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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文努)의 유풍을 따르는 신라 화랑 집단에 소속된 불교 승려라는 사실만 확인된다. 활동시기는 그와 교유한 김흠운(金歆運)이 태종무열왕 2년(655)에 사망한 시점을 고려할 때 선덕~진덕~태종무열왕 무렵으로 판단된다. 

삼국사기 권제47(열전 제7) 김흠운 : 김흠운(金歆運)은 나밀왕(奈密王) 8세손이다. 아버지는 잡찬 달복(達福)이다. 흠운이 어려서 화랑 문노(文努)의 아래에서 놀았는데 당시의 무리들이 아무개는 전사하여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말하자 흠운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격동하여 그와 같이 되려고 하니 동문의 승려 전밀(轉密)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약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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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흠운의 잘못된 표기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은 김씨다. 이름은 정명(政明)이고 자(字)는 일소(日炤)이다. 아버지는 문호왕(文虎王)이고 어머니는 자눌왕후(慈訥王后)이다. 비는 신목왕후(神穆王后)이니 김운공(金運公)의 딸이다. 신사년에 즉위해 11년을 다스렸다.

 

☞김흠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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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문노 전 : 8세 문노(文弩)는 비조부공(比助夫公) 아들이다. 어머니는 가야국(加耶國) 문화공주(文華公主)인데 문화공주는 야국왕(野國王)이 바친 여자(貢女)라고 한다. 《호조공기》(好助公記)에는 ‘북국왕녀(北國王女)’라고 되어 있는데, 문노는 스스로 가야가 외조(外祖)라고 말했으니, 북국은 가야의 북국일 것이다. 법흥대제가 가야를 나누어 남․북으로 하면서 이뇌(異腦)는 북국왕(北國王)으로 삼고는 양화공주(兩花公主)를 처로 삼게 하고, 청명(靑明)은 남국왕(南國王)으로 삼았다. 얼마 되지 않아 이뇌의 숙부 찬실(贊失)이 이뇌를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 때 호조공(好助公)이 가야에 사신으로 가서 책망했다. 이보다 앞서 찬실은 야국왕의 사위가 되었는데, 문화공주는 생각건대 틀림없이 찬실의 딸일 것이다. 처음에 호조공 첩이 되었는데, 비조부공과 더불어 몰래 통하여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격검(擊劍)을 잘 했고 의기(義氣)를 좋아했다. 가야가 반기를 들자, 사다함이 동행을 청했다. 문노가 말하기를 ‘어찌 어미의 아들로서 외조(外祖)의 백성들을 괴롭게 하겠는가’라고 하고는 끝내 가지 않았다. 국인 중에 비난하는 이가 있자, 사다함이 ‘내 스승은 의인(義人)이다’라고 말하면서 가야에 들어가서는 함부로 죽이지 말도록 주의를 주어 그 뜻에 보답했다. 세종이 잇자, 그 낭도가 그에게 속했다.

앞서 호조공이 가야 일을 잘해서 자주 사신으로 갔다. 비조공(比助公) 역시 그것을 이었는데 공을 세워 청화공주(靑華公主) 딸인 청진공주(靑珍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청진공주가 법흥제의 총애를 받았으므로 비조공은 요직에 발탁되었다. 그 권세가 일곱 총신과 아래위를  이루었다. 비조공은 형세를 잘 엿보아 몰래 영실공(英失公)을 따르면서 신하로 섬겼다. 건원(建元) 2년(537) 제(帝)가 장차 영실공을 부군(副君)으로 삼아 왕위를 넘겨주려 하면서 불복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해 비조공(比助公)을 병부령(兵部令)으로 삼아 군대를 통솔케 했다. 총신 중에 옳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많아 일은 이뤄지지 않았다. 지소태후가 집정하자 비조공을 물리치고 등용하지 않았다. 비조공은 이에 영실공과 함께 물러나 머무는 곳에서…바둑 따위를 두며 답답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 공은 스스로 …이 되어 가야파 일도(一徒)를 모아 …을 이루었다. … 자가 배척하고 비난했다.

옥진궁주가…을 근심해서…화랑에게 보호하게끔 했다. 이화공이 공을 사다함 스승으로 삼고 낭도에게 삼가 받들도록 했다. 지소태후가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이화공이 ‘천자에게 아직도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 신하가 있는데, 하물며 선도는 지조가 굳고 인격이 결백하고 기품이 높으니 한 가지 법으로 규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신의 별파유군(別派遊軍)입니다’라고 했다.

개국(開國) 4년(554) 공이 17세에 무력(武力)을 따라 백제를 쳤다. 공이 있었으나 보답을 받지 못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5년(555) 북한(北漢)에 나아가 고구려를 쳤다. 7년 국원(國原)에 나가 북가야를 쳤다. 모두 공이 있었으나 보답을 받지 못했다. 부하 중 불평하는 자가 있으면 달래기를 ‘대저 상벌이란 소인의 일이다. 그대들은 이미 나를 우두머리로 여기거니와 어찌 내 마음으로 그대들의 마음을 삼지 않는가’라고 했다.

세종이 6세 (풍월주)가 되자, 친히 집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나는 감히 그대를 신하로 삼을 수 없으니 부디 내 형이 되어 나를 도와주시오’라고 했다. 말이 심히 간절하여 공이 이에 굽혀 섬겼다. 세종은 이에 (진흥)제에게 말씀드리기를 ‘비조부의 아들 문노는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데 여러 번 공이 있었으나 어미 때문에 영달하지 못했으니 나라를 위해서도 아까운 일입니다’라고 했다. 제가 이에 급찬(級湌의 위(位)를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낭도 중에 금천(金闡)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백운(白雲)과 제후(際厚)를 위하여 사사로이 사람을 죽이니 조정에서 벌을 주려 했다. 세종공이 말하기를 ‘의리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상은 가하나 벌은 불가하다’라고 했다. 이에 작(爵)을 주어 기렸다. 이로서 공의 낭도들이 많이 세종공에게 귀의했다.

사도황후 역시 이름을 듣고 몰래 도우며, 이끌어 자기편을 삼았다. 세종공이 출정하자, 북한산에 따라가 고구려병을 여러 차례 무찔렀다. 미실궁주가 불러서 봉사(奉事)로 삼으려 했으나 승락하지 않았다. 진지(眞智)가 즉위하자 지도황후가 일을 꾸며 발탁해서는 일길찬(一吉湌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세종이 사도의 밀조를 받고 장차 진지를 폐위하려 하며 공을 불러 묻기를 ‘…위에는 발탁하여 등용한 은혜와 또한 황후와 더불어 근친이 되어 …조(詔)하여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했다. 공이 말하기를 ‘신은 … 명으로 …할뿐입니다. 어찌 감히 사사로운 정을 돌아 보겠습니까’라고 했다. 진지가 폐위됨에 이르러 그 공으로 아찬(阿湌에 올라 비로소 미실(美室)에게 총애를 받아 선화(仙花)의 위(位)를 얻게 되니 곧 8세 풍월주였다.

공은 용맹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아랫사람 사랑하기를 자기 사랑하는 것처럼 했으며, 청탁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에게 귀의하는 자는 모두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므로 명성이 크게 떨쳤고, 낭도가 죽음으로써 충성을 바치고자 하니 사풍(士風)이 이로써 일어나 꽃피었다. 통일대업이 공으로부터 싹트지 않음이 없었다.

공의 때에 낭도 부곡(部曲)을 두었다. 좌우봉사랑(左右奉事郞)을 좌우대화랑(左右大花郞)으로 만들고 전방봉사랑(前方奉事郞)을 전방대화랑(前方大花郞)으로 만들어 각기 3부(部)의 낭도를 거느리게 했다. 또 진골화랑(眞骨花郞), 귀방화랑(貴方花郞), 별방화랑(別方花郞), 별문화랑(別門花郞)을 두었고, 12․3살 빼어난 진골(眞骨) 및 대족(大族) 자제로 속하고자 하는  자로써 이를 삼았다. 좌화랑(左花郞) 2인, 우화랑(右花郞) 2인을 두었으며 각기 소화랑(小花郞) 3인, 묘화랑(妙花郞) 7인을 거느렸다. 좌삼부(左三部)는 도의(道義)․문사(文事)․무사(武事)를 맡았고, 우삼부(右三部)는 현묘(玄妙)․악사(樂事)․예사(藝事)를 맡았고, 전삼부(前三部)는 유화(遊花)․제사(祭事)․공사(供事)를 맡았다. 이에 제도가 찬연히 갖추어졌다.

3년간 재위하고 비보랑에게 전했다. 공은 오랜 동안 아내를 맞아들이지 않다가 국선(國仙)이 되자 윤궁낭주를 받들어 내원(內援)으로 삼았다. 윤궁은 황종공 딸이다. 그 어미는 곧 미진부공의 친누이였으니 미실궁주와는 종형제간으로 함께 동륜태자를 섬겨 윤실공주를 낳았다가 과부로 5년을 살았다. 홍제(鴻濟) 5년(576) 10월 공이 지도황후의 명으로 국선이 되고, 윤궁을 받들어 선모(仙母)로 삼았다.

앞서 공이 세종공을 모시고 출정했다 돌아 왔다. 세종공은 공이 아내를 맞지 않음을 근심했다. 미실이 말하기를 ‘제 동생 윤궁이 이 사람에게 어울리지만 지위가 낮음이 걱정입니다’라고 했다. 윤궁이 듣고 말하기를 ‘그 사람이 좋다면 어찌 위품(位品)을 논하겠는가’라고 했다. 공 또한 듣고 기뻐했다. 공의 부제 비보랑 또한 윤궁과 종형제였는데 공을 위해 공을 계부(繼夫)로 맞이하도록 힘써 윤궁에게 권했다. … ‘내가 비록 뜻이 있으나 다섯 가지 의롭지 못한 것을 어찌할 것인가. 비보(랑)…. 문노는 위가 낮다. 그러므로 윤실과 함께 자(子)…를 끊고 …. 제 마음은 사철 내내 만족하지만, 지위가 낮으면 진종전군이 삼대의 영석(榮席)에서 저를 총애하니, 지금 늙어 … 사랑할 만한 것이 없으나, 누차 사람을 시켜 나를 부르는데, 정군(貞君)을 거절하고 다른 데로 가는 것이 세 번째 불의다. 아버지가 재상 신분으로 나를 마땅히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시집보내려는데 거부하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네 번째 불의다. 금태자가 형군(동륜태자)의 총애를 이으려는데 거부하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다섯 번째 불의다. 이 다섯 가지를 풀면 나는 문노에게 갈 것이다’라고 했다.

비보가 돌아와 공에게 말했다. 공이 말하기를 ‘낭주의 말이 옳다. 나는 기다릴 것이다’라고 했다. 이 때 진종(眞宗)이 이미 세상을 뜨자 사절의 의리가 끊어졌다. 공이 장차 크게 기용되려하자 윤궁의 뜻이 자못 기울었다. 이에 공과 함께 미실의 궁에서 서로 보았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 낭주가 아니면 선모(仙母)는 없으니, 제가 국선에 나아가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윤궁이 말하기를 ‘제가 그대를 그리워한지 오래되어 창자가 이미 끊어졌습니다. 비록 골(骨)을 더럽힌다고 해도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선모의 귀함입니까’라고 했다. 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제게 국선이 영예롭다 하나, 저는 스스로 선모의 영예를 가집니다’라고 했다. 윤궁이 이에 공에게 몸을 허락해 세 아들과 세 딸을 낳으니 (아들은) 대강(大綱)․충강(充剛)․금강(金剛)이라 했다.

윤궁은 밖으로는 비록 선모(仙母)였으나, 안으로는 실제로 부인이 되어 공의 일을 힘써 도왔다. 공이 평소에 미실과 맞지 않았다. 윤궁이 간하기를 ‘그대는 세종전군 신하인데 미실궁주를 반대함은 옳지 않습니다. 전군(殿君)이 궁주(宮主)를 자기 목숨처럼 여김은 그대가 저를 목숨처럼 여김과 같습니다. 그대의 낭도가 만약 그대를 따르고 나를 그르다 하면 그대는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 공이 말하기를 ‘선모는 궁주와 같이 잘못이 없으니 낭도들이 어찌 비난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윤궁은 이에 힘써 미실의 잘못을 감싸며 말하기를 ‘사람이 모두 장단과 과실이 있음은 형세가 부득이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오랫동안 전쟁터(矢石)에서 오직 강철 같은 심장만을 법으로 삼고 처자의 즐거움이 없는 것은 세상과 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그대의 아들을 가졌는데, 그대가 한마음으로 뜻을 굳게 지키고 권문에 거스른다면 이 뱃속의 아이는 장차 어떤 처지가 되겠습니까…… 아이의 좋은 아버지로서 제 말을 들어야합니다’라고 했다. 공이 탄식하기를 ‘… 의지와 기개로 선모를 받드는데 선모는 세상일로 나를 감싸는 것 … 손은 사사로움입니다. 정이 사사로이 행해지게 되면 의리가 감추어지게 되고 … 그렇지만 내 선모가 신(臣)에게 허락한 뜻은 가히 죽음으로써 맹세한 것입니다. 차라리 …무리를 … 할지언정 선모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사사로운 인정에 끌려야 하겠소?’라고 했다. 윤궁은 웃으며 말하기를 ‘정이 아니면 그대와 제가 어찌 색사(色事)로서 서로 범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의(義)는 정(情)에서 나오고 정은 지(志)에서 나오니, 세 가지는 서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큰 정은 의가 되고 큰 사사로움은 공(公)이 된다고 했습니다. 만약 무리에게 사사롭지 않으면 무리를 거둘 방법이 없습니다. 그대는 어찌 일찍이 사사로움이 없겠습니까. 그대와 동침한 밤에 저는 대철우(大鐵牛) 꿈을 꾸었는데, 반드시 호랑이 새끼를 낳을 것입니다. 그대의 영웅스러움으로써 어찌 좋은 씨앗이 없으면 되겠습니까. 대중 또한 사람의 자식입니다. 남의 자식은 소중하게 여기고 자기 자식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자기를 손상시켜 명예를 좋아하는 것은 역시 사사로움에서 나옵니다. 그대와 내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정의 순수함입니다. 무리들이 그대에게 의지하는 것은 정이 섞인 것입니다. 청컨대 제 아이의 좋은 아버지가 되어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라고 했다. 공이 크게 깨달아서 말하기를 ‘선모는 진실로 성인입니다. 신은 어리석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정이 더욱 두터워졌다. 공은 이에 굽혀 미실을 섬기고 설원을 받아들여 주었다.

과연 대강을 낳았는데 뒤에 재상에 이르렀다. 충강 역시 높은 지위에 이르렀다. 금강은 가장 귀하게 되어 백성과 신하로서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 윤강(允剛)․현강(玄剛)․신강(信剛)은 모두 귀한 집안에 시집가서 영화롭고 귀하게 되었다. 윤궁의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

공은 대강을 낳고 나서 사사로운 정의 진실됨을 더욱 크게 느끼고, 모든 일을 번번이 윤궁에게 물어서 행했다. 혹 옳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초년의 기상이 없어졌다’고 했다. 공이 듣고 웃으며, ‘나도 지난날 전군이 궁주의 말을 듣고 따르는 것을 보고 흉을 보았는데, 내가 스스로 그렇게 되고 보니 알겠구나. 너희들 또한 스스로 당하면 알 것이다’고 하고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공이 (진지왕을) 폐립하는데 참여한 공으로 선화(仙花)가 되기에 이르렀다. 모두 윤궁의 내조가 많았다. 관위(位)가 아찬(阿湌에 이르러 비로소 골품을 얻었다. 윤궁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지아비가 될 날이 멀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미실이 과연 제(帝)에게 청하자, 조(詔)를 내려 윤궁을 공의 정처(正妻)로 삼았다.

진평대왕과 세종전군이 친히 포석사(鮑石祠)에 나아가 크게 …, 그리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늘 비로소 낭군이 되었으니 …의 귀함이 어찌 가히 이 경사에 미치겠습니까’라고 했다. 윤궁이 말하기를 ‘첩의 몸은 …이에 같은 골의 남편으로 갖게 되었으니, 결혼식을 해야 합니다. 어제 이전에 낭군은 첩의 신하였으므로 첩을 따르는 것이 많았으나, 오늘 이후 첩은 낭군의 처로서 마땅히 낭군의 명을 따라야 합니다’라고 했다. 마침내 감히 다시 공과 다투지 않고 공의 명령을 힘써 따랐다. 검소하고 무리를 사랑하여, 손으로 직접 옷을 만들어 낭도에게 주었다. 공이 종양을 앓았는데 입으로 빨아서 낳게 했다.

공은 풍월주로서 유화(遊花)로 인하여 더럽혀진 일이 한번도 없었다. 집에 있으며 마음이 화락하고 조용한 모습이 마치 물수리와 원앙 같았다. 양위함에 이르러 공은 윤궁과 함께  늘 수레를 같이 타고 야외로 나가 노닐고 돌아왔다. 공은 본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윤궁이 일찍이 공에게 말하기를 ‘첩이 듣건대 영웅은 주색을 좋아한다 하는데 낭군은 술을 안 마시고 색을 절제하니 첩이 속으로는 부끄러워합니다’라고 했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색을 좋아하면 그대가 질투를 할 것이며 술을 좋아하면 그대의 일이 많아질 것이오’라고 했다. 윤궁이 말하기를 ‘장부는 마땅히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지, 어찌 한 여자를 염두에 두겠습니까. 잠자리를 모시는 첩이 있으면 제 일을 대신하게 되니, 기쁜 일이지 투기할 일이 아닙니다. 지아비를 위하여 일이 많은 것은 처의 영광이니 부디 행하소서’라고 했다. 공은 이에 술을 조금씩 마시고 침첩(枕妾) 한 명을 두었으나, 난잡한 적이 없었다.

젊어 지극히 방정하고 빈틈이 없었는데, 윤궁을 처로 맞이한 후로 시비를 가리기보다는 화목함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사람들이 모두 부인이 남자를 이렇게 변하게 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부부를 말할 때는 반드시 공의 부처를 들며 말하기를, ‘지아비를 택하는 데는 마땅히 문선화와 같아야 하고, 처를 얻는데는 마땅히 윤랑주와 같아야 한다’라고 했다.

포석사(鮑石祠)에 화상을 모셨다. 유신이 삼한을 통합하고 나서 공을 사기의 으뜸(宗主)으로 삼았다. 각간(角干)으로 추증(追贈)하고, 신궁(神宮) 선단(仙壇)에서 대제를 행했다. 신궁의 기능 중 왕이 아닌 문노와 같은 사람을 위한 대제를 지낸 것을 볼 수 있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공은 건복(建福) 23년(606)에 세상을 떠나니 69세였다. 낭주는 이 해에 공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선(仙)이 되었다. 공보다 10살이 적었다.

찬한다: 가야의 외손이고 사기의 으뜸으로 선화 되어 아국(我國)의 위엄을 떨쳤도다. 

세계: 아버지는 비조부(比助夫)고, 할아버지는 호조(好助)이며, 증조는 비지(比知)다. 호조는 어머니가 등흔공(登欣公) 누이인 조리(助里)이니 또한…이 된다. 선혜황후는 묘심의 일로 폐위되어 살게 되고…. …감과 상통해서 비조부와 양화공주를 낳았다. 비조부 또한 호조공 첩인 문화공주(文華公主)와 통해 공을 낳았다. 문화공주는 북국왕(北國王) 딸인데 야국왕(野國王)의 딸이라고도 하며 역사에 그 세계가 없다.


삼국사기 권제47(열전 제7) 김흠운 : 김흠운(金歆運)은 나밀왕(奈密王) 8세손이며 아버지는 잡찬 달복(達福)이다. 흠운이 어려서 화랑 문노(文努)의 문하에서 놀았는데 당시의 무리들이 아무개는 전사해서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말하자 흠운이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며 격동하여 그와 같이 되려 하니 같은 문하의 승려 전밀(轉密)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약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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