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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춘천박물관 중도식토기 전시코너>

그제 국립춘천박물관 탐방에서 나는 이번에 이 박물관이 채택한 새로운 전시기법이랄까 하는 점들을 중심으로 소개하면서, 개중 특징적이거나 인상적인 대목으로 '중도식 토기(中島式土器)'의 압도적인 위용을 들었다. 이 중도식 토기란 실은 기원전후, 그러니깐 이 지구상에 예수라는 분이 탄생하던 시점,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중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특정한 토기를 지칭하는 말로서, 그 하나하나는 이렇다 할 볼품은 없지만, 그것들 수백 점을 한데 모아놓으니 볼 만하다고 나는 말했다. 

춘천박물관이 이 토기를 저리 집중적으로 소개한 까닭은 '중도식 토기'라는 말을 있게 한 본향이 바로 춘천인 까닭이다. '중도식 토기'란 요컨대 중도라는 지역에서 확인된 토기를 대표로 삼는 같은, 혹은 비슷한 시대 같은, 혹은 비슷한 토기를 일컫는 말이거니와, 예서 말하는 중도가 바로 지금은 의암호 건설로 북한강 수중섬으로 남은 중도를 말한다. 이 중도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는 '가운데 있는 섬'이거니와, 북한강 한복판에 있다 해서 이렇게 일컫는다. 춘천 의암호에서는 북한강 상류와 하류에 서로 인접해서 섬 두 개가 있는 까닭에 상류에 있는 것을 상중도(上中島)라 하고, 그 아래 지점 섬을 하중도(下中島)라 한다. 

이 중도식 무문토기는 무문토기(無文土器)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별다른 문양을 베풀지 아니함을 가장 큰 특징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이 무문토기는 그 전 시대, 그러니깐 한반도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늬없는 토기와는 구별이 되지 않는다. 보통 청동기시대라면 청동기 유물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아야 하지만, 한반도 청동기시대는 청동기 등장이 요새 조금 시간을 치고 올라가 기원전 10세기 어간으로까지 범위를 확장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본격적인 청동기 시대 등장은 그보다 훨씬 낮추어 잡아 실은 초기철기시대가 개막하는 기원전 4~3세기 무렵이 되어야 청동기 비중이 높아진다. 

<국립춘천박물관 중도식토기 전시코너>

그런 까닭에 한반도 청동기시대를 '무문토기시대'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 또한 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한데 '중도식 토기'란 더 풀어제끼면 '중도식 무문토기'라, 이 경우 문제가 되는 점은 그 이전 청동기시대 무문토기와는 어떻게 구별하느냐 하는 고민을 유발한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같은 무문토기라 해도 소위 중도식 무문토기는 그와는 결이 분명히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특징이란 무엇인가? 고고학도들은 소성도에 주목한다. 소성도(燒成度)란 무엇인가? 토기를 가마에서 몇도에서 굽느냐 하는 것이다. 한데 중도식 무문토기는 청동기시대를 특징짓는 무문토기보다는 높은 가마 온도에서 구웠다. 온도가 높으니, 당연히 그 전시대 같은 무문토기보다는 더 단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중도식 무문토기를 흔히 '경질(硬質)무문토기'라 일컫는다. 경질이란 단단하게 구웠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명명법도 문제는 없지 않다. 경질이라는 말에는 상대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영어에 견주어 한국어가 지닌 함정 혹은 결함이기도 한다. 한국어는 영어만큼 비교급 문법이 발달하지 않았다. 따라서 저걸 그대로 대입하면 단순히 '경질무문토기'가 아니요, '상대적으로 더 경질인 무문토기'가 되어야 하며, 이에서 '상대적으로 더'란 비교가치는 그 전 시대 '상대적으로 더 연질(軟質)인 청동기시대 무문토기에 견주어'란 수식어가 잔뜩 달려야 한다. 

저 경질무문토기를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느냐를 내가 몇 군데서 살핀 적이 있는데, 'hard plain coarse pottery'라는 말을 쓰거나 혹은 저 중에서 'coarse'라는 말을 빼고 'hard plain pottery'라 쓰기도 하더라. plain은 이렇다 할 무늬를 넣지 않았다는 뜻이니 저에서 하등 이상한 점은 없거니와 문제는 'hard'라, 도대체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hard'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고민을 유발한다. 나는 저 용어가 그 전 청동기시대 무문토기를 염두에 둔 것이므로 더욱 정확한 의미를 담으려면 'harder plain pottery' 정도로 옮겨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그 전시대 무늬없는 토기는 자연히 'softer plain pottery'가 되기 때문이다. 

<국립춘천박물관 중도식토기 전시코너>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중도식 토기란 저 경질무문토기를 말한다. 이 경질무문토기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이 종래와는 소성도가 높다는 점을 지적했거니와, 다시 들어가서 다른 특징을 보면, 빛깔은 대체로 약속이나 한 듯이 불그레죽죽한 빛을 띤다. 이 시대에 빛깔을 달리하는 다른 토기도 있으니, 회청색경질토기가 그것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빛깔로써 경질무문토기와는 구별하려 하는 것인데, 그 빛깔이 회청색 거무틱틱 계열인 까닭이다. 

흐름을 보면 애초엔 경질무문토기가 먼저 등장해 유행하다가, 그것이 한창 흥성하던 무렵에 회청색 경질토기가 등장해 경쟁하다가 후기로 갈수록 후자 비중이 늘어난다고 고고학계는 본다. '중도식토기'라면 이 시대 토기 중에서도 회청색 경질토기를 제외한 '경질무문토기'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안다. 


그건 그렇고 과연 고고학계가 정의한 '중도식토기(中島式土器)'란 무엇인가? 물론 그것이 전체 한국고고학을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펴낸 '한국고고학사전(2001)'에는 저 표제어로 수록됐거니와 그 정의와 설명, 그리고 참고문헌은 다음과 같다. 

설명

중도 주거지유적 출토 토기를 표지로 하는 중부지역의 초기철기 또는 원삼국시대의 토기를 말한다. 한강유역 철기시대 토기는 크게 3개의 기술적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경질무문토기로 청동기시대 이래의 무문토기 기술전통에 새로운 고화도 소성의 기술이 가미되면서 나타난 유형이고, 둘째는 타날문토기로 철기문화의 보급과 더불어 새로이 등장하는 제작전통인데 주로 호와 같은 기종에 많이 채택된다. 셋째는 회색 또는 흑색의 환원소성토기로 기벽 등 표면처리에 타날문이 없는 무문양의 토기이다. 이른 시기의 유적에서는 경질무문토기의 상대빈도가 높고 늦은 시기의 유적에서는 타날문토기와 회(흑)색무문토기의 빈도가 상대적으로 우세하다.

한강 유역의 철기시대 경질무문토기의 기종 중에서 주류를 이루는 것이 중도식토기로 불리우는 평저외반구연호인데, 중도식토기는 축약 평저나 말각평저(抹角平底)에 배가 부른 갸름한 난형(卵形)의 동부, 밖으로 외반된 구연부를 갖는 형태의 토기로, 몸통의 최대경이 상부에 있으며, 저부의 안쪽은 들린 것과 편평한 것이 있다. 한강유역 철기시대 주거지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강릉 초당동, 양양 가평리, 명주 안인리, 남쪽으로 제주도 곽지패총까지 분포하고 있다. 외반구연평저호는 함북에서도 출토되고 있으나 직접적 관련이 있는지 확실치 않으며, 전통적인 무문토기 제작수법이 한식토기와 같은 외래토기의 영향을 받아 기형의 변화를 가져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송국리형 토기를 그 조형으로 보는 설도 있으나 시기적인 차가 있어 연결에 무리가 있다.

편년에 관해서는 중도 유적 발굴보고서에서는 중도 1호 주거지 출토의 철촉이 북창군 대평리 유적의 상층 출토품과 유사하지만 오히려 토기상은 중층과 유사한 점과 마장리 유적에 대한 김원룡의 연대(B.C. 2세기~기원전후)를 수용하는 입장에서 1~2세기로 추정하였다. 이 연대는 이후 여러 연구자에 의해 수용되었고 중도식 토기 유적의 연대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中部地方 原三國 文化의 編年的 基礎-住居址의 相對編年을 中心으로-(宋滿榮, 韓國考古學報 41, 韓國考古學會, 1999), 利川 孝養山遺蹟 發掘調査 報告書(湖巖美術館, 1995), 韓國의 先·原史土器(國立中央博物館, 1993), 中島積石塚發掘報告(朴漢卨?崔福奎, 中島發掘調査報告書, 1982), 中島 3(池健吉 외, 國立中央博物館, 1982), 中島 1(李健茂 外, 國立中央博物館, 1980)

지금 내 책상머리에 저 오프라인 사전이 없어 이 항목 집필자가 웹상에서는 확인되지 아니하는데, 어투 혹은 문투로 보면 이성주 선생 같다. 아니라면 몹시도 실례한 셈이 되겠지만, 저 양반 아니고서는 저리 어렵게 쓰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한국고고학 대중화를 표방한 저 사전이 말하는 '중도식무문토기'...저 설명 보고 중도식 무문토기가 무엇인지 이해했다는 사람 손들엇! 

장담하거니와 단 한 사람도 저 사전을 통해 중도식 무문토기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왜 저런 일이 발생했는가? 고고학도들끼리 장난 쳤기 때문이다. 원고가 철저하지 아니했고, 그것을 감수하는 자들조차 까막눈이었기 때문이다. 저런 일반교양 대중을 표방한 사전은 해당 표제항목 집필은 저 분야 전문가가 쓴다 해도, 그것을 윤문하고 재가공하는 일은 기자나 문필가들 몫이어야 한다. 

그런 과정이 몽땅 누락됨으로써 저런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다.  

<국립춘천박물관 중도식토기 전시코너>

저 사전 집필을 어떤 이들이 주도했는지 내가 좀 안다. 한국 학계에선 고질이 있으니, 다른 분야 전문가가 참석하는 일을 지질이도 싫어해서 그것을 나와바리 침범으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감수 혹은 윤문을 그들의 권리에 대한 침해로 간주하면서, 아마추어들이 무얼 알겠느냐는 인식이 팽배하다. 내가 저 사전을 감수했더라면, 적어도 저 항목은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고 새로 썼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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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춘천시 중도동 | 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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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 두어 번 허탕을 쳤다. 재개관을 위한 전시실 리모델링 중이라 해서, 꽝꽝 닫힌 문을 뒤로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 국립춘천박물관을 주말인 오늘 문득 찾아 나섰다. 점심을 겸한 아침상을 남영동 사저에서 마주할 때만 해도 뚜렷이 어디로 나서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막연히 오후엔 근교로 바람이나 쐬러 갔다와야겠단 생각만 스칠 뿐이었다. 마침 때늦은 꽃샘 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날이라 멀리 움직이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밥상을 마주하는데, 집사람이 오늘은 어디 나가지 않느냐 해서, 대뜸 나온 말이 "춘천 잠깐 다녀올까 한다"였으니, 그 말에 다시 집사름이 대뜸 "그럼 기차표 끊어주까?" 하기에 "그리하라" 말한 것이 오늘 춘천행을 결행한 계기였다. 밥상 머리에서 휴대폰으로 기차 사정을 보던 집사람이 오후 1시30분 용산역 출발 ITX 기차표가 있다기에 그걸 끊어달라 했다. 듣자니 종착역인 춘천역까지 1시간 20분이 걸린다 한다. 


<야외전시실 광배>


춘천은 서울에서 가까워 아주 자주 다니는 곳 중 하나지만, 내가 기차를 이용하기는 물경 20년이 더 지난 일이 아닌가 한다. 요새는 갈수록 장거리 여행에 차를 몰기가 버거워 되도록이면 대중교통을 이용하자는 쪽으로 바뀌는 중이라, 춘천은 비록 근거리이기는 해도 하루에 차를 몰고 오가기가 힘들어졌으니 그리하여 기차 여행을 생각한 것이다. 


참으로 묘한 것이 어제 이런저런 일로 국립춘천박물관 김상태 관장과 메시지를 주고받을 일이 있어, 그가 말하기를 "내려오심 미리 연락주시라"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아무런 통보도 없이 그 이튿날 딥다 그곳으로 쳐들어가게 된 것이다. 기차 이용은 하도 기억이 오락가락해, 알고보니 남춘천역에서 내리는 편이 박물관과는 접근성이 훨씬 좋았다. 


춘천역에 내리니 생각보단 날씨가 화창했다. 어제만 해도 온통 국토가 미세먼지 천국이었는데, 오늘은 공활한 가을하늘이 펼쳐졌다. 그런 까닭인지, 적어도 대낮엔 꽃샘추위도 기승이 그리 심한 편은 아니었다. 내려 대중교통편을 검색하니 이래저래 복잡하고 괜히 시간만 걸릴 듯했다. 택시를 탔다. 운전하시는 분이 서울서 온단 말을 듣고는 "남춘천역에서 내리시지 왜 이곳으로 왔냐" 한다. 


<청와대 불상 대좌로 지목하기도 하는 석조물>


박물관에 들어서면서 카운터 근무 중인 분께 "혹 관장님 오늘 출근하셨냐" 물어보니, "어린이박물관 개관행사 하시고 조금 전에 들어가셨다"고 한다. 아, 오늘 나왔었구나. 서울로 출발했겠지 하면서, 부러 연락하지 않았다. 괜한 사람 붙잡을 수는 없다. 


박물관에 들어서면서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사진기를 꺼내 그것을 켜고는 께름칙한 생각이 들어 혹시나 하고는 밧데리 상태를 확인하니, 뿔싸, 깜빡깜빡 앵코 직전이라는 신호가 연신 들어왔다. 보조 밧데리를 넣어왔는가 하고는 온 가방을 다 뒤졌더니 없다. 보통 사진 가방째 매고 다니다가 요새는 일반 울러매는 가방으로 바꾸어 그 안에다가 잔뜩 사진기랑 렌즈랑 플래시 등등을 넣어다니곤 하는데, 그만 충전해 놓은 보조 밧데리를 사진가방에다 그대로 놓고 왔나 보다. 힘이 죽 빠진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요샌 폰카로도 그런대로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세상이므로, 폰에 의지하기로 했다. 


언제 밧데리가 죽을지 몰라, 꼭 필요한 장면만 그 카메라로 촬영하기로 하고는 우선 내가 이것만은 반드시 좋은 화질로 담으리라 다짐한 코너들을 물색했다. 이래저리 김상태 관장이 그간 소개한 새 전시실이라든가, 다른 분들이 여러 매체로 소개한 것들을 버무리니, 우선 오백나한상을 담아야 했다. 그리하여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나한상 모신 곳을 물으니 2층이란다. 곧바로 그곳으로 튀어올랐다. 


전시실 입구엔 '3 강원의 중세'라는 간판을 내달았으며, 그 입구 저편으로 펼쳐지는 내부를 보니 볼 만했다. 나중에 죽 훑어보고 알게 됐지만, 보통 '중세'라고 하면 고려시대만을 특정하는 데가 많지만, 춘천박물관은 규모가 작아서인지 별도로 고려실과 조선실을 구분치 아니하고 한데 엎쳐 놓았다. 

<중세실 불상>


역시 이래서 상설전시실도 일정한 주기로 리모델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준다. 춘천박물관은 2002년 개관한 신생 축에 속하는 문화시설이기는 하나, 이곳도 이미 개관 십여 년을 넘기면서 새단장이 필요했다. 박물관 규모가 크지 아니한 까닭에 박물관 전체를 폐쇄하다시피 한 리모델링을 거쳐 지난해 10월에 마침내 다시금 문을 열었다. 그 전과 비교하니 격세지감은 맞다. 새로운 시대감각에 맞추어 시원시원하게 만들어놨다. 


국립박물관 역사에서 이영훈 시대는 획기를 이룬다. 경주박물관장을 거쳐 전 정권 마지막 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그는 두 박물관장 재임 시절에 새로운 전시기법을 도입해 단순무식하게 말하자면 '질보다 양'으로 박물관 전시 방향을 바꾸었으니, 그간 소위 백화점 명품 코너 위주 전시를 유적 전체 맥락을 이해한다는 방향에서 해당 유적과 관련 있는 유물은 모조리 다 내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재개관 춘천박물관 역시 그런 영향이 짙게 드러난다. 특히 중세실을 필두로 1층 선사실과 고대실에서 이런 경향은 농후해 고려조선시대 문화소개에 초점을 맞춘 중세실에서는 영월 창령사지(蒼嶺寺址) 석조 오백 나한상 전시는 그 압권이라 할 만하다.   


이들 석조나한상은 영월군 남편 창원2리 1075번지 일대 경지정리 과정에서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이를 계기로 강원문화재연구소가 2001~2년 발굴조사를 통해 절터 배치 양상을 확인하기도 했다. 나한상을 파편까지 포함하면 도대체 총 몇 점이 수습되었는지 헤아리기도 곤란할 정도로 많다. 완형만 해도 100점에 육박할 듯하다. 조선시대 작품인데 전부 화강암 재질이거니와, 그 표정 하나하나가 생동감 있고 중복되지 아니한다는 점이 매력 포인트라 할 만하다. 히잡 혹은 숄을 머리에 걸친 아줌마 비스무리한 나한이 있는가 하면, 고개를 45도 각도로 치켜 올린 나한도 있어 각양각색이다. 한데 하나같이 나한은 눈을 제대로 뜬 이는 없고 면벽을 하는지 지긋이 감은 표정이다. 


<창령사지 오백나한상>


이걸 한 군데 벽면을 터서 총 4개 정도 되는 단 혹은 감실을 마련하고 배열한 전시기법이 탄성을 자아낸다. 이제 우리 박물관도 이렇게 시도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으니,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격언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사람이 바뀌고 세대가 교체되니 이런 전시기법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비단 이만이 아니라, 세부 코너 하나하나는 이런 식으로 해당 시대 혹은 해당 유적을 온전히 이해하게끔 했으니, 보기 좋은 떡만을 아무렇게나 골라놓고는 이것이 한국문화라는 자랑을 윽박하기에 여념이 없던 김재원 최순우 황수영 김원룡 한병삼 정양모 지건길 이건무 시대와는 격세지감이라 하겠다. 




이런 곳으로 또 하나 인상적인 곳이 1층 역사실 중도 코너다. 중도....의암호가 사방을 둘러친 북한강 수중섬인 중도는 요새 래고랜드 사업으로 분란이 끊이지 않는 곳이거니와, 그 일환으로 대대적인 발굴조사 결과 실로 엄청난 성과를 쏟아냈으니, 고인돌만 해도 100기를 상회하고, 해당 시대 주거지는 천기를 넘었으며, 초기철기시대 유적도 드글드글한 곳으로 드러났다. 이 중도는 한국고고학에서는 중도식 무문토기 존재를 알린 곳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의가 있다. 


물론 중도식 무문토기는 그 전에 이미 1964년 광주 풍납리토성에서 존재를 알렸지만,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실습발굴조사에서 확인한 까닭에 제 대접을 받지 못하고는 그만 그 영광을 중도로 넘겨주어야 했다. 중도 유적은 80년대초 국립박물관 조사에 의해 본격적인 조명이 이뤄졌거니와, 역시 국립박물관 힘이 센 까닭인지 그네들이 명명한 중도식 무문토기라는 명패가 대세를 장악했다. 중도식 무문토기란 경질무문토기라고도 하는 것으로 그 이전 무문토기 전통을 계승하되, 소성도를 높임으로써 토기 혁명을 이룩한 것으로 간주되거니와, 중심연대는 서력기원전후가 아닌가 하며, 집중 분포지역은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중부지역이다. 


<창령사지 오백나한상>


춘천박물관에는 이 중도식 무문토기만 수백 점을 가지런히 쌓아놓았다. 이것 역시 짙은 이영훈 영향이며, 더 범위를 넓히면 일본에서 더러 시도하는 것으로, 일본 국립박물관에서는 그런 종적을 찾기는 힘들되,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에서 주로 시도하는 기법이기도 하다. 이런 전시기법은 무엇보다 압도적인 시각효과를 주는 까닭에 고고학 문외한한테도 이것이 고고학이라는 깊은 인상을 주기 마련이며, 나아가 관련 유물 몇 점 표본으로 뽑아다 놓고는 설명만 잔뜩 갖다 붙이는 종래의 주입식 문화재 교육과도 결을 달리한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할 만하다. 


<중도식 무문토기>   


기타 주목할 만한 대목이 적지 않으나, 차후 기회를 다시 엿보기로 하고 이 두 가지만으로 맛배기를 보인 것으로 갈음하노라.  


<중도식 무문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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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춘천시 석사동 95-3 | 국립춘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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