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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리 6호분 등잔구멍>


1971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기적적으로 무령왕릉이 발견되고, 그 현실(玄室) 내부에서는 네 벽면에 모두 5군대 등잔을 안치한 구녕이 발견됐다. 그 무령왕릉 바로 코앞에 식민지시대에 도굴 상태로 발견된 송산리 6호분이라는 무덤이 있다. 이 무덤 역시 무령왕릉과 일란성 쌍둥이를 방불해 벽돌로 무덤 주체시설을 쌓은 소위 전축분(磚築墳)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그 구조 역시 그랬다. 하지만 6호분은 내부가 몽땅 도굴당한 상태라 그에서 건진 정보는 얼마되지 않았다.


이 6호분에도 무령왕릉과 같은 등잔을 안치한 구녕이 현실 네 벽면에 있다. 숫자는 무령왕릉보다 2개가 많은 7개였다. 도굴 피해를 보지 않은 무령왕릉이 발견됨으로써, 6호분 그 구멍도 비로소 기능을 둘러싼 베일을 벗었다. 


한데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전, 이 구녕을 무엇이라 했던가? 가장 그럴 듯한 설이 불감(佛龕)이라 해서 불상을 안치하는 시설로 봤다. 

하지만 이런 추정 혹은 주장은 무령왕릉이 미도굴 상태에서 발견됨으로써 개망신에 가까운 굴욕을 겪었다. 불감과는 전연 관계없는 등잔을 안치하기 위한 터널이었다. 


나아가 무령왕릉 등잔은 애초 그 발견 발굴 직후에는 비록 중국 수입제이기는 하나 이것이 한반도에서는 가장 오래된 백자 출토례라고 대서특필되었다. 언뜻 백자로 보이나, 최근 정밀조사 결과 이것이 백자가 아니라 청자로 드러났다. 


<무령왕릉 등잔구멍> 


송산리 6호분 현실 구멍을 불감으로 봤다 해서, 무령왕릉 등잔을 백자로 봤다 해서, 우리는 그런 주장을 하고, 그것을 따른 사람들을 유사역사학이라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사역사학은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인가? 나는 유사역사학을 누가 제대로 개념 규정이라도 해줬으면 싶다. 


무령왕릉 발굴 이전, 나아가 그것이 발견된 이후에도 한동안 그것과 송산리 6호분을 둘러싼 황당하기 짝이 없는 설이 횡행했다. 내가 이해하는 한, 소위 강단 역사학이 공격하는 유사 역사학의 가장 큰 특징은 황당무계함이며, 이를 발판으로 삼은 허황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물론 그에 더해 강단역사학이 말하는 유사역사학은 정치성을 고도로 띤다는 말을 덧보태기도 하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송산리 고분군으로 볼 적에 첫째, 황당하기 짝이 없고 둘째, 정치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유사역사학의 그것에 못지 않아, 무령왕릉 묘권(墓券)에서 그의 죽음을 중국 천자에게나 쓴다는 '붕(崩)'으로 적었다 해서, 백제의 주체성, 나아가 한민족의 주체성을 말해준다 해서 그 의미를 허위 혹은 과대 포장한 이가 다름 아닌 강단역사학이라는 점에서 나는 도통 작금 통용하는 유사역사학과 강단역사학을 어찌 구분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무령왕릉 현실..북쪽에서 입구 방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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