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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수리비>


고대사로 먹고산다는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재음하면 새빨간 거짓말로 들통나는 일이 한둘이 아니어니와, 신라 문자 생활사로 국한해 말한다면, 현재까지 발견된 초기 신라 금석문에 드러난 문장을 그들의 초기 문자 생활자료로 설명하는 압도적 견해도 그것을 대표하는 거짓말 중 하나다. 


현재까지 신라 금석문 발견 현황을 간단히 정리하면서 그 초기 자료들을 볼진대, 포항 영일 냉수리 신라비(이하 냉수리비)가 추정대로라면 신라 지증왕 재위 4년(503), 울진 봉평 신라비가 대략 이십년가량 늦은 법흥왕 11년(524)으로 건립시기가 추정되거니와,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 초기 금석문으로는 가장 최근에 발견된 포항 중성리비는 냉수리비보다 몇년 빠른 걸로 본다. 


이후 신라인이 남긴 금석문으로 진흥왕 순수비와 같은 시대 창녕 척경비가 따르며, 그 이후엔 명활산성비가 대표하는 금석문들이 있고, 중하대로 내려갈수록 실물자료는 많아진다. 

무엇이 새빨간 거짓말인가?


저들은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신라 금석문이다. 나아가 그 문장을 보면 전자 셋은 소위 신라식 한문이라 정통 한문, 그러니깐 진흥왕 순수비 기준으로 보면 투박하기 짝이 없게 보인다. 그래서 말하기를 저들 초기 금석문을 신라 초기 문자 생활사의 문물로 간주하는 한편, 그 문장 혹은 서사 수준이 형편없음을 들어 신라가 문서 행정을 지증왕 무렵 이후 계우 흉내나 내기 시작한 것으로 간주한다. 신라사 논문 백편 중 아흔아홉편이 저런 주장을 펴거나 그런 전제를 깐다고 보아도 대과가 없다. 


나는 이를 왜 새빨간 거짓이라 하며, 그렇기에 그것을 허무맹랑하다 하는가?


냉수리비와 봉평비와 중성리비는 신라 지배층이 신민을 통치하기 위해 구사한 커뮤니케이션 도구다.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로 어느 하나 흠결없이 완벽한 문장이다. 천오백년 지난 지금에 그 문서를 읽는 자들에게 저 문서가 어려울 뿐이지 그 문서를 작성한 사람과 그 문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하등 이상한 문서가 아니었다. 


<봉평비>


저것을 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정통 한문으로 적지 않았던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문서를 통용하고 소비하는 사회환경 때문이었다. 저 시대에는 저런 문장 혹은 행정문서를 요구했으며, 저들 문서는 그런 시대환경에 충실히 복무했다. 물론 저 시대 문맹률을 따져야겠지만, 적어도 저 문서를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저 문서는 지금의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그런 수수께끼가 전연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조선시대 이두는 물론이고 신라시대 이래 전근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활용한 이두니 석독이며 구결은 한문 한자에 기반한 문자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단계의 또 다른 성취다. 다시 말해 종래 정통 한문을 몇 단계 더 발전시킨 결과물이라는 뜻이다. 정통 한문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볼 때 이두며 하는 문자 표기 체계가 브로컨 잉글리시의 대표주자인 피전 잉글리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하긴 브로컨 잉글리시도 이두에 해당하기도 하다만, 어찌됐건, 그것은 정통 한문으로는 전달할 수 없거나, 전달하기 힘든 그 난관을 타개하고자 몸부림친 인간 노력의 위대한 성취라는 점이다. 이 점이 고대사학계, 혹은 일반의 통념과 내가 바라보는 지점이 대척을 형성한다. 


이두가 그렇듯이, 현재까지 발견된 봉평비 냉수리비 중성비는 신라의 초기 문자생활, 그런 까닭에 그 저급한 문자수준을 증언하는 유물이 아니라 외려, 그것이 더욱 더욱 고도화한 문자 생활의 표식이다. 따라서 저들 세 금석문 중에서도 그것을 전시 홍보하기 위한 전문 박물관을 갖춘 오직 유일한 사례인 울진 봉평비 전시관은 저 위대한 성취를 선전해야 하는 기관이다.


봉평비 봐라. 이 문서는 전체가 398字라고 당당히 밝혔다. 이는 이 문서를 단 한 줄이라고 곤치는 놈이 있다면 물고는 내겠다는 경고다. 때려 죽인다는 경고문이다. 이것이 유래한 뿌리 중 하나는 내가 늘 지적하듯이 《상군서商君書》다. 그리고 그 저층 혹은 심연을 흐르는 사상 기조는 당연히 법가法家요, 그것을 뒷받침한 논거 중 하나가 바로 《주례(周禮)》다. 


봉평비 냉수리비 중성비가 건립된 신라 지증왕~법흥왕 시대에 이미 《상군서》가 통용하고, 《주례》가 유통하고, 《한비자》가 읽혔다. 


신라? 당신들 눈엔 눈엔 신라가 그리 우습게 보일지 모르나, 신라는 이미 저 시대에 그 시대 동아시아 사상을 지배한 주요한 텍스트가 다 들어와 있었다. 냉수리비 봉평비를 푸는 열쇠는 《삼국사기》도 아니요 《삼국유사》도 아니며 《상군서》이며, 《주례》이며, 《한비자》다. 


내가 오래전에 지적한 것이지만, 신라에는 누층적, 혹은 간단히 추려 이중적 문자 서사체계가 있었다. 냉수리비 봉평비 중성비가 신라 신민을 대상으로 하는 마이크라면, 그 직후 등장한 유려한 정통 한문 텍스트인 진흥왕 순수비는 독자가 천지신이라 정통 한문을 사용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냉수리비와 봉평비가 대표하는 신라식 한문과 그 직후 정통 한문인 진흥왕 순수비문을 계승 관계로 간주했다. 다시 말해 지증왕 법흥왕 시대까지는 정통 한문도 몰라, 그 찌꺼기인 브로컨 차이니즈(Broken Chinese)를 사용하다가 진흥왕 시대가 개막하면서 비로소 한문다운 한문을 하는 지식을 배출하기 시작해 그것이 순수비로 '발전'했다고 간주했다.  


하지만 또 강조하거니와, 이는 독자가 다른 데 따른 다른 서사 체계의 채택이지 결코 사승 관계가 아니다. 종래 압도적인 논리대로라면 적어도 금석문으로 보건대 진흥왕 이후 신라 한문이 도로 냉수리비 시대로 돌아간 사정을 전연 설명할 수 없다. 


지금의 우리가 소화할 수 없거나, 소화하기 힘든 한문이라 해서, 그런 한문을 구사한 저 시대 신라인들의 문자 생활 수준이 저급했다고 간주할 수는 없다. 그들이 구사한 한문을 천오백년 지난 지금의 우리가 단번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의 사고체계를 알아야 하고, 그들의 제도를 알아야 하며, 그것이 운용된 시스템을 알아야 하지만, 이와 관련해 우리한테 알려지거나 주어진 정보는 태부족이다. 시간의 간극과 이런 여러 차이가 텍스트의 난독성을 초래하는 것이지, 저들이 구사한 한문이 저급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금석문 중 저들이 가장 초기 것이라 해서 그것이 그들의 초기문자 생활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채택할 수는 결코 없다. 이는 실은 고고학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 혹은 패착이거니와, 이 친구들은 엉뚱한 언론을 향해 최고最古 최초最初 최대最大의 삼최(三最)를 좋아한다 비아냥대고, 키득키득거리지만, 세상 어떤 유적 유물도 내가 이런 類로는 세계 최초라고 선언하는 경우는 없다. 삼최는 그것이 그때까지 알려진 시간과 공간의 상한선을 알려주기에 무척이나 중요하다. 하지만 이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삼최는 언제나 열린 것이며, 열려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우리네 고고학을 보니, 시건방이 하늘을 찔러, 강고한 이 삼최가 어느 순간 정답으로 고정한 그 강고한 폐쇄성에 심대한 문제가 도사린다. 


이 꼴이 신라사학계에도 도져서 저들을 신라생활 초기 문자자료라고 본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랜 신라문자자료라는 말이 신라인들이 문자생활을 한 가장 이른 시기 증거물일 수는 결코 없다. 


봉평비며 냉수리비며 중성리비는 그에 구사한 한문이 그것을 독자로 상정한 동시대 신라인을 철저히 겨냥한 서사체계라는 점에서 나는 저들을 한문을 수용하고 습득하고서 시간이 상당히 흘러 나온 결과물, 다시 말해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초기 한문 수용 단계에서 몇 단계 수십 단계를 지난 단계의 발전형태라고 본다. 


바꿔야 한다. 관점을 바꾸고, 고정과 인습을 타파 훼멸해야 한다. 



영일 냉수리비의 쓸쓸한 1500년 생일

입력 2003.11.18 10:56 수정 2003.11.18 10:56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서기 503년 진이마촌(珍而麻村)이란 곳에 사는절거리(節居利)라는 사람이 관련된 재산 분쟁이 발생했다.


이 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그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그 내용은 급기야 지방관을 거쳐 신라 조정에 보고되기에 이르렀다.


아마도 이런 복잡한 재산분쟁에 관한 저간의 사정은 진이마촌을 다스리는 행정관인 촌주(村主) 등을 통해 문서 형태로 작성되어 보고되었을 것이다.


이에 조정은 재산 분쟁의 당사자들인 절거리와 그 반대편의 주장 중 어느 쪽이옳은가를 결정하려 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어느 한쪽 손을 들어줄 수는 없는 법. "절거리" 분쟁과 비슷한 선례가 있었는가? 있었다면 그 판례는 어떠했는가? 판례가 있다면 그 판례는 어떤 법률에 근거했는가? 조정은 이와 같은 판례집, 혹은 관련 법령을 보관 혹은 관장하는 관청에 명령을하달해 찾아 보라고 지시했다.

이에 담당 관청은 문서 보관소를 뒤져 선대왕들인 ■부지왕(■夫智王)과 나지왕(乃智王)의 두 왕이 연이어 내린 교(敎. 일종의 명령 혹은 법률)가 바로 이와 같은절거리 재산 분쟁을 판결하는 준거가 되는 법률임을 알아냈다.(■은 판독은 되나 무슨 뜻인지 모르는 글자표시) 이들 교(敎)를 검토한 결과 신라 조정은 절거리의 주장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절거리가 재산을 갖는다". 이 판결에는 "별교"(別敎)라고 하는 부대조항이 있었다. 이 별교는 "절거리가먼저 죽으면 그의 재산은 ○○○에게 상속된다"고 판시했다.


재산 분쟁이 나중에 재발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조정은 아예 현행재산 분쟁 뿐만 아니라 상속 문제까지 이참에 완전히 못을 박아버리고자 했다.


이와 같은 "절거리" 재산분쟁에 관여해 공론(共論), 즉 함께 논의해 결정을 내린 인물은 모두 7명. 갈문왕(葛文王) 지도로(至都盧.지증왕)를 필두로 ■덕지(■德智) 아간지(阿干支).자숙지(子宿智) 거벌간지(居伐于支).이부지(爾夫智) 일간지(壹干支).지심지(只心智)거벌간지.두복지(頭腹智) 간지(干支).모■지(暮■支) 간지가 그들이었다.


판결 내용이 담긴 두루마리 문서는 관리 7명을 통해 진이마촌 현지에 공포되고즉각 시행에 들어갔다. 이들 관리는 분쟁 당사자들인 절거리 등을 소집하고는 판결내용을 낭독했다.


"앞으로 다시는 이와 같은 일로 소란케 하지 말지어다". 판결 내용이 장중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두루마리 문서에 적힌 판결 내용은 진이마촌 현지에 비석에다가 새겨 기록되기 시작했다.


이 때 의식은 장엄했다. 판결 내용에 절대 복종을 맹세한다는 뜻에서 얼룩소를잡아 희생물로 하늘에 바쳤다. 절거리 등은 하늘을 향해 외쳤다.


"다시 이와 같은 분쟁을 일으킬 때는 천벌을 받겠나이다". 이 때가 계미년(癸未年), 즉, 지증왕 4년(503) 9월25일이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문헌기록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이와 같은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는 경북 영일군 냉수리 신라 고비(古碑). 기적처럼 1989년 4월, 냉수리 주민에 의해 밭갈이를 하는 도중에 땅 속에서 긴잠을 깬 영일 냉수리비문이 올해로 건립 1500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냉수리비가 올해로 1500번째 생일을 맞았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지나가고 있다.

taeshik@yna.co.kr



<봉평비>


敎란 무엇인가? 가르친다는 뜻이요 이에서 비롯하여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행정명령, 법원 결정문 따위 전반을 敎라고 했다. 이 경우 敎는 가르친다기 보다는 명령한다에 가깝다. 그래서 敎가 지닌 여러 가지 의미 중에는 사역과 강제를 의미하는 使의 뜻이 내포하는 일이 많다. 이것이 정치 행정무대로 전용해서는 왕이 내리는 명령 전반을 敎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이러한 敎를 내리는 주체가 누구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신라사, 특히 중고기 신라사에서는 왕권이 확립되었네 아니네 하는 문제가 빈발하고, 이를 주제로 하는 논문만 수십편 수백편에 이른다. 


무엇이 문제인가?


근자에 발견된 501년 무렵 포항 중성리비를 필두로 영일 냉수리비, 울진 봉평비 따위에서는 주로 이해관계를 다투는 쟁송 문제와 관련한 신라 조정의 판결문을 담았거니와, 조정에서 이를 심판한 결정문을 敎라는 이름으로써 판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데 그 판시 주체를 보면 당시 신라왕이 아니라, 그 왕을 포함한 관료집단, 혹은 특정한 지위에 있던 어떤 신하로 표현되곤 한다. 간단히 말해 이 시대 신라의 문서, 특히 법률 행정 문건을 보면 


(무슨 왕, 무슨 갈문왕, 어떤 신하들)敎....


라는 형식으로 표현되었으니, 이를 발견한 신라사 연구자들이 요란을 떨기를


"봐라. 신라왕은 중고기만 해도 단독으로 敎를 내리지 못하고 다른 놈들과 함께 敎를 내리니 그 지위와 권력이 신하들에 견주어 초월적이 못했다"


고 오도방정을 뜰곤 한다. 이에서 비롯되어 요즘에는 부체제설이라는 실로 요망한 이론이 등장해 지증왕 당시에는 신라에 지증왕 뿐만 아니라 그외에도 6명의 왕이 동시에 병렬적으로 더 존재했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서슴지 않기에 이른다.  이렇게 육갑뜨는 무대가 작금 신라사다.  왕이 단독으로 敎를 내려야 그 시대 왕권이 확립되었다는 이 밑도끝도 없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뿌리를 뽑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봉평비(부분)>


그렇다면 왜 이 시대 敎를 내리는 주체는 집합명사인가? 그 내용을 잘 봐라. 이런 敎가 등장하는 문건은 예외없이 쟁송 관련 문건이다. 재판 판결문 혹은 법령문이다. 이런 판결에 이르기까지에는 실무자에서 중간급 간부, 그리고 부서 장관, 그리고 그 위로 갈문왕과 왕에 이르는 '결재라인'이 있기 마련이다. 敎의 주체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이 결재라인에 위치하는 사람들이다. 


왕권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지표를 오직 왕 혼자서 제 멋대로 해야 한다는 발상에 충실한 자들은 다른 놈들 다 제끼고 왕 혼자서 敎를 발표해야 그 시대 왕권이 확립된 징표로 본다. 왕이 얼마나 등신 같았으면 지 혼자서 敎도 못내리고 신하들과 함께 내리냐는 이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신라사회는 결코 왕 단독으로 敎의 주체로 내세우지 않았다. 결재 라인에 있는 모든 자를 敎의 주체로 표시했다. 이런 성향은 특히나 쟁송 문서에서 두드러진다. 


왜 이러했는가? 이를 묻지 않으니 저 허무맹랑한 설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쟁송은 첨예한 이해 다툼이다. 그 결과에 따라 한쪽은 모든 것을 얻지만 다른 한쪽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이런 첨예한 판결을 내리 주체로 王 혼자서 등장한다는 것은 왕을 그만한 반발의 위험에 노출한다는 뜻이다. 왕 혼자서 내린 결정은 그 모든 책임이 왕 한 사람에게 귀결하기 마련이다. 


<냉수리비>


어찌하여 왕이 이런 모든 책임을 혼자서 져야 하는가? 敎의 주체가 집합명사가 되는 것은 왕에게 집중하는 책임을 회피하는 전형의 방법이다. 반면 국가 유공자를 포상하는 따위의 일은 오로지 왕 혼자서 해야 한다. 왜? 백성에게 시혜를 베푸는 일은 왕이 독점해야 왕이 빛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왕권이다. 좋은 일은 왕 혼자서 해야 하며, 나쁜 일, 피를 묻히는 일은 책임을 분산해 되도록이면 실무진으로 전가해야 한다.


왕이 모든 敎를 독점하는 일. 그것은 칼을 부르는 행위다. 

신하들더러 날 죽여주십시오 하는 호출에 다름 아니다. 


이상은 2016년 6월 3일, 김태식 페이스북 포스팅이다. 몇몇 오타와 일부 대목에서는 바로잡은 데가 있지만, 골격은 같다. 

<영일 냉수리 신라비>


아래는 포항 영일 냉수리 신라비 첫 대목이다. 503년(지증왕 4년)에 세운 것으로 간주되며, 포항 중성리비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最古신라비였다. 


(1) 斯羅喙夫〇智王乃智王此二王敎用珍而」

(2) 麻村節居利爲證尒令其得財敎耳」

(3) 癸未年九月廿五日沙喙至都盧葛文」

(4) 王〇德智阿干支子宿智居伐干支」

(5) 喙尒夫智壹干支只心智居伐干支」

(6) 本彼頭腹智干支斯彼暮〇智干」

(7) 支此七王等共論敎用前世二王敎」


1989년 이 비가 발견되었을 적에 고대사학계가 흥분했거니와, 이 비문을 근거로 한때, 그러니깐 지증왕 시대에는 신라에 王이 한 명이 아니라 7명이나 떼거리로, 동시에 존재했다는 주장이 통설처럼 군림했다. 이를 근거로 우리가 아는 신라왕은 권위가 세지 못했으며, 여러 王 중에 한명이 지나지 않았다는 주장이 득세했던 것이다. 이를 '부체제설'이라 한다. 


그 결정적인 근거는 7행에 보이는 '此七王等'이었다. 이를 '이들 7명의 왕들'이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그 외에도 異說이 있기는 했다. 等을 이두로 간주한 국어학계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내가 익히, 그리고 여러 군데서 목이 터져라 지적했듯이 이는 끊어읽기를 잘못한 데서 비롯된 대참사였다. '此七/王等'이라고 분절해야 할 것을 '此/七王/等'이라고 분절하고 만 것이다. 


<영일 냉수리 신라비 이른바 차칠왕등此七王等 구성>


하지만 이는 그 앞줄에서부터 구체적으로 나열되는 갈문왕을 필두로 기타 신료 6명이라는 뜻이지, 결코 王이 7명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시말해 '王等'은 '(갈문)왕과 기타등등'이라는 뜻이다. 기존 '7왕들'이 어불성설임은 다름 아닌 같은 7행에 보이는 '前世二王'과 비교하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此七王等'이 '이들 7왕들'이라면 '前世二王' 또한 '前世二王等'이 되어야 한다. 


이설이 없지는 않았음에도 신라 seven kings論을 들먹이는 이가 요즘은 자취를 감춰간다. 이 해괴하고도 망칙한 '신라 seven kings論'은 내가 아래 논문을 통해 뿌리를 뽑아버리고 고사시켰다고 자신한다. 한데, 요즘은 보니깐 신종 세븐 킹즈론이 등장하는 게 아닌가 하는 증상도 있다.  '此七王等'이 설혹 일곱 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신라 상고기에는 저것이 상징하는 신라 왕권 약화론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왕이 한꺼번에 7명이 있지는 않았을지언정, 신라라는 왕국에서 왕이 차지하는 위상은 변변찮았고, 이른바 화백회의라는 귀족회의 대표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주장이 그렇다. 웃기는 짬뽕이다. 


〈냉수리비로 구축한 신라 'Seven Kings論' -此七王等, 그 괴이한 해석을 驅逐하며-〉, 《신라사학보》1, 신라사학회, 2004. 

<영일 냉수리 신라비 윗면>


울진 봉평 신라비나 영일 냉수리 신라비나 모조리 가릴 것 없이 그에 적힌 문장은 한문이다. 거기에 신라식 요소가 보인다 해도, 근간은 한문임은 하늘이 두쪽나도 변할 수 없다. 한문에서 'A等'이라고 하면, 말할 것도 없이 'A와 기타등등'이라는 뜻이다. 이건 천자문만 해도 아는 구문론이다. 


냉수리비에서 보이는 '此七王等'은 이들 일곱 왕과 기타등등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왕이 일곱이 아니냐, 그러니 일곱 왕과 기타 등등이 아니냐 하겠지만, 이들 일곱이 누구인지는 그 바로 앞에 나온다. 그들 중 (갈문)王을 冠稱한 이는 오직 한 명 뿐이다. 나머지는 그 아래에 포진한 신하들이다. 그래서 '갈문왕과 기타등등'이라 한 것이다.


같은 냉수리비에서는 이와 똑같은 구문이 무려 세 군데 네 군데나 나온다. 그래 너희 말대로 일곱 왕들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같은 논리로 같은 비문에 보이는 앞선 시대 두 임금인 '전세이왕前世二王'은 '前世二王等'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같은 논리로 같은 비문에 보이는 앞에서 말하는 두 사람을 의미하는 '此二人'은 '此二人等'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같은 논리로 같은 비문에 보이는 앞에서 말하는 일곱사람을 의미하는 '此七人'은 '此七人等'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하지만 같은 비문에서 '前世二王 / 此二人 / 此七人'으로 각각 등장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같은 비문에 같은 구문이 보이는데도 저따위 억지를 부리는 이가 아직도 있다. 


나는 냉수리비문이 한문이라 했다. 그럼에도 엉뚱하게도 等을 기타등등이 아니라 복수를 의미하는 '들'에 대한 이두적인 쓰임으로 보고자 하는 욕망이 그득하다. 이는 또 무슨 망발인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국어학의 부당한 개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국어학자들은 等만 보면 들이 아닌가 의심한다. 국어학이 이룩한 성과가 다대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끼친 패악 역시 막대하기만 하다.


무슨 한문을 이두로 해석한다는 말인가? 지증왕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은 이두로 한문을 해석하는 코미디가 일어난다.


호응이다. 성문기초영어만 봐도 나오는 호응이다.


<영일 냉수리 신라비 뒷면>


그럼에도 저런 억지 해석에 바탕을 두고서는 지증왕 무렵에 신라에는 동시에 왕이 일곱이 있었다는 주장이 한때 요원의 불길처럼 일었다. 그것이 고사직전인 지금에는 할 수 없이 갈문왕과 기타등등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면서도 저것 아니라도 당시 신라에서 왕은 변변찮은 위상을 지닌 존재였다는 주장이 여전히 횡행하다.


king과 kingship도 구분하지 못하는 신라사학계다. king과 kingship은 구별할 줄 아는가? 특정한 king이 여러 이유로 그 권력이 빈껍데기 같을 수는 있을지언정 그 자리가 주는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이 권위를 둘러싼 절대의 제반을 바로 kingship이라 한다.


king과 kingship을 혼동할 수는 없다. 혼동하면 역사학 그만둬야 한다. 

<영일 냉수리 신라비 전면>


다음과 같은 역사 가정을 해 본다. 


옛날 신라라는 왕국 서기 500년에 김태식 대물왕(大物王)과 홍승직 국무총리, 기호철 교육부장관, 신동훈 문화체육관광부 기조실장, 신영문 교육부 대학교육정책과장, 유제욱 문화체육관광부 생활체육과장, 이재호 문화재청 발굴제도과 사무관이 모여 재미교포 미련곰탱이라는 여인이 관계된 재산 분쟁건을 함께 논의한 결과, ‘此七王等’(A)이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모든 재산은 미련곰탱이가 갖는다.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면 사지를 찢어죽인다.”


이런 결정 내용은 홍길동 과장, 전우치 사무관, 심청이 사무관, 춘향이 사무관, 어우동 주무관, 배비장 주사, 별주부 주사 ‘此七人’(B)이 현지에 전달하고 비석을 세워 기록한다.


묻는다. 

‘此七王等’(A)은 누구인가? 이 문제를 함께 논의해 결정한 왕과 그의 신하 6명을 말함이 아닌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이들 일곱 김태식 (대물)왕과 기타 등등’이라는 뜻 아닌가 말이다. 이 경우 왕은 오직 대물왕 한 명뿐이다. 나머지 6명도 王이라고?


나머지 6명이 왕이 될 수 없는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그리고 무엇보다 호응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홍승직 국무총리, 기호철 교육부장관, 신동훈 문화체육관광부 기조실장, 신영문 교육부 대학교육정책과장, 유제욱 문화체육관광부 생활체육과장, 이재호 문화재청 발굴제도과 사무관을 왕이라 칭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도 없다.


왕은 오직 한 명 뿐이다. 따라서 ‘此七王等’은 ‘此七=王等’이다. 이들 일곱 명, 다시 말해 왕과 기타 등등이라는 뜻이다.


설혹 이를 ‘왕 일곱 명들’, 곧 seven kings라고 해석하자. 그렇다면 같은 문장에서 이 법령을 현지에 가서 공표한 사람들도 당연히 ‘此七人’이 아니라, ‘此七人等’이라 해야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이처럼 명백함에도, ‘此七王等’을 역사학도 100명 중 99명이 왕이 일곱이라고 해석했다. 나머지 두 명 중 한 명은 1명의 왕과 6명의 대등(大等)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1명의 왕과 6명의 大等’이라는 해석 또한 코미디를 방불한다. 等이 그렇게 해석되기 위한 절대의 조건은 그 앞 문장에 대물왕을 제외한 국무총리 이하 6명이 ‘大等’이라는 언급이 있어야만 할 때에만 성립하는 조건이다. 


이것이 바로 호응이다. 이런 기초문법까지 동원해야 하는 신라사학계 현실이 답답하기 짝이 없다. 

<울진 영일 냉수리 신라비>


다음 두 문장을 보자.


(A) 옛날 신라라는 왕국에 김태식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은 음경(陰莖) 길이가 45센티미터였다.

(B) 옛날 신라라는 왕국에 김태식이라는 대물왕(大物王)이 살았다. 은 음경 길이가 45센티미터였다.


먼저 (A)를 본다. 말하는 사람이 '김태식이라는 사람'과 '왕'을 동일시했을 때, 이것이 이상한 문장임을 낌새 챈다. 그것은 바로 '호응'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바로 다음 문장에 김태식을 왕으로 지칭할 조건이 그 앞 문장에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달되려면, 저 문장은 예컨대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A) 옛날 신라라는 왕국에 김태식이라는 왕이 살았다. 은 음경(陰莖) 길이가 45센티미터였다.


반면 (B)에서는 그 바로 앞에서 김태식을 '(대물)왕'이라고 적기했기에, 그 다음 문장에 그를 지칭하는 대명사로써 그를 표현할 때 '왕'이라고 하면, 당연히 우리는 그 왕을 김태식을 지칭했다고 간주한다. 


이것이 바로 호응이다. 

호응은 그가 언어 능력을 상실한 사람을 제외하면 모를까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태어난다. 천 오백년 전 신라사람이라고 예외가 없다. 

<영일 냉수리 신라비 전면(부분)>


문법 혹은 언어학에서 말하는 법칙을 형이상학 혹은 관념에 속하는 그 무엇이라 대단하게 치는 경향이 있지만, 이 문법이라는 것이 사람의 인지 능력을 상회하는 일은 결코 없어 그것은 언제나 실생활의 영역을 탈출하지 아니한다. 문법 혹은 언어학에서 고상하게 내세우는 개념 중에 '일치' 혹은 '호응(sequence or agreement)'이란 요물이 있다. 예컨대 A boy is standing there라 했으면, 그 뒤에서 a boy를 지칭할 대명사는 모름지기 he여야지 she 혹은 it 혹은 they가 될 수 없는 이치가 바로 호응이다. 


이것이 무에 대단한 발견이겠는가? 이런 호응은 언어학 혹은 문법을 배우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득적(inborn)으로 지니고 태어난 능력이다. 물론 그런 능력을 타고난 것과 실제 언어생활에서 반드시 이렇게 사용되는가는 별개 문제다. 그리하여 A boy is standing there. She is my brother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일은 얼마든 가능하며, 실제로 이런 착란이 무수하게 실제 언어생활에서는 일어난다. 


이 경우 두 가지 점에서 일치에 문제가 생겼으니, 첫째, 앞에서 말한 a boy를 she라 했으니(he가 맞다) 이것이 하나요, 둘째, she가 brother가 될 수 없음이 두 번째다. 남자형제가 어찌 성별로 여성인 she가 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우리는 이렇게 말해 놓고도 그것이 비문법적이며, 호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말한 사람이 안다. 이것이 문법이요 언어학이니, 그것을 결코 실생활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하는 보기다.


한데 이런 아주 평범한 언어학 기본 상식조차 망각한 텍스트 해독에 기초한 실로 어처구니없는 역사조작이 횡행했으니, 한심해서 차마 말문을 닫을 수가 없다. 

<영일 냉수리 신라비>


예서 문법이란 grammar를 말한다. 전근대 한국사는 절대 다수 기록이 한문이거나 혹은 한자를 빌린 이두류이니 개중 한글문헌이 15세기 이후 일부 있다. 한문은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덮어놓고 읽고 쓰기를 강요하나, 엄연히 한문은 문법 체계가 있는 언어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걸 망각하면 평지돌출 파천황 같은 억설이 난무하거니와, 하시何時라도 이를 떠나서 텍스트를 대할 수는 없다. 


내가 신라 냉수리비문에 등장하는 '此七王等(차칠왕등)'을 '이들 일곱 왕들(these seven kings)'이라고 결코 볼 수 없는 가장 주된 전거로 내세운 논리가 grammar다. 그 grammar 중에서도 호응(互應)이었다. 무슨 판결에 관여한 일곱 중 왕은 오직 갈문왕 한 명인데 어찌하여 나머지 여섯까지 왕이 될 수 있는가? 왕이 일곱이라면 '此七王(차칠왕)'이지 어찌하여 차칠왕등이겠는가? 도대체 얼빠진 등신들 아니고 누가 저 따위로 푼단 말인가?


<영일 냉수리 신라비 전면>


A boy was crying라는 말이 있고, 그 다음에 이 boy를 말할 적에 he라고 해야지 she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호응이다. 냉수리비문 '차칠왕등'이 결코 왕이 일곱이 될 수 없는 까닭은 바로 이 한문의 호응이라는 그라마 때문이지, 기타 우수마발은 다 필요없다. 그럼에도 내 논문을 인용하는 사람 중에 그것을 나름대로 평가하면서 단 한 명도 내가 문법을 가장 주된 근거로 이야기했음을 말하지 않으니 기이하기만 하다. 


<송산리 6호분 명문 전돌>


공주 송산리 6호분 출토 명문 전돌에 적힌 글자가 'A爲師矣'이거니와, 이에서 A가 결코 물건이 아닌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도 말할 것도 없이 호응 때문이다. 스승 혹은 모범(師)이 되는 A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종래의 압도적인 독법인 '梁官瓦爲師矣'가 허무맹랑한 가장 주된 근거는 바로 이런 문법에서 기인한다. 이를 따른다면 양나라 관아에서 쓰는 기와를 스승으로 삼는다가 되어버리니 기와가 어찌 스승이 된단 말인가? 얼토당토 않는 주장이다. 


문법을 알아야 한다. 한문을 알아야 하며, 그런 한문이 철저히 문법에 기반한 언어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허무맹랑한 소리가 줄어들거나 없어진다.


*** 이 글은 2016년 4월 27일, 내 페이스북에 '역사학과 문법'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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