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잊고 있었다. 나 자신도 잊어버린 내 자식을 다른 이가 찾아주었다. 


어제 우리 공장 연합뉴스 문화부에서는 이른바 '미남불상(美男佛像)'이라 일컫는 청와대 경내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石佛坐像이 원래 어디 있다가 이동했는지를 두고, 그것이 본래 경주 이거사지(移車寺址)라는 절터임을 결정적으로 입증하는 대정大正 6년(1916) 문건 《신라사적고新羅寺蹟考》를 발굴 공개함으로써, 이 불상 출처를 둘러싼 기나긴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기사를 내보냈다.




한데 이 《사적고》는 출처가 신라학 혹은 경주학도로 이름 높았던 故 이근직 경주대 교수 컬렉션이다. 그의 유족이 최근 고인이 생전에 수집한 경주신라학 관련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문제의 저 자료를 발견하고는 나한테 긴급히 연락한 것이다. 


저 청와대 불상이 여전히 청와대 구중심처에 볼모로 잡혀있음을 안타까이 여기면서, 그것이 경주로 반드시 귀환해야 한다는 신념이 깊었던 근직 형은 생전에 나한테도 그것이 본래 봉안된 곳이 이거사지였음을 줄기차게 주장했거니와, 경주지역 절친 박영우 선생이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08년에 내가 작성한 관련 기사를 찾아내고는 해당 기사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링크를 한 것이니, 아래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나조차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산 내 기사다. 


<청와대 불상 출처는 경주 이거사>

기사입력 2008-05-12 07:02 최종수정 2008-05-12 09:52


청와대 안 통일신라 불상

"경주 남산도, 유덕사도 잘못"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청와대 경내 유일한 고대불상이 지난 9일 공개됐다. 

청와대 대통령 관저 뒤쪽 보호각 안에 안치된 높이 1m의 이 석조여래좌상은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4호로 등재돼 있으며 그 양식으로 보아 8세기 무렵 통일신라시대 유물로 평가된다. 석굴암 본존불과 크기만 다를 뿐 양식이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 제작 시기를 추정하는 근거다. 

이 불상은 어디에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진 것일까? 

출처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경주 남산일 것이라는 추정과 경주시 도지동 유덕사(有德寺)라는 주장이 그 것이다. 

유덕사라는 주장은 신문기자 출신 미술평론가이자 문화재 사가(史家)인 이구열 씨의 1973년 저서인 '한국문화재비화'와 그 재판인 '한국문화재 수난사'(돌베개.1996)에서 나온다. 

남산이라는 추정은 경주라는 원래 자리를 떠난 통일신라시대 불상이 대체로 남산에서 나온 것인데서 기인한다. 실제로 남산은 지금도 거대한 신라시대 야외 불교 박물관을 방불케하고 있다. 

그 출처가 어디건 청와대 불상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곳에 안치되게 되었는지는 이구열 씨가 자세히 정리했다. 

이씨에 의하면 이 불상은 1913년 무렵, 데라우치 조선총독이 경주를 순시하던 중에 당시 경주금융조합 이사로 있던 오히라(小平)라는 일본인 집 정원에서 발견돼 고난의 여정을 시작한다. 오히라는 데라우치가 이 불상을 탐낸다고 생각해 즉시 지금의 남산 밑 왜성대에 있던 총독관저로 보냈다는 것이다. 

이후 이 불상은 "1927년에 경복궁에 새 총독관저(지금의 청와대)가 신축되자 그리로 옮겨져갔고, 현재도 청와대 숲속 침류각(枕流閣) 뒤의 샘터 위에 잘 안치돼 있다"고 이구열씨는 적었다. 

서울시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1974년 1월이며 현재의 보호각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졌다. 

청와대 안 불상의 어제와 오늘


한데 이구열 씨가 무엇을 근거로 이 불상의 출처를 유덕사로 지목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른 무엇보다 유덕사의 위치 자체를 지금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찰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탑상(塔像) 편에 '유덕사(有德寺)'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이야기에 보인다. 

이에 의하면 "신라의 대부(大夫)이자 각간(角干)인 최유덕(崔有德)이 자기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그 이름을 유덕사(有德寺)라 했다. 그의 먼 후손인 삼한공신(三韓功臣) 최언위가 유덕(有德)의 진영(眞影)을 여기에 걸어 모시고 또 비도 세웠다고 한다"고 했다. 

이 것 외에는 어디에서도 유덕사에 관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으며, 더구나 그 위치는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불상이 유래한 곳은 어디일까? 

경주 지역사에 정통한 이 지역 출신 신라사 연구자 이근직 박사(문화재청 전문위원)는 "남산은 근거가 전혀 없는 주장이며, 유덕사 또한 무엇을 근거로 나온 주장인지 모르겠다"면서 "식민지 시대 이 불상과 관련되는 자료 등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그것이 원래 있던 자리는 경주시 도지동 이거사(移車寺) 터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이거사는 성덕왕릉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 사찰의 존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시대 기록에도 보인다. 이에 의하면 성덕왕이 재위 35년(736)만에 죽자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그 출처가 이처럼 비교적 확실하게 밝혀짐에 따라 경주지역 문화계 일각에서는 원래 자리로 불상을 모셔와야 한다는 여론이 일 수도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고딕체 부분에서 바로 나는 이근직 형 말을 인용했거니와, 그는 각종 자료를 검토한 결과 청와대 불상 본래 자리는 이거사임에 틀림없다 확신한 것이니, 그러고 보니, 당시 이와 관련한 전화 문의에 그는 분명히 그것을 증명하는 자료가 있다고 자신한 기억이 이제야 떠오른다. 그때 다음에 경주에 가면 그 자료를 보기로 했던 것인데, 그도 나도 만나면 이런저런 경주와 신라 문화 이야기로 날이 새는 줄을 몰라 그만 청와대 불상과 관련한 자료를 보는 일을 깜빡하고 말았으니, 그러다가 10년이 흘러 오늘에 이르다가 그 사이 형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경주에서 약탈해 조선총독한테 진공되어 오늘날 청와대에 갇힌 통일신라시대 불상을 어찌 해야 하는지를 둔 논란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근자 벌어지는 사태 전개는 문재인 정부 출범과 직접 궤를 같이한다. 정권 출범 직후 나는 요로를 통해 이 불상의 조속한 경주 반환을 요청했고, 그에 병행해, 혹은 그와 관련없이도 당국에서도 익히 이 문제에 관심을 보였으니, 무엇보다 역사덕후 문 대통령이 이 불상에 대해서도 유감없이 그런 면모를 발휘했으니, 이를 토대로 해서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이미 정권 출범 직후 청와대 요청에 의해 당시까지는 서울시 유형문화재인 이 불상에 대한 사상 처음으로 기초 정밀조사를 벌였던 것이며, 이를 토대로 나중에는 이 불상이 급기야 보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신라사적고新羅寺蹟考가 말하는 1916년 경주 이거사지移車寺址 사정. 이에서 이르기를 "과거에 완전한 석불좌상 1구가 엄존했는데, 지난 다이쇼 2년(1913) 중에 총독관저로 옮겼다. 그 외에 목 부분에 손상이 있는 석불 1구와 후광(장식)이 있는 석불입상 1구, 석탑 1기(도괴됨) 등이 절터 부근 땅속에 묻혀 있었다"고 했다. 이에서 묘사하는 사정은 현재 남은 이거사지 사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좌상으로 평가되는 이 청와대 불상은 그때까지만 해도 그 본래 위치가 경주 이거사(移居寺) 터라는 데는 이렇다 할 의문의 여지는 없었다. 이 불상이 문화재 혹은 미술품으로 재발견되어 보고되기 시작한 무렵에는 그 출처가 이거사지가 아닌 '경주 남산'으로 지목된 자료가 많기는 해도, 그것이 오류임은 이후 활발한 자료 발굴을 통해 이거사지임이 거의 다 드러난 마당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이거사지에 견주어 경주 남산을 지목하기도 했으니, 이들이 주로 내세운 근거는 크게 두 가지였으니, 첫째가 식민지시대 경주 남산을 뿌리로 적은 각종 자료였으며, 둘째가 이른바 미술사 양식론에 착목한 것으로써, 문제의 청와대 불상과 흡사한 같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이 같은 경주 남산에 두어 점 보고된 까닭이었다. 


이런 사정은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불상 현지조사로 하고, 이를 통해 그것이 일약 대한민국 보물로 승격하면서 더욱 묘한 국면을 연출했으니, 다 죽은 듯하던 경주 남산론에 불을 다시 지폈기 때문이다. 해당 문화재를 지방문화재에서 중앙정부 지정 문화재로 격상할 때는 당연히 해당 문화재에 대한 정밀조사가 따르기 마련이고, 이를 토대로 해서 해당 지자체장은 문화재청에 보물지정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이에 의해, 문화재청에서 이 조사를 의뢰받은 서울시는 박원순 시장 이름으로 보물 지정을 했거니와, 이에서 바로 이 불상이 본래 있던 곳을 '미상'으로 처리하고 말았다. 더욱 정확히는 현재로서는 정확한 본래 위치를 알 수 없다고 정리했으니, 그러면서도 신청서와 현지조사 보고서는 이거사지와 경주 남산으로 크게 보아 갈라진 두 견해 중에서도 실은 남산에다가 무게 중심을 두었다. 


신라사적고 서지사항



서울시가 2017년 9월, 문화재청에 제출한 이 불상에 대한 '국가지정문화재 등의 지정 요청 자료보고서'는 이의 '연혁/유래/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1913년경 총독방문 후 경주금융조합이사였던 고다이라 료조가 총독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서울 남산 총독관저(왜성대)로 불상 진상

- 1927년, 지금의 청와대 부근에 새로운 총독관저 신축되면서 불상도 함께 이전된 것으로 추정 

-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24호 <석조여래좌상>으로 지정

- 2006년, 불신의 일부 보존처리(수리보고서 별송)

- 2009년, <석불좌상>으로 지정명칭 변경(2009.6.4.)


나아가 이 지정신청서는 '지정가치 및 근거기준'으로는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석불좌상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 무렵 경주에서 서울로 옮겨진 상으로 통일신라 8세기 불상의 특징인 당당한 어깨와 가슴을 지녔지만, 두터운 팔과 손, 삼단사각대좌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 9세기 무렵 제작한 것으로 판단한다. 이 석불좌상은 특이한 이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상태가 양호하고, 삼단사각대좌를 지닌 통일신라의 드문 예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보호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라고 적었거니와, 이에서 보듯이 시종 일관 그 출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은 채, '경주'라고만 적었으며, 그것이 반출된 시점으로는 '1913년 무렵'이라 해서, 그 정확한 시점을 특정하지 못했다. 한데 이 지정신청 보고서에는 이례적인 구절이 보이거니와, 우선 '조사내용' 중에 "1917년 6월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중대석 확인- 경복궁에 있던 중대석을 2002년 춘천박물관으로 이전"이라는 구절이 있는가 하면, 다음 구절도 발견된다. 


삼단사각대좌를 지닌 불좌상 가운데 양식적으로 가장 이른 예는 경주 남산에 남아있다. 대표적인 예로 남산 약수계 석불좌상과 용장계사지 약사불좌상, 양지암곡의 석불좌상 등 경주 남산에서만 3구가 있고, 대좌만 남아있는 경우도 국립경주박물관을 비롯하여 그 예가 적지 않다. 삼단사각대좌를 갖춘 이들 남산 불상 가운데 약수계의 석불좌상은 청와대 불상과 쌍둥이처럼 유사하다.  


이는 이 지정신청서, 나아가 그 토대가 된 실사보고서를 누가 썼는지를 엿보게 하니, 불교미술사 전공으로 경주대학교 문화재관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임영애가 그 주인공이다. 문제의 청와대 불상 받침대 중 하나인 중대석(中大石)은 결실됐지만, 국립춘천박물관 야외에 전시 중인 어떤 불상의 중대석이 바로 이 불상의 그것이라고 주장한 이는 오직 임영애만 있을 뿐이다. 이런 주장을 나는 익히 접했으나, 고려할 만은 하나, 그것이 정답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고, 여타 미술사학도 또한 나랑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러니 설혹 저와 관련한 저런 논문이 나왔다 해도, 그것을 작성한 사람이 아니면, 저리 적을 수는 없으며, 다른 사람이 작성했다면 "춘천박물관 소장 중대석이 이 불상의 중대석이라는 주장도 있다"는 정도로 적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최선일 등과 더불어 이 불상 현지조사를 벌인 임영애는 조사를 토대로 2017년 12월 발간된 한국미술사학회 기관지 《美術史學硏究》 第296號에 〈일명 ‘청와대 불상’의 내력과 의미〉라는 논문을 투고, 게재하거니와, 이 논문 다음 결론 부분을 보면, 저 보물지정 신청보고서가 어떠한 목적에 따라 작성되었는지를 엿보는데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청와대 불상은 경주 도지동의 이거사지가 원봉안처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남아있는 자료는 청와대 불상의 원봉안처가 이거사지라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 청와대 불상의 원봉안처와 관련해 가장 이른 기록인 1934년 『매일신보』 기사가 경주 남산이라고 못박아 이야기하고 있고, 또 청와대 불상과 쌍둥이처럼 같은 불상이 경주 남산 약수계에도 있기 때
문이다. 아울러 청와대 불상과 같은 형식의 삼단사각대좌 불상이 경주 남산에만 남아있는 것도 원봉안처가 도지동 이거사지라고 단언하기 어렵게 만든다또 일제강점기 경주의 절터를 상세히 조사했던 오사카 긴타로도 『경주고적급유물조서』라는 보고서에서 ‘移車寺址’를 별도의 항목으로 다루었지만, 이곳에 있던 불상을 옮겼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 같은 책에서 경주 남산의 삼릉계 약사불좌상과 감산사 불상이 서울로 옮겨간 사실에 대해서는 명확히 적어두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오사카 긴타로가 청와대 불상에 대해 전혀 몰랐거나, 청와대 불상의 원봉안처가 이거사지가 아닐 가능성을 반증하는 것이다한편 1917년 『조선고적도보』 해설편에서는 청와대 불상을 ‘경주의 모처에 있던 불상’이라고 적었다. 1917년의 이 기록은 옮긴지 4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지만, 원봉안처를 밝히지 않았다. 원봉안처를 정말 몰랐기 때문인지, 혹은 출처를 밝히기를 곤란한 사정이 있어 의도적으로 ‘모처’라고 적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불상을 소유하고 있던 고다이라 자신도 원봉안처가 알려지는 일을 꺼렸을 것이니 지금 남겨진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통해 원봉안처를 밝히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청와대 불상은 아픈 기억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하나의 역사이다. 아쉽게도 지금 남아있는 자료만으로 원봉안처가 어디인지를 명확히 밝히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청와대 불상은 현재 봉안되어 있는 장소도, 그 내력도, 또 통일기 신라 불상 가운데 매우 이례적인 삼단사각대좌를 지녔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통일기 신라 9세기의 불상이다.  


이에서 보듯이 임영애는 시종일관 이 불상 원래 봉안처에서 이거사지를 떼어내려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인다. 비록 그에 대해서는 여러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이런 언급 이면에 깔린 주장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봉안처는 이거사지가 아니라, 경주 남산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임영애의 생각이다. 


신라사적고 서언


하지만 그의 이런 주장은 생명이 1년을 가지 못하고 말았다. 그 본래 위치가 이거사지임을 명백하게 폭로한 1916년 문건 《신라사적고(新羅寺蹟考)》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저자는 모로가 히사오(諸鹿央雄). 1908년 무렵 이후 경주를 주무대로 활동한 그는 문화재 수집가이자 나름 역사학도였고, 나중에는 금관총 발굴에 관여하는가 하면 1933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현 국립경주박물관)이 생기자 그 초대 관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책은 다이쇼 5년(1916)에 그가 자비 출판한 것으로, 이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과거에 완전한 석불좌상 1구가 엄존했는데, 지난 다이쇼 2년(1913) 중에 총독관저로 옮겼다. 그 외에 목 부분에 손상이 있는 석불 1구와 후광(장식)이 있는 석불입상 1구, 석탑 1기(도괴됨) 등이 절터 부근 땅속에 묻혀 있었다. 


덧붙여  《신라사적고(新羅寺蹟考)》가 발견된 경위를 밝혀두어야겠다. 그 자신 경주 출신으로, 경주학을 확립하고자 했으며, 신라와 경주와 관련한 자료라면 불원이천리하고 긁어모은 고 이근직 형이 있다. 경주대 교수로 재직 중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거니와, 그의 컬렉션은 미망인인 주진옥 선생이 보유 중이다. 경주에 관한 무수한 글을 쓴 그의 글에서도 좀처럼 저 청와대 불상과 관련해서 이렇다 할 자세한 글로써 정리한 것이 없으면서도, 그 원봉안처는 이거사지라고 떠들고 다닌 점이 나로선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어떤 증거없이 저리 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저 청와대 불상을 이제는 볼모에서 건져내 경주 현지로 돌려보내겠다고 결심한 그 무렵, 내가 주 선생한테 신신부탁했다. "분명히 근직형이 이거사지 관련 자료를 모아놨을 것이다. 없을 리가 없다. 찾으면 바로 연락주시라." 그때 주 선생이 이르기를 "안 그래도 찾아 봤는데 없더라"고 말했다. 


그렇게 잊고 지냈는데, 그제 밤, 주 선생이 전화를 했다. "찾았다"고 말이다. 저 자료를 찾았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듣고는 그랬다. "그 인간이 그런 인간이요. 분명히 있을 거라 그랬자누?" 


오늘 따라 근직형이 더 그립다. 





《신동아》

김태식의 考古野談 | 마지막 회 |

이제는 제자리 경주로 돌려보내자

일제에 납치돼 청와대에 갇힌 ‘미남 석불’

  • 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
입력
2017-08-21 13:14:01



이제는 제자리 경주로 돌려보내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여래좌상’.[오세윤 작가 제공]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한 일간 매일신보는 1934년 3월 29일자에 ‘석가여래상(釋迦如來像)의 미남석불(美男石佛), 즐풍욕우(櫛風浴雨) 참아가며 총독관저(總督官邸) 대수하(大樹下)에’라는 제목을 내건 기사 하나를 싣는다. 이런 큰 제목만으로는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음인지, 이에는 ‘오래전 자취를 감추었던 경주의 보물, 박물관(博物館)에서 수연만장(垂涎萬丈)’이라는 작은 제목을 달았다. 

80년 전 문체여서인지 우선 큰 제목과 작은 제목에 들어간 몇 단어가 생경하다. 즐풍욕우(櫛風浴雨)란 글자 그대로는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비로 몸을 씻는다는 뜻이니, 간단히 말해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된 상태라는 의미다. 대수하(大樹下)란 큰 나무 아래라는 뜻이요, 수연만장(垂涎萬丈)이란 침을 만 길이나 흘린다는 뜻이니, 어떤 것을 제 소유로 만들고 싶어서 몹시 탐낸다는 비유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저 기사가 말하고자 하는 대의(大義)를 풀어보자. 석가여래를 표현한, 잘생긴 돌로 만든 부처가 어쩌다가 경주를 떠나 조선총독 관저로 옮겨졌지만, 그곳 정원 큰 나무 아래서 별다른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비바람에 노출돼 있어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애를 태운다는 뜻이다. 이제 이 불상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는 이 기사를 통해 찬찬히 살펴본다. 현대에 익숙지 않은 표기법만 약간 손질하는 선에서 당시 표현을 최대한살린다.    

“석가여래상으로 경주 남산에 있던 미남석불(美男石佛)이 지금으로부터 여러 해 전에 자최(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말았었다. 그 얼마 후에야 미남석불이 어디로 도피한 줄을 안 총독부박물관에서는 그동안 그의 간 곳을 찾아오다가, 작(昨·지난) 27일에야 왜성대(倭城臺) 총독관저에 안치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비목(榧木) 촉탁이 급히 달려가 보니, 경관힐소(警官詰所) 뒤 언덕 큰 나무 아래에 천연스럽게 좌정(坐定)은 하고 있으나, 비바람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경관힐소란 경비 초소다. 이 무렵 총독 관사 위치를 왜성대(倭城臺)라 하거니와, 이곳은 지금의 서울시 중구 예장동 2-1번지 일대 남산 기슭이다. 이곳 총독 관저로 가서 문제의 불상을 조사했다는 ‘비목(榧木) 촉탁’이란 총독부박물관 촉탁(일종의 전문위원)이던 가야모토 가메지로(榧本龜次郞)를 말한다. 이 대목으로 보면 문제의 경주 남산 불상은 이전에 존재는 알려졌지만, 종적을 찾을 수 없다가 이때 와서 재발견됐음을 알 수 있다. 한데 이 돌부처를 ‘미남석불’이라 한다. 부처가 잘생겨서 얻은 이름일 터이다. 그래서일까? 기사의 불상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은 극찬이다.  

“이 미남석불은 시가(時價)로 따진다면 적어도 오만 원 이상은 할 것이나 지금 세상에 있어 돈 아니라 금을 가지고라도 도저히 살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니, 좌신(座身·앉은 자세의 몸)의 높이가 3척 6촌, 슬폭(膝幅·양쪽 무릎 끝까지의 폭)이 2척 9촌이오, 또 연좌대(蓮座臺·연꽃 모양 받침대)에는 천녀(天女)를 아로새긴 엄청난 것으로 신라의 유물로서 석불과 함께 다시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참고자료이다.”  

이 불상을 좌신(座身)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이는 부처 중에서도 앉은 모습을 형상화한 이른바 좌불(坐佛)임을 미루어 짐작한다. 1척이 대략 30.3㎝요, 1촌은 약 3.33㎝니, 이 좌상(坐像)은 받침대를 제외한 불상만으로 볼 때, 기사에서 말한 높이는 110.88㎝다. 양쪽 무릎 간 폭은 90.63㎝다. 대략 앉은키와 무릎 높이가 1대 1 가까운 비율을 이룬다. 나아가 이 불상을 신라 작품으로 본다는 점도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 불상이 어찌하여 총독 관저에까지 오게 된 것일까? 그에 대한 신문의 답변이다.  

“이에 대하여 총독부박물관에서는 ‘어떻게 되어서 그 미남석불이 총독관저에 안치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제1회(의미 불명) 재등(齋藤) 총독시대에 어떤 우연한 일로 관저로 올라온 듯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박물관 홀에 진열되어 있는 약사여래(藥師如來)와 경주의 같은 골짜기에 안치되어 있던 것인데, 지금 풍우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애석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한다.”  


조선총독의 포로 된 ‘미남 석불’

기자도 이 불상이 옮겨진 구체적인 사연을 더는 캐지 못하고 있다. 다만 2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재임하던 시절(1919~1927)에 올라왔을 것이라는 총독부박물관 측의 발언을 전달만 한다. 아마도 이 발언은 이를 조사한 가야모토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나아가 총독부박물관에서는 이 불상이 당시 그곳에 전시 중인 약사여래상과 같이 경주의 골짜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약사여래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3층 불교조각실에 상설 전시 중인 ‘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 약사여래 좌상’을 말할 것이다. 이 약사여래상은 1915년 무렵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지시로 남산을 떠나 경성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총독부박물관이 인수하게 된다. 이 불상은 남산 서쪽에 위치하는 계곡 중 하나인 삼릉곡 작은 절터에 있었다. 이로써 본다면, 총독부박물관에서는 비록 단순 추정이라는 범위를 넘지는 못하지만, 문제의 ‘미남 석불’ 역시 이곳에서 봉안하던 것으로 본 셈이다. 

이런 보도를 하면서 기사는 “그리하여 박물관에서는 수연만장(垂涎萬丈) 어떻게 박물관으로 가져왔으면 하고 있으나, 그러나 이미 총독 관저의 물건이 되어 있는 이상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형편이므로 총독의 허가를 얻어 박물관에 진열하여 보려고 희망하고 있는 중이라더라”고 끝을 맺는다. 하기야 박물관으로서는 그것을 옮겨오고 싶었겠지만, 다름 아닌 총독 관저에 있는 것이라 섣불리 말도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찌됐건, 우리는 저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적어도 1934년 3월 현재에는 ‘미남 불상’이 조선총독에게 사로잡힌 포로 신세 비슷함을 확인한다. 한데 더 놀라운 사실은 조선총독 관저의 장식물 중 하나로 전락한 바로 그 불상이 83년이 흐른 지금에는 대한민국 대통령 관저이자 사저가 있는 청와대 구중심처에서 여전히 일반과는 유리된 채 포로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에 통일신라시대 불상이 있다니?  

필자가 문화재 담당 기자 시절, 아마 박근혜 정부 초창기였다고 기억하거니와, 청와대 출입 사진기자를 통해 ‘미남 불상’ 촬영을 의뢰한 적이 있다. 그 기자가 청와대 대변인실에 이를 문의했더니, 예상한 대로 그곳은 접근 불가라 보여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대변인실의 정확한 답변은 기억나지 않지만, 청와대 관내 사람도 함부로 근접할 수 없는 곳에 있으며, 대통령 경호상 더더구나 불가능하다는 요지였다.  

‘미남 불상’이 광복 이후 청와대로 넘어가게 된 과정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조선총독을 대체한 대한민국 권력이 대통령이고, 그가 집무하고 생활하는 공간이 청와대이니, 인수인계 차원에서 그리되었다고만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경주가 출처임이 확실한 통일신라시대 불상이 청와대 경내에 있다는 사실은 일찍부터 알려져, 서울시에서는 이미 1974년 1월 15일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했다. 이를 지정하기 위해서는 기초 조사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다.  


소유자도, 관리자도 없는 석불

이제는 제자리 경주로 돌려보내자

[지도 제공 : 네이버 ] 

문화재청이 2017년 7월 현재 제공하는 이 불상에 대한 정보를 보면 간략하기 짝이 없다. 우선 그 명칭부터가 아주 어정쩡해서 그냥 ‘석불좌상(石佛坐像)’이다. 석불좌상이 한두 점이 아니고, 더구나 그것 중에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꽤 많은데 이런 명패만 덜렁 달아, 다른 석불좌상과 구별되지 않는다. 한데 지정 당시 명칭은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이었다. 서울시는 문화재청의 문화재 지정 명칭 변경 방침을 수용해 2009년 6월 4일, 서울시 고시 제2009-221호를 통해 현재의 이름으로 바꿨다.  

문화재청 제공 정보에 의하면, 이 불상 소재지는 당연히 ‘서울 종로구 청와대로1 (세종로) 청와대’이며, 제작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표시했다. 한데 놀랍게도 ‘소유자(소유단체)’와 ‘관리자(관리단체)’ 칸이 비어있다. 당연히 청와대여야 하겠지만, 이 불상은 주인도 없고, 관리자도 없다. 이 불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이 전부다. 나아가 이런 정보에는 불상 크기가 빠질 수 없지만, 이 ‘미남 불상’은 그 내력이 빠져 있다. 청와대 구중심처에 있는 까닭에 실측조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이 불상은 원래 경주 남산의 옛 절터에 있었는데, 1927년 총독부 관저를 새로 지으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놓았으며, 풍만한 얼굴은 눈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갔고 두툼한 입은 굳게 다물고 있다. 왼쪽 어깨만을 감싸고 입은 옷에는 주름이 소매 끝과 발목까지 표현되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보면, 이 불상은 유덕사(有德寺) 석가여래좌상으로 불리어왔는데, 유덕사는 신라시대 최유덕(崔有德)이 자기의 집을 기부하여 지었다는 절이다. 그의 후손인 삼한공신 최언위(崔彦撝)가 최유덕의 진영(眞影·초상화)을 모시고 기념비를 세웠다고 하며 절터는 경상북도 월성군에 있다.” 

1989년 1월 1일자로 경주와 통폐합된 도시임에도, 문화재청은 여전히 소재지를 ‘월성군’이라고 적고 있다. 이 설명문에서 주목할 부분은 1927년 총독부 관저를 새로 지으면서 이 불상을 경주에서 총독 관저로 옮겨왔다는 문구다. 무엇을 근거로 이리 확정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최근의 연구 성과를 보면, 그것이 원래 있던 자리는 현재 위치를 종잡을 수 없는 유덕사가 아니라, 이거사(移車寺)라는 경주 지역 한 절터였음이 거의 정설이 되어 있다. 이거사의 위치는 약사여래 좌상이 있던 경주 남산 서쪽이 아니라 남산 동쪽으로 추정된다. 

한데 이 불상을 이제는 제자리로 옮기거나, 청와대가 아닌 다른 곳, 예컨대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국립경주박물관 같은 데로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은 끊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역대 정권마다, 특히 대통령의 종교성향에 따라 이 불상은 자주 괴담의 주인공으로 내몰리기도 했다. 지금 이 불상은 대통령 관저를 내려다보는 녹지원 경내 보호각 시설 안에 있다. 1989년 노태우 정부 시절, 대통령 관저를 신축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100m가량 후퇴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이 불상을 특별히 생각했는지는 흔적이 없다. 하지만 청와대 경내에서의 불상 이전은 기독교계가 반발하는 빌미가 됐다. 불교신자 대통령 등장으로 심기가 불편했던 기독교계는 “청와대에 불상이 들어섰다”며 대통령의 종교 편향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신교 장로 출신인 김영삼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미남 불상’은 전연 반대의 위치로 내몰린다. 집권 초창기, 하나회 숙청과 공직자 재산공개, 그리고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와 같은 전격적인 개혁 정치로 지지율 고공행진을 벌이던 김영삼 정부는 구포역 열차 탈선이며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와 같은 대규모 참사에 휘말리게 되고 그러자, 불교계가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난 것이 “청와대 불상을 치워버렸기 때문”이라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는 아무리 봐도, 대통령의 친기독교 성향을 견제하기 위한 심리전 성격이 강했지만, 참위설(讖緯說)의 힘은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세지기 마련이다. 할 수 없이 청와대는 ‘미남 불상’이 온전하게 남아 있음을 증명하고자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조계종단 승려들을 초청해 현장을 보여주어야 했다.  


이제는 제자리 경주로 돌려보내자

청와대 경내의 석조여래좌상(미남 불상).[청와대 제공]

대통령 종교 따라 구설 휘말려

같은 기독교 장로 출신인 이명박 정부에서도 불상이 다시 문제가 됐다. 대통령 당선인 시절에 터진 숭례문 화재와 집권 뒤 발생한 용산 화재 참사와 같은 악재가 겹치자, 이번에도 불교계는 청와대가 문제의 불상을 홀대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서울시장 재임 시절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말을 했다 해서 구설에 오른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반작용 측면도 컸다. 이명박 정부의 친기독교 성향 혹은 정책을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런 전략들이 얼마나 주효했는지 모르지만, 불교계가 그 반대급부의 일정 부분을 챙긴 흔적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실제 이명박 정부는 불교계를 달래기 위한 각종 정책을 폈으며, 취임 첫해인 2008년 5월 9일,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는 문제의 불상을 출입기자단과 조계종에 공개하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 

종교 성향이 다소 모호한 측면이 있는 박근혜 대통령 시절 역시 불교계 달래기 차원에서였는지 모르지만, ‘미남 불상’을 활용한 흔적이 보인다. 2013년 부처님오신날을 하루 앞둔 5월 16일, 최상화 춘추관장을 비롯한 청와대 불자 모임인 청불회(靑佛會) 소속 일부 신자가 미남 불상을 참배하기도 했다. 청와대는 이 일이 비공식이라 했지만, 그 일정이 언론을 통해 공개됐음을 볼 때, 대외용 행사로 기획했음을 엿볼 수 있다.  

불상을 둘러싼 이런 정치 역학의 움직임은 당연히 원래 자리인 경주로 돌아가야 할 불상의 이전을 복잡하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앞서 보았듯 이 불상은 그 과정이 석연치는 않지만, 일제강점기에 불법적 방법을 통해 경주를 벗어나 서울로 이송되고, 더구나 조선총독 관저에 장식물로 비치됐다. 더구나 그것을 이어받은 청와대는 소유권도 없고, 관리권자도 아니다. 당연히 불상은 청와대를 벗어나야 한다.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경주 사람들은 더는 불상을 볼모로 삼지 말고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불교계와 자주 대척점을 형성하는 기독교계에서도 탐탁지 않게 바라본다. 당연히 내 보내라고 요구한다. 언뜻 보면 당장 경주로 내려보내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모든 여건이 경주 귀환을 충족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불상을 둘러싼 그간의 일들은 불교계를 곤혹스러운처지로 내몰리게 하는 측면이 있었다. 불교계에서도 당연히 경주 귀환을 바라겠지만, 그런 일이 자칫 외부의 압력에 굴복해 불상이 청와대에서 ‘축출’되는 것으로 비치지는 않을까 우려해서다. 
불상은 이제 제자리로 가야 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한테 ‘진상’된 성보문화재를 언제까지 청와대가 볼모로 잡아둘 수는 없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이제는 당당히, 그리고 자랑스럽게 불상을 제자리로 돌려야 할 때다.  

이제는 제자리 경주로 돌려보내자

 
김태식

● 1967년 경북 김천 출생  
● 연세대 영어영문학 학사, 선문대 고대사·고고학 석사 
● 저서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직설 무령왕릉’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