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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원성왕 김경신(金敬信) 친모(親母)이며 대아찬을 역임한 김효양(金孝讓)과의 사이에서 왕을 낳았다. 그리하여 원성왕 즉위와 더불어 왕태후로 추봉되어 받은 시호가 바로 이것이다. 다만 표제 표기는 그의 당대에 건립된 갈항사 석탑기에 등장하는 표현이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소문(昭文)이라 하고 있다.    

갈항사석탑기(葛項寺石塔記․천보天寶 17년․신라 경덕왕 17년․758) : 두 탑은 천보(天寶) 17년 무술에 세우시니라. 남자형제와 두 여자 형제 모두 셋이 업으로 이루시니라. 남자형제는 영묘사(零妙寺)의 언적(言寂) 법사이며, 큰누이는 조문황태후(照文皇太后)님이시며, 작은누이는 경신태왕(敬信太王)이시니라. (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娚姉妹三人業以成在之娚者零妙寺言寂法師在旀姉者照文皇太后君妳在旀妹者敬信太王妳在也.)  

☞소문(昭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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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 경쟁자가 폭우에 발 묶인 틈타 대권 차지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2017.05.07 02:44 | 530호 23면 

  

대권(大權)은 우연의 소산일까 아니면 운명의 장난일까? 혹은 하늘의 의지일까? 이런 물음에 전근대 동아시아 이데올로그들은 언제나 천명(天命)을 거론했다. 실제로 천명이 작동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겉으론 그러했다. 하지만 추잡한 권력투쟁을 천명이란 이름을 빌려 포장한 데 지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선덕왕 후계 언급 없이 타계하자

김경신·김주원 치열한 왕권 경쟁

김주원, 큰 비 내려 건너 오지 못해

하늘의 뜻이라며 김경신 왕위 계승

김주원을 명주군의 왕에 책봉


신라는 일통삼한(一統三韓) 전쟁과 그에 따른 세계 제국 당(唐)과의 일전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절대 번영을 구가했지만, 소나무가 언제나 푸를 수는 없었다. 그 피로감이 극에 달하자 체제가 흔들리는 징후를 곳곳에서 보였다. 마침내 100년 정도가 흐르자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기 시작하면서 낯선 장면들을 목도하게 되었으니, 왕위 계승전쟁이 그것이다. 제38대 원성왕(元聖王·재위 785~798년) 역시 이 와중에 힘으로 대권을 쟁취한 인물이다.


그를 일컬어 삼국사기 그의 본기에는 “이름은 경신(敬信)이며, 내물왕(奈勿王) 12대손이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繼烏夫人)이며, 왕비는 김씨이니 각간(角干·신라시대 최고 관위) 신술(神述)의 딸이다”고 했다. 이어 그가 대권을 쥐게 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이어 간다.


“혜공왕(惠恭王·재위 765~780년) 말년에 신하들이 반역하여 날뛰니 선덕(宣德)이 당시에 상대등이 되어 임금의 측근 중 나쁜 무리를 제거할 것을 앞장서 주장하니 경신이 그를 도와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자, 선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바로 상대등으로 삼았다.”


36대 혜공왕은 신라사의 마지막 평화기라 일컬을 시대를 구가한 경덕왕의 아들로 즉위했지만, 재위기간 내내 평안한 해가 없다시피 했다. 게다가 경주 일대를 대지진이 여러 차례 덮쳐 막대한 피해를 내니 더욱 뒤숭숭할 수밖에 없었다.


반란은 언제나 이런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혹은 그것을 조장하면서 싹을 틔우게 마련이다. 왕은 유약한 데다 환락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재위 16년(780)에 접어들어 정월에는 누런 안개가 끼고, 2월에는 흙비가 내리더니, 마침내 이찬(伊飡·신라 17등관계 중 둘째) 김지정(金志貞)이라는 고위 관료가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포위한 채 왕을 공격했다.


반란 진압하고 왕위에 오른 선덕왕


이 반란은 여름 4월에야 끝난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해당하는 상대등(上大等·국무총리) 김양상(金良相)이 이찬 김경신과 함께 쿠데타군을 진압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임금과 왕비는 살해된다.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 이제 차기 대권이 누구로 가느냐가 남았다. 당연히 힘을 쥔 이는 반란 진압에 혁혁한 공을 세운 김양상과 김경신 일당이었다. 이들은 제3자를 세우는 대신 자신들이 직접 전면에 나서는 길을 선택했다. 김양상이 먼저 왕위에 오르니, 그가 죽은 뒤 선덕(宣德)이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이다.


김양상이 즉위할 때 나이가 얼마였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직전 직위가 원로대신의 대표자에 해당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상대등이었던 사실에 견주어 볼 때 상당한 고령이었다고 짐작할 뿐이다. 그런 까닭에 그가 장기간 재위하면서 안정된 국정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긴 힘들었다. 더구나 권력을 다른 쿠데타 주도 세력들과 사실상 분점한 상태나 다름없었으니, 정권기반은 취약했던 듯하다.


예상대로 그는 재위 6년 만 인 785년 봄에 타계한다. 한데 이상한 점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그의 유언이 있지만, 후계자에 대해선 어떤 언급도 없다. 이는 곧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의 예고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와중에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등장한 이가 김경신과 김주원(金周元)이었다. 둘은 선덕왕 말년에 이르러 치열한 왕권투쟁을 벌인다. 이 전투에서 마침내 김경신이 승리하니 이가 곧 원성왕이다.


이 권력투쟁이 처음부터 김경신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는 김주원이 주도권을 쥐었다는 것을 『삼국사기』 원성왕본기 기록이 증언한다.


“선덕왕이 죽자 아들이 없으므로 여러 신하가 논의한 끝에 왕의 조카뻘인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 이때 주원은 서울(京)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閼川) 물이 불어 주원이 건널 수가 없었다.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이라는 큰 자리는 본디 사람이 어찌할 수 없다. 오늘의 폭우는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앞선 임금의 아우로 본디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모가 있다’고 했다. 이에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일치되어 그를 세워 왕위를 계승케 했다. 이윽고 비가 그치니 경성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어쩐지 개운찮은 조작의 냄새가 난다. 폭우가 조작됐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일을 빌미로 천명이란 명분을 앞세워 정권이 김경신에게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음을 정당화한 구절이란 의심이 가시지 않는 대목이다. 알천이란 경주 분지를 관통하는 형산강으로 흘러드는 지류 중 하나다. 북쪽을 관통한다 해서 북천(北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상류를 막은 덕동댐과 보문호 때문에 평소 수량은 ‘도랑’ 수준을 넘지 못하지만, 신라시대에는 홍수 피해가 극심했던 모양이다. 공교롭게도 선덕왕 김양상이 죽자 폭우가 쏟아져 알천이 범람하고, 이는 김주원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다. 유감스럽게도 신라왕궁 월성은 알천 남쪽에 있었던 것이다. 문헌에는 그런 기록이 없지만, 그의 경쟁자인 김경신은 월성 가까운 곳에 근거지가 있었던 듯하다. 결국 김주원은 폭우로 불어난 알천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며, 대권의 꿈을 접어야 했다.


좀 더 상세한 일화가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 ‘원성대왕(元聖大王)’ 조에 전해 온다. 이에 따르면 선덕왕이 죽을 무렵 김주원은 이찬이자 상재로, 각간인 김경신보다 직위도 높았다고 한다. 이런 김경신이 하루는 꿈을 꾸었다. 그가 복두를 벗고 흰 갓을 쓰고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 천궁사(天官寺)라는 사찰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꿈에 대한 해석은 달랐다. 한 점쟁이는 “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라고 해몽을 했다.


하지만 이 꿈을 들은 아찬(阿飡신라 17등 관제 중 여섯째) 여삼(餘三)이라는 사람이 전연 다른 해석을 내놨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앉는 이가 없다는 뜻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열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손(代孫)이 왕위를 이어받을 징조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이 해몽을 들은 김경신이 “내 위에 주원(周元)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상위(上位)에 있을 수가 있단 말이오?”라고 반문하니, 여산은 “몰래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 지내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고 하니 이에 따랐다고 한다. 북천신은 말할 것도 없이 북천인 알천을 지배하는 신이다. 이런 북천신에게 기도했더니, 북천이 홍수로 넘쳐 라이벌인 김주원을 제치고 김경신이 왕이 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김주원, 오늘날 강릉 김씨 시조


그렇다면 김경신에게 왕위를 빼앗긴 김주원은 어찌 되었을까. 또 왕이 된 김경신은 김주원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으므로, 보통은 경쟁자를 각종 명목을 달아 처단 멸족해야 한다. 하지만 김경신은 김주원을 그리 대접하지 않았다. 아니,그리할 힘이 없었다. 어느 한 쪽이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확보하지 못할 땐 서로가 사는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요즘 정치권에서 유행하는 협치(協治)나 연정(聯政)쯤에 해당하는 공생의 길을 선택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인물 조에는 김주원이 왕위에서 밀려난 후 “화를 당할까 두려워해서 명주(지금의 강릉 일대)로 물러나 서울에 가지 않았다. 2년 뒤에 (원성왕이) 주원을 명주군 왕으로 책봉하고 명주 속현인 삼척·근을어·울진 등의 고을을 떼서 식읍(食邑·신하에게 내린 토지)으로 삼게 했다. 자손이 이로 인해 부(府)를 관향(貫鄕)으로 삼았다”고 했다. 이것이 오늘날 강릉 김씨의 탄생 배경이다.


이렇게 해서 명주는 그 아들 김종기(金宗基), 손자 김정여(金貞茹), 증손 김양(金陽)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김주원 후손의 작은 왕국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김주원은 강릉을 선택했을까? 그곳이 아마 그의 가문과 인연이 깊었던 곳이었던 것 같다. 더구나 태백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던 데다 신라로서는 북방이었던 까닭에 원성왕 김경신으로서도 그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해로울 건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1200여 년 전의 일이지만 협치의 도량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막은 경우로 봐야 할 것 같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소백산맥 기슭 산골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영문학과에 들어가 한때는 영문학도를 꿈꾸다 가난을 핑계로 접었다. 23년간 기자로 일했는데, 특히 역사와 문화재 분야에서 한때 ‘최고의 기자’로 불리며 맘껏 붓끝을 휘두르기도 했다. 무령왕릉 발굴 비화를 파헤친 『직설 무령왕릉』을 비롯해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풍납토성』 등의 단행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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