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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을 열고 사진기를 찾았다. 뿔싸 정작 카메라만 없더라. 렌즈만 잔뜩 쑤셔박아 왔더라.
낭패다. 오늘 아니면 다시 내년 가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은행나무 단풍은 그렇게 언제나 내 곁을 떠나갔다. 첫사랑처럼, 둘째 사랑처럼, 그리고 셋째사랑처럼 말이다.


뭐 어쩌겠는가? 이빨이 없으니 잇몸으로 때워야지 않겠는가? 다행히 근자 폰을 갤놋나인으로 교체하고, 몇번 시험 가동해 보니 그런대로 땜빵은 하더라.


성균관이다. 공자를 모신 학당이요 제전祭殿이다. 이곳에 터잡은 대학교가 굳이 이 이름을 택한 이유다. 한데 그 시작이 1398년이란다. 심한 뻥에 빙그레 웃어주자.

이곳 은행 단풍이 절정이라 해서 잠깐 짬을 냈더랬다.


불이 탄다. 입소문 났는지, 아니면 일욜 도심이라 그런지 많은 이가 몰려들어 단풍 구경 중이다. 연신 탄성을 지르고, 기념 촬영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래 문묘가 이리도 각광받을 때가 있었던가?


홍단풍 지지 않을 세라, 노랑과 멱살잡이 한다. 내가 잘 났다 자랑질이다.
내 보기엔 어우러져 서로가 더 강렬한데 쌈박질은 뭐람?


그윽한 감상은 물건너갔다. 요란스레 기사가 날아든다. 간밤에 타계한 배우 신성일씨 빈소 관련 스케치 기사가 많다.

노랑물 발광하는 이 풍경이 그리 좋았을까?
행여 이 광경 아깝다 해서 더 버둥거리다 넋을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한시, 계절의 노래(212)


낙엽(落葉)

[宋] 애성부(艾性夫) / 김영문 選譯評

맑은 서리 즈믄 숲
마르게 하니

누런 잎이 만 가지 춤
추려 하네

한밤 내내 북창에서
잠 자는데

마른 비 오는 소리
우수수 들리네

淸霜槁千林, 黃葉欲萬舞. 一夜北窗眠, 瀟瀟聽乾雨.

서리 맞은 단풍 잎은 이제 곧 천지 간을 휘돌며 찬란한 춤을 출 것이다. 양만리에 의하면 그건 하늘 술을 훔쳐 먹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는 단풍의 취후(醉後) 난무(亂舞)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술주정에 어찌 밤낮이 따로 있던가? 하지만 단풍잎의 술주정은 폭언과 폭행이 아니다. 천지를 가득 채우는 오색 춤사위와 창 너머 들려오는 쓸쓸한 비 소리다. 그 비 소리에는 물기가 없다. 마른 비 즉 건조한 비다. 그것도 민폐라면 민폐다. 사람들의 마음에 가을을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마음에 가을을 가득 담은 가을 남녀들은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쓸쓸함에 낙엽처럼 거리를 떠돈다. 북창(北窗)은 은사가 잠자는 곳이다. 도연명(陶淵明)의 거처다. 왜 하필 북창인가? 세상을 등진다는 의미가 아닐까? 북창은 여름엔 이를 데 없이 시원하지만 가을과 겨울에는 찬바람이 들이치는 곳이다. 이제 그곳에 밤낮 없이 마른 비 소리가 들린다. 은사조차 불면의 밤으로 이끄는 물기 없는 비 소리다.

꼭 가야 한다는 윽박은 없었다. 그래도 이맘쯤 본 그곳이 하도 강렬해 그저 보고싶었노라 말해둔다. 다만 그때랑 조금은 다른 코스를 골랐으되 여전히 대청호변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청주 시내에서 대청호를 향해 달리다 왼편으로 다리 건너 대통령 별장인지 뭔지 있다는 청남대 방향으로 튼다. 햇볕 은어처럼 튀기는 호수 오른쪽으로 끼고 달리나니 숲 터널이다. 그 위상 녹록치 않은듯 해 차 세울 만한 곳에 잠시 똥차 주차하곤 내가 갈 길, 내가 지난 길 번갈아 본다. 노랑 물결이다.


비슷한 패턴이 반복한다. 이 무렵 저 빛깔은 물림 질림이 없다. 권태 나른과도 거리가 멀고, 무엇보다 근자 나를 옥죈 그 어떤 휴밀리에이션 humiliation도 없다. 


호수 역시 말이 없다. 빛 등진 수면은 그 멋대로, 그 반대편은 또 제멋대로 맛이 난다. 아래선 폭풍우 치는지 모르겠으나 저 고요 한없이 부러워 침이 흐른다.


청남대다. 불이 탄다.
들끓는다.
태우다태우다 태울 것 없어 창자벽 파내다 피가 흥건한 어느 중늙은이 같다.


昌德宮,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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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시신을 봤다. 아마 우리 공장 유리벽에 돌진해 반열반하셨나 보다. 아님 마누라한테 볶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아미타 극락왕생 기원할 겸 정화하러 나선다.


어디로 잡을 것인가? 찬바람 쌩쌩하니 이쯤이면 창덕궁 단풍 제철이리란 경험믿고 무턱대고 나선다.


난 품계가 없으니 인정전 뜰 문턱에서 임금한테 안부인사 간단히 하려는데, 문지기 하는 말이 이곳 쥔장도 뒤안으로 비빈 잔뜩 대동하고는 단풍 구경 갔다더라. 쫓는다. 


숲길 청단풍 무성하다. 단풍이 덜 들었다 투덜대는 사람도 있어 청단풍이라 그렇다며 실망하긴 이르다 달래며 숲길 통과한다.


주합루로 들어서니 별유천지 비인간이라 글쎄 기다려 보라 하지 않았던가 핀잔한다. 이구동성 왜 비원인가 적이 동의하는 듯 하니 내 어깨 괜히 들썩인다.


불로문不老門이다. 예 통과하면 늙지 않는다니 백발 다시 검어질까? 수면 아래도 단풍이요 소나무는 대가리부터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무삼 말이 필요하리오?


깊이깊이 들어간다. 코딱지만한 바위에 비류직하 삼백척이라 뻥을 친 숙종도 오늘은 용서하리라.




불탄다. 오늘에야 비로소 만산홍엽滿山紅葉이다.  

너흰 붉어서 좋고 노래서 좋겠다. 나는 속이 불타고 하늘이 노랗다.



  1. 아파트담보 2018.10.29 20:06 신고

    오우 예스! 구깅 한번 잘 했습니다. 품계도 없이 막 들어갔군여. 캄사해여.

  2. esstory 2018.10.29 22:49 신고

    창덕궁 단풍 덕분에 잘 구경 했습니다 이번 주말에 좀 남아있을래나요

마뜩한 까닭은 없다.
그냥 연노랑 보고파 올랐노라 해둔다.
에스프레소 한 잔 때린다.
저 아래로 눈을 깐다.


푸르름 채 가시지 않아 마누라한테 야구 빠따로 얻어터져 생긴 멍이라 해둔다.


그래서
물감 뿌린 덕수궁은 가을이 멍이다.
쉬 자국 가시지 않는 그 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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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계절의 노래(198)


산행(山行)


[唐] 두목 / 김영문 選譯評 


돌 비탈 길 따라서

멀리 추운 산 올라가니


흰 구름 피는 곳에

인가가 자리했네


수레 멈추고 앉아서

저녁 단풍 숲 사랑함에


서리 맞은 나뭇잎들

봄꽃보다 더 붉구나


遠上寒山石徑斜, 白雲生處有人家. 停車坐愛楓林晚, 霜葉紅於二月花. 


한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 치고 이 시를 모르는 분은 없으리라. 또한 이 시는 가을 단풍을 노래한 절창으로 각종 한문 교과서에까지 실리곤 했다. 이 시를 그렇게 유명하게 만든 요소는 무엇일까? 시를 꼼꼼히 읽어보자. 우선 작자 혹은 작중 인물은 거처에서 멀리(遠) 떨어진 추운(寒) 산 돌 비탈(斜) 길을 오르고 있다. 천천히 오르막을 올라선 눈 앞에는 흰 구름이 피어오르는 곳에 인가가 몇 집 자리 잡고 있다. 때는 석양이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는 가을 저녁이다. 시속 주인공은 한기가 스미는 석양 속 단풍 숲 앞에서 수레를 멈췄다. 이쯤 되면 보통 한시 작자들은 “아 슬픈 가을(悲秋)이여!”라는 탄식을 내뱉는다. 가을을 읊은 시들이 대개 그렇다. 아니 한시의 상당수가 애상, 비탄, 수심 등의 정서와 관련되어 있다. 1917년 중국 신문학운동의 선구자 후스(胡適)는 전통문학의 병폐를 여덟 가지로 정리하고 그것을 타파하자고 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아프지도 않은데 신음하는 글을 짓지 말자(不做無病呻吟的文字)”였다. 중국 시 전통의 한 갈래가 “인간의 감정에 따르는(詩緣情)” 데서 시작되었고, 또 감정 가운데서도 “울분이나 비애를 토로하는 것(發憤著書)”이 문학창작의 주요 동기였음을 상기해보면 그런 ‘비애’의 전반적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상습화·유형화의 함정에 빠짐으로써 감정의 과잉이나 표현의 진부함에 갇히게 되었다. 모든 한시가 그게 그거 같아서 독창성이나 신선함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특히 추남추녀(秋男秋女)의 휑한 가슴을 읊은 가을 시의 거의 90%는 ‘슬픔의 가을(悲秋)’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현대시도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두목의 이 시는 그런 슬픔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석양빛에 반짝이는 단풍잎을 아끼고 즐기는 마음이 은은하게 배어 있다. 매우 절제되어 있지만 이는 틀림없이 기쁨의 감정이다. 그 기쁨은 석양, 가을, 낙엽이라는 자연의 마지막 교향곡 위에 실려 있기에 더욱 소중하고 아름답다. 우리의 노년도 이처럼 절제되어 있지만 당당하고 찬란한 빛이었으면 좋겠다. 문학의 독창성은 무슨 경천동지할 발상이나 표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은 비틀기다. 이 시가 바로 그런 비틀기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단풍 절정을 보름쯤 앞둔 이맘쯤 나는 근 몇년 연속으로 남산공원을 같은 목적으로 탄다. 이곳 화살나무 단풍이 서울성곽과 어울려 오묘한 풍광을 빚곤 한다는 그 기억이 하도 강렬하기 때문이라, 나 혼자 그것을 즐기기엔 아깝다 해서 더러 그것을 공유하고픈 사람을 동행하기도 했더랬다. 공원으로 올라가는 동네 길목에 보니 해바라기 여물어 꽃잎 잃어버리곤 목 디스크로 고생하는 듯 푹 고개 수그렸다.


공원에 들어선다. 뭐 이 천만 도시 도심 공원이 아무리 좋다 해도, 별유천지 비인간이라 할 수는 없을 터, 그럼에도 인간계에선 이만한 곳 찾기가 쉽진 않다고는 해두자. 


작년부턴가 이 공원 느낌이 확 달라졌는데, 내가 그리 좋아하는 화살나무는 꽤 많이 뽑아버렸음에 틀림없다. 나는 불타는 가을이 좋다. 내가 열이 많아선지 혹은 꼭 이맘쯤이면 그것을 대변하는 듯한 일을 모름지기 하필 치루기 때문에 더 그런지는 모르겠더라. 아무튼 해마다 이 무렵이면, 그런 일이 꼭 나한텐 하나씩은 생기더랬다. 부디 이번만은 그냥 나 역시 가을 탄다는 말 정도로만 넘어갔으면 한다. 


확실히 화살나무 비중이 줄었다. 그 허전함 싸리꽃으로 대체하고자 하나 역부족이다. 저 주렁주렁 자주색 알알이 송근 저 나무는 언제나 이름을 들었다 하면, 바로 까먹어 이젠 미안함도 없다. 내가 이러니 너도 그러려니 했으면 한다. 


오르는 길에 김유신 동상을 본다. 김경승 작품인데 난 이 사람 조각에서 언제나 근육에의 숭배를 본다. 뭐 내가 갖추지 못한 결단이 드러나기에 부럽기 짝이 없어서라 말해둔다. 남들이야 우째 보건 나한텐 베르리니를 능가하는 조각가다.


올라 화살나무를 찾는다. 나 대신 터져버린 그 붉음을 찾는다. 성벽 따라 한땐 화살나무 그득그득했더랬다. 까까머리 만드니 저 모양이다. 부디 화살나무 좀 더 심어다오. 


화살아 넌 터지기라도 하지 난 속에선 난 천불로 죽을 것만 같다.


이러구로 답답해 하는데 먼저 터진 홍단풍이 지는 해 역광에 붉음을 탐한다. 해가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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