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미천왕비이자 고곡원왕 어머니. 모용황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생환한 바 있다.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본기 : 12년(342) 11월에 [모용]황이 스스로 날랜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남도로 나와, 모용한과 모용패(慕容覇)를 선봉으로 삼고, 따로 장사(長史) 왕우(王=) 등을 보내 군사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북도(北道)로 나와서 침략해 왔다. 왕은 아우 무(武)를 보내 정예군 5만 명을 거느리고 북도를 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남도(南道)를 막았다. 모용한 등이 먼저 와서 싸우고 [모용]황이 대군을 이끌고 뒤이어 오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했다.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 머리를 베니 여러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마침내 환도로 들어 왔다. 왕은 말 한 필을 몰고 도망가 단웅곡(斷熊谷)으로 들어갔다. [연나라] 장군 모여니(慕輿=)가 쫓아가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비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이때, 왕우 등이 북도에서 싸우다가 모두 패하여 죽었다. 이로 인해 [모용]황이 다시 끝까지 쫓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왕을 불렀으나 왕은 나가지 않았다. [모용]황이 장차 돌아가려 할 때 한수가 말했다.“고구려 땅은 지킬 수 없습니다. 지금 그 왕이 도망하고 백성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숨어있으나, 대군이 돌아가면 반드시 다시 모여들어 나머지 무리를 모아 오히려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그의 친어머니를 잡아가십시다. 그가 스스로 몸을 묶어 항복해 오기를 기다려 그 후에 돌려주고 은덕과 신뢰로 어루만지는 것이 상책입니다.” [모용]황이 그 말을 좇아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싣고, 창고 안의 여러 대의 보물을 거두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그 궁실을 불지르고, 환도성을 허물고는 돌아갔다.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본기 : 25년(355) 겨울 12월에 왕은 사신을 연나라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치면서 어머니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나라 왕 [모용]준이 이것을 허락하고 전중장군(殿中將軍) 조감(龕)을 보내 왕의 어머니 주씨를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왕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로 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하고, 왕호는 예전과 같게 하였다.



'고대한국인명지명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국원왕(故國原王)  (0) 2018.02.19
송황(宋晃)  (0) 2018.02.19
주씨(周氏)  (0) 2018.02.19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  (0) 2018.02.19
무(武)  (0) 2018.02.19
쇠(釗)  (0) 2018.02.19

기사) 시신 도굴 미천왕, 그 영광과 비극


고조가 아니라 증조다 기사 내용 수정 바람 미천왕은 광개토대왕의 증조부임 미천왕의 아들이 고국원왕이고 고국원왕의 둘째아들이 광개토대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이다 고조는 개뿔 고조는 미천왕의 아버지인 돌고가 고조임 수정 바람” 

이 지적이 맞다. 아래 계보에서 보듯이 광개토왕에게 미천왕은 증조다. 고조라는 내 기사는 오류다. 
  
미천왕 –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 광개토왕 – 장수왕 




시신 도굴 미천왕그 영광과 비극
(서울=연합뉴스김태식기자 최근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부친 묘 도굴사건은 지금으로부터 꼭 1657년 전인 고구려 고국원왕 12즉 서기로는 342년 2(양력으로는 3)에 일어난 고구려 미천왕 시신 도굴사건과 흡사 닮아있다.
  
우리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산 인물 중 한명인 고구려 15대 미천왕(美川王재위 서기 300~330)은 제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재위 331~370)의 부친이면서 정복군주로 이름 높은 광개토왕(재위 391~412)에게는 고조할아버지가 된다.(注-붉은고딕 글씨 부분을 증조로 수정해야 한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권력투쟁에서 밀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소금장수 생활로 연명한 그지만 폭군 봉상왕(烽上王)을 몰아낸 쿠데타 세력에 의해 일단 왕위에 옹립되고 나서는 광개토왕 못지않은 눈부신 정복활동을 펼치게 된다.
  
한나라 때부터 설치된 현도군을 침입해 8천 명을 생포해 평양으로 옮겼고 요동군의 서안평을 습격해 취했으며 313년에는 4백여 년간이나 계속된 중국의 낙랑군을 드디어 멸망시키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재위시절에는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복군주였다는 광개토왕이나 신라 진흥왕 못지않은 영광된 삶을 살았지만 죽고 난 뒤에는 이만저만한 모욕을 당한 게 아니었다.
  
그의 시신은 미천원(美川原)이란 언덕에 모셔졌다생전 이름이 을블(乙弗) 혹은 우불(優彿)이었던 그가 미천왕이라는 시호(죽은 뒤의 이름)를 얻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인 고국원왕 재위 12(서기 342) 2월 북방유목민족 선비족이 건국한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愰)은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서울인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미천왕릉을 도굴해 그 시신을 꺼내 왕모(王母)를 포함한 고구려 남녀 포로 5만여 명과 함께 끌고 돌아갔다.
  
치욕을 당한 고구려는 미천왕 시신과 왕모를 돌려받기 위해 전연에 구걸 외교를 펴는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2월 고국원왕은 친동생을 보내 모용왕 앞에서 보물 수천 점을 바치면서 스스로 ()’이라 낮추는 치욕을 감수하고 나서야 겨우 미천왕 시신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모용왕은 여전히 왕모즉 미천왕의 왕비이면서 고국원왕의 어머니는 13년 동안이나 인질로 붙잡아두고 있다가 고국원왕 재위 25년째에야 돌려보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무덤을 도굴해 시신 일부를 베어간 뒤 돈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번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부친 묘 도굴사건이 미천왕 도굴 사건과 흡사 닮아있다는 것은 두 사건 모두 아무 말이 없는 시신을 볼모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 Recent post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