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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7년, 한반도가 신라에 의한 반도 통일 전쟁으로 요동을 치던 그 시절. 신라가 당군을 끌어들여 동맹국이라 할 수 있는 백제를 멸한 것이 그로부터 7년 전인 660년. 망가진 백제 사직을 돌려놓겠다며, 왜의 여주(女主)로서 아들인 中大兄황자에 의해 두 번째로 왕위에 옹립된 이가 제명(齊明. 사이메이) 천황. 


제명은 두 번째 재위 5년째인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자, 이듬해인 661년(제명 7년), 군대를 이끌고 한반도로 진군하겠다며 아들 중대형과 함께 서울을 떠나 츠쿠시(축자. 筑紫)에 집결한다. 하지만 항전을 기다리던 제명이 츠쿠시에서 사망하자, 이에 中大兄이 재위에 오르니 이가 천지천황(天智天皇. 텐치천황)이다.


실제 그의 즉위는 661년이나, 즉위 원년은 이듬해로 삼는다. 이는 前王 재위 말년과 新王 즉위 초년이 겹치는데 따른 혼란을 피하기 위한 이른바 즉위년 유년법이다. 


백제를 멸한 신라와 당은 662년, 고구려 정벌에 나서게 된다. 그러자 고구려는 倭에 도움을 청한다. 합동전선을 펴서 신라-당의 예봉을 극복해 보자는 것이다. 倭가 이에 부응할 수 없던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멸한 다음 신라와 당의 다음 정벌 대상이 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당시 국제정세를 봐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이런 절박한 사정에서 倭가 취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뿐이었다.

첫째 결사 항전. 하지만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둘째 자발적인 굴복. 신라와 당에 굽신거리면서 신하의 예를 취하는 길밖에 없다.


당시 정국을 보면 사실 倭는 강온 양면 전략을 구사한다. 먼저 유화책으로 신라에 대한 애걸복걸이 있다.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자 왜 조정은 배 두 척을 뇌물로 바친다. 한 척은 당시 신라왕인 문무왕 김법민을 위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당시 신라의 최고 실력자인 김유신을 위한 것이었다.


텐치는 강경책도 구사하는데 그것이 바로 663년에 도발한 저 유명한 백촌강(白村江) 전쟁이다. 이 백촌강은 정확한 위치에 대한 논설이 구구하나 금강 어구로 본다. 하지만 2만7천명이나 되는 대병력을 동원한 이 전투에서 왜군은 신라군에 대패하고 몰살했다. 


그들의 안전을 위한 교두보이자 거점이라고 간주한 백제 부흥이 물건너간 667년, 텐치는 도읍을 오우미(근강. 近江)로 옮긴다. 이듬해인 668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회복한다. 이를 발판으로 그 이듬해인 669년에는 텐치는 이번에는 당에 대규모 사신을 보내어 머리를 조아린다. 그 답례로 당은  664년에 이미 왜국에 사신으로 다녀간 바 있는 곽무종이라는 자를 대표단으로 하는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한다. 이렇게 해서 텐치는 당과 신라가 주축을 이룬 동아시아 국제정에서 고립화의 위기를 타개한다.


국제정세를 유리하게 돌려 놓은 텐치. 하지만 그는 그 얼마 뒤인 671년에 사망하고 만다. 여기서 왜 조정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권력투쟁이 발생한다. 그 정국 중심에 두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텐치 아들인 오오토모(대우.大友) 황자. 다른 한 명은 텐치 동생인 오오아마노오오지(대해인. 大海人) 황자. 


천지천황은 애초에 후계자로 동생인 대해인을 지목했다고 한다. 하지만 말년에 헷가닥 머리가 돌아버려 아들 대우황자에게 대권을 물려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서기 시각인데, 아무래도 거짓말 같다. 원래 대권이 천지에게 있었음을 선전하는 기술일 가능성이 아주 크기 때문이다.  


이런 권력투쟁에서 아주 재미있는 이는 지통(持統)이라는 여자. 그녀는 아버지가 천지천황이니 그 장녀다. 大友황자에게는 누나였다. 여기서 잠시 천지천황이 생산한 자녀 관계를 나이 순서대로 볼짝시면 


1. 장녀 지통 

2. 초벽황자비가 된 차녀 원명(元明) 

3. 셋째로 아들로는 장남인 대우황자 

4. 차남인 시기(施基)황자 

5. 삼남인 하도(河島)황자


가 있었으니, 이 중 장녀 지통은 아버지 천지천황의 동생, 그러니까 작은아버지인 大海人 황자에게 시집을 갔다. 이른바 근친혼이었던 셈인데, 대해인-지통 사이에서 난 장남이 초벽(草壁)황자이니, 이 초벽황자가 다시 어머니의 바로 밑의 동생, 그러니까 이모인 元明과 혼인하게 되니, 뭐 복잡하게 계보 생각할 것 없다.


한마디로 콩가루 집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이와 거의 똑같은 콩가루 혼인 패턴은 신라 또한 여전했다. 신라 왕실 계보도 그리다 보면 복잡해서 미치고 팔짝 뛰게 되는 경우가 허다한데 극심한 극친혼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얘기하고자 한 본론은 이게 아닌데, 얘기가 너무 옆으로 샜다. 그 배경을 설명하려다가 전혀 엉뚱한 얘기가 되야 버렸으니, 본론은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잘란다. 자기 전에 한마디.


이 권력투쟁에서 지통은 누구 편을 들었는가? 아버지인가 남동생인가 남편인가? 


2005.06.27 00:50:50



연회에 참석하여(侍宴)

 

황제는 밝음이 일월과 같으니 皇明光日月

황제는 덕이 천지를 실을 만하고 帝德載天地

삼재 모두 태평 창성하니 三才竝泰平

만국이 신하로 엎드리노라 萬國表臣義

 

회포을 푸나니(述懷)

 

도덕이 하늘의 가르침 이으니 道德承天訓

염매는 진재(眞宰)에 맡기노라 鹽梅寄眞宰

부끄러워 부리며 어루만질 줄 모르니 羞無監撫術

어찌 사해에 군림할 수 있으리 安能臨四海

 

아버지 텐무천황(천무천황)이 죽은 671년에 23세로 집권해 천황이 되었으나 이른바 진신의 난(壬辰之亂)에 휘말려 반란을 기획한 작은 아버지 텐지(천지)에게 밀려나 25세에 죽임을 당한 오오토모황자(대우황자. 大友皇子) 작품으로 전하는 한시 두 수이다.

 

이 대우황자는 나중에 홍인천황(弘引天皇)으로 추존되는데, 그것이 언제인가? 메이지 시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억울하게 죽은 뒤 무려 1천200년이나 지난 뒤에야 천황 취급을 받게 된다. 


대우황자에 대해 회풍조에 이르기를

 

"皇太子者 淡海帝之長子也 魁岸奇偉 風範弘深 眼中精耀...唐使劉德高 見而異曰 此皇子 風骨不似世間人 實非此國之分"

 

뭐,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한마디로 잘 난 놈이다. 이런 뜻이다. 그런 잘남이 얼마나 잘났는지, 그런 잘남을 칭송하는 주체로서 멀리 당나라 사절인 유덕고란 자까지 끌어들인다. 

 

이런 불행과 비슷한 삶을 걸은 인물로 신라사에서는 진지왕이라는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金輪. 신라의 일대 영주(英主)라고 일컬어지는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 둘째 아들이라.

 

그의 동복 형은 동륜(銅輪). 하지만 이 동륜은 진흥왕 재위 33년 갑자기 죽어 버린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기에는 그가 무슨 이유에서인가 기냥 죽은 것으로 묘사돼 있으나 최근 공개된 필사본 화랑세기에 의하면 아버지(진흥) 후궁 중 한명인 보명(寶明)이란 여자를 밤마다 겁탈하다가 어느날은 시종 없이 담장을 뛰어넘어 보명궁(寶明宮)에 들어가다가 개 한테 물려 죽었다. 

 

여자하고 놀아나다, 그것도 아버지의 여자와 놀아나다 개한테 물려 죽다니? 그래서 응겹결에 태자가 되어 왕위에 오른 이가 동륜의 동생 금륜이었다.

 

이 금륜은 불과 7살 꼬맹이에 즉위해 무려 37년 동안이나 왕위에 군림한 심맥부(심맥부는 진흥왕 이름이다)가 44세에 崩하자, 576년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가 왕 노릇 한 것은 3년에 지나지 않으니,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지왕기에 의하면 재위 4년째에 죽었다고 하고 있으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축출된 것으로 나오고 있다. 하지만 축출 주체는 묘사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필사본 화랑세기에 의할 것 같으면, 그는 허수아비 왕이었다. 실질적인 권력은 그의 어머니, 그러니까 진흥왕비인 사도(思道)에게 있었으니, 이 대목 화랑세기는 "后(사도)가 몸소 帝位에 있으면서 新王(진지)을 통제했으니"라고 하고 있거니와 말할 것도 없이 필사본 화랑세기가 가장 사실에 가까운 증언이라 할 것이니.

 

하지만 이 불쌍한 진지, 엄마 품에서 한번 벗어나려 앙탈을 부렸다가 작살나니, 누가 엄마를 맹목적 사랑의 총아로 그렸던가? 자기 권력에 누를 범하는 자, 그가 아들이라도 용서치 못할 것이니 마침내 사도는 무장들인 世宗과 文弩 일당을 끌여들여 마침내 폐위를 시키나니, 이렇게 해서 진지는 재위 3년만에 폐서인이 되어 幽宮에 유폐되어 3년을 살다가 결국은 죽어 버렸다. 아마도 독살 당했으리니.

 

그런 진지조차 신라사에서는 왕으로 취급해 주어 제25대 왕으로 추존이 되고 더구나 그 손자인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증손자인 문무왕 김법민, 고손자인 신문왕에 이르러서는 왕실의 직계 조상으로서 진지대왕이라 일컬어지며 제사와 헌창을 받게 되나니, 그에 비해 이 大友황자란 이는 불쌍코 불쌍토다.


하지만 그는 이런 역사의 푸대접을 스스로 변명할 기회를 남기나니, 위에 든 한시 두 수가 그것이라.

이 두 수는 회풍조(懷風藻)라는 일본고대한시집 첫 머리에 수록된 것이니 왜 첫머리인가?

 

그것이 현존 최고 일본의 한시이기 때문이니라. 이 대우황자, 그의 정치 일생은 불행으로 점철됐으나 그가 일본국의 문화의 남상으로 기록되고 있을지니, 영혼이여 만세토록 평안할 지어다. 

 

*** 회풍조(懷風藻) : '카이후우소우'라고 발음한다. 만엽집과 함께 일본고대 시가의 쌍벽이라 일컫는다. 전자가 소위 와카(和歌)라고 해서 일본어 시집이라면 후자는 순수 한시만 수록했다.  


회풍조 序(서문)는 이르기를 "余撰此文意者, 爲將不忘先哲遺風, 故以懷風名之云爾, 于時天平勝寶三年 歲在辛卯冬十一月也"라고 하고 있으니 이를 통해 편찬시기를 천평승보 3년, 즉, 서기 751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나, 이 서문에서 余(나)라고 기록된 편찬자(편집자)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이 시집은 나라(奈良)시대(710-784) 저작임이 드러난다. 


작품 현황에 대해 같은 회풍조 서문은 "凡一百二十篇 勒成一卷 作者六十四人"이라 했으니 120편이며, 그 작가는 모두 64명임이 드러난다. 하필 64명이며 하필 120명인가? 64란 주역 괘 놀음이며 120이란 60의 배수이니, 주갑(周甲)으로 2가 된다. 부러 이리 선별한 것이다. 


수록 작품을 형식별로 보면 오언율시가 가장 많다. 작가 중에는 천황 왕자 고관 승려 등이 포함됐다. 주의할 것은 이 회풍조에는 신라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당시 일본 문인 혹은 관료들이 지은 시가 10여 수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이들 신라사신 접대용 멘트들에 대해서는 추후 하나씩 검토하기로 한다. 


회풍조에는 이런 일본관료들의 노래에 대한 답가 혹은 그것을 유발했을 신라인들의 노래가 모조리 탈락돼 있으나, 그런 시가가 신라라는 대응 없이 나올 수 없는 이상 이 회풍조 수록 宴 新羅客이라는 제하에 수록된 모든 시는 신라의 문학이라는 범주에 포함시켜야 하며, 그런 신라가 진정 한국사라고 간주하거들랑 한국문학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 


2005.06.28 06: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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