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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타소(古陀炤)는 앞서 여러 번 다루었고, 그것이 등장하는 맥락이나 사건은 이곳 내 블로그에서 '고타소' 혹은 그의 남편 '품석'으로 검색하면 되거니와, 혹 그것들이 모두 필요하신 분들은 참고바란다. 고타소란 이름은 내 조사가 철저한지 아닌지는 자신이 없거니와, 일단 내 추산대로라면 《삼국사기》 권 제41 열전 제1 김유신上에 보이거니와, 그것이 등장하는 맥락은 다음과 같다. 


선덕대왕 11년 임인(642)에 백제가 대량주(大梁州)를 격파했을 때, 춘추공(春秋公)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남편 품석(品釋)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한스럽게 여겨 고구려에 청병함으로써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하자 왕이 허락했다. 


이것이 삼국시대 말기, 삼국 관계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대량주, 곧 지금의 합천 전투를 말함이거니와, 이 전투를 고비로 삼아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은 국운을 건 일전들을 치루거니와, 조금 과장하면 신라에 의한 일통삼한, 그 불씨는 대야성에서 출발한다. 나아가 더 세부로 들어가면, 이 전투에서 신라가 패하고 고타소가 죽임을 당한 일이 그 거대한 출발점을 삼는다. 이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 전재한 글에서 내가 전론(傳論)한 바 있으므로, 중복을 피하기로 한다. 


이런 고타소가 비록 고타소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맥락은 이 한 곳에 지나지 않으나, 이 당시 비극의 행적은 《삼국사기》 등지의 다른 곳에서도 산발적으로 보이니, 이런 여타 행적들과 버무림으로써 우리는 이 고타소의 족보를 둘러싼 비밀 하나를 풀게 된다. 아무튼 저 인용문을 통해 우리는 김춘추한테는 642년 당시 품석이라는 대야성주(이는 다른 대목에 보인다)한테 출가한 이미 출가한 고타소라는 딸이 있었음을 안다. 


이 고타소는 아비만 드러날 뿐, 어머니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이에서 관건은 고타소 어미가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 소생인가 아닌가로 모아진다. 현재 우리의 첫번째 관심은 고타소 어미가 문희냐 아니냐다. 이를 판별하기 위해 김춘추 출생년과 김법민(훗날 문무왕), 그리고 김법민 바로 아래 남동생 김인문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고타소가 문희 소생인가 아닌가는 거의 90% 이상 단안할 수 있다. 


첫째 김춘추 생년이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 는 침묵하나,  《삼국유사》는 달라 이곳 기이(紀異)편 제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전에 의해 그것이 밝혀진다. 이곳에 이르기를 김춘추는 "영휘 5년 갑인(654)에 즉위해 8년을 다스리다가 용삭 원년 신유(661)에 붕崩하시매 수壽 59세였다"고 하니, 말할 것도 없이 이때 나이는 소위 한국식이라 서양식 관념으로는 만 58세라는 뜻이다. 따라서 661년에서 58을 빼면 603이니, 이것이 바로 김춘추가 태어난 해다. 595년 생인 김유신과 비교하면 8살 어리다. 


따라서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딸 고타소가 죽었을 때, 김춘추는 만 39세, 신라식으로는 마흔살이었음을 안다. 이 무렵에 대개 스무살 안팎이면 거의 다 장가를 갔을 것이므로, 이때 김춘추가 사위를 봤다 해서 하등 이상한 점은 없다. 


한데 관건은 김법민과 김인문이다. 이 두 형제가 문희 소생임은 너무나 분명해 그에 대해 더는 물을 것이 없다. 이 중 형 김법민은 626년 생이요, 동생 김인문은 629년 생이다. 두 형제간에는 3년 차이가 난다. 김법민은 아들딸 통털어서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첫번째임은 하늘이 두쪽 나도 변함이 없다. 그것은 김유신이 기획한 저 유명한 축국쇼, 다시 말해, 김유신이 일부러 김춘추를 끌어들여 축구시합을 하다가 부러 옷고름을 찢어발겨 그것을 기워준다는 구실로 미혼인 누이동생 문희와의 소개팅을 주선해, 그에서 쿵딱쿵딱 해서 문희가 처녀 몸으로 밴 애가 바로 김법민인 까닭이다. 따라서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는 626년 태어난 김법민 이전에 태어난 자식은 있을 수가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 


고타소가 문희 소생이라면 그가 태어난 시점은 626년 생인 김법민보다 때려 죽어도 늦어야 한다. 얼마나 늦어야 하는가? 년년생이 전통시대에 드물지는 않았으므로 년년생이라 해도 고타소는 627년생이다. 한데 그렇게 봐도 영 석연찮은 대목이 있다. 다름 아닌 김인문 때문이다. 김인문은 김법민보다 3살 적은 629년 생이다. 626년과 629년 사이에 다른 자식이 없으란 법은 없으나, 문희가 무슨 애 낳는 벤딩머신이란 말인가? 상식으로 봐도 얼토당토 않다. 결론은 하나다. 고타소가 문희 소생이라고 하면, 626년생인 김법민, 629년생인 김인문보다 동생이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고타소는 때려죽여도 630년 이후에 태어나야 한다. 


 그래 고타소가 문희 소생이라고 하고, 모든 가능성 고려해서 630년에 태어났다고 하자! 630년 이전에는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넉넉잡아 630년 생이라고 해도, 고타소는 642년 대야성 전투 당시 나이가 고작 만으로 12살, 신라 나이로 13살밖에 되지 않는다. 


뭐, 그렇다고 치자. 저 나이에 얼마든 지아비는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넉넉잡아 13살이라고 하고, 그 나이에 김품석과 결혼해 남편 따라 대야성으로 갔다가, 불행하게 백제군에 성이 함몰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치자!  


같은 《삼국사기》 권제 47, 열전 제7이 저록著錄한 죽죽竹竹 전 다음 기술은 대체 무슨 개뼉다귄가? 


殺妻子而自刎 


죽죽은 이 대야성 전투에서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신라 군인이다. 품석의 부하들이 배반하여 백제군과 밀통하고 항복하려는 움직임에 분연히 반대하고 일어나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신라를 배신한 품석 부하들이 성문을 열고 백제군으로 투항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백제는 배신했다. 항복하러 나온 신라군을 복병을 시켜 몰살시켜 버린 것이다. 저 인용문은 그 장면을 보고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성주 김품석이 취한 행동을 말한다.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품석은) 먼저 자기 마누라(고타소)와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어랏? 김품석과 고타소 사이에 아들이 있었네? 말이 안 되잖아? 고타소가 문희 소생이라면 아무리 많아 봐야 13살인데, 13살짜리가 아들을 낳았다고? 물론 이조차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그럴 수도 있다는 것과 그렇다는 건 번갯불과 반딧불의 차이다. 


결론은 오직 이 하나 뿐이다. 


김춘추에게는 문희 이전에 다른 부인이 있었다!!!!  


이 명확함이 오직 《화랑세기》에서만 드러난다.  《화랑세기》 논쟁? 끝났다. 뭐 그냥 단순히 문희 이전에 김춘추한테 부인이 있었다? 그건 누구나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에 그 맥락이 어찌 드러나는지 눈이 있으면 똑똑히 보고 말해라.  


  


 

선덕왕 11년(642) 백제와의 대야성전투에서 끝까지 항거하다 전사한 신라인이다. 당시 관위가 사지(舍知)인 것으로 보아, 지방출신 하급 관리 혹은 군인이 아니었나 한다. 그의 공을 기려 대나마에 추증됐다. 


삼국사기 권 제5(신라본기 제5) 선덕왕 : 11년(642) 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에 백제 왕 의자(義慈)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나라 서쪽 40여 성을 쳐서 빼앗았다. 8월에 또 고구려와 함께 모의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였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당] 태종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이끌고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도독 이찬 품석(品釋)과 사지(舍知) 죽죽(竹竹)·용석(龍石) 등이 죽었다. 겨울에 왕이 장차 백제를 쳐서 대야성에서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하여,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 대야성이 패하였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하고는, 곧 왕을 찾아 뵙고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 말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죽죽 : 죽죽(竹竹)은 대야주 사람이다. 아버지 학열(郝熱)은 찬간(撰干)이 되었다. 죽죽은 선덕왕 때 사지(舍知)가 되어 대야성도독 김품석(金品釋) 휘하에서 보좌역을 맡고 있었다. 왕 11년 임인(백제 의자왕 2: 642)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그 성을 공격했다. 이보다 앞서 도독 품석이 막객(幕客)인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아내가 예뻐 이를 빼앗았으므로 검일이 한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백제군과 내응해 그 창고를 불태웠으므로 성중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굳게 막지 못하였다. 품석의 보좌관 아찬 서천(西川)<또는 사찬(沙飡) 지삼나(祗彡那)라고도 한다>이 성에 올라가 윤충에게 소리치기를 “만약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원컨대 성을 들어 항복하겠다!” 하니 윤충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대와 더불어 우호를 함께 하겠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밝은 해를 두고 맹서하겠다!” 하였다. 서천이 품석 및 여러 장수에게 권하여 성을 나가려 하니, 죽죽이 말리며 말했다. “백제는 자주 번복을 잘하는 나라이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윤충의 말이 달콤한 것은 반드시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으로 만약 성을 나가면 반드시 적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쥐처럼 엎드려 삶을 구하기보다는 차라리 호랑이처럼 싸우다가 죽는 것이 낫습니다.” 품석이 듣지 않고 문을 열어 병졸을 먼저 내보내니 백제의 복병이 나타나 모두 죽였다. 품석이 장차 나가려 하다가 장수와 병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처자를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죽죽이 남은 병졸을 모아 성문을 닫고 몸소 대항하니 사지(舍知) 룡석(龍石)이 죽죽에게 말하기를 “지금 군대의 형세가 이러한데 반드시 온전할 수 없다. 항복하여 살아서 후일을 도모함만 같지 못하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합당하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고 이름지어 준 것은 나로 하여금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절조를 지켜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말게 한 것이니 어찌 죽음을 두려워 하여 살아서 항복하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힘써 싸워서 성이 함락되자 용석과 함께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죽죽에게는 급찬, 용석에게는 대나마 관등을 내리고 처자에게 상을 내려 서울로 옮겨 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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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왕 11년(642) 벌어진 백제와의 대야성 전투에서 대야성 도독 김품석 휘하 보좌관으로 백제군에 스스로 항복했다가 죽임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관위가 아찬이었다.  


삼국사기 권 제47 (열전 제7) 죽죽 : 죽죽(竹竹)은 대야주 사람이다. 아버지 학열(郝熱)은 찬간(撰干)이 되었다. 죽죽은 선덕왕 때 사지(舍知)가 되어 대야성도독 김품석(金品釋) 휘하에서 보좌역을 맡고 있었다. 왕 11년 임인(백제 의자왕 2: 642)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그 성을 공격했다. 이보다 앞서 도독 품석이 막객(幕客)인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아내가 예뻐 이를 빼앗았으므로 검일이 한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백제군과 내응해 그 창고를 불태웠으므로 성중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굳게 막지 못하였다. 품석의 보좌관 아찬 서천(西川)<또는 사찬(沙飡) 지삼나(祗彡那)라고도 한다>이 성에 올라가 윤충에게 소리치기를 “만약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원컨대 성을 들어 항복하겠다!” 하니 윤충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대와 더불어 우호를 함께 하겠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밝은 해를 두고 맹서하겠다!” 하였다. 서천이 품석 및 여러 장수에게 권하여 성을 나가려 하니, 죽죽이 말리며 말했다. “백제는 자주 번복을 잘하는 나라이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윤충의 말이 달콤한 것은 반드시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으로 만약 성을 나가면 반드시 적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쥐처럼 엎드려 삶을 구하기보다는 차라리 호랑이처럼 싸우다가 죽는 것이 낫습니다.” 품석이 듣지 않고 문을 열어 병졸을 먼저 내보내니 백제의 복병이 나타나 모두 죽였다. 품석이 장차 나가려 하다가 장수와 병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처자를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죽죽이 남은 병졸을 모아 성문을 닫고 몸소 대항하니 사지(舍知) 룡석(龍石)이 죽죽에게 말하기를 “지금 군대의 형세가 이러한데 반드시 온전할 수 없다. 항복하여 살아서 후일을 도모함만 같지 못하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합당하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고 이름지어 준 것은 나로 하여금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절조를 지켜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말게 한 것이니 어찌 죽음을 두려워 하여 살아서 항복하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힘써 싸워서 성이 함락되자 용석과 함께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죽죽에게는 급찬, 용석에게는 대나마 관등을 내리고 처자에게 상을 내려 서울로 옮겨 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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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신라 사람이나, 642년 대야성 전투 때 신라를 배반하고 검일과 더불어 백제와 내통해 성이 백제에 함락되도록 하고, 아울러 이때문에 대야성주 김품석 부부를 죽임에 이르게 했다.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한 백제 정벌 때 신라군에 잡혀 처형됐다. 그의 가족들은 절 노비로 적몰되었다. 

삼국사기 권 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본기 : 7년(660)…8월 2일에 주연을 크게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왕과 정방(定方) 및 여러 장수들은 대청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과 그 아들 융(隆)은 마루 아래 앉혀서 때로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목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날 모척(毛尺)을 붙잡아 목베었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으로서 백제에 도망한 자인데, 대야성의 검일(黔日)과 함께 도모하여 성이 함락되도록 했기 때문에 목벤 것이다. 또 검일을 잡아 [죄목을] 세어 말하였다.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질러 없앰으로써 온 성 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요, 품석(品釋)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요, 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세 번째 죄이다." 이에 사지를 찢어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해동고승전 권 제1 법공(法空) : 21년(534) 천경림의 나무를 베고 정사를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주초와 석감(石龕)과 섬돌을 발견하니 과연 그곳은 옛날 초제(招提)의 옛 터였다. 대들보감으로 쓸 재목은 다 이 숲에서 나왔다. 공사를 다 마치자 왕은 왕위를 사양하고 스님이 되어 이름을 법공이라고 고치고 삼의(三衣)와 와발만을 생각했다. 뜻과 행은 원대하고 고매하였으며, 일체 자비를 가졌다. 그리고 그 절 이름을 대왕흥륜사라고 했는데, 이는 대왕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것이 신라에서 절을 창건한 시초이다. 왕비도 또한 부처님을 받들어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렀다. 이로부터 큰 (불)사를 열어 일으켰으므로 왕의 시호를 법흥이라 한 것은 헛된 찬사가 아니다. 그 뒤로는 염촉의 기일을 맞이할 때마다 흥륜사에서 법회를 열어 그의 지난날을 추모했다. 태종왕 때에는 재상 김량도가 서방을 신앙하여 두 딸을 희사했다. (두 딸은) 화보와 연보라 했으며 이 절의 사비로 삼았다. 또 역신이  모척 일족도 천역에 충당하였으므로 구리와 주석 두 부류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천역을 맡고 있다.

삼국유사 제3권 흥법 제3 아도기라(阿道基羅) : 그 뒤 태종왕(太宗王) 때 재상 김양도(金良圖)가 불법(佛法)을 믿어 화보(花寶)와 련보(蓮寶) 두 딸을 바쳐 이 절의 종으로 삼았으며, 또 역신(逆臣) 모척(毛尺)의 가족을 데려다가 절의 노예로 삼으니 이 두 가족 후손은 지금까지도 끊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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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태종무열왕이 된 신라 김춘추 딸이다. 대야성 군주로 임명된 남편 김품석을 따라 임지에 있다가 백제군에 성이 함락될 때 피살됐다. 

삼국사기 권 제41(열전 제1) 김유신上 : 선덕대왕 11년 임인(642)에 백제가 대량주(大梁州)를 격파했을 때, 춘추공(春秋公)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남편 품석(品釋)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한스럽게 여겨 고구려에 청병함으로써 백제의 원한을 갚으려 하자  왕이 허락했다. (춘추가) 막 떠나려 할 때 유신에게 말했다. “나는 공과 한 몸이고 나라의 팔다리입니다. 지금 내가 만약 저 곳에 들어가 해를 당하면, 공은 무심할 수 있겠습니까?” 유신이 말했다. “공이 만일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백제 두 임금의 뜰을 짓밟을 것이오. 진실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나라 사람을 대할 것이오?” 춘추가 감격하고 기뻐하여 공과 더불어 함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며 맹서하며 말했다.“내가 날짜를 계산하여 보건대 60일이면 돌아올 것입니다. 만약 이 기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 만나 볼 기약이 없을 것이오.” 그리고 나서 서로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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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소(古陀炤)라는 여자를 높여 일컫는 말인 듯

 ☞고타소(古陀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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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벌어진 백제와의 대야성 전투 당시 도독 품석의 보좌관으로, 신라 쪽 정세가 불리해지자 백제 장군 윤충과 백제에 항복하자고 품석을 설득했다. 하지만 백제가 배신하는 바람에 항복하는 길에 백제군에 살해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관위는 아찬이었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죽죽 전 : 죽죽(竹竹)은 대야주 사람이다. 아버지 학열(郝熱)은 찬간(撰干)이 되었다. 죽죽은 선덕왕 때 사지(舍知)가 되어 대야성도독 김품석(金品釋) 휘하에서 보좌역을 맡고 있었다. 왕 11년 임인(백제 의자왕 2·642)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그 성을 공격했다. 이보다 앞서 도독 품석이 막객(幕客)인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아내가 예뻐 이를 빼앗았으므로 검일이 한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백제군과 내응해 그 창고를 불태웠으므로 성중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굳게 막지 못하였다. 품석의 보좌관 아찬 서천(西川)<또는 사찬(沙) 지지나(祗之那)라고도 한다>이 성에 올라가 윤충에게 소리치기를 “만약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원컨대 성을 들어 항복하겠다!” 하니 윤충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대와 더불어 우호를 함께 하겠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밝은 해를 두고 맹서하겠다!” 하였다. 서천이 품석 및 여러 장수에게 권하여 성을 나가려 하니, 죽죽이 말리며 말했다. “백제는 자주 번복을 잘하는 나라이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윤충의 말이 달콤한 것은 반드시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으로 만약 성을 나가면 반드시 적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쥐처럼 엎드려 삶을 구하기보다는 차라리 호랑이처럼 싸우다가 죽는 것이 낫습니다.” 품석이 듣지 않고 문을 열어 병졸을 먼저 내보내니 백제의 복병이 나타나 모두 죽였다. 품석이 장차 나가려 하다가 장수와 병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처자를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죽죽이 남은 병졸을 모아 성문을 닫고 몸소 대항하니 사지(舍知) 룡석(龍石)이 죽죽에게 말하기를 “지금 군대의 형세가 이러한데 반드시 온전할 수 없다. 항복하여 살아서 후일을 도모함만 같지 못하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합당하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고 이름지어 준 것은 나로 하여금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절조를 지켜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말게 한 것이니 어찌 죽음을 두려워 하여 살아서 항복하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힘써 싸워서 성이 함락되자 용석과 함께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죽죽에게는 급찬, 용석에게는 대나마 관등을 내리고 처자에게 상을 내려 서울로 옮겨 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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