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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4일 치른 2018년 서울시 지방공무원 7급 필기시험 '한국사 A형' 7번 시험문제가 저렇단다. 이걸 두고 말이 많다. 어느 유명 학원강사가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이 문제를 문제삼았으니, 만인이 보는 인터넷 강의에서 지랄 같다 하는가 하면, 좇같다 했으니, 간평하건대 저 학원강사 말 중에 단 하나도 틀린 대목 없으며, 이런 시험문제를 낸 놈이나, 이걸 감수하고도 그대로 시험문제로 출제를 강행한 놈이나 쳐죽여야 한다. 

물론 그 나름으로는 변명이 있으리라. 문제 출제자가 누구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그의 변명을 들을 수는 없으나, 변별력을 고려해 아마 저런 말도 안되는 문제를 냈을 성 싶다. 그래 내 세대에 행정고시며 사법고시며 하는 국가고시에서 이런 문제도 나온 적이 있었다는 말을 나는 기억한다.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분량이 총 얼마인가를 묻는 문제가 있었단다. 그 말을 고시를 준비하는 내 친구한테 들었을 때 나는 대략은 맞추었으니, 500여 권이다. 이는 내가 고교 국사교과서에서 나온 대목을 기억하는 까닭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저런 식의 문제를 내면 안 된다. 

가뜩이나 역사는 암기과목이라는 인식이 팽배하거니와, 저런 문제는 문제로서 자격도 없는 점은 고사하고, 역사는 덮어놓고 외워야 한다는 당위를 유감없이 증명없이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저 문제가 문제은행에서 고른 것인지, 아니면 특정 전문가가 만든 것인지 자신은 없으나, 그 어떤 경우건, 저 문제를 만든 이는 볼짝없이 대학에서 역사로 밥을 빌어먹고 산다는 교수놈이다. 

그건 그렇고 저 보기로 든 고려 후기 역사서 네 종을 보건대, 더욱 심각성을 더하는 대목은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제외한 나머지 세 종은 이미 존재조차 망실되어버린 소위 일서(逸書)라는 사실이다. 더 간단히 말한다. 나머지 세 종은 우리가 보고 싶어도 볼 수도 없다. 왜? 이미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물론 후대 기적적으로 발견될 가능성까지 없는 않다.)

보기가 제시한 저들 네 종 완성에 얽힌 기록들을 찾아봤다. 

고려사절요 권제 24 충숙왕(忠肅王) 정사 4년, 원(元) 연우(延祐) 4년(1317) 조를 보건대 "여름 4월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 민지(閔漬)가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찬술(撰述)해 올렸다. 위로는 건국 초부터 시작하여 아래로 고종(高宗) 때까지에 이르렀는데 책이 모두 42권이었다. (민)지는 문장에 조금 재주가 있었으나 심술이 바르지 못하고 성리학(性理學)을 알지 못했다. 그가 소목(昭穆)을 논하면서 주자(朱子)의 논의를 그르다고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와 같이 소견이 편파적이었다"고 했으니, 이를 통해 본조편년강목 찬술 시점이 1317임을 확인한다. 

<제왕운기 서문 마지막(오른쪽)과 본문 첫 대목(왼쪽)>

다음으로 유일하게 현존하는 제왕운기는 무엇보다 이승휴 자신이 쓴 서문이 있어 이에서 서문 마지막에 이승휴 스스로가 "지원(至元) 24년(1287) 3월 일 두타산거사(頭陀山居士) 신 이승휴(李承休)"라고 한 점을 참조한다. 이를 통해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완성한 시점을 1287년으로 본다. 한데 이는 문제가 적지 않다. 서문을 쓴 시점이 반드시 그 책이 완성된 시점을 말하는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서문을 미리 써놓기도 하고, 훨씬 나중에 쓰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저 시점은 제왕운기가 완성된 시점을 '추단'하는 증거 중 하나가 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제왕운기가 완성된 시점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 제왕운기는 완성 시점이 1287년 무렵이라는 정도만 확인한다. 

다음으로 허공[許珙]의 《고금록(古今錄)》이 문제거니와, 그 찬성시점을 이승휴가 제왕운기 서문을 쓴 시점보다 불과 3년 빠른 1284년을 제시하거니와, 나로서는 아직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지는 못했다. 이 고금록은 『고려사』 권제105, 열전18 허공[許珙] 열전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보이거니와, 

허공은 정당문학 윤극민(尹克敏)13)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처가 죽은 후 자기 집에서 길렀던 처제의 딸과 재혼하고서 헌사의 탄핵을 받았다. 당시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새로운 관직 제도에 따라 직함이 바뀌자 왕에게 사례했으나 허공만이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뒤에 판밀직(判密直)·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를 역임하였다.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려 하자 왕은 도지휘사(都指揮使)를 각지로 보내어 전함의 건조를 독려했다. 허공은 경상도로 가고 홍자번(洪子藩)은 전라도로 갔는데, 홍자번이 반도 못 마쳤을 때 허공은 벌써 일을 완료하고 돌아오니 홍자번이 그의 능력에 탄복하였다. 참문학사(參文學事)·수국사(修國史)로 옮겨 한강(韓康)·원부(元傅) 등과 함께 『고금록(古今錄)』을 편찬하였고 이에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임명되었다. 

이것만으로는 찬술 완성 시점을 확정할 수는 없다. 다음으로 같은 고려사 권제107, 열전 20 한강(韓康) 열전에는 이에 관여했다는 직접 증언이 없으며, 나아가 같은 고려사 권제 107, 열전 20 원부(元傅) 열전에서는 원부가 "충렬왕 초에 찬성사(贊成事)·판군부(判軍簿)·수국사(修國史)로 있으면서 유경(柳璥)·김구(金坵)와 함께 『고종실록(高宗實錄)』을 편찬했다. 이때 전 추밀부사(樞密副使) 임목(任睦)의 사고(史藁)를 개봉해 보았더니 백지였으므로 수찬관(修撰官) 주열(朱悅)이 그를 탄핵해야한다고 건의했으나 원부와 유경(柳璥)은 말을 막고 사고를 공개하지 않았다. 이것은 원부가 직사관(直史館)으로 있을때 역시 사고를 바치지 않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대목만 보이고, 고금록에 관한 기술은 보이지 아니한다. 

다음으로 이제현의 사략은 틀림없이 史略을 말할 터인데 유감스럽게도 그의 저술로 이 이름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의 문집인 익재난고 중 부록에 실린 그의 연보를 보면 원 순제(元順帝) 지원(至元) 17년 정유 선생 71세 대목에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있다. 

집에서 국사(國史)를 찬수(撰修)할 적에는 사관(史官) 및 삼관(三館)이 다 모였었는데, 뒤에 국사는 병화(兵火)에 잃어버렸다. 또 《금경록(金鏡錄)》을 선(選)하였다. 또 국사가 미비함을 못마땅하게 여겨 기년(紀年)ㆍ전(傳)ㆍ지(志)를 찬수하였는데, 뒤에 홍건적(紅巾賊) 난리에 유실되고 오직 태조(太祖)에서 숙종(肅宗)에 이르기까지의 기년(紀年)만이 남았다. 8월에 왕이 선생에게 명하여 종묘(宗廟)의 소목위차(昭穆位次)를 정하게 하니, 선생이 이에 대한 의(議)를 올렸다.

저 시험 문제 보기 중 하나가 말하는 사략이 이 중 어느 것을 말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저런 문제를 낸 담대함이 나로서는 참으로 기이하기만 하다. 


용재(慵齋) 성현(成俔·1439~1504)의 불후한 야담필기류인 《용재총화(慵齋叢話)》 에 보이는 각종 공무원 신참 신고식 백태(百態)다. 신참 신고식을 면신례(免新禮)라 하니, 말 그대로 아마추어 티를 벗는 의식이라는 뜻이다. 그 폐단을 극력 주창하면서 그 개선을 촉구한 율곡 이이의 글은 이 블로그에 따로 있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제1권

○ 옛날에 신입자(新入者 새로 문과에 등과한 사람)를 제재한 것은 호사(豪士)의 기를 꺾고 상하의 구별을 엄격히 하여 규칙에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바치는 물품이 물고기면 용(龍)이라 하고, 닭이면 봉(鳳)이라 하였으며, 술은 청주이면 성(聖)이라 하며, 탁주이면 현(賢)이라 하여 그 수량도 제한이 있었다. 처음으로 관직에 나가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하고 10여 일을 지나 구관(舊官)과 자리를 같이하는 것을 면신(免新)이라 하여 그 정도가 매우 분명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관(四館 성균관ㆍ예문관ㆍ승문관ㆍ교서관)뿐만 아니라, 충의위(忠義衛)ㆍ내금위(內禁衛) 등 여러 위(衛)의 군사와 이전(吏典)의 복예(僕隸)들까지도 새로 배속된 사람을 괴롭혀서 여러 가지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졸라서 바치게 하는데 한이 없어 조금이라도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면 한 달이 지나도 동좌(同坐)를 불허하고, 사람마다 연회를 베풀게 하되 만약 기악(妓樂)이 없으면 간접으로 관계되는 사람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끝이 없다.

古者制馭新來。所以折豪士之氣。嚴上下之分。使就規矩也。其徵物。魚則稱龍。雞則稱鳳。酒則淸稱聖。而濁稱賢。其數亦有限。初出官曰許參。纔過十餘日。與之同坐。則曰免新。其程度甚明。今也非徒四館。如忠義衛內禁衛曁諸衛軍士吏典僕隷。侵毒新屬之人。凡十貴味。皆督徵之。無有紀極。少或不適於己。雖過一朔。不許同坐。人人皆令設宴。若無妓樂。則侵責無已。

○ 감찰이라는 것은 옛날의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의 직책인데, 그 중에서 직급이 높은 자가 방주(房主)가 된다. 상ㆍ하의 관원이 함께 내방(內房)에 들어가 정좌하며 그 외방(外房)은 배직한 순위에 따라 좌차(坐次)를 삼는데, 그 중에서 수석에 있는 사람을 비방주(枇房主)라 하고, 새로 들어온 사람을 신귀(新鬼)라 하여, 여러 가지로 욕보인다. 방 가운데서 서까래만한 긴 나무를 귀(鬼)로 하여금 들게 하는데, 이것을 경홀(擎笏)이라 하며 들지 못하면 귀는 선생 앞에 무릎을 내놓으며 선생이 주먹으로 이를 때리고, 윗사람으로부터 아랫사람으로 내려간다. 또 귀로 하여금 물고기 잡는 놀이를 하게 하는데, 귀가 연못에 들어가 사모(紗帽)로 물을 퍼내서 의복이 모두 더러워진다. 또 거미 잡는 놀이를 하게 하는데, 귀로 하여금 손으로 부엌 벽을 문지르게 하여 두 손이 옻칠을 하듯 검어지면 또 손을 씻게 하는데, 그 물이 아주 더러워져도 귀로 하여금 마시게 하니 토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또 귀로 하여금 두꺼운 백지로 자서함(刺書緘)을 만들어 날마다 선생 집에 던져넣게 하고, 또 선생이 수시로 귀의 집에 몰려가면 귀는 사모를 거꾸로 쓰고 나와 맞이하는데, 당중(堂中)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선생에게 모두 여자 한 사람씩을 안겨주는데, 이를 안침(安枕)이라 하며, 술이 거나하면 〈상대별곡(霜臺別曲)〉을 노래한다. 대관(臺官)이 제좌(齊坐)하는 날에 이르러서 비로소 자리에 앉는 것을 허용한다. 이튿날 아침 일찍 청에 나아가면 상관인 대리(臺吏)가 함께 뜰 안으로 걸어 들어가 뵙는데, 예가 끝나기도 전에 밤에 숙직한 선생들이 방안에서 목침을 가지고 큰 소리를 지르며 치는 짓이 있으므로, 신귀(新鬼)가 달아나다가 지체하면 그 몽둥이에 얻어맞기도 한다. 이런 풍습의 유래는 이미 오래되었는데, 성종(成宗)이 이를 싫어하여 신래(新來)를 괴롭히는 모든 일을 엄하게 금하니, 그 풍습이 조금 숙어졌으나 아직도 구습 그대로 폐하지 않은 것이 많다.

監察者。是古殿中侍御史之職。其中級高者爲房主。與上下有司。入內房正坐。其外房則以拜職久近爲座次。其中居首者。爲枇房主。新入者呼爲新鬼。侵辱萬狀。房中有長木如椽。令鬼擧之。名曰擎笏。不能擧則鬼以膝納于先生前。先生以拳歐之。自上而下。又令鬼作捕魚之戲。鬼入池水中。以紗帽挹水。衣服盡汚。又令作捉蛛之戱。鬼以手捫摩廚壁。兩手如漆。又使盥手。水甚穢黑。令鬼飮之。無不嘔吐。又鬼以厚白紙作刺書緘。日日投先生家。又先生無時到鬼家。鬼倒着紗帽出迎。設酌堂中。先生各挾一女而坐。謂之安枕。酒酣唱霜臺別曲。至臺官齊坐之日。始令許坐。翌日凌晨詣廳。上官臺吏齊行入謁庭中。禮未畢。夜直先生自房內持木枕。大呼擊之。新鬼走出。如或遲回。必遭其捧。風俗所由來者已久。 成宗惡之。凡侵虐新來者痛禁。其風小戢。仍舊不廢者亦多。


제2권

○ 삼관(三館) 풍속에는 남행원(南行員 조상의 덕으로 하던 벼슬아치)이 그 두목을 상관장(上官長)으로 삼아 공경해서 받들었고, 새로 급제하여 분속된 자는 신래(新來)라 하여 욕을 주어 괴롭혔으며, 또 술과 음식을 요구하되 대중이 없었으니 이는 교만한 것을 꺾으려 함이었다. 처음으로 출사(出仕)하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하고, 예(禮)를 끝내면 신면(新免)이라 하여 신면을 하여야만 비로소 구관(舊官)과 더불어 연좌(連坐)해서 잔치를 베풀었다. 말관(末官)이 왼손으로 여자를 잡고 오른손으로 큰 종을 잡아 먼저 상관장을 세 번 부르고, 또 작은 소리로 세 번 불러서 상관장이 조금 응하여 아관(亞官)을 부르면, 아관이 또한 큰 소리로 부른다. 하관(下官)이 이기지 못하면 벌이 있었으나, 상관이 이기지 못하면 벌이 없었다. 지위가 높은 대신이라도 상관장의 위에는 앉지 못하고, 세 관원 사이에 끼어 앉아서 부르되, 정일품에는 오대자(五大字), 종일품에는 사대자(四大字), 이품에는 삼대자(三大字), 삼품 당상관에는 이대자(二大字), 당하관은 다만 대선생(大先生)이라 부르고, 사품 이하는 다만 선생이라 부르되, 각각 성(姓)을 들어 이를 칭하였고, 부르고 난 뒤에는 또 신래자를 세 번 부르고, 또 흑신래자(黑新來者)를 세 번 부르는데, 흑(黑)은 여색(女色)이다. 신래자는 사모(紗帽)를 거꾸로 쓰고 두 손은 뒷짐을 하며 머리를 숙여 선생 앞에 나아가서 두 손으로 사모를 받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였는데, 이것을 예수(禮數)라 하였다. 직명(職名)을 외우되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 순함(順銜)이요,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면 역함(逆銜)이며, 또 기뻐하는 모양을 짓게 하여 희색(喜色)이라 하고, 성내는 모양을 짓게 하여 패색(悖色)이라 하였으며, 그 별명(別名)을 말하여 모양을 흉내내게 함을 ‘3천 3백’이라 하였으니 욕을 보이는 방식이 많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방(榜)을 내걸고 경하(慶賀)하는 날에는 반드시 삼관(三館)을 맞이한 뒤에 연석(筵席)을 베풀고 예를 행하였는데, 만약 신은(新恩)이 불공하여 삼관에게 죄를 지으면, 삼관은 가지 아니하고 신은도 또한 유가(遊街 급제자가 풍악을 앞세우고 웃어른이나 친척들을 찾아보는 것)하지 못하였다. 삼관이 처음 문에 이르러 한 사람이 북을 치면서 ‘가관호작(佳官好爵)’이라고 부르면, 아전들이 소리를 같이하여 이에 응하고 손으로 신은을 떠받쳐 올렸다 내렸다 하는데, 이를 경하(慶賀)라 하였고, 또 부모와 친척에게 경하하는 것을 생광(生光)이라 하였으며, 또 최후에 여인(女人)을 받들어 경하하는 것을 유모(乳母)라 하였다. 또 신은(新恩)은 방(榜)이 나는 대로 의정부ㆍ예조ㆍ승정원ㆍ사헌부ㆍ사간원ㆍ성균관ㆍ예문관ㆍ교서관ㆍ홍문관ㆍ승문원 등 여러 관사의 선배를 배알하고, 포물(布物)을 많이 걷어 이것으로 연회를 위한 음식을 만드는데, 봄에는 교서관이 먼저 행하되 홍도음(紅桃飮)이라 하고, 초여름에는 예문관이 행하되 장미음(薔薇飮)이라 하였으며, 여름에는 성균관이 행하되, 이를 벽송음(碧松飮)이라 하였다. 을유년 여름에는 예문관이 삼관(三館)을 모아 삼청동(三淸洞)에서 술을 마셨는데, 학유(學諭) 김근(金根)이 몹시 취하여 집으로 돌아가다가 검상(檢詳) 이극기(李克基)를 길에서 만났는데, “교우(交友)는 어디서 오는 길이기에 이렇게 취하였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장미(薔薇)를 먹고 온다.” 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 냉소(冷笑)하였다.

三館風俗。南行員尊其首爲上官長。敬謹奉之。新及第分屬者。謂之新來。侵辱困苦之。又徵酒食無藝。所以屈折驕氣也。始仕曰許參。終禮曰免新。然後與舊官連坐。開筵設酌。則末官以左手執女。右手執大鍾。先呼上官長者三。又細聲呼者三。上官長微應呼亞官。則亞官亦大聲呼之。下官不勝則有罰。上官不勝則無罰。雖位高大臣。不得坐上官長之上。與三官間坐呼。正一品五大字一品四大字二品三大字三品堂上二大字。堂下官只呼大先生。四品以下泛呼先生。各擧姓而稱之。呼畢。又呼新來者三。又呼黑新來者三。黑者女色也。新來倒着紗帽。以兩手負背低首至就先生前。以兩手圍紗帽而上下之。名曰禮數。誦職名。自上而下則順銜。自下而上則逆銜。又令作喜形曰喜色。作怒形曰悖色。言其別名。使爲其狀曰三千三百。其侵辱多端。不可勝言。放榜慶賀之日。必邀三館。然後設筵行禮。若有新恩不恭。得罪於三館。則三館不往。新恩亦不得遊街。三館初到門。一員擊鼓唱佳官好爵。諸吏齊聲應之。以手擎奉。新恩下上之曰慶賀。又慶父母族親曰生光。最後又奉女人。而慶之曰乳母。又新恩聯榜。拜謁于議政府禮曹承政院司憲府司諫院成均館藝文館校書弘文館承文院諸司先生。多徵布物。以爲飮宴之需。春時校書館先行之。曰紅桃飮。初夏藝文館行之。曰薔薇飮。夏時成均館行之。曰碧松飮。乙酉夏。藝文館聚三館飮于三淸洞。學諭金根泥醉還家。檢詳李克基路遇之。問交友從何來。何醉之至此。根答曰食薔薇而去。人有聞者皆齒冷。


제4권

○ 새로 급제한 사람으로서 삼관(三館)에 들어가는 자를 먼저 급제한 사람이 괴롭혔는데, 이것은 선후의 차례를 보이기 위함이요, 한편으로는 교만한 기를 꺾고자 함인데, 그 중에서도 예문관(藝文館)이 더욱 심하였다. 새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배직(拜職)하여 연석을 베푸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하고, 50일을 지나서 연석 베푸는 것을 면신(免新)이라 하며, 그 중간에 연석 베푸는 것을 중일연(中日宴)이라 하였다. 매양 연석에는 성찬(盛饌)을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시키는데 혹은 그 집에서 하고, 혹은 다른 곳에서 하되 반드시 어두워져야 왔었다. 춘추관과 그 외의 여러 겸관(兼官)을 청하여 으레 연석을 베풀어 위로하고 밤중에 이르러서 모든 손이 흩어져 가면 다시 선생을 맞아 연석을 베푸는데, 유밀과(油蜜果)를 써서 더욱 성찬을 극진하게 차린다. 상관장(上官長)은 곡좌(曲坐)하고 봉교(奉敎) 이하는 모든 선생과 더불어 사이사이에 끼어 앉아 사람마다 기생 하나를 끼고 상관장은 두 기생을 끼고 앉으니, 이를 ‘좌우보처(左右補處)’라 한다. 아래로부터 위로 각각 차례로 잔에 술을 부어 돌리고 차례대로 일어나 춤추되 혼자 추면 벌주를 먹였다. 새벽이 되어 상관장이 주석에서 일어나면 모든 사람은 박수하며 흔들고 춤추며 〈한림별곡(翰林別曲)〉을 부르니, 맑은 노래와 매미 울음소리 같은 그 틈에 개구리 들끓는 소리를 섞어 시끄럽게 놀다가 날이 새면 헤어진다. 

新及第入三館者。先生侵勞困辱之。一以示尊卑之序。一以折驕慢之氣。藝文館尤甚。新來初拜職設宴。曰許參。過五十日設宴。曰免新。於其中間設宴。曰中日宴。每宴徵盛饌於新來。或於其家。或於他處。必乘昏乃至。請春秋館及諸兼官。例設宴慰之。至夜半諸賓散去。更邀先生設席。用油蜜果尤極盛辦。上官長曲坐。奉敎以下與諸先生間坐。人挾一妓。上官長則擁雙妓。名曰左右補處。自下而上。各以次行酒。以次起舞。獨舞則罰以酒。至曉。上官長乃起於酒。衆人皆拍手搖舞。唱翰林別曲。乃於淸歌蟬咽之間。雜以蛙沸之聲。天明乃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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