위세 역시 막강해서 고려왕을 시종 위협하며, 실제로 호시탐탐 그 자리를 노리기도 했다. 


 심왕 왕호는 충렬왕 손자다. 충렬왕은 아들 셋을 두었다. 원 제국 쿠빌라이 칸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아내로 맞아들어 충선왕을 낳았고, 정신부주(貞信府主)라는 후궁에게서 강양공(江陽公) 왕자(王滋)를 두었으며, 그 외에도 반주(盤珠)라는 또 다른 후궁한테서 왕서(王湑)라는 아들을 얻었다. 맏이는 왕자였지만, 원 황실을 등에 업은 정비 소생 충선왕에게 권위가 미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왕자는 살아남고자 승려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환속해서 왕호를 비롯한 아들 셋을 두었던 것이다. 다행히 왕호는 삼촌인 충선왕에게 총애를 받아 이를 발판으로 심왕 자리를 이어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왕호가 성공 가도를 달리는 데는 그 역시 원 황실의 적극적인 도움이 받았다는 점이 결정적이다. 그의 장인은 원 제국 황족 일원으로 양왕(梁王)에 책봉된 송산(松山)이라는 사람이다. 송산은 쿠빌라이(1215~1294)의 증손자이면서 할아버지는 진금태자(眞金太子, 1243~1286)다. 진금태자는 형이 일찍 죽자 일찌감치 다음 보위를 이을 태자가 되었지만, 그에게 불행은 아버지 쿠빌라이가 무려 80세로 지나치게 장수했다는 사실이었다. 아버지가 죽기만을 기다림이 너무 애탔는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다만 이후 원 제국 황제는 모두 진금태자 후손에게서 나온 일로 사후 보상을 받게 된다. 


 진금태자는 세 아들을 두었으니 맏이가 카마라(甘麻剌). 처음에는 양왕(梁王)에 책봉되었다가 나중에는 진왕(晉王)으로 옮겼다. 그의 딸 중에 계국공주(薊國公主) 보탑실리(寶答失里)가 충선왕에게 시집갔다. 충선왕과 보탑실리는 금슬이 아주 나빠 이것이 결국 빌미가 되어 느닷없이 왕위에서 쫓겨나기도 한다. 카마라 역시 아버지 진금태자처럼 그 자신은 황제가 되지 못했지만 나중에 그의 둘째아들이 10대 황제가 되니 그가 태정제(泰定帝)다. 카마라가 지닌 진왕이라는 타이틀은 그의 맏아들 송산(松山)에게 넘어간다. 심왕 왕호의 부인 눌륜은 바로 송산의 딸이다. 계보가 매우 복잡하니 간단히 할아버지 충렬왕 이래 그 아들 충선왕, 그리고 충렬왕 손자이면서 충선왕에게는 조카인 왕호 모두 원나라 황실 공주를 아내로 맞았다는 사실만 기억하기로 한다. 


 고려 왕실이 원 황실의 사위가 되었다는 것은 구속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또 한편으로는 엄청난 힘이었다. 이들 고려 왕족이 때로는 원 제국에서 갖은 모욕을 당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엄청난 파워를 휘둘러 그 정치를 좌지우지하기도 했다. 충선왕 같은 이는 황위 계승 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마침내 승리함으로써 당대 정치를 주름잡았다. 오죽하면 아버지 충렬왕이 죽고 난 뒤에도 고려왕이 싫다 하면서 원나라에 계속 머물고자 했겠는가? 


 기록에 확실치 않은 면이 있지만, 심왕 왕호의 부인 눌륜은 내가 보기에는 원나라 서울인 연경(燕京)에서 나고 자랐으며, 남편 왕호를 따라 심양에서 생활했거나 어쩌면 연경에서 죽 생활한 듯하다. 고려 혹은 개경하고는 인연이 남편이 그쪽 출신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한데도 막상 눌륜은 원나라 땅에서 죽어서는 그곳에서 잠들지 못하고 개경으로 왔다. 그 이유는 ‘출가외인’이라는 그 시대 관습에서 말미암는다. 남편이 죽을 땅에 묻혀야 했던 것이다. 한데 생전에는 각종 호사를 누렸겠지만, 이것이 역설적으로 그의 사후 생활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가 묻히고 무덤 문이 닫힌 그 다음날 그 무덤으로 밤 손님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앞서 본 기술이 전부다. 도굴 피해는 어떠한지, 관련 수사는 어떻게 되었는지 전연 말이 없다. 이 사건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까닭에 추가 언급을 뺏을 수도 있다. 이는 영원히 미궁으로 묻혀 버렸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을까? 도굴이 어떻게 해서 가능했을까? 무덤에는 어떤 물건들이 묻혔을까? 범인이 안 잡힌 미제 사건인지 모르나, 나는 누가 범인인 줄은 대강은 안다. 누구인가? 무덤을 만드는 데 관여한 사람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도굴은 단독 범행이 없다. 도굴은 한밤중에 하므로, 촛불을 비춰주거나 하는 공범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범인 중 적어도 한 명은 틀림없이 그 전날 눌륜공주를 안장하는 의식에 참여한 사람이다. 무덤 구조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른바 면식범 소행임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무덤이 어떠했기에 이렇게 간단히 도굴되었을까? 눌륜공주의 무덤 소재지와 그 실물이 밝혀졌는지 모르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 무덤은 안 봐도 돌방무덤이다. 이 시대에는 왕릉을 비롯해 거의 모든 무덤이 합장분이라 해서 대체로 부부를 같은 무덤방에다가 묻었다. 부부가 몰사하거나 동시에 자살하지 않는 한 죽는 시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때도 평균 연령은 여자가 높아 남편이 먼저 죽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눌륜은 남편보다 먼저 죽었다. 나중에 남편 왕호는 죽어서 눌륜이 기다리는 무덤으로 틀림없이 먼저 들어갔을 것이다. 이런 부부 합장묘는 대체로 돌방무덤으로 만든다. 그 돌방무덤은 한 쪽에다, 거의 예외 없이 남쪽에다가 무덤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마련한다. 이 무덤 문을 통해 나중에 죽어서 들어오는 남편이나 부인 시신을 들이게 된다. 그러니 돌방무덤은 도굴에 취약하다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비록 무덤 문을 튼튼하게 마련하고 자물쇠를 채운다 하지만, 구조를 아는 사람들한테 이 문을 따기는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다. 


 그렇다면 왜 도굴했을까? 보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덤에 묻힌 사람은 더구나 원나라 황실의 공주다. 도굴 우려 때문에 이 시대 한편에서는 박장(薄葬)이라고 해서 껴묻거리를 일부러 적게 묻는 일도 있지만, 대체로 후장(厚葬)이라 해서 잔뜩 묻는 일이 흔했다. 더구나 껴묻거리가 아무리 적다해도 원 황실의 공주 무덤 아닌가? 서민들한테는 엄두를 낼 수 없는 보물로 찾을 것임에 틀림없다. 도굴꾼은 이를 노린 것이다. 


▲ 가릉 ▲ 천장 덮개돌 상부에서 노출된 가릉 8각호석 모습 ▲ 가릉 석실 내부 벽석 축조 상태 ▲ 공릉 입구 막음석 노출상태사진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 가릉 ▲ 천장 덮개돌 상부에서 노출된 가릉 8각호석 모습 ▲ 가릉 석실 내부 벽석 축조 상태 ▲ 공릉 입구 막음석 노출상태 (사진제공=국립문화재연구소)


  이 무렵 고려 시대 왕릉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실물이 있다. 고려 시대 왕릉은 대부분 개경에 소재하는 까닭에 그 실체적 접근이 우리로서는 지극히 어렵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강화도에는 그 왕릉 몇 기가 다행히 남아있고, 그 대부분은 정식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이들 왕릉은 강도(江都)시대, 그러니깐 강화도에 도읍한 시기에 만든 것이다. 널리 알려졌듯이 고려왕조는 개경을 포기하고 강화도로 옮겨 몽고 침입에 30년 이상을 버텼다. 개중 하나로 석릉(碩陵)이라는 곳이 있다. 제21대 희종(재위 1204∼1211) 무덤이다. 이곳은 2001년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 조사 결과 묘역(墓域)을 어떻게 꾸몄으며 시신을 묻은 공간인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결과 봉분 주위로는 ‘∩’ 자 모양 담장(曲墻)이 둘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주목할 만 한 점은 무덤방 천장을 길이 300㎝, 너비 120㎝ 안팎인 대형 판석 3장을 놓고 그 위에 다시 평면 8각형 호석(護石)을 둘렀다는 대목이다. 담장과 호석 사이에는 납작한 작은 돌을 깔았다. 이는 아마도 왕릉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구조로 판단된다. 돌로 만든 무덤방은 길이 310㎝, 너비 210㎝, 높이 220㎝ 규모이며 양측 벽과 뒷벽에는 깬돌을 이용해 7단으로 쌓았다.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은 양측 벽 전면에 장대석 각각 1개씩을 놓아 기둥처럼 사용했고 대형 판석 1개로 막음 처리를 했다. 시신을 안치한 관을 놓은 바닥인 시상부(屍床部)는 풍화암반층 위에 두께 20㎝ 안팎의 장대석을 이용했다. 이미 여러 차례 도굴 피해를 본 까닭에 출토 유물은 많지 않으나 온전한 모양의 청자탁잔(靑磁托盞) 3점을 비롯해 꽤 많은 청자 제품을 수습했다. 나무 널에 사용한 철못과 널 부착물로 판단되는 금박(金箔) 조각, 구슬류 몇 점도 확인됐다. 이로 보아 원래 이 무덤에는 부장품이 상당했을 것으로 판단됐다. 


강화 고령왕릉 가릉 곤릉 출토유물강화 고령왕릉 가릉 곤릉 출토유물 (사진제공=국립문화재연구소)


 이 석릉은 남한에서는 최초로 실시된 고려 왕릉이다. 이후에도 인근 고려 시대 왕릉 혹은 그에 버금가는 무덤이 추가로 더 조사됐다. 2004년 조사한 고려 제22대 강종(康宗)의 비 원덕태후(元德太后) 무덤인 곤릉(坤陵)과 제24대 원종(元宗)비 순경태후(順敬太后) 무덤인 가릉(嘉陵), 그리고 2007년 조사한 능내리 고분이 그들이다. 이들은 기본 무덤 구조가 같다. 눌륜공주의 무덤 역시 시대가 비슷하므로 틀림없이 석릉과 비슷했을 것이다. 껴묻거리 역시 상당했을 것이다. 도굴꾼들이 이를 몰랐을 리 만무하다. 


강화 능내리 석실분강화 능내리 석실분 (사진제공=김태식)


 도굴은 앞서 보았듯이 그것을 의미하는 행위를 ‘발(發)’이라는 동사로 표현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는 파낸다는 뜻이다. 도굴이나 발굴은 결국 무엇인가를 땅에서 파내는 행위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정식 고고학 발굴 역시 ‘보물’을 캐내고자 하는 점에서는 예외가 없다. 다만 도굴과 발굴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이를 통해 노리는 보물이 다르다는 점이다. 고고학은 발굴을 통해 그 시대 문화사를 ‘발굴’하고자 한다. 이것이 고고학이 노리는 보물이다. 물론 고고학이라 해서 값비싼 금붙이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요새야 고고학 역시 홍보와 뗄 수가 없어 금붙이가 많이 나오는 발굴을 일러 ‘대박쳤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역시 그 시대 문화상 복원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금붙이를 비롯한 유물의 습득과 그 판매를 통한 실질적 금전 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도굴과는 길이 다르다. 


강화 능내리 석실분 출토 유물강화 능내리 석실분 출토 유물 (사진제공=국립문화재연구소)


강화 능내리 석실분 출토 도기강화 능내리 석실분 출토 도기 (사진제공=국립문화재연구소)


 하지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이 있다. 발굴을 근간으로 하는 고고학 역시 도굴에 분명히 뿌리가 있다. 도굴 없이 오늘날의 고고학 발굴이 존재할 수는 없다고 나는 본다. 그 시대를 증언하는 유적과 유물이 땅속에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도굴이 길을 열어줬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고리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도굴은 과연 언제쯤부터 있었을까? 또 무엇 때문에 도굴은 성행했을까? 도굴이 성행함에 따라 그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어떠했는가? 나아가 그런 대응들은 얼마나 성공했는가? 혹여 그런 대응에 대해 우리의 도굴꾼들은 또 어떻게 대처했는가? 


 이런 점들을 함께 고려하면 도굴은 단순히 보물 캐기가 아니다. 도굴 역시 문화현상 중 하나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것이 범죄 행위라는 점에서는 이론이 있을 수는 없지만, 그런 점을 들어 단순히 성토하기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사회사를 탐구해 보아야 한다. 이를 훑다 보면 도굴에도 피눈물이 있다. 도굴로 살아갈 수밖에 없던 소위 민초들의 고뇌가 있다. 그런 점에서 주로 무덤을 대상으로 하는 도굴은 한편으로는 분노이며 눈물이기도 하다. 다음 호에서는 이런 여러 도굴 양상을 점검하기로 한다. 



김태식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  




  1. 2018.03.30 17:11 신고

    잘 읽었습니다. 전문가의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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