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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이 신라의 미래 동량으로 두각을 드러나기 시작할 무렵, 한반도는 시종 전운이 감도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단 한 해도 전쟁이 없는 시대로 돌입했다. 삼국사기 신라 진평왕본기에서 그 흔적을 추려보면, 38년(616) 겨울 10월, 백제가 모산성(母山城)을 쳤는가 하면, 40년(618)에는 북한산주 군주 변품(邊品)이 가잠성을 되찾고자 병사를 일으켜 백제와 싸웠지만 패배하고 해론(奚論)이 전사했다.


45년(623) 겨울 10월에는 백제가 늑노현(勒弩縣)을 습격하더니 이듬해 46년(624) 겨울 10월에는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속함(速含)ㆍ앵잠(櫻岑)ㆍ기잠(歧暫)ㆍ봉잠(烽岑)ㆍ기현(旗縣)ㆍ혈책(穴柵)  여섯 성을 포위한 결과 세 성이 함락되고 급찬 눌최(訥催)가 전사하는 대패를 기록했다. 


시종 백제 공세에 시달린 신라는 47년(625) 겨울 11월에는 당에 보낸 사신 편을 통해 고구려가 길을 막고서 조공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자주 자기네 국경을 침입한다고 호소했다. 48년(626) 가을 7월에도 당에 사신을 보내 같은 호소를 하니 당 고조 이연이 고구려와 화친을 권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장 그 다음달에 백제가 주재성(主在城)을 공격해 성주 동소(東所)를 전사케 했다. 


49년(627) 가을 7월에는 장군 사걸(沙乞)이 이끄는 백제군이 서쪽 변방 성 두 곳을 함락하고 남녀 3백여 명을 사로잡아 갔다. 50년(628) 봄 2월에는 백제가 다시 가잠성을 포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 기간 기상재해도 빈발해 이해 가을에는 백성들이 주려서 자식들을 파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백제와 고구려 협공에 내내 시달리던 신라는 당에 호소해 외교력으로 그들의 예봉을 피하고자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런 신라가 마침내 선제 공격으로 전환을 선언한다. 


진평왕 51년(629) 가을 8월, 신라는 대병을 일으켜 고구려 공략에 나서니, 점령 대상지는 낭비성(娘臂城)이었다. 왜 낭비성인가? 이를 엿볼 직접 자료가 현재 우리한테는 없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낭비성이 어디인지를 알아야, 그 지정학적 중요성을 간취하는 한편, 이곳을 점령하고자 한 신라의 의도를 어느 정도 간파하겠지만, 이를 알아낼 방도가 현재로서는 없다. 


다만, 신라가 이 전쟁에 얼마나 많은 공력을 투입했는지는 이때 신라군 진용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한다. 이와 관련해 진평왕본기에서는 "임금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했다"고 하지만, 같은 사건을 전하는 김유신 열전(上)을 보면, 이 전쟁이 신라로서는 훨씬 더 심대한 사안이라, 그야말로 국운을 걸다시피했음을 엿볼 수 있으니, 이에 이르기를 


건복 46년(629) 기축 가을 8월, 왕이 이찬 임말리(任末里), 파진찬 용춘(龍春)ㆍ백룡(白龍), 소판 대인(大因)ㆍ서현 등을 파견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케 했다. 


고 했고, 이에서 김유신은 "중당 당주(主)"라 했으니, 신라 정벌군 예하 부대 하나를 이끌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김유신은 35살, 군인으로서는 한창 혈기방장하던 때라, 아마 요즈음으로 치자면 영관급 대대장 정도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진평왕본기에 견주어 김유신 열전 기록이 훨씬 더 상세하며, 이를 통해 신라군 진용 편성도 더 확연히 드러난다. 이에서 총사령관은 임말리였으니, 그의 관위가 17단계 중 넘버 투인 이찬이었다. 재상이었다. 나아가 그 예하 각 부대를 이끈 장군들을 보면 대인과 서현이 3등 소판이었고, 용춘과 백룡은 4등 파진찬이었다. 이런 군부대 편성은 이보다 대략 30년 뒤, 신라가 대대적인 백제 정벌 전쟁을 일으킨 그때 신라군 진용에 견줄 만하다. 


임말리는 아마도 총사령관으로서 중앙군을 맡았을 수도 있고, 혹은 총사령관으로서 각 군단을 지휘하기만 했을 수도 있다. 이에 김유신이 예하 부대장으로 참전한 것이다. 나머지 소현과 대인, 용춘과 백룡은 각기 군단을 거느렸을 것이니, 이로써 본다면, 신라군은 아마도 4군, 혹은 5군으로 편성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이 전쟁에 투입된 신라군이 얼마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만명 이상을 헤아리는 대군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까닭에 신라로서는 반드시 이 전쟁에서 이겨야만 했다. 그런 대상지로 낭비성을 고른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그곳이 바로 신라로 진격하는 고구려 남방 전진기지의 최중심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곳을 점령하면, 당분간은 고구려의 예봉은 피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 신라는 마침내 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전개된 전투는 신라군에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고구려군 반격에 신라군은 전사자가 속출했다. 김유신 열전에 이르기를 "그때 고구려인들이 병사를 내어 맞받아치자 우리 편이 불리해져 전사자가 매우 많았고 사기도 꺾여서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고 한 대목이 그런 사정을 웅변한다. 


이 전투가 공성전은 아니었음이 확실하다. 그것은 이 사정을 전하는 진평왕본기에서 "고구려인이 성에서 나와 진을 쳤는데, 군세가 매우 강성하여 우리 병사가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하며 싸울 생각을 못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실제 이후 전개된 전투 양상을 봐도 양국 군대는 평야 혹은 구릉지대에서 싸웠다. 


패배가 목전에 다가온 이때 김유신이 나선다. 이 대목을 열전에서는 "유신이 이때 중당 당주였는데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였다"고 하고, 진평왕본기에서는 


"나는 '옷깃을 잡고 흔들면 가죽옷이 바로 펴지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고 들었다, 내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노라!” 라는 말을 남기고는 그 즉시 말에 올라 칼을 빼들고 적진으로 향해 돌진했다. 이렇게 세 번을 들어갔다 나왔는데 매번 들어갈 때마다 장수 목을 베거나 군기를 뽑았다. 여러 군사가 승세를 타고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돌격하여 5천여 명을 목 베어 죽이니, 낭비성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고 했다. 이를 통해 이 전투가 평야전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한다. 외우 서영일 박사는 낭비성을 파주 칠중성으로 지목했거니와, 낭비성이 칠중성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전투지는 칠중성 자체가 아니었고, 그 근처 평야지대였다. 


나아가 이 전투가 얼마나 규모가 컸던지, 고구려군 전사자가 5천 명에 달했다. 신라로서는 명운을 건 전투에서, 다름 아닌 김유신이 대전과를 올렸으니, 그의 명성은 이젠 누구도 넘볼 수 있는 정상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 낭비성 전투는 만호태후와 미실궁주가 후원한 미래의 동량 김유신이 역사의 전면에, 이제는 최고 실력자로, 그것도 본인 실력으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한반도엔 김유신이라는 깃발이 마침내 펄럭이기 시작했다. 


나아가 낭비성 전투는 김서현과 김용춘 시대가 이제는 막을 내렸음을 고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이들이 비록 승리를 이끌기는 했지만, 이제는 늙어 뒷방으로 물러날 시대가 온 것이다. 장강 물길을 밀어내는 것은 뒷물이다. 그렇게 서현과 용춘은 김유신이라는 뒷물에 떠밀려 조용히 물러났다. 

김춘추 아버지 용수·용춘은 형제 사이 

[중앙선데이] 입력 2016.12.18 00:42 | 510호 23면 


서기 654년 봄, 진덕여왕이 죽자 신라엔 성골(聖骨)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선덕여왕 즉위(632년) 때부터 남자 성골이 씨가 말랐다. 하는 수 없이 마지막 성골 여인인 선덕과 진덕을 차례로 왕으로 세운 것이었는데,이는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신분제 사회인 신라에서 성골은 품계가 없는, 더 정확히는 품계를 초월하는 신분이었다. 그 다음 신분인 진골(眞骨)은 신하들이 차지했다. 성골이 멸종했으므로 신하 중 누군가가 왕위에 올라야 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김춘추다. 그의 후견인은 처남 매부가 되어 끈끈한 인연을 다진 맹장 김유신. 처남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김춘추가 마침내 권좌를 차지하니, 그가 훗날의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다. 김춘추의 계보를 『삼국사기』 본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태종무열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다.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伊飡) 용춘(龍春, 혹은 용수라고도 함)의 아들이다. 어머니 천명부인은 진평왕의 딸이다. 왕비는 문명부인으로 각찬(角飡) 서현(舒玄)의 딸이다.” 


그의 할아버지 진지는 진흥왕의 둘째아들로 형 동륜(銅輪)태자가 일찍 죽자 왕위를 이었지만 재위 4년 만에 황음무도(荒淫無道)하다 해서 쫓겨났다. 원래 이름이 금륜(金輪)인 진지왕은 지도(知道)를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용춘이다. 


한데 무슨 사연이 있기에 『삼국사기』는 김춘추의 아버지를 “용춘(혹은 용수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다”(龍春[一云龍樹]之子也)고 했을까? 용수와 용춘은 같은 인물인가, 아니면 다른 인물인가. 단순한 한자 표기의 차이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면 이 구절은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것을 판별할 결정적인 증거가 『신라본기』에 나와 있다. 진평왕본기 44년(622)조를 보면 “이해 2월에 이찬 용수를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삼았다”는 귀절이 있다. 이찬은 17등급으로 나뉜 신라 관위(官位) 체계에서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는 제1등급을 뜻한다. 그러나 이보다 7년이 지난 진평왕본기 51년(629)조를 보면 “이해 가을 임금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용춘이 김유신 아버지인 김서현과 함께 고구려군에 맞선 신라군 총사령관이 됐다는 의미다. 다만 이때 용춘의 관위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장군은 전시에 임금이 임명하는 임시 군사직이었기 때문이다. 


의문의 열쇠는 다시 『삼국사기』에서 풀린다. 김유신 열전(上)에 다음과 같이 대목이 보인다. “건복(建福) 46년(629) 기축 가을 8월, 왕이 이찬 임말리(任末里)와 파진찬 용춘(龍春)·백룡(白龍), 소판 대인(大因)·서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낭비성을 치게 했다.” 


낭비성 전투 당시 신라군 총사령관은 이찬 임말리였으며, 용춘과 서현은 그를 보좌하는 부사령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파진찬은 4등, 소판은 3등이었다. 낭비성 전투가 신라에는 얼마나 큰 전쟁이었는지, 그에 대응하면서 짠 진용을 보면서 실감한다. 


유관한 세 개의 기록을 통해 용수와 용춘이 다른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622년에 관위가 1등 이찬이었던 사람이 7년이 지난 629년에 4등 파진찬으로 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용수와 용춘은 별개의 인물로 보는게 상식적이다. 


우리 사학계에서 어떤 학자도 용수와 용춘이 별개 인물임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이 기이하기만 하다. 같은 인물에 대한 약간 다른 표기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같은 사람에 대한 두 가지 이상의 다른 표기를 소개할 적에 ‘龍春[一云龍樹]’와 같은 식으로 흔히 적기 때문이었다. 두 책 모두에서 용춘 혹은 용수가 곳곳에 등장하거니와 그때마다 “용춘은 용수라고 한다”거나 “용수는 용춘이라고도 한다”고 적었으니, 둘을 동일인이라고 철석같이 믿어버렸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화랑세기』로 눈을 돌려보자. 여기선 용수를 형, 용춘을 동생으로 그리고 있다. 김춘추와의 관계를 보면, 용수가 생물학적인 아버지요, 용춘은 작은 아버지이자 양아버지이기도 하다. 이에 의하면 김춘추는 용수와 천명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용수는 죽으면서 부인과 아들을 모두 동생에게 맡겼다. 이렇게 해서 김춘추는 작은아버지 보호를 받고 자라서는 나중에 권좌에 오르게 되고, 그리하여 즉위하자마자 양아버지를 문흥대왕(文興大王)에 추봉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용수와 용춘을 헷갈린 사연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두 사람은 부모가 같은 형제였던 데다 공교롭게도 ‘용(龍)’이라는 돌림자를 썼으며, 더 나아가 김춘추에게는 생부와 양부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본기에서 김춘추를 일러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용춘(혹은 용수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라고 한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다. 


『화랑세기』는 우두머리 화랑인 풍월주(風月主)를 차례로 역임한 32명에 대한 전기다. 이에 의하면 그 열세 번째 풍월주가 용춘이다. 그는 아버지가 금륜왕(金輪王), 곧 진지왕이고 어머니는 지도태후(知道太后)다. 형으로 용수(龍樹)가 있고, 누나로는 용명(龍明)이 있다.용명은 나중에 진평왕에게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용수와 용명이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용춘에 대해“태화(太和) 원년(647) 8월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0세였다”는 기록이 있어, 아버지 진지왕이 임금이 된 지 3년째인 578년에 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진지왕은 579년, 쿠데타로 쫓겨난다. 『화랑세기』는 “(용춘)공은 아직 어려서 그(아버지 금륜왕) 얼굴을 몰랐다. (어머니인) 지도태후가 태상태후의 명령으로 다시 새로운 왕(진평왕)을 섬기게 되자 공은 새로운 왕을 아버지라 불렀다. 이 때문에 왕이 가엽게 여겨 총애하고 대우함이 매우 도타웠다”고 돼있다. 하지만 용춘은 나중에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이에 격분해 화랑으로 들어가 풍월주에까지 오른다. 


그렇다면 형은 어찌 되었을까? 이 과정에서 천명이라는 여인과 용수-용춘 형제를 둘러싼 재미난 일화가 전한다. 이는 곧 김춘추의 출생 비밀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진흥왕 손자인 진평왕은 재위 기간이 장장 53년(579~632)에 달했지만, 왕위를 물려줄 적통 왕자를 오랫동안 생산하지 못했다. 그 결과 ‘한국 역사 최초의 여왕’이라는 선덕이 탄생하게 됐다. 진평은 애초에는 다음 보위를 이을 인물로 용수를 점찍었다. 진평은 진흥왕의 큰 아들인 동륜태자의 아들이고, 용수는 진흥왕의 둘째아들인 금륜태자(진지왕)의 아들이니, 진평과 용수는 사촌이다. 용수는 아버지가 폐위되지 않았으면 아마도 다음 보위를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지왕이 폐위되면서 용수는 성골 적통 왕자에서 한 단계 떨어져 진골이 되었던 것같다. 거주지도 아버지가 왕위에 있을 적에는 당연히 궁궐 안이었겠지만, 쿠데타로 쫓겨난 뒤에는 궁궐 밖에 마련했을 것이다. 왕위 계승권이 없는 왕자를 전군(殿君)이라 부른다. 신분이 강등된 용수 역시 전군이었다. 이런 용수를 진평왕이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자격을 구비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진평이 생각한 것이 그를 사위로 만드는 일이었다. 사촌인 용수를 사위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직계 가족 일원으로 편입시키려 했던 것이다. 


진평왕은 마야(摩耶) 부인과 사이에 두 딸, 천명(天明)과 선덕(善德)을 뒀다. 마야부인은 석가모니 부처의 어머니한테서 따온 이름이다. 진평왕 부부는 장녀인 천명을 용수와 짝 지워 주려했지만 천명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랑세기』 용춘공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공주는 마음속으로 (용춘)공을 사모하여 (마야) 황후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남자는 용숙(龍叔)과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고 했다. 황후가 용수로 생각해서 시집을 잘못 보낸 것이다.” 


용숙이란 ‘용(龍)자를 쓰는 아재비’를 말한다. 용수건 용춘이건 천명에게는 오촌 당숙이다. 천명의 말을 잘못 알아들어 용수와 짝지어 주었다는 대목을 곧이곧대로 믿을 이유는 없다. 마야부인이 일부러 그리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명의 마음엔 오매불망 용춘만 어른거릴 뿐이었다. ‘천명의 꿈’은 남편 용수가 죽고 나서 풀린다. 동생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안 용수는 죽으면서 천명을 용춘에게 맡기고, 용춘도 하는 수 없이 천명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때 어머니를 따라 용춘에게 간 용수의 아들, 그가 바로 김춘추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 치고는 기구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기야 그런 김춘추 역시 훗날 김유신의 계략에 말려들어,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를 받아들여 혼전 임신을 해서 아들(문무왕 김법민)을 낳았으니 말이다. 이런 장면들을 보면 출생의 비밀로 얼룩진 막장 드라마가 단순히 상상의 소산만은 아닌 듯하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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