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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문(金仁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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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694년. 字는 인수(仁壽)이며,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문명왕후 사이에서 난 둘째 아들로, 문무왕 김법민의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두루 책을 읽었고 글씨를 잘 썼다. 어린시절 당에 보내져 그곳에 눌러앉아 숙위했다. 이런 경력을 발판으로 폭넓은 인망을 활용하고, 중국어에도 능통했을 것이므로, 신라에 의한 일통삼한 전쟁기에는 당과의 외교업무를 전반적으로 관장했다. 당에서 죽어 시신은 신라로 운구해 안장했다. 


삼국사기 권 제5(신라본기 제5) 진덕왕 : 5년(651) 봄 정월 초하루에 왕이 조원전(朝元殿)에 나아가 백관으로부터 새해 축하인사를 받았다. 새해를 축하하는 예식(禮式)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2월에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로 고치고 파진찬 죽지(竹旨)를 집사 중시(執事中侍)로 삼아 기밀업무를 관장케 하였다. △△△ 파진찬 김인문(金仁問)을 당에 보내 조공하고 머물러 숙위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3년(656) 김인문이 당에서 돌아와 마침내 군주(軍主)에 임명되어 장산성(獐山城) 쌓는 일을 감독하였다. 가을 7월에 아들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문왕을 당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7년(660) ... 3월에 당 고종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또 칙명으로 왕을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응원하게 하였다. 7년(660) ... 3월에 당 고종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또 칙명으로 왕을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응원하게 하였다. ...9월3일에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이 군사 1만 명으로써 사비성(泗城)에 남아 지켰는데, 왕자 인태가 사찬 일원(日原), 급찬 길나(吉那)와 함께 군사 7천 명으로써 그를 보좌하였다. 정방은 백제 왕 및 왕족·신료 93명과 백성 1만 2천 명을 데리고 사비에서 배에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김인문과 사찬 유돈(儒敦), 대나마 중지(中知) 등이 그와 함께 갔다.


삼국사기 권 제7(신라본기 제7) 문무왕 하 : 14년(674) 봄 정월에 ... 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고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니, 당나라 고종이 크게 화를 내어 조서로써 왕의 관작을 깎아 없앴다. 왕의 동생 우효위원외대장군(右驍衛員外大將軍) 임해군공(臨海郡公) 김인문이 당의 서울[京師]에 있어, 신라 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衛尉卿) 이필(李弼),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 이근행으로 보좌하게 하여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왔다.


삼국사기 권 제6(신라본기 제6) 문무왕 上 : 원년(661) 6월에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던 인문(仁問)과 유돈(儒敦) 등이 돌아와 왕에게 고하였다. 황제께서 이미 소정방을 보내 수군과 육군 35도(道)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고, 마침내 왕께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서로 응원하라고 하였습니다. [왕께서] 비록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이지만 무거운 황제의 칙명을 어기기는 어렵습니다. 가을 7월 17일에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인문, 진주, 흠돌(欽突)을 대당(大幢) 장군으로, 천존, 죽지, 천품(天品)을 귀당(貴幢) 총관으로, 품일, 충상, 의복(義服)을 상주(上州) 총관으로, 진흠, 중신(衆臣), 자간을 하주(下州) 총관으로, 군관(軍官), 수세(藪世), 고순(高純)을 남천주 총관으로, 술실(述實), 달관(達官), 문영을 수약주 총관으로, 문훈(文訓), 진순(眞純)을 하서주 총관으로, 진복(眞福)을 서당(誓幢) 총관으로, 의광을 낭당(郎幢) 총관으로, 위지(慰知)를 계금(衿) 대감으로 삼았다. 2년(662) 봄 정월에 ... 왕이 유신에게 명하여 인문(仁問)과 양도(良圖) 등 아홉 장군과 함께 수레 2천여 대에 쌀 4천 섬과 조(租) 2만 2천여 섬을 싣고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2월...6일에 양오(楊==)에 이르러 유신이 아찬 양도(良圖)와 대감 인선(仁仙) 등을 보내 [당 군영에] 군량을 가져다 주었는데, 소정방에게는 은 5천7백 푼[分], 가는 실로 곱게 짠 베 30필, 두발(頭髮) 30량(兩)과 우황(牛黃) 19량을 주었다. 정방은 군량을 얻자 곧 전쟁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유신 등은 당나라 군사들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역시 군사를 돌려 과천(川)을 건넜다.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오자 군사를 돌이켜 맞싸워 1만여 명을 목베고 소형(小兄) 아달혜(阿達兮) 등을 사로잡았으며, 병기 1만여 개를 획득하였다. 전공을 논하여, 본피궁(本彼宮)의 재화와 토지[田莊] 그리고 노비를 반씩 나누어 유신과 인문에게 주었다...가을 7월에 이찬 김인문을 당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4년(664) ...2월에...각간 김인문, 이찬 천존이 당나라 칙사 유인원, 백제 부여륭(扶餘隆)과 함께 웅진에서 맹약을 맺었다. ...가을 7월에 왕이 장군 인문, 품일, 군관, 문영 등에게 명하여 일선주(一善州)와 한산주(漢山州) 두 주의 군사를 이끌고 웅진부성의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돌사성(突沙城)을 치게 하여 멸하였다. 삼국사기 권제6(신라본기 제6) 문무왕 : 6년(666)....여름 4월에 ...천존의 아들 한림(漢林)과 유신의 아들 삼광(三光)은 모두 나마로서,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8년(668) ...6월12일에 요동도안무부대사(遼東道安撫副大使) 요동행군부대총관(遼東行軍副大摠管) 겸 웅진도안무대사(熊津道安撫大使) 행군총관(行軍摠管) 우상(右相) 검교태자좌중호(檢校太子左中護) 상주국(上柱國) 낙성현개국남(樂城縣開國男) 유인궤가 황제의 칙명을 받들고 숙위 사찬 김삼광과 함께 당항진(項津)에 도착하였다. 왕이 각간 김인문으로 하여금 성대한 예식(禮式)으로 맞이하게 했다. 이에 우상(右相)은 [군사 동원기일] 약속을 마치고 천강(泉岡)으로 향하였다. ...6월...21일에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 대총관으로, 각간 김인문·흠순·천존·문충, 잡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개원·흠돌을 대당 총관으로, 이찬 진순(陳純)과 죽지를 경정(京停) 총관으로, 이찬 품일, 잡찬 문훈, 대아찬 천품을 귀당 총관으로, 이찬 인태(仁泰)를 비열도 총관으로, 잡찬 군관, 대아찬 도유(都儒), 아찬 용장(龍長)을 한성주 행군총관으로, 잡찬 숭신(崇信), 대아찬 문영, 아찬 복세(福世)를 비열주 행군총관으로, 파진찬 선광(宣光), 아찬 장순(長順)·순장(純長)을 하서주 행군총관으로, 파진찬 의복(宜福)과 아찬 천광(天光)을 서당 총관으로, 아찬 일원과 흥원(興元)을 계금당 총관으로 삼았다. ...22일에...인문·천존·도유 등은 일선주 등 일곱 군 및 한성주의 병마를 이끌고 당나라 군영으로 나아갔다. 29일에 여러 도(道) 총관이 출발하였다. 왕은 유신이 풍질(風疾)을 앓았으므로 서울에 남아있게 하였다. 인문 등은 영공을 만나 영류산(留山)<영류산은 지금[고려]의 서경(西京) 북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아래까지 진군하였다. ...9월21일에 당나라 군대와 합하여 평양을 에워쌌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淵男産) 등을 보내 영공을 찾아 뵙고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寶臧王)과 왕자 복남(福男)·덕남(德男) 그리고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助州)가 영공을 따라갔는데, 인태·의복·수세·천광·흥원 등도 수행하였다. ...겨울 10월 22일에 유신에게 태대각간을, 인문에게 대각간의 관등을 주었다. 9년(669) .....말기르는 목장 무릇 174곳을 나누어 주었는데 소내(所內)에 22곳, 관청에 10곳을 속하게 하고 태대각간 유신에게 6곳, 대각간 인문에게 5곳, 각간 일곱 명에게 각각 3곳, 이찬 다섯 명에게 각각 2곳, 소판 네 명에게 각각 2곳, 파진찬 여섯 명과 대아찬 열두 명에게 각각 1곳씩 나누어 주고, 나머지 74곳은 적절하게 나누어 주었다. 15년(675) ...2월에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인궤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조칙으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경략케 하였다. 그래서 왕은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사죄하니 황제가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김인문은 중간에서 [당으로] 되돌아갔는데, 그를 임해군공으로 고쳐 봉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8(신라본기 8) 효소왕 : 3년(694) 봄 정월에...김인문이 당나라에서 죽으니, 나이 66세였다.


삼국사기 권 제44(열전 제4) 김인문 열전 :  김인문(金仁問)은 자(字)가 인수(仁壽)이고, 태종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 학문을 시작하여 유가(儒家)의 책을 많이 읽었고, 겸하여 장자(莊子)·노자(老子)·불교의 책도 읽었다. 또한 예서(隷書)와 활쏘기·말타기·향악(鄕樂)을 잘 하였는데, 행동의 법도가 수수하고 세련되었으며,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시 사람들이 추앙하였다. 영휘(永徽) 2년(진덕왕 5년: 651), 인문의 나이 23세에 왕명을 받아 대당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고종이 “바다를 건너 와 조회한 충성이 가상하다.”고 하여 특히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의 직을 제수하였다. 영휘 4년(진덕왕 7년: 653) 황제의 허가를 받고 귀국하여 부모를 찾아 뵈니 태종대왕은 그에게 압독주(押督州)[현재의 경북 경산시] 총관(摠管)을 제수하였다. 이에 그가 장산성(獐山城)을 쌓아 요새를 설치하니, 태종이 그 공을 포상하여 식읍 300호를 주었다. 신라가 여러 차례 백제의 침공을 받자, 당나라 군대의 원조를 얻어 그 수치를 씻으려고 숙위하러 가는 인문을 통하여 군사를 청하게 하였는데, 마침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神丘道) 대총관(大摠管)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황제가 인문을 불러서 도로의 험하고 평탄한 곳과 가는 길이 어디가 좋은가를 묻자, 인문이 매우 자세히 대답하니, 황제가 기뻐하여 제서(制書)를 내리어 [인문을] 신구도(神丘道) 부대총관(副大摠管)에 임명하고 군중(軍中)에 나갈 것을 명하였다. 드디어 정방과 함께 바다를 건너 덕물도(德物島)[현재의 경기도 덕적도]에 이르렀는데, 왕이 태자와 장군 유신·진주·천존 등에게 명하여 큰 배 100척에 군사를 싣고 맞이하게 하였다. [당군이] 웅진구(熊津口: 금강 어구)에 이르니, 적군이 강가에 군사를 배치하고 있었다. 이와 싸워서 이기고 승세를 타서 그 도성에 들어가 멸하였다. 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 등을 포로로 잡고 당으로 돌아갔다. 대왕이 인문의 이룬 공을 가상히 여겨 파진찬을 제수하였다가 다시 각간으로 높여주었다. 그 후 곧 [인문은] 당에 들어가 전과 같이 숙위하였다.용삭(龍朔) 원년(문무왕 원년: 661)에 고종이 [인문을] 불러서 말하였다. “내가 이미 백제를 멸하여 너희 나라의 우환을 제거하였는데, 지금 고구려가 견고함을 믿고 예맥(穢貊)과 더불어 악한 짓을 함께 하여 사대(事大)의 예(禮)를 어기고 선린(善隣)의 의(義)를 저버리고 있다. 내가 군사를 보내 치려 하니, 너는 돌아가 국왕에게 고하여 군사를 출동, 함께 쳐서 망해 가는 오랑캐를 섬멸토록 하라.” 인문이 곧 귀국하여 황제의 명을 전하니, 국왕이 인문으로 하여금 유신 등과 더불어 군사를 훈련하여 대비하게 하였다. 황제가 형국공(邢國公) 소정방을 요동도(遼東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으로 삼아 6군으로써 만리 길을 달려가게 하였는데, 고구려군을 패강(浿江: 대동강)에서 만나 격파하고 드디어 평양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굳게 지키기 때문에 이를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군사와 말이 많이 죽고 부상을 당했으며 식량을 조달하는 길도 끊겼다. 인문이 [웅진에]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劉仁願)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쌀 4천 섬과 조(租) 2만여 섬을 싣고 다다르니, 당나라 사람들은 식량을 얻었으나 큰 눈이 내렸기 때문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신라군이 돌아오려 하자 고구려가 이를 도중에서 요격하려고 도모하였다. 인문이 유신과 함께 속이는 꾀를 내어 밤중에 몰래 도망하였는데, 고구려인이 이튿날에야 깨닫고 뒤를 쫓아왔다. 인문 등이 돌아서 반격하여 이를 크게 파하고 1만여 명의 머리를 베고, 5천여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인문은 다시 당에 들어가 건봉(乾封) 원년(문무왕 6년: 666)에 황제의 수레를 따라 태산(泰山)에 올라가 봉선(封禪)의 의식에 참여한 바 우효위(右驍衛) 대장군으로 승격 임명되었고, 식읍 4백여 호를 받았다. 총장(摠章) 원년 무진(문무왕 8년: 668)에 고종 황제가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고, 또 인문을 보내 우리에게도 군사를 징발하게 하였다. 문무대왕이 인문과 함께 군사 20만을 출동하여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이르러 왕은 여기에 머무르고 인문 등을 먼저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와 회합하여 평양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한 달 이상이 지나 고구려왕 장(臧)을 사로잡아 인문이 왕으로 하여금 영공(英公) 앞에 꿇어앉게 하고 그 죄를 세니, 왕이 재배하고 영공이 예로 답하였다. [영공은] 곧 왕과 남산(男産)·남건(男建)·남생(男生) 등을 데리고 돌아갔다. 문무대왕은 인문의 영특한 재략과 용감한 공로가 남보다 특이하였으므로 죽은 대각간(大角干) 박뉴(朴紐)의 식읍 500호를 내리고 고종도 인문에게 수차의 전공(戰功)이 있음을 듣고 제서(制書)를 내렸는데 이에 이르기를 “용감한[爪牙] 훌륭한 장수[良將]요, 문무(文武)에 뛰어난 재사[英才]이다. 작(爵)을 제정하고 봉읍을 주고 그 위에 아름다운 명을 내림이 마땅하겠다.” 하였고, 작위를 더하고 식읍 2천 호를 더했다. 그 후로 [당의] 궁궐에서 시위(侍衛)하기를 여러 해 동안 하였다.상원(上元) 원년(문무왕 13년: 673)에 문무왕이 고구려의 반란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니, 당나라 황제가 크게 노하여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摠管)으로 삼아 군사를 일으켜 와서 치고, 조서(詔書)로써 왕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이때 인문은 우효위(右驍衛) 원외대장군(員外大將軍) 임해군공(臨海郡公)으로 당나라 수도에 있었는데 그를 세워 [신라]왕으로 삼고 귀국시켜 형을 대신케 하고자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봉하였다. 인문이 간곡히 사퇴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여 드디어 귀국의 길에 올랐다. 그런데 마침 왕이 사절을 보내 공물을 바치며 또 사죄하니 황제가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하였다. 인문도 중도에서 [당나라로] 돌아가 전의 관직을 다시 맡게 되었다.조로(調露) 원년(문무왕 19년: 679)에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행우무위위(行右武威衛) 대장군에 보임되고, 재초(載初) 원년(신문왕 10년: 690)에는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상주국(上柱國) 임해군개국공(臨海郡開國公) 좌우림군장군(左羽林軍將軍)에 제수되었다. 연재(延載) 원년(효소왕 3년: 694) 4월 29일에 병으로 누워 당나라 서울에서 죽으니, 향년이 66세였다. 부음을 듣고 황제가 매우 슬퍼하며 수의를 주고 관등을 더하고, 조산대부(朝散大夫) 행사례시(行司禮寺) 대의서령(大醫署令) 육원경(陸元景)과 판관(判官) 조산랑(朝散郞) 직사례시(直司禮寺) 모(某) 등을 명하여 영구(靈柩)를 호송하게 하였다. 효소대왕(孝昭大王)은 그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추증하고 담당 관서에 명하여 연재(延載) 2년(효소왕 4년: 695) 10월 27일, 서울 서쪽 언덕[西原]에 묻었다. 인문이 일곱 번 당에 들어가 그 조정에 숙위한 월일을 계산하면 무릇 22년이나 된다. 이때 해찬(海) 양도(良圖)도 여섯 번 당나라에 들어갔고 서경(西京)에서 죽었는데, 그 행적의 시말은 전해지지 않는다.


삼국사기 권 제22(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下 : 27년(668) 봄 정월에 [당나라가] 우상(右相) 유인궤(劉仁軌)를 요동도 부대총관으로 삼고 학처준·김인문(金仁問)을 그 부장으로 삼았다.


삼국유사 권2 기이 2 태종춘추공 : 태자 법민(法敏)·각간(角干) 인문(仁問)·각간 문왕(文王)·각간 노차(老且)·각간 지경(智鏡)·각간 개원(愷元) 등은 모두 문희가 낳은 아들이니 전날에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서자(庶子)는 개지문(皆知文) 급간(級干)과 거득령공(車得令公)·마득(馬得) 아간(俄間)이다.  딸까지 합치면 모두 다섯 명이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紀異) 2 문호왕(文虎王) 법민(法敏) : 총장(總章) 무진(戊辰.668)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仁問)·흠순(欽純) 등과 함께 평양(平壤)에 이르러 당(唐)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다...상원上元 원년元年 갑술甲戌(674) 2월에 유인궤劉仁軌로 계림도鷄林道 총관摠管을 삼아서 신라를 치게 했다.  우리 나라 <고기古記>에는 "당唐나라가 육로장군陸路將軍 공공孔恭과 수로장군水路將軍 유상有相을 보내서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문仁問과 흠순欽純 등의 일만 말하고 유신庾信은 없으니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때 당나라의 유병(游兵)과 여러 장병(將兵)들이 진(鎭)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우리 신라(新羅)를 치려고 했으므로 왕이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쳤다.  이듬해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인문(仁問) 등을 불러들여 꾸짖기를, "너희가 우리 군사를 청해다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 이제 우리를 침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하고 이내 원비(圓扉)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훈련하여 설방(薛邦)으로 장수를 삼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이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유학(留學)하러 당나라에 갔다가 인문을 찾아보자 인문은 그 사실을 말했다.  이에 의상이 돌아와서 왕께 아뢰니 왕은 몹시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것을 막아 낼 방법을 물었다.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尊)이 말했다.  "요새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비법(秘法)을 배워 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명랑이 말했다.  "낭산(狼山)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道場)을 개설(開設)하면 좋겠습니다."  그때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 보고한다.  "당나라 군사가 무수히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돌고 있습니다."  왕은 명랑을 불러 물었다.  "일이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명랑이 말한다.  "여러 가지 빛의 비단으로 절을 가설(假設)하면 될 것입니다."  이에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고 풀[草]로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가(瑜伽)의 명승(明僧) 열두 명으로 하여금 명랑을 우두머리로 하여 문두루(文豆婁)의 비밀한 법(法)을 쓰게 했다.  그때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아직 교전(交戰)하기 전인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서 당나라 군사는 모두 물속에 침몰(沈沒)되었다.  그 후에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하여 지금까지 단석(壇席)이 없어지지 않았다(<국사國史>에는 이 절을 고쳐 지은 것이 조로調露 원년元年 기묘己卯(679)의 일이라고 했다).그 후 신미년(辛未; 671)에 당나라는 다시 조헌(趙憲)을 장수로 하여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으므로 또 그전의 비법을 썼더니 배는 전과 같이 침몰되었다.  이때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은 인문을 따라 옥중에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문준을 불러서 묻는다.  "너희 나라에는 무슨 비법이 있기에 두 번이나 대병(大兵)을 내었는데도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느냐."  문준이 아뢰었다.  "배신(陪臣)들은 상국(上國)에 온 지 10여 년이 되었으므로 본국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저희 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그 은덕(恩德)을 갚으려고 낭산(狼山) 남쪽에 새로 천왕사(天王寺)를 짓고 황제의 만년 수명(萬年壽命)을 빌면서 법석(法席)을 길이 열었다는 일뿐입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에 예부시랑(禮部侍郞) 낙붕귀(樂鵬龜)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그 절을 살펴보도록 했다.  신라 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이 절을 사신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새 절을 지어 놓고 기다렸다.  사신이 와서 청한다.  "먼저 황제의 수(壽)를 비는 천왕사에 가서 분향(焚香)하겠습니다."  이에 새로 지은 절로 그를 안내하자 그 사신은 절 문 앞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군요"하고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국인(國人)들이 금 1,000냥을 주었더니 그는 본국에 돌아가서 아뢰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天王寺)를 지어 놓고 황제의 수(壽)를 축원할 뿐이었습니다"했다.  이때 당나라 사신의 말에 의해 그 절을 망덕사(望德寺)라고 했다(혹 효소왕孝昭王 때의 일이라고 하나 잘못이다). 신라 왕은 문준이 말을 잘해서 황제도 그를 용서해 줄 뜻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강수(强首) 선생에게 명하여 인문의 석방을 청하는 표문(表文)을 지어 사인(舍人) 원우(遠禹)를 시켜 당나라에 아뢰게 했더니 황제는 표문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인문을 용서하고 위로해 돌려보냈다.  인문이 옥중에 있을 때 신라 사람은 그를 위하여 절을 지어 인용사(仁容寺)라 하고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열었는데 인문이 돌아오다가 바다 위에서 죽었기 때문에 미타도량(彌陀道場)으로 고쳤다.  지금까지도 그 절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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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문의 자(字이다). 


삼국사기 권제44 (열전 제4)  김인문  열전 :  김인문(金仁問)은 자(字)는 인수(仁壽)이고, 태종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김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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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기사입력시간은 2016년04월11일 13시55분이다. 


 1. 서악동의 신라 시대 귀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무덤을 비롯한 중고시대 신라 왕릉 밀집지역인 서악고분군에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그 전면에 봉분 두 기가 붙었으니, 하나는 김춘추 9세손으로 신라 하대 인물인 김양(金陽)이 857년 향년 50세로 졸하고는 묻힌 곳이라고 하며, 다른 하나는 김춘추의 둘째아들 김인문(金仁問) 묘라고 전한다. 이 두 봉문 앞에는 몸돌과 머릿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그것을 받쳤을 거북 모양 받침돌만 덩그러니 남았으니 이를 서악동 귀부(龜趺)라 한다.


서악동 귀부와 김인문 묘서악동 귀부와 김인문 묘


 보물 제70호인 이 귀부에 대한 현지 안내판은 김인문 묘비를 받치던 것이라 기술한다. 이 지역에 기반을 둔 역사학도 중에는 김양 묘와 함께 선 무덤을 김인문 묘라는 주장을 부정하면서, 이는 실은 김유신 묘이며 따라서 이 귀부는 김유신의 그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따르기가 심히 힘들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김유신의 장송(葬送)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지에 기술되었거니와, 그 어디에도 그의 무덤이 무열왕릉 인근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악동 귀부의 귀두서악동 귀부의 귀두


 그 인근에 제작 연대가 확실한 태종무열왕비 귀부가 있으니, 그것과 비교할 적에 비슷한 시대 작품임이 분명한 느낌을 준다. 어떻든 김인문 묘비 귀부 중 머리 부분을 유심히 본 적 있는지 모르겠다. 그 전면 땅바닥 쪽에서 이 귀부를 올려다보면 남자의 성기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점을 알아챌 것이다. 하기야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거북 머리를 ‘귀두(龜頭)’라고 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 생김새가 이 성기의 꼭지 부분과 유난히 상사(相似)한 데서 비롯한다. 쭈글쭈글한 목덜미 주름은 흡사 포경수술 하지 않은 남자 성기의 껍데기가 뭉친 모습이고, 돌출한 머리는 완연히 귀두 그것이다. 귀두와 다른 점은 오직 두 눈만 표현했다는 데 있다 할 것이다. 


 이런 사정은 그 인근 서악동 고분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오른편 비각(碑刻) 안에서 만나는 태종무열왕비에서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 귀부가 그 전면 김인문 묘의 그것과 다른 점은 거북 받침돌 말고도 사람으로 치면 머리 혹은 모자에 해당하는 이수(螭首)도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유지한 채 남았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 이수가 압도적인 느낌을 주거니와 그 장식이 무엇보다 찬란하기 때문이다. 역시 왕의 그것에 어울리는 장식이라 할 만하다. 그런 까닭에 그 전면 김인묘 귀부는 문화재 지정 명칭이 ‘서악동 귀부’인데 견주어 이는 ‘경주 태종무열왕능비’가 정식 명칭이다. 그렇지만 이에도 문제는 없지 않아, 사람으로 치면 발바닥과 머리 부분만 남고 정작 몸통에 해당하는 비신(碑身)은 달아났으니 말이다. 


태종무열왕비 귀부와 태종무열왕릉태종무열왕비 귀부와 태종무열왕릉


 이를 갈라보면 귀부는 길이 약 3.33m에 폭 2.54m이며, 이수는 높이 약 1.1m다. 이수에는 여섯 마리 용이 좌우에서 세 마리씩 엉킨 채 여의주를 문 모습을 연출했으니, 그 자태는 보는 이의 찬탄을 자아낸다. 이수 전면 중앙에는 이 무덤 주인공을 밝히는 ‘太宗武烈大王之碑(태종무열왕지비)’라는 글자를 전서(篆書)체로 양각했으니, 글씨는 그의 아들 김인문이 썼다고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장방형 기단돌 위에 올려 앉은 귀부의 거북은 이런 비석에 사용하는 비석에서는 으레 그렇듯이 네 발을 쫙 벌린 채 엎드린 자세로 고개를 쳐들고 입은 다문 채 전면을 응시한다. 머리는 전면에서 선 채로 바라보면 사각에 가까워 뱀의 그것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한데 이 거북 머리를 측면, 혹은 전면 바닥에서 쳐다보면 역시나 ‘귀두’다. 목덜미에는 부처님의 그것처럼 삼도(三道)를 표현했다. 콧구멍 두 개는 완연하거니와, 옆으로 다문 입술 표현 역시 섹슈얼 코너테이션(sexual connotation)이 짙다.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두태종무열왕릉비의 귀두



2. 음경을 대신한 거북 대가리 


 요즘 내가 휴대하고 다니면서 다시 읽는 문고본 중에 《일본인의 사랑과 성》이 있다. 일본 와세다대 교수를 역임한 일본 근세 문학 연구가 데루오카 야스타카(暉峻康隆. 1908~2001) 원저로 단국대 인문학부 정형 교수가 번역해서 한림대 일본학연구소가 기획한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60권째로 국내에서는 2001년 10월에 초판이 도서출판 소화에서 나왔다. 이 초판을 독서대본으로 삼거니와, 이 책은 아마도 국내 출판 직후인지 그 얼마 뒤에 서점에서 우연히 보고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 손에 들었다가 순식간에 일독한 기억이 있다. 데루오카는 가고시마 현 태생으로 와세다대 문학부를 졸업하고 모교 교수로 부임해 그곳에서 오래도록 봉직하다가 퇴임 뒤에는 명예교수가 되었다고 한다. 보니 그 일본어 원서는 ‘日本人の愛と性’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유서 깊은 출판사인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에서 1989년에 초판이 나왔다 한다. 


 제목 그대로 일본문화에서 사랑과 성 관념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참으로 평이하지만 유려한 문체로 그려냈다. 이런 문체로 일본 학계가 내놓은 저작 중에 기념비적인 것으로 이시다 미노스케의 《장안의 봄》(국내에서는 이동철·박은희 번역으로 2004년 도서출판 이산에서 출간)이 있거니와, 그에 견주어 데루오카 이 책 역시 그에 못지않은 역작이다. 책 전편에 걸쳐 데루오카는 헤이안 시대 이전으로 사랑과 성 문화가 돌아가야 함을 역설하거니와, 간통죄가 대표하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 이래의 성에 대한 억압 체계에는 시종 비판적이다. 


 이에는 13세기 중엽, 호조 도키요리(北條時賴) 집권시대에 성립한 《고금저문집(古今著聞集)》이라는 설화집 중 제16권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 하나를 그 시대 성 풍조를 증언하는 자료로 소개한다. 이야기의 원활한 전개를 위해 내가 번역문 문장을 조금 가다듬었다.


옛날 조정에서 잡무를 담당하는 하급관리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유난히 질투가 강해 그 때문에 항상 괴로워했다. 어느 날 남편이 궁리 끝에 거북이 한 마리를 구해 그 목을 12센티미터 정도로 잡아 빼내고는 잘라 종이에 감추어 두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다시 아내의 질투로 말다툼을 하게 되자 남편은 “이렇게 싸움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이 물건 때문”이라 하고는 허리에 찬 작은 칼을 꺼내어 앞을 걷어 올리고는 자기 마라(魔羅)를 자르는 척하며 품안에서 거북이 목을 꺼내어 내던졌다. 아내는 몹시도 기분이 언짢아하며 그것을 집어 들고 물러났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내가 한가로이 앉아 바느질을 하는데 무릎을 세우고 앉은 다리 가랑이 사이를 보니 검은 천 조각이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남편이 “그 검은 천은 무엇이오”라고 물으니 아내는 “아니, 별 것 아니에요”라고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남편이 줄곧 다그쳐 묻자 그제야 아내는 마지못하면서 “숨겨도 소용없으니 사실대로 말씀드리지요. 이 검은 천은 돌아가신 분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어안이 벙벙한 남편이 “고인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라고 반문하자 부인은 “지난번 잘려 고인이 되어 버린 마라의 명복을 비는 뜻에서 제 음부에 상복을 입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이야기는 “세상에 별난 상복(喪服), 재미는 있는 일이야”라는 말로 끝난다. 남편이 자신의 그것을 자르는 시늉을 하면서, 실제로는 거북이 대가리로 대체한 ‘마라’는 무엇인가? 그 정확한 의미를 지금 단계에서는 모른다 해도 볼 짝 없이 음경(陰莖)이다. 이 말은 원래 불교를 타고 넘어온 범어다. 즉, 불교에서는 ‘수행을 방해하는 악마’가 바로 이것이니, 아마도 성욕이 그런 기능이 있다고 보아 남근(男根)을 지칭하는 은유로 일본에서는 사용하기 시작한 것 같다. 로마나이즈 하면 ‘māra’이며 ‘魔羅’ 혹은 ‘摩羅’ 등으로 표기한다. ‘魔’에는 그 자체 악마라는 뜻이 있으니, 전자가 더욱 그럴 듯한 번역어라는 느낌을 준다. 남편이 잘라낸 이 마라, 실제는 거북 대가리를 그 아내가 검은 천으로 싸서 다녔다는 말은 그것을 주검으로 간주해 입힌 상복이라는 뜻이며, 더구나 그것을 음부에 싸서 다녔다고 하니, ‘귀두’가 가야 할 곳은 음부 말고 어디가 있겠는가? 


 이 관리가 잘라낸 거북 대가리는 길이를 12센티미터라 했는데, 당시에 일본에 미터법이 있었을 리는 만무하니, 이는 데루오카가 틀림없이 당시에 쓰던 단위를 현대 미터법으로 환산한 수치일 터이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그에 해당하는 원문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그건 그렇고 12센티미터라는 환산치가 정확하다고 가정할 때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것이 실은 한·중·일 성인 남성의 평균 음경 길이라는 점이다. 고교 학창 시절에 30센티미터 대나무 자로 자기 음경을 잰 어떤 친구가 22센티미터라고 해서 한바탕 웃은 일이 있는데, 항문 쪽에서 잰 길이였다. 그 놈 말이 더 가관이었는데, 음경 뿌리가 거기에서 시작하니 거기에서 재야 한다나 어쩐다나 한 기억이 있다.  


 앞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데루오카는 “남근의 끝을 귀두(龜頭)라고 하니 자못 그럴싸한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가 나온다는 《고금저문집》이 궁금해 내가 조금 더 찾아보았더니, 가마쿠라(鎌倉)시대 사람으로 이하(伊賀)라는 지방을 다스리는 지방관인 이하수(伊賀守)를 역임했지만 정확한 생몰년은 미상인 다치바나노 나리스에(橘成季)가 편찬한 설화집으로 간단히는 ‘저문집(著聞集)’이라고도 한다. 제목을 풀면 ‘옛날과 지금 있던 일로서 들은 이야기 모음집’ 정도를 의미한다. 전체 20권 30편으로 목차가 편제됐으며, 이에 수록한 이야기는 총 726개. 건장(建長) 6년(1254) 10월 무렵에 대략 완성을 보았다가 나중에 보완되었다고 하며, 《금석물어집(今昔物語集)》・《우치습유물어(宇治拾遺物語)》와 더불어 일본 3대 설화집으로 일컫는다. 


 이로써 실제의 거북 대가리 귀두가 남근의 대가리로 인식되기도 했다는 내 말은 여실히 증명되었다고 본다. 나아가 구지가(龜旨歌)는 귀두가(龜頭歌)였음도 싱겁게 드러났다고 본다.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 




이에 대해 강진아 선생의 다음과 같은 논평이 있었다.(2018.7.18)  


마라mara는 팔리pali어입니다. 팔리어는 인도 초기불교경전에서만 발견되는 범어의 방언 중 하나입니다. 팔리경전은 붓다생전부터 기원 일세기까지 오백년에 걸쳐 형성되었고, 이 중 맨 나중에 형성된 논장을 제외한 경장과 률장에는 약 오십여개의 길고 짧은 다양한 구성의 마라신화가 담겨있습니다. 제가 공들인 논문 주제입니다. 범어로는 무르티유Mrtyu입니다. 리그베다에 나오는 죽음의 신 야마 Yama가 후기에 속하는 카타 우파니샤드에서 무르티유Mrtyu와 결합하여 죽음의 나라를 다스리는 야마무르티유 Yama Mrtyu가 됩니다.(r밑에 ㆍ점있는 r입니다) 초기경전에는 마라의 성gender이 불분명합니다. 단어 자체는 남성이지만 범어나 팔리어에서는 문법적인 이유로 성을 구분하는 것에 불과해서요. 명사의 어미가 24가지로 바뀌는데 남성형ㆍ여성형이 있는거죠. 오히려 마라는 정체를 바꾸는 기술이 있어서 여자 혹은 남자로 둔갑을 잘 합니다. 초기경전에는 마라를 음경과 동일시한 경우는 없습니다만 이야기의 정황상 '정액'이 아닐까 추측을 하게끔 하는 경우는 꽤있습니다. 붇다나 출가승이 명상수행할 때 비..가 내리면 꼭 마라가 나타나거든요. ㅋㅋ 저 일본책을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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