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영호 상공 모란에 화답하며[和令狐相公牡丹]


唐 유우석劉禹錫 / 서성 譯 


平章宅裏一闌花  재상 댁 안 화단 가득 핀 꽃

臨到開時不在家  한창 피어나는데 집을 떠나는구료

莫道兩京非遠別  낙양이 가깝다고 말하지 마소

春明門外卽天涯  춘명문 밖이 바로 아득한 하늘 끝이라오



牡丹(모란) 


唐 나은(羅隱·833~909) / 서성 譯


艶多煙重欲開難 여러 꽃 피어날 때 함께 피기 싫더니

紅蕊當心一抹檀 온통 분홍색 가운데 붉은 꽃술로 피었네

公子醉歸燈下見 귀공자는 취해 돌아가다 등불 들고 살펴보고

美人朝揷鏡中看 미인은 아침에 꺾어 꽂고는 거울 속을 바라본다

當庭始覺春風貴 정원에선 봄바람이 귀한 줄 비로소 느끼고 

帶雨方知國色寒 비가 뿌리면 국색이 추운 줄 그제사 아는구나

日晩更將何所似 날 저물 땐 더욱이 무엇으로 비유하랴?

太眞無力憑欄干 양귀비가 힘없이 난간에 기댄 것 같아


羅隱(833~909)은 字가 소간(昭諫)이며 신성新城(지금의 浙江 富陽市 新登鎮) 사람이다. 833年(太和 7年)에 태어나 大中 13年(859)에 底至京師하고, 應進士試했지만 歷七年토록 不第했다。咸通 8年(867), 乃自編其文하여  《讒書》라 했지만 이 때문에 더욱 권력자들한테 미움을 받았으니, 그런 까닭에 羅袞贈詩說:“讒書雖勝一名休”。後來又斷斷續續考了幾年,總共考了十多次,自稱“十二三年就試期”,最終還是鎩羽而歸,史稱하기를 “十上不第”라 한다。黃巢가 起義한 後에 避亂하여 隱居 九華山하다가 光啓 3年(887), 55歲時에 歸鄉하여 吳越王 錢鏐한테 의탁하고는 歷任 錢塘令、司勳郎中、給事中 等 職하다가 909년(五代 後梁 開平 3年) 去世하니 享年 77歲였다. 

경복궁 아미산



買花

값비싼 꽃


 백거이白居易 / 서성 譯評  


帝城春欲暮, 봄이 저무는 장안에

喧喧車馬度. 말과 수레 오가는 소리 소란스러워

共道牡丹時, 모두들 모란이 한창 때라 말하며

相隨買花去. 어울려 꽃을 사러 가는구나

貴賤無常價, 희귀한 것은 일정한 가격이 없고

酬直看花數. 값을 지불하며 꽃이 몇 송이인지 살펴본다

灼灼百朶紅, 타오르는 듯한 붉은 꽃 백 송이면

戔戔五束素. 다섯 필 흰 비단도 사소하다네

上張帳幄庇, 위에는 휘장을 펼쳐 덮고

傍織笆籬護. 주위로는 울타리를 쳐 보호한다

水灑復泥封, 물을 뿌리고 또 뿌리에는 흙을 덮어

遷來色如故. 옮겨 심어도 색깔이 변하지 않는다네

家家習爲俗, 집집마다 기르다 보니 습속이 되어

人人迷不悟. 사람마다 미혹된 채 깨어날 줄 몰라라

有一田舍翁, 어느 나이든 농부가 있어

偶來買花處. 우연히 꽃 사는 곳에 와선

低頭獨長歎, 고개를 숙이고 홀로 장탄식을 하니

此歎無人諭: 그 탄식을 알아듣는 이 없어라

一叢深色花, 진한 색 꽃 한 묶음 값이

十戶中人賦! 중류층 10가호의 세금에 해당한다!


* 백거이의 <진중음> 10수 가운데 하나다. 


〔해설〕 모란을 완상하기 위해 거액을 물 쓰듯 하는 귀족과 고관의 호사스런 생활을 통해 빈부 차이의 사회적 모순을 드러내었다. 모란은 원래 산서(山西) 지방에서 자랐으나 당대 초기에 장안에 들여와 진귀하게 여겨졌다. 덕종(德宗) 정원(貞元) 연간(785-804) 이후에는 장안에서 완상하는 풍기가 극성하였다. 이런 사실은 이조(李肇)의 《당국사보(唐國史補)》에 잘 기록되었다. “도성의 사람들은 놀이를 중시하는데 모란을 숭상한지 30여 년이 되었다. 매년 늦봄이 되면 마차들이 미친 듯이 다니며, 실컷 즐기지 않으면 부끄럽게 생각할 정도였다. 집금오(궁성 경비대)가 관청 밖 절과 도관에도 이를 심어 이익을 챙겼으니, 한 뿌리에 수만전이 되는 것도 있었다.”(京城貴遊, 尙牡丹三十餘年矣. 每春暮車馬若狂, 以不躭玩爲恥. 執金吾鋪官圍外寺觀種以求利, 一本有直數萬者.) 위곡의 《재조집》에서는 제목을 「모란」(牡丹)이라 하였다.

운현궁의 모란


농촌 출신인 나에게 종묘(種苗)라는 말은 익숙하다. 곡물 종자라는 뜻이다. 이 種苗가 좋아야 곡물 소출이 좋을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종자(種子) 혹은 種苗가 좋다 해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더불어 우리는 사람을 지칭해서도 種子를 운운한다. 사람도 종자를 받기도 한다. 고려 무신 정권 때 노비 반란을 주도한 만덕이 했다는 그 유명한 말, 하지만 실제는 秦 말기 농민반란을 주도한 진승과 오광이 했다는 말, 즉, “王侯將相, 寧有種乎?”에서 種이 갖는 sexual connotation은 매우 짙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저명한 문인 유몽인(柳夢寅)의 《어유야담(於于野談)》이 채록한 일화다. 정덕년이라는 사람 집에 시골에서 서생 하나가 과거 시험을 치러 올라와 머물고 있었는데 야밤에 어떤 종가를 지나고 있을 때 일이다. 장사 네댓 명이 불쑥 몰려나오더니 이 서생을 때려 엎고는 마련해온 커다란 자루에 담아 묶어 둘러메고는 이 골목 저 골목 누빈 끝에 담 안으로 던져놓더니 자루를 풀고 정중히 방안으로 모시는데 비단 이부자리가 깔린 신방이었다. 조금 있으니 성장한 여인이 들어와 동침을 청하고 파루(罷漏)의 북소리가 나자 여인은 사라지고 장정 네댓이 다시 나타나 자루에 담아 묶고 골목길을 누비더니 납치해간 종가에 풀어놓은 것이었다. 시골에서는 서생 대신 소금장수나 무시로 장수, 땜통장수 등 뜨내기를 은밀히 들여 동침시키고 입마갯돈을 단단히 주어 은밀하게 씨를 받았다. 


모란씨


이것이 바로 씨받이의 상대 개념인 씨내리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진평왕의 딸로써 아버지가 아들을 두지 못한 까닭에 여자로서 즉위했다는 선덕여왕 덕만이 씨내리를 통해 아들을 낳으려 했다는 명확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씨내리가 《화랑세기》에는 보이니, 13세 龍春 傳에 이르기를 善德에게 보위를 이을 아들을 얻고자 해서 처음에는 龍春에게 씨를 받고자 했다가 실패하자 삼서지제(三壻之制)를 들어 흠반(欽飯)과 을제(乙祭) 또한 함께 선덕을 ‘시중’들게 했다고 한다. 이 三壻之制의 결론을 말하면 실패로 끝났다. 이들 남자 세 명을 잠자리에 들이고도 아들을 얻지 못하자, 결국 왕위는 眞德에게 돌아간다. 


이에서 말하는 三壻之制는 전후 문맥으로 미뤄 볼 때, 후사인 아들을 얻을 때까지 남자를 세 명 들여 씨를 받는 제도를 말한다. 드라마 얘기가 나온 김에 《선덕여왕》에는 을제가 보이거니와, 20대 앳된 선덕여왕에 대비되어 70대 원로 배우 신구가 扮해 출연하는 바람에 ‘원작’의 묘미를 살리는 데는 아랑곳이 없는 듯하다. 


백모란


선덕이 남자 세 명을 들이고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내용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기존 문헌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했지만, 내가 이미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김영사, 2002)에서 지적했듯이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과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천양의 차이가 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에는 선덕여왕의 앞날을 내다보는 혜지를 말해주는 증거 중 하나의 예화로 기록된 이른바 모란씨 서되 얘기가 그 편린이라고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란씨 서되 얘기는 익히 알려졌거니와, 요약하자면 선덕은 당 태종 이세민이 모란 그림과 함께 보내준 모란씨 서되를 보고는 그 모란이 꽃을 피워도 향기가 없을 것임을 미리 알았다는 것이거니와, 그 근거로써 이세민이 보낸 모란 그림에 나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랑세기》를 내가 ‘괴물’로 치부하는 또 다른 까닭은 바로 이 사례에 단적으로 해당한다. 방금 말한 三壻之制를 담은 《화랑세기》라는 텍스트가 출현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 모란씨 서되 이야기를 선덕의 총명함을 말해주는 증좌로써만 소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화랑세기》가 출현한 지금에서는 이 모란씨서되 얘기가 실은 선덕이 아들을 낳기 위해 남자 세 명을 들였으나 아들 낳기에 실패한 史話의 복선이라는 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화랑세기》가 갖는 폭발성은 바로 이에서 비롯된다. 이런 내용을 어찌 조작해 낼 수 있다는 건지 필자로서는 궁금하기 짝이 없다.  





모란꽃 향기(牡丹芳) 

  

   당(唐) 백거이(白居易) / 김영문 選譯 


모란꽃 향기롭네 모란꽃 향기로워

홍옥으로 만든 방에 황금 꽃술 터졌네

천 조각 붉은 꽃잎 노을처럼 찬란하고

백 가지 진홍 꽃이 등불처럼 휘황하네

땅 비추며 이제 막 비단 자수 펼칠 뿐

바람 속에 난향 사향 주머니도 차지 않았네

신선 옥나무도 창백하게 빛을 잃고

서왕모 복사꽃도 향기를 잃는다네

밤이슬 동글동글 보랏빛 펼쳐내고

아침 태양 반짝반짝 빨간빛 비춰내네

보라 빨강 두 색 사이 짙고 옅은 색조 섞여

마주보고 등지면서 온갖 모습 뒤바꾸네

고운 꽃잎 다정하게 부끄러운 얼굴 감추고

누운 꽃떨기 힘없이 취한 모습 숨기네

어여쁘게 웃는 얼굴 고운 입 가린 듯

생각 잠겨 원망하며 애간장 끊는 듯

농염하고 귀한 자태 진실로 절색이라

잡다한 화초들에 비교할 수 없어라

석죽 금잔화는 얼마나 시시한가

연꽃 작약도 진실로 평범하네

왕공귀족 경대부도 마침내 몰려나와

수레 세우고 날마다 꽃구경이네

곱고 푹신한 수레 탄 고귀한 공주와

명마 타고 향기 풍기며 부자 도령도 섞였네

위공 저택 동쪽 정원 고요하게 닫혀 있고

서명사 북쪽 회랑 깊숙하게 열려 있네

춤추는 나비 쌍쌍이 오래도록 사람 구경

쇠약한 꾀꼬리 한 번 울며 봄날을 늘리네

향기 태양 빛에 머물기 어려울까

장막 펼쳐 시원한 그늘 드리우네

모란꽃 피고 지는 스무날 

온 성이 모두들 미친 듯

하·은·주 삼대 이후 문(文)이 질(質)을 뛰어넘으니

인심도 질박함보다 화려함 중시하네

화려함 중시하여 모란 향기에 이른 건

조금씩 쌓여 왔지 오늘 생긴 일 아니라네

원화 연간 천자께서 농사 양잠 걱정하며

백성을 구휼하자 하늘이 길상 내리셨네

작년에는 가화(嘉禾)에 아홉 이삭 달렸지만

논밭에는 쓸쓸하게 아무도 가지 않았네

올해는 서맥(瑞麥)에 두 가지가 자랐지만

임금 혼자 기뻐할 뿐 아무도 모른다네

아무도 모르니, 진실로 탄식할 뿐

이 내 몸 잠시라도 조화옹 힘을 빌려

요염한 모란꽃 화려한 빛 줄이고

모란꽃 사랑하는 공경대부 마음 식혀

농사 일 걱정하는 우리 임금 닮게하리


牡丹芳, 牡丹芳,

黃金蕊綻紅玉房.

千片赤英霞爛爛,

百枝絳點燈煌煌.

照地初開錦繡段,

當風不結蘭麝囊.

仙人琪樹白無色,

王母桃花小不香.

宿露輕盈泛紫豔,

朝陽照耀生紅光.

紅紫二色間深淺,

向背萬態隨低昂.

映葉多情隱羞面,

臥叢無力含醉妝.

低嬌笑容疑掩口,

凝思怨人如斷腸.

濃姿貴彩信奇絕,

雜卉亂花無比方.

石竹金錢何細碎,

芙蓉芍藥苦尋常.

遂使王公與卿士,

遊花冠蓋日相望.

庳車軟輿貴公主,

香衫細馬豪家郞.

衛公宅靜閉東院,

西明寺深開北廊.

戲蝶雙舞看人久,

殘鶯一聲春日長.

共愁日照芳難駐,

仍張帷幕垂陰涼.

花開花落二十日,

一城之人皆若狂.

三代以還文勝質,

人心重華不重實.

重華直至牡丹芳,

其來有漸非今日.

元和天子憂農桑,

恤下動天天降祥.

去歲嘉禾生九穗,

田中寂寞無人至.

今年瑞麥分兩岐,

君心獨喜無人知.

無人知, 可歎息.

我願暫求造化力,

減卻牡丹妖豔色.

少回卿士愛花心,

同似吾君憂稼穡.


영화 《황산벌》이 말했던가? 꽃은 화려할 때 지는 기라고? 그 화려함에서 꽃 중의 꽃은 단연 모란이라, 괜시리 그를 화왕(花王)이라 일컫었겠는가. 화려함은 순식간에 발산한 에너지가 폭발한 모습이니, 이를 누설淚洩이라 이름한다. 화려하기에 꽃은 기껏해야 생명줄이 스무날 남짓했으니, 이 역시 한 송이가 스무날을 간 것이 아니요, 이 송이 저 송이 모란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고지며 연장하는 시한부 인생 총합이 스무날에 지나지 아니한다.  


그 스무날이 아까워 차양을 치고는 그늘을 만들어 그 전광석화 같은 시간을 늦잡고자 했으니, 초여름 문턱 퇴약볕 드러난 모란을 유심히 살핀 적 있는가? 축 늘어진 그 꽃술은 영락없는 오뉴월 소불알이요, 그 힘 없음은 누설하고는 풀 죽은 음경에 진배없다. 싱싱함을 유지코자 태양을 막고자 차양을 쳤으니, 그리하여 단 하루라도 생명을 연장해 모란을 즐기고자 했다. 


백씨 낙천 거이가 이를 묘사하기를 "향기가 태양 빛에 머물기 어려움 근심하여 장막을 펼쳐서 시원한 그늘 드리우네"라고 했으니, 이 대목이 바로 내리쬐는 태양에서 모란을 지키고자 한 발악이다.  


그래도 모란은 피고진다. 그 "모란꽃 피고 지는 스무날 온 장안성 사람은 모두들 발광한 듯하네"라니, 그 사뭇한 풍광이 1천200년 시간 간극을 뚫고서 경복궁 아미산으로 여진으로, 전율로 전하노라. 


김영문 선생 옮김을 약간 손댔다. 



한시, 계절의 노래(49)


모란을 감상하다(賞牡丹) / 당(唐) 유우석(劉禹錫) / 김영문 選譯評


뜰 앞 작약 요염하나

격조가 없고


못 위 연꽃 깨끗하나

박정한 모습


모란만 진정으로

국색일지라


꽃 피는 시절이면

도성이 들썩


庭前芍藥妖無格 

池上芙蕖淨少情 

唯有牡丹眞國色 

花開時節動京城


모란꽃은 과연 향기가 없을까? 선덕여왕은 당나라에서 보내온 모란꽃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모란꽃은 향기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 이야기는 선덕여왕의 지혜를 찬양하는 에피소드로 역사책에 실려 전한다. 실제로 모란꽃을 심었더니 정말 향기가 없어서 나비가 오지 않았다는 내용과 함께. 하지만 내가 맡아본 모란꽃 향기는 매우 짙었다. 모란이 부귀를 상징함은 화려하고 큰 꽃과 함께 그 짙은 향기에서 연원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처럼 선덕여왕과 모란꽃에 관한 이야기는 명실상부하지 않기에 여러 방향에서 그 원인을 구명하고자 했다.(이상 김영문) 


유우석과 남다른 친분을 과시하고 동시대를 호흡하면서 함께 문단을 호령한 낙천 백거이 역시 모란을 소재로 한 시 여러 편을 남겼으니, 유우석이 말한 '꽃 피는 시절이면 도성이 들썩'이라는 구절이 백낙천에서 이르러서는 "꽃이 피고 지는 스무날, 온 성안 사람이 모두 미쳐 날뛰듯 하네(花開花落二十日 一城之人皆若狂)"라는 버전으로 바뀌니, 이 시대 모란은 그야말로 광풍이라, 견주건대 이 시대 이 순간 이 세계를 호령하는 방탄소년단 같았다.  

‘씨내리’ 남자 셋 들이고도 임신 못한 선덕여왕

[중앙선데이] 입력 2016.09.18 00:46 | 497호 23면 

  

“신이 듣기에 옛날에 여와씨(女媧氏)가 있었으나, 그는 진짜 천자가 아니라 (남편인) 복희(伏羲)가 구주(九州)를 다스리는 일을 도왔을 뿐입니다. 여치(呂治)와 무조(武?) 같은 이는 어리고 약한 임금을 만났기에 조정에 임해 천자의 명령을 빌린 데 지나지 않아, 사서에서는 공공연히 임금이라 일컫지는 못하고 다만 고황후(高皇后) 여씨(呂氏)라든가 즉천황후(則天皇后) 무씨(武氏)라고만 적었습니다. 하늘로 말한다면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부드러우며, 사람으로 말한다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법이니, 어찌 늙은 할망구(??)가 규방을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하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신라는 여자를 추대하여 왕위에 앉히니 이는 실로 난세(亂世)에나 있을 법한 일이라, 그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에 먼저 울면 집안이 망한다(牝鷄之晨)’고 하고, 『주역(周易)』에는 ‘암퇘지가 두리번두리번 거린다’고 했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국사 최초의 여주(女主)인 신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재위 16년째인 647년 봄 정월 8일에 죽은 사실을 『삼국사기』가 적으면서 그 편찬 총책임자인 김부식이 덧붙인 역사평론인 사론(史論) 전문이다. 아주 혹독한 평가다. 한데 같은 『삼국사기』 선덕왕본기에는 원래 이름이 덕만(德曼)인 그가 아버지 진평(眞平)을 이어 즉위한 사실을 전하면서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니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고 해서 이율배반의 평가를 한다. 성조황고는 그 의미가 확연하지는 않지만, 요컨대 성스러운 덕성을 지닌 후덕한 어머니 혹은 할머니 같은 존재 정도를 의미한다.

  

여자가 군주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불만은 당시 신라 내부에서도 팽배했던 듯하다. 국제사회에서 빈축을 사기도 했던 모양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선덕이 여자라 해서, 당 황실에서 배필을 골라줄 테니 정치는 그 남자한테 맡기라 빈정대기도 했다. 선덕이 죽음을 앞두자 왕위 계승권이 없는 이들이 왕좌 탈취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니, 이해 봄 정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상대등(上大等) 직위에 있던 비담(毗曇)이 염종(廉宗)과 함께 일으킨 내란이 그것이다. 비담이 내세운 논리가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였다. 아마도 비담은 선덕이 곧 죽을 것이 확실한 와중에 그 후임을 같은 여자인 진덕(眞德)으로 확정하자 다시 여자가 임금이 돼선 안 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권좌를 탈취하고자 했던 듯하다. 

  

비담 “여왕은 나라 못 다스려” 난 일으켜하지만 혹평과는 달리 선덕은 매우 똑똑한 여자였던 듯하다. 즉위 당시 나이가 얼마인지 알 수는 없지만, 중년을 넘어선 것만은 확실하다. 김부식 사론에선 그를 ‘늙은 할망구(??)’라 했고, 그가 즉위하자 신라사람들이 ‘성조황고(聖祖皇姑)’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선덕은 노련하면서도 덕을 갖춘 정치인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선덕의 총명함을 말해주는 일화가 나란히 등재돼 있다. 특히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 수록된 이야기는 아예 제목부터가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다시 말해 선덕왕이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일이다. 두 가지는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女根谷)이라는 곳으로 백제군이 몰래 침습한 걸 알아내 그들을 몰살하고,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았다는 것이다. 선덕왕이 예지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나머지 하나가 모란 사건이다. 먼저 『삼국사기』 선덕왕본기 첫 대목에 수록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앞선 왕(진평왕-인용자) 때 당나라에서 가져온 모란꽃 그림과 그 꽃씨를 덕만에게 보이니, 덕만이 말하기를 ‘이 꽃이 비록 지극히 요염하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고 했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는 까닭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에게 국색(國色)이 있으면 남자들이 따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 꽃은 무척 아름다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향기가 없는 꽃임에 틀림없습니다’고 했다. 그것을 심었더니 과연 말한 바와 같았으니 미리 알아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이는 선덕이 진평왕의 공주이던 시절의 일화로 보인다. 『삼국유사』의 ‘선덕왕 지기삼사’엔 이렇게 적혀있다.

  

“당 태종이 모란을 세 가지 색깔, 즉 붉은색·자주색·흰색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 씨앗 석 되를 보내왔다. (선덕)왕이 꽃 그림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오’라고 했다. 이에 명하여 뜰에다 (그 씨를) 심게 했다가 그것이 피고 지기를 기다렸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중략) 이로써 대왕이 신령스럽고 신령함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뭇 신하가 왕께 아뢰기를 ‘어떻게 (모란) 꽃과 개구리 두 사건이 그렇게 될 것을 아셨습니까?’ 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꽃을 그렸으되 나비가 없으니 거기에 향기가 없음을 알았소. 이는 곧 당나라 황제가 과인에게 배필이 없음을 놀린 것이오.’ (중략) 이에 뭇 신하가 모두 그의 성스러운 지혜에 감복했다. (모란) 꽃 세 가지 색을 보낸 것은 아마도 신라에 세 여왕이 있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선덕·진덕(眞德)·진성(眞聖)이 그들이니 당나라 황제도 미래를 아는 명석함이 있었다.”

  

『삼국사기』와 비교해 몇 가지 미세한 차이점을 지적하면, 우선 이 사건이 발생한 때가 선덕이 왕으로 있던 시절이다. 또 『삼국유사』 쪽 기술이 훨씬 생생하며 문학적이다. 이런 차이는 참조한 원전이 각기 달랐을 가능성도 있지만 같은 원전을 참조하면서 이를 전재하는 과정에서 현재와 같은 차이가 빚어졌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건이 역사성을 반영한 것일까. 필자는 이 일이 선덕여왕 혹은 선덕공주 시대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한다. 그 근거는 이야기의 소재로 등장하는 모란 때문이다. 공주 시절이건, 여왕 시절이건 이 시대에는 모란이 등장할 수 없었다. 모란은 이보다 대략 100년 뒤에나 등장하기 때문이다. 당 태종이 모란 그림과 모란 씨를 보내왔다고 하는데, 이세민 시대에 중국에 모란은 없었다는 역사성의 차이를 어찌 증명할 것인가.

  

중국사에서 볼 때 당 제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모란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진평왕, 혹은 선덕여왕 시대보다 무려 100년이나 뒤인 서기 750년 무렵 이후다. 아무리 일러도 730년 이전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중국의 관련 기록을 모조리 검토하면 모란은 중국 대륙 북부 사막 지역에서 이 무렵에 들어왔으며, 더구나 그런 모란이 광적인 열풍을 일으킨 것은 800년 이후, 백거이가 이 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떠오른 무렵이다. 실제 중국 청나라 때 당나라 시인 2200여 명이 남긴 시 4만8900여 수를 묶은 방대한 시집 『전당시(全唐詩)』를 훑어봐도 당 현종 개원 연간(713~741) 이전에는 모란을 소재로 하는 시가 단 한 편도 등장하지 않는다. 모란이 그 무렵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각종 기록을 봐도 이 꽃은 개원 연간에 장안에 비로소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니 진평왕 시대에 당나라에서 신라에 모란씨나 모란 그림을 선물로 보낼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화랑세기』에 여왕 둘러싼 ‘삼서지제’ 소개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무엇을 모티브로 한 것일까. 이 점을 해명하기 위해선 이 이야기가 선덕왕(혹은 선덕공주)을 감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꽃이 피었는데 향기가 없고, 그래서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다거나 열매를 맺지 않았다는 것은 남자가 없거나, 남자가 있어도 자식, 특히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은유에 다름 아니다. 각기 다른 세 가지 색깔의 모란씨를 심었지만 향기가 없다는 것은 혹시 선덕왕에게 세 명의 남자가 있었지만 누구에게서도 자식을 두지 못했다는 뜻이 아닐까.

  

의문의 실마리는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라는 사람이 필사본 형태로 남긴 『화랑세기(花郞世紀)』에서 찾을 수 있다. 『화랑세기』는 우두머리 화랑을 역임한 역대 풍월주 32명에 대한 전기물이다. 13세 풍월주 용춘공(龍春公) 열전을 보면 다음 왕위를 이을 아들을 생산하지 못한 선덕여왕을 둘러싸고 벌어진 ‘삼서지제(三?之制)’라는 제도가 다음과 같이 흥미롭게 소개되고 있다.

  

“(선덕) 공주가 즉위하자 (용춘) 공을 지아비로 삼았지만 공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물러나고자 했다. 이에 뭇 신하가 삼서(三?)의 제도를 의논하여 흠반공(欽飯公)과 을제공(乙祭公)으로 하여금 왕을 보좌토록 했다. (용춘) 공은 본디 (아버지인) 금륜(金輪)이 색(色)에 빠져 폐위된 일을 슬퍼하여 성품이 색을 좋아하지 않아 왕에게 아첨할 생각이 없었기에 물러날 뜻이 더욱 굳어졌다. 선덕은 이에 정사를 을제에게 맡기고 공에게 물러나 살도록 했다. (물러난) 공은 천명공주(天明公主)를 처로 삼고는 태종(太宗·김춘추)을 아들로 삼았다.”

  

선덕왕은 아들을 두고자 용춘·흠반·을제 세 명의 남자를 잠자리로 불러들였으나, 모두 임신에 실패했다. ‘삼서지제’는 여자가 적통 아들을 두기 위해 남자를 세 명까지 불러들이는 제도였던 것이다. 이들은 정식 남편이 아니라 씨내리 남자들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이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해서 나중에 모란 이야기로 둔갑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