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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시대 조선 땅 문화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한명이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다. 가만...한자 표기가 맞는지 자신이 없다. 내 기억에 의하면 이 친구 1927년 공주고보 한문교사로 부임해 1940년인지 강경여고로 옮기기까지 이 학교에서 죽 생활하면서 송산리 고분군을 비롯한 공주 일대 고분을 무허가로 천기 가까이 도굴했다. 이 와중에 일어난 유명한 사건이 벽화분인 송산리 6호분 도굴사건이다. 


공주고등학교 발간 <공주고60년사>



2000년 무렵, 무령왕릉 발굴 30주년을 코앞에 두고 그의 행적을 추적한 적이 있다. 가루베에 대해서는 공주 지역 일부 연구자가 學的으로 주목한 적이 있으나 당시까진 글다운 글이 없었다. 그나마 풍문에 의지한 글이 대부분이었다.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떤 개뼉다귀냐?


가루베는 일본 제국 패망과 더불어 본국으로 돌아가 미에현인지 어디에서 교수로 봉직하다가 1970년인지, 69년인지 무령왕릉이 발견되지 직전에 죽었다. 그가 죽은 직후 그의 글을 모은 유작이 단행본 2권으로 나왔는데 이것이 그의 연구를 위한 제1의 문헌이다. 


한데 이에 수록한 글이라든가 식민지시대 신문 잡지 등등을 뒤져보면 그의 조선 행적이 더러 보이기는 한다. 이 중에서도 그가 애초에는 평양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기차를 타고 공주에 입성하는 장면을 자못 비장하게 그려놓은 글이 있거니와, 참으로 잘 쓴 小文이다.


그의 행적을 추적하던 당시 내가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 고리로 삼은 것이 바로 공주고등학교 敎史였다. 공주고보 후신인 공주고 역사를 정리한 그 교사에는 무엇인가 그와 관련한 행적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공주고 정도면 교사도 틀림없이 여러 번 나왔을 것이라 짐작했다. 한데 이를 어디에서 구한다는 말인가? 




그 무렵 공주에 들렀을 때다. 아마도 대통사지 인근, 혹은 공주고 근처였다고 기억하는데 거기에 헌책방 하나가 있었다. 나는 헌책방 다니기를 좋아하거니와, 무엇이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 케케한 냄새와 공기가 좋다. 무료하거나 마음이 산란할 때 헌책방처럼 멍 때리기 좋은 데도 없다. 그날도 이런저런 구경 삼아 훑어보는데, 내가 관심 있는 분야로 국한하자면, 이곳이 아무래도 공주라 그런지 공주지역 발굴보고서가 많았다.   


이날 이 헌책방에서 두 가지 중대한 자료를 구했으니, 하나는 정확한 책 제목이 지금 지금은 기억나지 않으나, 해방 직후 경성제국대학(당시 이름이 바뀌었나 모르겠다) 사학과 교수 학산 이인영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만든 두툼한 한국사 개설이었으니, 그에는 손진태 서문이 붙었고, 집필에 참여한 제자들로는 손보기와 한우근, 김성준 등등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이 책은 희귀본으로 분류되거니와, 한데 이 책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머지 하나가 바로 공주고 교사敎史였다. 그런 교사로 2종인가 찾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60년사와 80년사. 가루베 행적이 있다면 《공주고60년사》가 나을 듯했다. 왜냐? 이에는 가루베를 기억하는 이 학교 출신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대강 펼쳐보니 이 교사에는 학창시절을 추억하는 이 학교 출신자의 회고담이 꽤 있었다. 그것을 대강 훑어보니 아! 이럴 수가? 온통 가루베 얘기였다. 그리고 역대 교사 명단을 보니 역시 그의 이름이 보였다.


본국으로 귀환한 가루베는 1969년 조선 땅을 다시 밟는다. 이 귀국 장면이 가루베의 글에 보이는데, 강경여고 제자들이 공항으로 마중나온 사실을 감격스레 그려놓았다. 이 때 한국 여행에서 가루베는 명지대에서 강연을 하기도 한다. 당시 나는 그가 왜 명지대에서 강연을 했을까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왜???? 왜????? 왜???? 


이를 나는 공주고보 교사를 보고 알았다. 명지대 설립자는 공주고보 5회인지 6회였거니와 그가 바로 가루베의 제자였다.


그의 행적에서 참으로 수상쩍은 또 다른 대목은 이런 그가 1940년 강경여고로 갔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 대한 궁금증을 당시 나는 강경여고 교사를 찾아서 실마리를 잡고자 했다. 하지만 이 작업도 이내 흐지부지되어 더 이상 추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무령왕릉 발견 30주년을 맞아 우리 공장에서 그 특집을 기획하고, 내가 15회 분량인가를 집필하는 한편, 이를 토대로 직후 단행본을 준비하면서 그와 관련한 자료조사를 더했으니, 그때 조사성과가 근자 《직설 무령왕릉》으로 정리되어 나온 것이다. 


저 공주교보 60년사는 그때 내가 무령왕릉 특집을 비롯해 더러 인용하면서 요긴하게 써먹었으니, 이후 다른 사람들의 관련 글을 보니, 이 교사가 빠지지 않고 인용되고 있음을 보았다. 역사를 쓸 적에 교사가 그만큼 요긴하다. 


내가 특집과 책을 쓸 때 참고한 가루베 관련 책 두 종은 두번째 첨부사진이니, 저 자료집을 그때만 해도 나는 국립민속박물관 소장본을 이용했으니, 지금 내 서재 있는 저들은 현재 일본 규슈에 안식년을 보내는 대전대 이한상 교수가 마침 그곳 헌책방에 들렀다가 발견하고는 나한테 요긴하리라 해서 사서 일본에서 발송해온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이 교수께 다시금 감사하다는 말을 남긴다. 

 


가루베 지온








여러 번 이곳저곳에서 말했듯이, 나한테 《직설 무령왕릉》은 해직이 준 선물이었다. 나는 2015년 11월28일, 연합뉴스에서 해직되었거니와, 졸저는 이듬해 4월 30일자로 찍혀 도서출판 메디치미디어에서 나왔다. 해직을 축복으로 여긴 나는 이때다 싶어, 기간 미룬 일이나 이참에 마침표를 찍자 해서, 나아가 뭐 이래저래 소일거리 삼아 옛날 원고를 뒤척이며, 이 참에 그 옛날에 사산死産한 무령왕릉 원고 정리에 들어가기로 했으니, 그리하여 마침내 저 졸저가 나왔다. 남들 생각보다 일이 훨씬 빨리 진행된 까닭은 실은 그 원고가 2001년에 이미 완성을 본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15년이 흘러버렸으니, 손볼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거니와, 무엇보다 그 사이에 무령왕릉을 둘러싼 무수한 변동이 있었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원고를 완성해 놓고도 내가 저 책 출간을 미룬 이유는 권오영 선생 때문이었다. 한때 역기를 했다는 그 권오영 말이다.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인 권오영은 어찌된 셈인지, 국사학으로는 벌어먹기 힘들다 판단했음인지, 이곳저곳 발굴장을 기웃거리게 되고, 그리하여 어쩌다가 최몽룡 눈에 띄어 1987년인가에는 최몽룡과 공동 저자 형식으로 하남위례성에 관한 글 한 편을 탈초하게 되고, 그것을 아마 내 기억에는 《향토서울》인지 《국사관논총》인지 어디에 발표하기에 이르렀거니와, 아무튼 이런 전력을 발판으로 나중에 동아대 전임으로 임용되어서도 고고학 주변을 얼쩡거렸으니, 그러다가 또 어찌하여 나중에 한신대로 자리를 옮겼으니, 바로 이곳에서 운명과도 같은 풍납토성을 조우하게 된 것이었다. 


1996년, 풍납토성 발굴 연합조사단이라는 요상한 협의체에 이름을 올린 한신대박물관은 풍납토성 조사에 한 다리 걸치게 되고, 1999년인가에는 저 유명한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을 낙찰받게 되거니와, 이 과정에서 또 더 유명한 발굴현장 파괴사건을 겪기도 했으니, 이를 통해 그가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는 필설로 형언키 어렵다. 경당지구 발굴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 그때 나는 이 일을 기록으로 더 확실히 남겨야겠다 해서, 도서출판 김영사와 계약하고는 그것을 일필휘지로 정리해 내려갔으니, 그것이 바로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였다. 


한데 그 진실성 여부는 확언하지는 못했지만, 그 무렵 어딘가에서 권오영 선생이 풍납토성 건으로 모 출판사와 계약을 했다는 말이 들렸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 진실성 여부를 나는 확인하지는 못했다. 이걸 본인한테 직접 묻자니, 영 모양새가 이상해서,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어쩌면 내가 김을 빼버린 셈이 되는구나 하는 막연한 미안함이 꽤 심했다. 물론 아니라면, 괜한 걱정이었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 무렵, 나는 동시에 무령왕릉 집필에 들어갔다. 한쪽에는 풍납토성, 다른 쪽에는 무령왕릉을 두고 동시 집필에 몰입했던 것이거니와, 하필 무령왕릉이었는가 하면, 2001년이 바로 무령왕릉 발굴 40주년이었고, 이를 즈음해 나는 연합뉴스를 통해 무령왕릉 특집을 15회 분량인가에 걸쳐 장기연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풍납토성이 급하다 해서 그것을 먼저 낸 것인데, 그 무렵 또 이상한 말이 들려왔다. 권오영 선생이 무령왕릉 출판건으로 무슨 출판사와 계약을 한 상태로, 원고를 준비 중이라는 것이었다. 내 기억이 정확한지 자신은 없으나, 이 말을 나는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한창 풍납토성 발굴에 종사하던 신희권한테 들었다. 


이러다간 또 내가 선수를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혹은 미안함이 다대했다. 권오영은 아마 기억하지 못할 듯한데, 이 건은 내가 본인한테 직접 확인해야 했다. 아마 풍납토성 현장인지 아니면 학술대회장 같은 데선지 자신은 없으나, 아무튼 그를 직접 만나 무령왕릉 책 출간 계획이 있는가를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내가 그 말을 듣고는 저도 준비 중인데, 그러면 저는 선생이 책을 내고 나면 내지요 라고 했다. 이런 말에 권오영은 요점을 추리면 그럴 필요 있겠는가? 같이 나오면 더 좋지 않겠느냐 뭐 이런 식이었다. 


무령왕릉 출간 계획을 직접 확인했으니, 나는 미루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건 예의가 아닌 듯해서, 권오영 책이 나오기를 기다려, 그 이후에 낼 작정이었다. 이것이 2001년 혹은 2002년에 있었던 일이다. 


한데 니미랄, 곧 나온다 곧 나온다던 권오영 책은 하세월이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그의 책은 물경 2005년 6월에 이르러 《고대 동아시아 문명 교류사의 빛 무령왕릉》이라는 제목으로 도서출판 돌베개에서 나오고야 말았다. 잠시만 기다렸다가 내겠다는 내 원고 역시 그만큼 뒤로 미뤄지고 말았으며, 무엇보다 이 기간, 나는 무령왕릉에 대한 열정을 그만 상실하고 말았다. 


2001년 완성한 무령왕릉 원고에는 서문까지 있었으니, 그때 써둔 그 한 구절이 이렇다. 


이 책은 나로서는 올들어 두 번째 단행본이 된다. 지난 2월에는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를 통해 풍납토성이 한성백제 500년 왕성인 하남위례성임을 조명했다. 고고학 발굴기를 겸한 거기에서 나는 무령왕릉 발굴기 집필을 나 자신과 독자들께 다짐했다. 그 약속을 지금 실천에 옮긴 것이다. 한데 아주 묘하게도 애초에 그리 목적한 것은 아닌데 결과는 백제 2부작이 되고 말았다. 전편이 풍납토성을 고리로 한성도읍기 백제 493년을 훑어보았다면 이번에는 무령왕릉을 통해 웅진도읍기 백제 63년을 조명하게 되었다. 아울러 이 2부작은 고고학 발굴 성과에 초점을 맞추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사비도읍기까지 합쳐 아예 고고학 발굴을 통한 백제 3부작을 완성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다. 틀림없이 그리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3부작은 이전 단행본보다는 더 많은 시간과 공부와 준비가 필요할 것 같다.


2001년 10월10일 저녁 8시13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서


그런 책이 해직이라는 축복을 맞아 마침내 세상 구경을 했으니, 묘하도다 묘하도다. 운명이로다 운명이다. 


  1. yisabu 2018.09.29 15:17 신고

    백제 3부작 마지막 작품 주제가 궁금하면 권오영 선생님께 여쭈어 봐야겠군요.

  2. 한량 taeshik.kim 2018.09.29 15:18 신고

    나왔어요

  3. 한량 taeshik.kim 2018.09.29 15:18 신고

    능산리 발굴기로

  4. 차포 2018.09.29 21:02 신고

    풍납토성. 이북이 안나왔네요. 무녕왕령은 이북 살려고 카트에 넣어 놨습니다. 혹시 풍납토성이 이북으로 나올까요? 아니면 절판이라 귀국해서 중고로 구매 해야 해서요.


공주 교촌리에서 무령왕릉과 유사한 형태의 벽돌무덤 확인

- 발굴현장 공개 6.7. 오전 11시 -


공주 교촌리 전축분 전경



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의 허가를 받아 지난 5월부터 공주시와 함께 공주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하고 있는 공주 교촌리에서 공주 송산리 고분군(사적 제13호) 내 무령왕릉과 유사한 형태의 백제 시대 전축분(塼築墳, 벽돌무덤)이 발굴 조사되어 현장 공개와 설명회를 7일 오전 11시에 가진다.

* 발굴현장: 충남 공주시 교동 252-1번지

* 전축분(塼築墳): 벽돌로 널방을 만들고 주검을 넣은 무덤 


교촌리 3호분 전축분 노출



교촌리 전축분의 존재는 1530년(중종 25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공주목조(公州牧條) 부분에 “향교의 서쪽에 무덤이 있는데, 백제왕릉이라고 전한다”라는 기록을 통하여 조선 시대에도 이미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교촌리 3호분 전축분 북벽



그러나 교촌리 고분군이 일제강점기인 1939년 사이토 다다시(齊藤忠)와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에 의해 발굴조사된 이후부터는 구체적인 위치를 알 수 없었다. 특히, 가루베 지온이 미완성 고분이라고 정의한 이후, 1971년 송산리고분군 내 무령왕릉이 발굴 조사되면서 교촌리 전축분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지 못한 상태였다.


석단시설 문양전



다행히 지난해 12월, 공주대학교박물관에서 시굴조사를 통하여 교촌리 전축분의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또 다른 백제 시대의 전축분이 발견되어 80여 년 만에 재회하게 된 것이다.


새롭게 발견한 교촌리 3호 전축분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사적 제13호) 내 무령왕릉이나 6호분과 같은 터널형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무덤의 축조에 사용된 벽돌이 모두 무늬가 없는 네모꼴과 긴네모꼴이며, 벽면은 벽돌을 가로로 쌓아서 만들었는데, 이는 무령왕릉이나 6호분과는 다른 모습이라 주목된다. 


교촌리 산 정상부 석단 기초시설



발굴 조사단은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교촌리 전축분이 무령왕릉 축조를 위한 연습용의 미완성분인지, 아니면 백제 웅진기에 도입된 중국식 상장례 도입과 함께 수용된 전축분의 새로운 유형인지, 무령왕릉 이전에 만들어진 왕릉 격의 무덤인지 등 해당 고분의 구체적인 성격을 검토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공주향교 뒤쪽의 ‘교촌봉’ 정상부에서는 백제 시대 석축 단시설이 조사되었다. 1939년 조사를 통하여 2호 전축분이라고 정의하였으나, 이번 발굴조사 결과 전축분이 아니라 산꼭대기에 만들어진 네모꼴의 석축 단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석축 단시설은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하며, 주변에서 무령왕릉에서 나온 문양 벽돌과 같은 연화문(蓮花文) 벽돌이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의 중요 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식민지시대 교촌리 3호 전축분 노출



백제 웅진기에 만들어진 전축분은 그 사례가 많지 않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송산리고분군 내 무령왕릉과 6호 전축분이 있다. 다행히 이번에 진행된 교촌리 3호분에 대한 재발굴조사를 통하여 백제 전축분의 새로운 유형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교촌봉’ 정상에서 조사된 방형의 석축 단시설을 통해 백제 시대 국가의 제례시설 존재를 함께 검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조사 성과가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인 공주의 웅진기 왕도경관을 체계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더 자세한 내용 설명이나 취재를 원하시면 공주대학교 박물관(학예연구사 이현숙 ☎041-850-8733)으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0607 공주 교촌리에서 무령왕릉과 유사한 형태의 벽돌무덤 확인(붙임) (3).pdf



<송산리 6호분 등잔구멍>


1971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기적적으로 무령왕릉이 발견되고, 그 현실(玄室) 내부에서는 네 벽면에 모두 5군대 등잔을 안치한 구녕이 발견됐다. 그 무령왕릉 바로 코앞에 식민지시대에 도굴 상태로 발견된 송산리 6호분이라는 무덤이 있다. 이 무덤 역시 무령왕릉과 일란성 쌍둥이를 방불해 벽돌로 무덤 주체시설을 쌓은 소위 전축분(磚築墳)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그 구조 역시 그랬다. 하지만 6호분은 내부가 몽땅 도굴당한 상태라 그에서 건진 정보는 얼마되지 않았다.


이 6호분에도 무령왕릉과 같은 등잔을 안치한 구녕이 현실 네 벽면에 있다. 숫자는 무령왕릉보다 2개가 많은 7개였다. 도굴 피해를 보지 않은 무령왕릉이 발견됨으로써, 6호분 그 구멍도 비로소 기능을 둘러싼 베일을 벗었다. 


한데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전, 이 구녕을 무엇이라 했던가? 가장 그럴 듯한 설이 불감(佛龕)이라 해서 불상을 안치하는 시설로 봤다. 

하지만 이런 추정 혹은 주장은 무령왕릉이 미도굴 상태에서 발견됨으로써 개망신에 가까운 굴욕을 겪었다. 불감과는 전연 관계없는 등잔을 안치하기 위한 터널이었다. 


나아가 무령왕릉 등잔은 애초 그 발견 발굴 직후에는 비록 중국 수입제이기는 하나 이것이 한반도에서는 가장 오래된 백자 출토례라고 대서특필되었다. 언뜻 백자로 보이나, 최근 정밀조사 결과 이것이 백자가 아니라 청자로 드러났다. 


<무령왕릉 등잔구멍> 


송산리 6호분 현실 구멍을 불감으로 봤다 해서, 무령왕릉 등잔을 백자로 봤다 해서, 우리는 그런 주장을 하고, 그것을 따른 사람들을 유사역사학이라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사역사학은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인가? 나는 유사역사학을 누가 제대로 개념 규정이라도 해줬으면 싶다. 


무령왕릉 발굴 이전, 나아가 그것이 발견된 이후에도 한동안 그것과 송산리 6호분을 둘러싼 황당하기 짝이 없는 설이 횡행했다. 내가 이해하는 한, 소위 강단 역사학이 공격하는 유사 역사학의 가장 큰 특징은 황당무계함이며, 이를 발판으로 삼은 허황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물론 그에 더해 강단역사학이 말하는 유사역사학은 정치성을 고도로 띤다는 말을 덧보태기도 하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송산리 고분군으로 볼 적에 첫째, 황당하기 짝이 없고 둘째, 정치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유사역사학의 그것에 못지 않아, 무령왕릉 묘권(墓券)에서 그의 죽음을 중국 천자에게나 쓴다는 '붕(崩)'으로 적었다 해서, 백제의 주체성, 나아가 한민족의 주체성을 말해준다 해서 그 의미를 허위 혹은 과대 포장한 이가 다름 아닌 강단역사학이라는 점에서 나는 도통 작금 통용하는 유사역사학과 강단역사학을 어찌 구분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무령왕릉 현실..북쪽에서 입구 방면> 


 

<Monument of King Muryeong> 

King Muryeong's 'Big Tomb', or the Graveyard of his Clan?

Kim, Tae-shik

The discovery and excavation of King Muryeong's tomb in 1971 has been great help to solve many questions or mysteries concerning the history of Baekje, but at the same time it has brought on many problems. In that respect its discovery was not only a great blessing, especially to historians, but it also remains to a huge agony to them. One of the unsolved problems in relation to the tomb is 'Big Tomb'(大墓). The two epitaphs excavated in the tomb say the dead bodies of King Muryeong and his wife were shifted to the 'Big Tomb, and buried in it eventually. Almost all of the historians interested in it maintain that the 'Big Tomb' indicate the present King Muryeong's tomb, which is located in the Songsan-ri tomb area, Gongju, the capital of Baekje during the reign of the king(reigning from 501 to 523 A.D.) Nobody has raised any question on that.

But much to their regret, the 'Big Tomb'(大墓) is far away from such an understanding. The expression of the 'Big Tomb', literally meaning 'Big Tomb, makes appearances sometimes in the chinese textual documents of the same age with the period of King Muryeong, or near to it, and more importantly, in the majority of such cases '大墓' does not mean 'Big Tomb', it means the area of tombs or the whole graveyard belonging to a certain clan or family. In brief, the 'Big Tomb' is not a tomb, but a grave area. Therefore the 'Big Tomb' is a collection of many tombs. That means the 'Big Tomb' is a collective noun.

So we can now conclude that the dead bodies of King Muryeong and his wife were shifted to the graveyard of their clan. It can be also great help to the social systems that sustained the dynasty of Baeckje. Its royal familly and high-class clans were operating their family graveyard respectively.

<Songsanri Tumuli>

문화재와 국가주의 망령 - 석굴암과 무령왕릉의 경우  

*** 이 글은 사단법인 한국박물관협회가 발간하는 소식지인 《박물관소식》 2002 3․4호에 ‘특별기고’ 형태로 투고한 글 전문이다.  

석굴암을 감도는 유령이 있다. 국가주의와 국민주의가 응결된 국민국가주의라는 망령이 그것이다. 한국인은 석굴암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한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TV는 장중한 애국가를 들려주며 그 배경으로 석굴암을 빼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석굴암이 훌륭한 문화유산의 하나임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다만 여기서 이런 의문을 품어봐야 한다. 석굴암을 ‘반만년유구한 한민족의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만든 주인공은 과연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그렇게 했는지를 이제는 되짚어보아야 한다.

이러한 반추 과정이 왜 필요한가? 석굴암을 둘러싼 일연의 논쟁, 예컨대 현재의 석굴암 전실이 잘못 복원됐다느니, 전실 수호상이 원래는 몇 개였는데 지금은 몇 개라느니 하는 논쟁도 따지고 보면 국가주의와 밀접히 연관돼 있다.

또 최근에는 석굴암 모형전시관 건립 문제도 불거지고 있다. 경주시와 불국사가 중심이 돼 석굴암 모형전시관을 세우기로 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회의까지 통과한 상황에서 일부에서 환경파괴 등의 이유를 들어 반대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난감해진 문화재청은 갈팡질팡하는 모습이다. 문화재위원회를 통과하고 국가예산까지 배정돼 있음에도 사업자체를 재검토하려 하고 있다.

요컨대 석굴암과 관련한 이러한 각종 논쟁과 논란의 밑바닥에는 항상‘한민족의 가장 위대한 유산을 이렇게 방치, 혹은 파괴할 수 있느냐’는 질타가 깔려 있다. 국사교과서나「한국사신론」을 비롯한 각종 한국사통론은 물론이려니와 이 분야 전문가라는 불교미술사학자들이 쓴 거의 모든 글에서 도출되는 석굴암에 대한 등식 두 가지는‘신라의 호국사찰이자 왕실사찰’이라는 것이다. 아주 이름 높은 국내 어느 미술사학자가 쓴 글에서 뽑은 구절이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성왕이며 항일정신이 투철하던 문무대왕은 평화로운 신라를 항상 노략질하는 왜구를 저주한 나머지 ‘내가 죽으면 동해의 호국룡이 되어 왜적을 무찌르겠노라. 부디 나의 뼈를 동해바다에 장사지내 달라􀀀는 뜻의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신 애국심의 화신 같은 위인이었다...(중략)..신라 사람들은 문무대왕의 지극한 듯을 받들어 이 문무대왕릉을 중심으로 감은사, 석불사(=석굴암) 같은 큰 절들을 세워서 호국룡으로 화한 문무대왕의 힘과 불법(佛法)의 힘을 빌려 항상 바다로 침노해 오는 왜적들을 물리치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 석굴암은 바로 그러한 신라 사람들의 염원이 스며있는 국가적인 절이었으므로 이 절과 불상 조각에 나타난 신라 예술가들의 정성은 너무나 간절한 기도 같은 것이었다.】  

1300년 전 신라시대에 항일정신이 웬말이며, 군주가 곧 나라이던 시대에 군주의 애국심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또한 석굴암이 신라인의 염원이 스며 있는 국가적인 절이라는 말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석굴암을 이렇게 평가하는 이는 비단 고인이 된 불교사학자만이 아니다.

어떻든 우리는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석굴암이 실은 신라시대의 석굴암이 아니요, 더구나 김대성(金大成)이라는 한 개인의 사찰이 아님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이들이 말하는 석굴암은 근대에 들어와 비로소 태동한 근대 국민국가주의의 표상에 불과하다. 요컨대 석굴암은 껍데기였을 뿐이요, 학계는 석굴암이라는고리를 통해 국가와 민족, 국민이라는 근대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석굴암이 한민족의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이자 신라 호국정신을 대표하는 불교유적으로 자리매김된 가장 결정적인 시기가 박정희 유신정권 시대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 무렵‘화랑의 순국무사 정신을 본받아 국민 총화단결을 이룩하며 민족주체성을 되살리며 조국근대화를 이룩하자’는 구호가 열병처럼 한국사회 전반을 휘감았다.

박정희 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전과 이후 독재정권 시절에도 개인과 인권, 자유는 전체와 국익, 의무라는 구호에 질식했다. 이러한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는 개인과 인권, 자유를 말살했을뿐만 아니라 석굴암 같은 문화유산 또한 짓눌렀다. 이 분야 종사자들은 못내 인정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으나 여러 학문 중에서도 역사학과 고고학, 미술사학은 문화재라는 고리를 통해 박정희 장권의 통치기반을 강화, 혹은 정당화시켜주는 일정 구실을 맡았다. 이와 관련된 다른 보기를 우리는 무령왕릉에서도 쉽사리 찾을 수 있다.

1971년 7월 공주 송산리에서 무령왕릉이 발견되고 거기에서 무덤 주인공이 누구이지 알려주는 지석 두 장이 발견됐다. 그 중 하나가 무령왕의 지석이었는데 첫 대목에는 이런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영동대장군 사마완(무령왕)께서 62세에 붕(崩)하셨다’ 중국천자에나 쓸 수 있는 ‘崩’으로 무령왕의 죽음을 표현한 사실을 발견한 학계는 이렇게 난리법석을 떨었다.  

▲ ‘崩’은 중국에서 황제에 한해서 쓰는 것이다. 백제에서 이 글자를 사용한 것은 역시 정치적으로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적 지위를 가지고 중국황제나 대등한 태도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 무령왕릉 발견의 의의로서 둘째로 들어야 할 것은 백제의 주체의식이 뚜렷이 나타난 것을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므로 종래 생각해온 것과 같이 백제를 사대주의 국가라고만 할 수가 없고 도리어 주체의식이 강한 국가였다는 점이 드러났다고 믿는다. 

이런 말은 누군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너무나도 유명한 학계 원로들이 버젓이 학술논문에서 뱉은 말이다. 이처럼 학계는 무령왕릉을 통해 민족주체성과 민족자주성을 부르짖었다.여기서 우리가 심각히 고민해야 할 문제는 그들이 무령왕릉을 통해 외친 민족주체성이 실은 백제의 주체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붕이라는 글자 한 글자를 쓰고 안 쓰고 했다는 점에서 그 나라가 자주적이었느니 종속적이었느니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민족 주체성이며 사대주의라는 개념은 근대 역사학의 창조물이다. 더욱 범위를 좁히자면 무령왕릉에서 찾아냈다고 요란을 떤 민족주체성은 실은 박정희 정권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이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그 무렵 입만 열었다 하면 민족주체성 회복을 외쳤다. 이런 현상은 북한 또한 마찬가지였다.

1500년 전에 축조된 무령왕릉을 박정희 이데올로기를 제창하는 선전도구로 삼고 있으니 이것이 역사학이 권력과 야합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제국주의 성장과 궤를 같이하며 19세기말에 태동한 근대 역사학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제국주의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했으며 특히 이 과정에서 문화재는 그 집중 타깃이 되기에 이르렀다.

영국 출신 유대인 좌파 역사학자 에릭 홉스본은 역사학의 이런 어용성을 갈파했다. 그에 따르면 역사가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권력이 요구하는 전통, 다시 말해 권력이 요구하는 이데올로기 확립에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다시 석굴암 얘기로 돌아가면 석굴암이 호국 혹은 왕실 사찰이라는 근거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석굴암은 김대성의 개인사찰이었으며 애국심과도 하등 관련이 없다. 설혹 그것이 왕실사찰이었다고 해서 그것이 신라 애국심을 발로가 되는 것이 아니며 항일정신과도 눈꼽만큼 연관이 없다.

더불어 우리는 석굴암의 원형이 어떠했는지도 알 길이 없다. 겨우 20세기 초반에 찍거나 그린 사진이나 도판 몇 장을 찾았다고 해서 그것을 토대로 석굴암 원형이 이러했는데 지금과는 다르다고 논의하는 것 자체도 코미디에 지나지 않는다. 석굴암은 처음 축조된 지 1천300년이나 흘렀다. 이 장구한 역사에서 어느 시점을 석굴암의 원형으로 삼을 것인지도 논의하지 않으면서 원형과 다르다, 틀린다고 말하는 것은 정도가 아니다. 20세기 초반의 사진이나 도판에 나타난 석굴암은 20세기 초반의 석굴암일 뿐이요, 그것이 신라 당대의 석굴암 원형이라고 생각한다면 망상이다. 석굴암 모형 전시관 건립을 극력 반대하는 어떤 학자는 석굴암이 완벽한 조각품이라고 외치면서 모형 전시관은 이러한 완벽성을 해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완벽한 게 어디 있다는 말인가?

석굴암은 인정하기 싫건 말건 상관없이 20세기 초반에 일본 건축가에 의해 재발견됐다. 당시 사진 자료를 보면 석굴암은 몰골이 형편없다. 그것이 지금처럼 번듯하게 재단장된 것은 식민강점기였다. 그런데 지금 석굴암의 무에가 완벽하다는 말인가?

문화유산 보존의 절대원칙은 지금 상태보다 더 파괴, 인멸되는 것을 막는 것이지, 실체가 없는 원형을 억지로 만들어 꿰맞추는 것도 안 된다. 더불어 완벽이라는 없는 개념을 억지로 만들어 석굴암은 완벽하다고 강변해서는 안 된다. 더더군다나 없는 이데올로기를 억지로 끌어내는 것 또한 그 문화유산은 물론이려니와 그 나라, 그 국민에게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령왕릉에서 어거지로 민족주체성을 찾아내고, 석굴암에서 없는 애국심과 항일정신을 어거지로 창출해서는 안 된다. 이런 어거지 창출이 우리가 그토록이나 비판하고 있는 일본 우익 역사교과서의 사관과 본질적으로 무에가 다르다는 말인가, 우리는 억지로 쓰면서 누구를 욕한다는 말인가?

석굴암과 무령왕릉을 비롯한 문화재를 이제는 국가와 민족, 국민이라는 망령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그래야 문화재도 살고, 국민도 살며, 나라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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