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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중대 관료. 계보가 보이지 않으나,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흠순 아들이다. 


삼국사기 권 제8(신라본기 8) 신문왕 : 8년(688) 봄 정월에 중시 대장(大莊)이 죽으므로 이찬 원사(元師)를 중시로 삼았다. 10년(690) 봄 2월에 중시 원사가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아찬 선원(仙元)을 중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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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9~681년. 일통삼한 전쟁기에 맹활약한 신라 장군이다. 김서현과 만명부인 소생이며, 김유신에게는 동부동모 동생이면서, 태종무열왕비가 된 문명(문희)의 오빠다. 풍월주 출신이다. '欽純(흠순)'이라고도 쓴다. 


삼국사기 권 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7년(660)...여름 5월..21일에 왕이 태자 법민(法敏)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았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했다.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義慈)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 법민이 말했다. “대왕은 지금 대군(大軍)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왔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잡숫다가 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케 했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대 형세가 매우 성대하다 말하니,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춘(春)을 순(純)이라고도 한다> 등에게 명해 정예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그것에 부응토록 하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 가서 머물렀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김령윤 열전 : 김령윤(金令胤)은 사량(沙梁) 사람으로 급찬(級) 반굴(盤屈)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인 각간 흠춘(欽春)<흠순(欽純)이라고도 한다>은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는데, 어짐이 깊고 신뢰가 두터워 뭇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장년이 되어 문무대왕이 그를 올려 총재(冢宰)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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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조카이자 사위인 반굴 제물 삼아 계백 이기다

[중앙선데이] 입력 2017.01.08 00:44 | 513호 18면 

  

『삼국사기』 권제47 열전 제7이 표제로 내세운 인물 중 김영윤(金令胤)의 전기는 실은 그를 중심으로 그의 아버지 김반굴(金盤屈),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 김흠춘(金欽春)에 이르는 3대에 걸친 가문 이야기다. 비록 짧은 분량에 지나지 않으나, 반굴과 흠춘에 대한 생애의 몇 가지 중요한 단락을 보충한다. 김영윤에 앞서 등장하는 반굴과 흠춘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김영윤은 사량(沙梁) 사람으로 급찬 반굴(盤屈)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인 각간(角干) 흠춘(흠순·欽純이라고도 한다)은 진평왕(眞平王) 때 화랑이 됐는데 인덕이 깊고 신의가 두터워 뭇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장성하자 문무대왕이 발탁해 재상으로 삼았는데,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고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어진 재상이라고 칭송했다.”

  

김흠춘은 태종무열왕 7년(660) 가을 7월, 신라가 5만 대병을 동원해 백제를 정벌할 때에는 총사령관 김유신을 수행하는 부사령관 중 한 명으로 참전했다. 백제 영역에 들어간 신라군은 같은 달 9일, 황산 벌판에 이르러 계백(階伯)이 이끄는 이른바 백제 오천 결사대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신라군은 백제군과 네 번을 싸웠지만 모두 졌다. 이렇게 해서는 백제를 멸망시키는 꿈을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신라군 진영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를 타개할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김유신은 김흠춘을 비롯한 수뇌부를 소집해 긴급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군사들을 격발케 하자는 전법을 채택했다. 거듭된 패배에 사기를 잃은 군사들을 분연히 떨쳐 일어나게 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이다. 소위 가미가제식 자폭이었다. 용맹한 군사를 뽑아 적진에 뛰어들게 해서 혼자 싸우다 죽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군사들의 분노를 유발키로 한 것이다. 참으로 섬뜩한 작전이었다.


[아들 출전했더라면 내보냈을 것]

문제는 누구를 뽑을 것인가였다. 김유신은 극약처방을 생각했다.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솔선수범해야 했다. 그러려면 자신과 가장 가까운 피붙이여야 했다. 만약 김유신의 아들이 출전했더라면, 서슴지 않고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그럴 만큼 김유신은 냉혹한 사령관이었다. 국가를 위해서는 아들조차 희생물로 바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당시 이미 66세의 노장 김유신에게 장성한 아들이라고는 오직 김삼광(金三光) 한 명이 있을 뿐이었다. 한데 삼광은 이때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 진영에서 그들을 돕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피붙이는 조카밖에 없었다. 그가 바로 반굴이었다. 부사령관 김흠춘은 김유신의 친동생이다. 김유신은 반굴을 희생하기로 한 것이다. 아무리 형의 결정이라 해도, 자기 자식을 희생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장면을 김영윤 열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흠춘이 아들 반굴을 불러 말하기를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으뜸이요 자식의 도리로는 효성이 제일이니, 위급함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 충과 효가 모두 온전해진다’고 하니, 반굴이 ‘알겠습니다’라고 하고는 곧 적진으로 들어가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영화 ‘황산벌’에서는 이 장면을 약간 코믹하게 그렸다. 그러나 실제 전투에선 참혹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조카를 희생시킨 김유신은 또다른 부사령관으로서 좌장군인 김품일(金品日)의 아들 관장(官狀)도 성전의 제물로 삼기로 한다. 기록에 따라 관창(官昌)이라고도 하는 이 아들은 당시 겨우 열여섯 살 애송이었다.

  

한데 품일은 아들을 앞에 세우고는 여러 장수가 일부러 지켜보는 가운데 “내 아들은 나이가 겨우 열여섯이지만 의지와 기개가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삼군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고는 홀로 적진에 뛰어들게 했다고 『삼국사기』 신라 태종무열왕본기는 적고 있다. 하지만 계백이 애송이 관창을 다시 신라군영으로 살려 보내니, 이를 치욕으로 여긴 관창은 우물물을 떠서 마시고는 다시금 적진에 뛰어들어 맹렬히 싸우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본 김품일은 “내 아이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구나. 임금을 위해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스런 일이로다”고 말했다고 한다.

  

무열왕 본기에 이르기를 “삼군이 이를 보고는 분기가 북받쳐올라 모두 죽을 마음을 먹고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해 백제의 무리를 크게 쳐부수니 계백은 그곳에서 죽었고,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등 20여 명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격발의 전법이다. 볼수록 섬뜩한 장면이다.

  

이 황산벌 전투는 한국사의 가장 비장한 장면으로 꼽힐 만하다. 이 전투의 결과 백제 700년 사직이 문을 닫고 말았기 때문이다. 김흠춘은 형과 마찬가지로 무수한 전쟁에 참전한 전쟁 영웅이었다. 그는 김수로에게서 시작하는 금관가야 직계 왕족 후손이다. 이 가문이 정착한 곳은 당시 신라 서울 금성(金城)을 구성하는 여섯 개 부 중에서도 사량부(沙梁部)다. 김흠춘과 김유신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은 진흥왕 시대 금석문에도 등장하거니와, 거주지가 같은 사량부다. 그러니 김유신 가문은 김무력 이래 줄곧 사량부가 터전이었다.

  

김흠춘을 일러 김영윤 열전에는 “진평왕때 화랑이 되었다”고만 돼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엔 김흠춘이 역대 화랑 교단의 우두머리인 32명의 풍월주(風月主) 중 당당히 제19대 풍월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여기서 잠깐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김유신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보자. 『삼국사기』열전 제7에 나오는 열기(裂起) 전기에 해답이 있다. 이렇다 할 내세울 가문 배경이 없는 열기는 문무왕 원년(661)에 당이 고구려 정벌을 위해 평양성을 포위하자 대각간 김유신을 수행해 쌀 4000섬과 조 2만2255 섬을 당군에 수송하는 작전에 징발됐다. 하지만 마침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이라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고 고구려군까지 막아서자 행로가 막혔다. 우선 신라군은 이런 사정을 평양성 공격에 나선 당군 진영에 알릴 필요가 있었다. 이 일을 자청하고 나선 이가 보기감(步騎監)으로 참전한 열기였다. 이에 김유신은 열기와 군사(軍師) 구근(仇近)을 비롯한 열다섯 사람을 특공대로 조직해 당군 진영에 파견했다. 열기는 작전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이틀 만에 다시 신라군 본진으로 돌아왔다.

  

열기 열전은 “유신이 그들(열기와 구근)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급찬 벼슬을 주었다”고 적고 있다. 직권으로 관위를 승진시킨 것이다. 한데 이것으로도 부족하다 생각했는지 경주로 복귀한 김유신은 왕에게 “신이 편의에 따라 급찬 직위를 허락했지만 공로에 비하면 미흡하오니 사찬 벼슬을 더해 주시기 바라나이다”고 주청한다. 이에 문무왕은 “사찬이라는 관직은 너무 과분하지 않겠소”라고 하니, 유신이 말하기를 “벼슬과 녹봉은 공공의 그릇으로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니 어찌 과분하다 하겠습니까”고 하고는 기어이 윤허를 받아내고 만다. 이를 볼 때 김유신은 냉혹한 군인이지만 노력에 대한 보상을 할 줄 아는 사령관이었다.


[반굴의 아들 영광도 전장서 장렬히 전사]

다시 반굴로 돌아가보자. 『화랑세기』를 보면 반굴은 김유신의 조카이자 사위이기도 했다. 관창에 앞서 왜 반굴이 나서야만 했는지, 그 비밀이 마침내 『화랑세기』를 통해 풀린다. 19세 풍월주 흠순공(欽純公) 전의 한 대목이다.

  

“공의 셋째 아들만이 홀로 (염장공의 딸들을) 버리고 유신공의 딸 영광(令光)을 아내로 맞아 아들 영윤(令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반굴공(盤屈公)이다. 부자가 마침내 전쟁에서 죽었으니 아름다운 이름이 백세에 남으리라.”

  

이것이다. 황산벌 전투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5만 신라군 중에서 반굴은 김유신에게 가장 가까운 피붙이였다. 조카이자 사위를 희생시킴으로써 그는 패배감과 위기감에 젖은 신라군을 향해 “너희들은”이라는 무언의 시위를 벌인 것이다. 근친혼이 흔하던 신라에서 사촌끼리의 혼인은 일반적인 패턴이기도 했다.

  

김반굴은 김흠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김유신의 사위로 희생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김유신은 사위를 희생케 함으로써 자기 딸을 일순간에 과부로 만들어버렸다. 그가 승전해 집에 돌아왔을 때, 남편을 잃은 딸 영광은 심정이 어떠했을까. 오열하면서 냉혹한 아버지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한데 그의 자식 김영윤 또한 전장에서 장렬히 죽었으니, 그때까지 영광이 살아있었다면 또 한 번 가슴이 찢어졌을 생각을 하니 가슴 저편이 저며 온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당에 사신 갔던 전쟁 영웅의 옥사, 나당 전쟁 부르다

[중앙선데이] 입력 2016.10.23 00:42 | 502호 23면

  

『삼국유사』 중 ‘흥법(興法)’이라는 이름이 달린 챕터가 있다. 불교를 일으킨 일화를 묶어놓은 것으로 ‘원종흥법(原宗興法) 염촉멸신(厭觸滅身)’이라는 제목을 단 것이 있다. 원종이라는 사람이 불법을 일으키고, 염촉이라는 사람은 스스로 몸을 희생했다는 의미다. 원종은 신라사에서 불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법흥왕이요, 염촉은 바로 이를 위해 순교한 이차돈(異次頓)을 말한다. 불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맞서고자 법흥왕과 이차돈이 벌인 게임, 다시 말해 이차돈이 스스로 목숨을 청해 잘려나간 그의 목에서 흰 피가 솟는 이적(異蹟)이 일어남으로써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게 되었다는 그 이야기가 골자를 이룬다. 이차돈 순교 이후 법흥왕이 전개한 불교 포교 사업을 소개한 글이 있다.

  

“법흥왕이 없어진 불교를 다시 일으키려 절을 세우고자 했다. 절이 낙성하자 면류관을 벗어버리고 가사를 걸치고는 궁궐 친척들을 절의 노비로 삼는 한편 임금은 그 절에 주석하면서 몸소 (불법의) 교화를 널리 펼치는 일을 했다.”

  

중간에 일화가 삽입됐다. “이 절 노비들은 지금도 왕의 후손이라 일컫는다. 뒷날 태종왕(太宗王) 때 이르러 재보(宰輔·재상) 김양도(金良圖)가 불법에 귀의했다. 그에게는 두 딸이 있어 이름을 화보(花寶)와 연보(蓮寶)라 하니, 이들은 자기 몸을 바쳐 절의 노비가 되었다. 역신(逆臣) 모척(毛尺)의 가족 또한 몰입하여 절의 노예로 삼았다. 두 집안 자손들은 지금도 끊어지지 않는다.”

  

이차돈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이 세운 절이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다. 그 터가 정확히 어딘지는 논란이 없지는 않으나 지금의 경주 평야에 있었던 것만큼은 틀림없다. 법흥왕의 불교 공인 이전부터 불교는 이미 신라사회에 침투해 있었다. 따라서 암자 비슷한 포교당 혹은 미니 사찰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흥륜사야말로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이래 왕실에서 처음으로 세운 거찰(巨刹)이었다. 그처럼 역사가 유구하기에 법흥왕은 일부 왕족을 절에 희사해 부처를 시봉하는 ‘노비’로 삼기도 했을 것이며, 더 나아가 태종무열왕 김춘추 시대에는 재상을 역임한 김양도라는 사람의 두 딸까지 스스로 절에 들어가 노비가 됐던 것이다.

  

화보와 연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김양도의 두 딸이 절의 노비가 되는 과정을 『삼국유사』는 ‘사신(捨身)’이라 표현했다. 다시 말해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 자발적으로 절의 노비, 다시 말해 부처님의 노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문장·서화·중국어 능통한 팔방미인]

김양도는 신라가 국운을 걸고 일통삼한(一統三韓) 전쟁을 벌이던 시기에는 혁혁한 전과를 낸 전쟁 영웅이면서, 대(對) 중국 외교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이런 그의 두 딸이 자발적으로 흥륜사 노비가 된 과정은 아마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노비가 된 모척의 가족과는 사뭇 사례가 다르지 않을까 한다. 모척은 누구인가? 앞선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643년 대야성 전투에서 신라를 배신하고 백제에 빌붙어 성문을 열어준 바로 그 사람이다. 이로써 신라는 서쪽 변경 백제와 맞서는 가장 중요한 전진기지인 대야성, 즉 지금의 경남 합천 일대를 백제에 빼앗기고 말았으며, 이 과정에서 대야성주 김품석과 그의 아내 고타소,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고타소는 바로 김춘추의 딸이었다. 백제와 내통한 모척은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신라에 사로잡혀 능지처참됐다.

  

이런 모척이 느닷없이 흥륜사에서 부활했다. 물론 모척은 죽고 없었지만, 그의 자손들은 노비로 함몰되어 흥륜사에 배속되었던 것이다. 김춘추와 그의 아들 문무왕 김법민의 모척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깊었던지, 그 후손들 역시 대대로 흥륜사 노비로 사역되는 운명을 맞았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김춘추의 유명(遺命)이었으리라.

  

그렇다면 김양도는 누구인가? 그에 대한 언급은 『삼국사기』 두어곳에서 발견된다. 먼저, 권제44 열전 제4에 수록된 ‘김인문(金仁問) 열전’ 말미를 보자.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둘째아들이자 문무왕 김법민의 동생인 김인문이 당나라의 장안에서 죽은 사실을 전하면서 “그 무렵 해찬(海飡) 양도(良圖) 역시 여섯 번 당에 들어갔다가 서경(西京)에서 죽었는데 그 행적의 시말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 권제46 열전 제6에도 흡사한 기록이 보인다. 강수(强首), 최치원(崔致遠), 설총(薛聰)의 순으로 3명의 전기를 정리해 싣고 있는데,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문장가들이다. 그 말미를 보면 『신라고기(新羅古記)』라는 정체불명의 문헌을 인용해 “문장으로는 강수(强首)와 제문(帝文)·수진(守眞)·양도(良圖)·풍훈(風訓)·골답(骨沓)이 유명하다고 하나, 제문 이하 인물들은 행적이 전하지 않아 전기를 세울 수 없다”고 돼있다.

  

두 곳 다 김양도를 언급하고 있다. 서경은 장안을 지칭한다. 파진찬(波珍飡) 혹은 파미간(破彌干)으로도 불렸던 해찬은 신라의 17개 관위(官位) 체계에서 네 번째 서열로,재상급이다. 그러나 수상한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뒤져보면 열전을 세우고도 남을 정도로 행적이 많이 나와있는데도 “행적이 전해지는 것이 충분하지 않아 열전을 세울 수 없다”고 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수수께끼 같은 인물, 김양도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우선, 그는 당시 중국어 실력이 출충했던 대중국 외교관이자 문장가였다는 걸 유추해볼 수 있다.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여섯 번이나 당나라에 사절로 파견된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중국어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본다. 또 당시 외교관의 절대 구비 조건이 문장력이었다는 점에서 탁월한 문장가였음을 알 수 있다.

  

김양도는 백제 멸망 이듬해인 태종무열왕 8년(661)에 채 진압되지 않은 백제군이 사비성을 공격해 오자, 대아찬으로서 대장군 품일(品日)을 보좌한 장군이었다. 나아가 문무왕 2년(662)에는 고구려 평양성 공략에 나선 당나라 군대에 군량을 조달해 주는 군량 수송 작전에 대장군 김유신을 보좌하는 장군으로 참전했다. 이어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멸한 문무왕 8년(668) 전쟁에는 역시 대아찬으로 대당총관에 임명돼 출전했다. 요컨대 김양도는 일통삼한기 신라를 대표하는 장군 중 최상위층을 형성한 전쟁영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라와 당이 일촉즉발의 대결을 앞둔 문무왕 10년(670) 정사(正使)이면서 김유신의 동생인 흠순과 함께 부사(副使)로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 들어갔다가 억류됐다 끝내 옥사하면서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 사건을 『삼국사기』 문무왕 본기에서는 “봄 정월에 (당) 고종이 흠순에게는 귀국하라 하고 양도는 억류해 감옥에 가두니, 그는 감옥에서 죽었다.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아 차지했으므로 황제가 책망하고 노하여 거듭 사신을 억류했던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통이라 해서 특사로 선발돼 사죄단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다가 억류되어 변을 당하고만 것이다.

  

김양도는 뛰어난 조각가이기도 했다. 『삼국유사』 권제5 신주(神呪)편에 실린 ‘밀본이 요사한 귀신을 물리치다(密本?邪)’라는 제목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어렸을 적에 벙어리였다. 요망한 귀신의 농간으로 벙어리가 됐으나 밀본법사라는 법력이 뛰어난 스님의 도움으로 귀신을 물리쳐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나아가 이를 계기로 독실한 불교 신도가 되어 “흥륜사 오당(吳堂)의 주불(主佛)과 아미타불 존상, 그리고 좌우 보살을 빚어 만들었으며 그 불당을 금색 그림으로 채우기도 했다”고 전한다. 조각가이자 화가이기도 했던 김양도는 문장과 서화·외국어에 능통한 팔방미인이었던 것이다.

  

[백제·고구려 멸망 후 일촉즉발의 상황]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진노한 당 황제에 의해 옥사했다는 대목에서, 당시 백제와 고구려 멸망 직후 신라와 당 사이에 움트기 시작한 전쟁의 기운을 실감하고도 남음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외교관례상 사신은 죽이지 않는 법이다. 한데 당은 힘을 믿고 신라 사신, 그것도 재상을 죽여 버렸다. 사신을 죽이는 일은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협상은 없으며, 오로지 굴복 혹은 무력 징벌의 협박만 남았음을 당나라는 신라에 보여준 사건이다. 이 사건이 당시 신라 사회 내부에 미친 충격파가 어떠했는지는 증언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이후 전개된 전쟁 양상을 보면 신라가 가진 당에 대한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직감할 수 있다.

  

신라 문무왕 10년(670) 3월에 사찬 설오유(薛烏儒)는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기 정예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당을 진격하고, 다음달 4일에는 당군 수중에 들어가 있던 말갈군을 개돈양(皆敦壤)에서 대파했다. 고구려를 직접 지배하려는 당에 대한 신라의 반격을 보여주는 신호탄이다. 곧이어 신라는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인 안승(安勝)을 받아들여 지금의 전북 익산에 있던 금마저(金馬渚)에 그 유민들과 함께 안치한 다음 고구려 국왕으로 책봉함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직접 지배를 관철하려 했다.

  

신라는 또 백제 옛 땅에 대한 공격도 개시해 82개 성을 일시에 탈취했다. 당이 저버린 약속을 신라는 무력으로 관철하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기나긴 전쟁에서 신라는 마침내 문무왕 15년(675) 가을 9월15일 매초성(買肖城)에서 이근행(李謹行)이 이끄는 당군 20만을 대파하고, 이듬해 겨울 11월 기벌포(伎伐浦)에서는 크고 작은 22회에 걸친 전투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당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하게 된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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