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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사IN》 2016년 08월 24일 수요일 제466호


두 ‘박통’이 추진한 경주 국책사업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신라왕경 사업 마스터플랜’을 보면 2035년까지 1조5000억원을 경주에 투자할 예정이다. 그런데 사전 승인을 해야 하는 문화재위원회가 강하게 제동을 걸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2016년 08월 24일 수요일제466호


박정희 시대 대한민국 수도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겨냥한 대한민국 ‘정신의 수도’는 경주였다. 그의 집권기에 남북한은 그야말로 사투에 가까운 정통성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역사 부문에서는, 북한이 고구려를 앞세운 데 비해 남한은 ‘신라 중심주의’로 부를 만한 사관을 시종일관 견지했다. 이런 사관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이 한민족이 하나로 되는 발판을 마련한 ‘민족사적 사건’으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 정권은 1971년 7월,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착수한다. 신라 중심주의 사관을 구체화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가 유신체제 내내 의욕적으로 추진한 이 사업 결과를 통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경주가 출현했다. 이 사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앞으로 차근차근 살필 것이다.

박근혜 정권 출범과 더불어 경주 지역 인사들을 주축으로 추진 중인 ‘신라왕경 핵심유적 정비·복원사업 종합기본계획(이하 신라왕경 기본계획)’은, 박정희 시대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의 심화 버전이다. 사업 규모와 기간, 그 내용 등으로 볼 때, 부녀가 각각 착수한 과거와 현재의 두 국책사업은 일란성 쌍둥이를 방불케 할 만큼 닮았다. 박근혜 정권의 ‘신라왕경 기본계획’에 따라, 신라의 천년 왕성인 월성에서는 이미 발굴이 시작되었다. 황룡사 터 인근에 대한 발굴 작업도 속도를 내는 중이다.

 <div align = 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75년 7월 박근혜 영애(가운데)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왼쪽)과 국립경주박물관 개관식에 참석해 신라 금관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1975년 7월 박근혜 영애(가운데)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왼쪽)과 국립경주박물관 개관식에 참석해 신라 금관을 보고 있다.

박근혜 정권의 신라왕경 기본계획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유감스럽지만 누구도 그 실체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 이 사업의 기본 계획이 확정·공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업 전담조직인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 추진단(이하 추진단)’은 2014년 4월 말, 국무총리 훈령을 통해 공식 출범했다. 이미 몇몇 유적지에서는 집행 단계에 들어가 있다.

추진단의 설치 목적은 ‘장기적 난제 사업으로 대통령 지방 공약인 경주 역사·문화 창조도시 조성 사업의 중앙-지방 간 협업을 통한 본격 추진’이다. 4급 단장 아래 3팀, 12명으로 구성되었다. 문화재청 6명, 경주시 4명, 그리고 문체부와 경북도에서도 각각 1명씩 파견되어 활동 중이다.

이런 추진단 구성은 여러 모로 1970년대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박정희 시대의 ‘추진단’은 청와대 경제수석이 단장을 맡은 명실상부한 범정부 기구였다. 이 같은 전례와 비교해보면, 지금의 신라왕경 추진단이 약간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추진단이 수행할 ‘신라왕경 골격 복원을 통한 천년고도 경주의 정체성 회복 및 역사문화 자원의 가치 증진과 적극적 활용기반 구축’ 사업은 그 내용을 보면 결코 박정희 시대의 그것에 못지않다.

무엇보다 당초의 ‘신라왕경 기본계획’은 사업 기간이 2014~2025년도로 12개년에 달한다. 총사업비는 9450억원으로, 이 중 국비가 6615억원이며 나머지 2835억원은 지방비다. 사업 대상지의 전체 면적은 196만9400㎡(약 59만5743평)다. 박정희 시대의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은 문화재 조사·복원 및 정비를 표방하긴 했으나 사실은 보문관광단지 개발이 사업의 주축이었다. 그러나 이번 신라왕경 기본계획은 순수한 문화재 관련 사업으로 관광 부문은 빠졌다. 그런데도 이 정도 규모의 자금을 쏟아부을 계획이라는 점에서, 단군 이래 최대의 문화재 사업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이후 계획 규모가 더욱 확장되었다. 일단 사업 종료 연도를 2025년에서 2035년으로 10년 늘렸다. 당초 사업 기간인 ‘2014~2025년’을 중단기로 묶고, ‘2026~2035년’ 10개년 계획을 추가한 것이다. 추진단은 이로 인해 발생하는 추가 비용을 4991억원으로 예상한다.

정리하자면, 박근혜 정부는 2035년까지 1조5000억원 정도를 투입해서 경주에 “역사·문화유산의 가치 재창출을 통한 천년 역사도시로서의 위상을 재정립”하려 한다. 사실상 경주의 경관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발상이다. 이런 계획 수립과 병행해서 이미 지난해 6월에는 8개 핵심 유적에 대한 중·장기 발굴계획을 수립했다. 앞서 말한 대로 월성 일원과 황룡사 터 인근에서는 이미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삐걱거림이 발생했다. 추진단에서 마련한 ‘신라왕경 사업 마스터플랜’에 문화재위원회(문화재위)가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추진단의 사업 대상 지구들은 거의 전부가 ‘문화재 보호구역’이다. 이런 구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개발과 ‘현상 변경 행위’에는 문화재위원회의 사전 승인이 필요하다. 추진단은 지난 5월11일, 2년에 걸쳐 야심차게 마련한 마스터플랜을 문화재위에 제출했다. 문화재위 측은 심지어 추진단의 설명을 들은 뒤 계획서 자체의 수령까지 거부하고 말았다. 1964년 문화재위 출범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문화재위가 추진단이 마련한 사업 내용을 ‘위험’하게 보고 있다는 증거다.

 <div align = 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2013년 10월 경북 경주시청에서 열린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 종합기본계획’ 업무협약식. 
ⓒ연합뉴스
2013년 10월 경북 경주시청에서 열린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 종합기본계획’ 업무협약식.


문화재위원회는 사업계획서 수령 자체를 거부

그렇다면 문화재위는 과연 어떤 내용을 문제 삼았을까? 문화재위는 이 사업 추진 단계에서부터 ‘복원’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사실 신라왕경 유적을 조사하고 정비하는 사업이라면 반대할 필요가 전혀 없다. 문화재위 역시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러나 조사·정비를 토대로 왕경 유적을 ‘복원’한다니? 문화재위원이라면 누구도 이른바 복원에 찬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추진단은 ‘철저한 고증 연구를 통한 체계적인 발굴조사 진행 및 복원·정비사업 추진’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철저하게 고증하고 연구한다 해도, 예컨대 이미 몽골 침략 당시 불타버린 황룡사 9층 목탑을 신라 시대 모습 그대로 다시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혹 세운다 한들 그것은 21세기의 우리가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목탑에 지나지 않는다.

추진단이 내놓은 마스터플랜을 보면 곳곳에 황룡사 9층 목탑 복원 같은 계획이 마련되어 있다. 예컨대 신라 왕궁의 별궁 터인 동궁과 월지(안압지) 권역에서는 2021~2025년도에 정전(正殿)과 편전, 중문과 회랑을 복원하겠다고 한다. 황룡사 역시 현재까지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거의 모든 건물 기초 위에 강당이며 그 부속 건물, 중문과 담장은 물론이고 논란이 분분하기 짝이 없는 9층 목탑까지 만들어 세우겠다는 것이다.

이런 계획이 실현된다면, 우리는 장차 경주평야 한복판에서 ‘황룡사 터’가 아니라 ‘신라 시대의 황룡사’라 자처하는 실제 사찰을 만나게 될 것이다. 문화재위가 이런 계획들에 분노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상상의 역사도시 경주’는 이렇게 해서 일단 퇴짜를 맞았다.

출처 : 《시사IN》 2016년 08월 19일 금요일 제465호


대통령이 경주 개발에 적극적인 이유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0년대 국책사업으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추진했다. ‘경주 역사문화 창조도시 조성’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박근혜 대통령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주 개발에 적극적이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webmaster@sisain.co.kr  2016년 08월 19일 금요일 제465호


경주는 지금 온통 발굴 현장이다. 경주 시내 남쪽 월성(신라의 천년 수도 월성이 있었던 곳)처럼 훼손 위험 등으로 인해 예전에는 감히 발굴하지 못했던 곳까지 속속들이 파헤치고 있다. 신라 왕성(王城)의 구조를 확인한다며 굴삭기를 동원해 시루떡 떠내듯이 표토(表土)를 걷어내는 중이다. 성벽 바깥을 두른 도랑 겸 방어 시설인 해자(垓字) 구역 역시 발굴 과정에서 나온 흙더미 천지다. 월성 남쪽을 감돌아 흐르는 남천에서는 ‘신라 시대 월정교’라는 다리가 느닷없이 출현했다. 교각 터만 남아 있던 유적을 관광 문화재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월성 서북쪽에 인접한 드넓은 황룡사 터 인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황룡사 터 남쪽 담장 외곽 구역에서 발굴이 한창 진행 중이다. 절터 한쪽 구역에는 조만간 공식 개관을 알릴 ‘황룡사지 전시관’이 어느새 우뚝하니 건립되었다.

2~3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익숙했던 월성과 황룡사 터의 경관은 온데간데없다. 황룡사 금당 터에서 감상할 수 있었던 서쪽 선도산 너머 낙조의 장관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볼썽사나운 전시관이 가로막고 섰기 때문이다.

지금 천년 고도 경주는 무엇엔가 쫓기는 듯 그야말로 전광석화를 방불케 하는 발굴 속도전이 전개 중이다. 다만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나라를 통치하던 시절에도 경주는 온통 발굴로 꿈틀거렸다. 부녀간인 두 대통령에게는 뭔가 공통분모가 있는 모양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75년 7월, 박정희 대통령(가운데)이 국립경주박물관 개관 테이프를 끊었다. 
ⓒ연합뉴스
1975년 7월, 박정희 대통령(가운데)이 국립경주박물관 개관 테이프를 끊었다.

그동안 경주에서는 언제나 지역 인사들을 중심으로 개발을 요구하는 아우성이 터져 나오곤 했다. 황룡사 터를 가리키며 ‘볼 것이 뭐가 있느냐’ 혹은 허허벌판인 월성에 가서 ‘신라의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경주의 관광업체 종사자들은 주로 유럽의 유적지에 견주면서 ‘경주가 어떤 곳이며 역사적으로 어떤 내력을 가졌는지 관광객에게 입으로만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목이 아플 지경’이라고 말한다. 결국 볼거리를 내놓으라는 요구다. 명색이 천년 왕국 신라의 수도인데 ‘감동을 줄 만한 볼거리가 없다’는 볼멘소리는 언제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불만은 어느 정도 타당한 측면도 있다. 유럽 유적지의 경우, 석조 건축물의 흔적이 뚜렷한 곳이 많다. 이에 비해 눈에 드러나는 신라의 흔적은 우람한 왕릉급 무덤과 첨성대를 빼면 적어도 경주 분지에서는 찾기 힘들다. 결국 보고 느낄 수 있는 문화재를 요구하는 여론은 천년 왕국 신라의 흔적을 찾아 지하로 내려가라는 압박으로 발전한다. 이렇게 찾은 흔적 위에 ‘볼만한 것’을 세우라는 요청도 나온다.

박정희 정부가 1970년대에 국책사업으로 추진했던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은 볼 것이 없는 경주에서 볼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한 시도였다. 국내 고분 중에서 가장 크다는 황남대총을 팠다. 이 사업을 연습하기 위한 교보재가 바로 천마총 발굴이었다. 황룡사 터를 매입해 주민을 이주시키고, 인근의 안압지 및 그 주변에 대한 대대적 준설과 발굴 작업을 벌인 것도 이 시기다. 월성 내의 마을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고 이를 에워싼 해자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발굴 조사에 착수하기도 했다. 국립경주박물관도 다시 세워 대대적으로 재단장했다. 박물관 개관식 테이프 커팅은 박정희 대통령 혼자서 거행했다. 이뿐 아니다. 경주 남산에는 신라의 삼국통일 정신을 계승한다며 화랑의집과 통일전을 이른바 ‘민족 성지’로 세웠다. 때마침 개통한 경부고속도로 경주나들목에는 화랑 동상을, 황성공원에는 김유신 장군 동상을 건립했다. 보문관광단지도 이때 개발되었다.

역사적으로 경주라는 지역 명칭이 탄생한 시기는 고려 초기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경주는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다. 그 역사는 40년에 지나지 않는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2015년 9월7일, 경주의 신라 왕경(월성) 발굴조사 현장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앞줄 가운데)이 나선화 문화재청장(앞줄 맨 왼쪽)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2015년 9월7일, 경주의 신라 왕경(월성) 발굴조사 현장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앞줄 가운데)이 나선화 문화재청장(앞줄 맨 왼쪽)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이같이 ‘박정희 시대 경주 만들기’의 표상이라 할 만한 곳이 바로 불국사와 안압지다. 지금의 불국사는 석가탑과 다보탑을 제외하면 신라 시대 불국사와 큰 관련성 없는 건물이다. 박정희 시대에 새롭게 건설된 불국사로 봐야 할 것이다. 불국사의 중심인 대웅전 역시 조선 후기 건축물에 지나지 않는다.

통일신라 시대의 대규모 정원 유적인 안압지도 마찬가지다. 박정희 시대에 발굴 조사가 완료되었을 뿐 아니라 그 연못 주변에 건물 몇 개를 상상해서 복원(?)해놓았다. 현재의 안압지 및 주변 건물 모습이 통일신라 시대의 그것과 비슷한지에 대해서는 어떤 고증도 없다. 하지만 지금의 안압지와 주변 건물들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굉장하다. 관광객들은 그 아름다움에 통일신라 시대의 영광을 투영시킨다.


‘신라 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 사업에 거액 투입

이처럼 경주에서 ‘눈과 손으로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감동을 캐내려는 욕구가, 박정희의 딸 박근혜 시대에 다시 용솟음치고 있다. 박정희는 경주 지역 문화재 발굴 현장만 세 번 찾았다. 그는 경주를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로 간주했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모친 육영수 여사의 비극적 죽음 이후 아버지를 수행해서 경주를 자주 방문했다. 경주 시민들 역시, 딸이 아버지 못지않은 애정을 ‘천년 왕성’에 쏟아주리라 기대했다. 박근혜는 ‘경주 역사문화 창조도시 조성’이라는 공약을 내걸고는 화려하게 청와대로 입성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 공약을 내걸 때 실행 의지와 욕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길은 없다. 그러나 경주 관련 공약들은 비교적 착실하게 이행되었다. 경주 시민들 역시 대통령 공약을 무기로 삼아 가시적인 실행을 끊임없이 요구해왔다.

2013년 10월21일 경주시청에서는 문화재청과 경북도 그리고 경주시가 ‘신라 왕경(王京) 핵심유적 복원·정비’를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세 기관을 대표해 변영섭 당시 문화재청장과 김관용 도지사, 최양식 경주시장이 협약서에 서명했다. 경주시 등 세 기관은 지금까지 왕경의 발굴·복원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며 비교적 구체적인 다음과 같은 전망을 제시한다. “신라 왕경의 조사·연구와 정비를 위해 2014년부터 2025년까지 약 9400억원을 집중 투입하여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함으로써, 우리 문화의 저력과 가치를 재발견하고 문화 융성의 모멘텀이 되어 21세기 실크로드의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도록 추진할 예정이다.”

박정희 시대의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부활해서 기지개를 켜는 장면이다.

출처 : 《시사IN》 2016년 07월 29일 금요일 제462호


두 박 대통령이 사랑했던 곳, 경주

박정희 대통령은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유별났다. ‘단군 이래 그랬던 적이 없었다’고 할 만큼 문화재가 각광을 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자 문화재계는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숭례문 부실 복구로 물거품이 되었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2016년 07월 29일 금요일 제462호
집권 4년차인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후 문화재 현장을 최소한 세 번 찾았다.  2013년 5월4일 숭례문 복구공사 완공 기념식, 지난해 9월7일 경주 월성 발굴 현장에 참석한 데 이어 올해 3월18일 아산 현충사를 방문했다. 물론 세 차례 방문을 근거로 박근혜 대통령이 우리 문화재에 유별나게 애착을 가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역대 한국 대통령 가운데 박 대통령만큼 문화재 현장 방문 기록을 남긴 이가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론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첫 방문지인 숭례문 복구 완공 기념식의 경우, 어떤 대통령이라도 참석했을 행사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두기는 힘들다. 2008년 2월 ‘숭례문 방화’는 국가적 사고였던 만큼 복구 완공을 기념하는 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복구된 숭례문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준 내상(內傷)은 적지 않은 듯하다. 떠들썩하게 복구를 완료했다고 발표한 직후, 전통 방식으로 재현했다는 숭례문의 단청이 벗겨지고 만 것이다. 더욱이 단청을 재생한 방법 역시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 곧이어 드러났다. 이는 결국 단청뿐 아니라 숭례문 복구공사 자체가 총체적으로 엉터리였다는 지적으로 이어진다. 심지어 숭례문을 넘어 한국의 문화재 현장 전반이 부실 덩어리로 간주되는 상황까지 확대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해(2013년) 11월11일, “숭례문 부실 복구를 포함해 문화재 보수 사업의 관리 부실 등과 관련한 문화재 행정 전반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통해 문제점을 밝히라”고 지시하게 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2015년 9월 경주의 신라왕경(월성) 발굴조사 현장에서 조사단의 설명을 듣는 박근혜 대통령(오른쪽). 
ⓒ연합뉴스
2015년 9월 경주의 신라왕경(월성) 발굴조사 현장에서 조사단의 설명을 듣는 박근혜 대통령(오른쪽).


그런데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를 단지 ‘언제나 있는 일’ 정도로 봐서는 안 된다. 시점이나 경로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었다. 당시 서유럽 순방에서 막 돌아와 공식 일정도 잡지 않은 상황에서 김기춘 비서실장을 통해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 ‘특별 지시’를 전달한 것이다. 박 대통령의 지시를 전파한 이정현 당시 홍보수석의 어조도 매우 강경했다.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것을 보면 (문화재 복원·관리 문제가) 원전 비리 못지않게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박 대통령도 원전 비리 커넥션이나 그로 인한 문제점 못지않게 굉장히 심각하게 이 사안을 보신 것 같다.”

발언 그대로만 보면, 문화재 비리를 당시에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원전 비리에 견준 이가 박근혜 대통령 본인인지, 아니면 이정현 수석인지 애매하기는 하다. 하지만 두 사람 중 누가 그 발언의 장본인인지에 상관없이, 그 이후 진행된 경과를 보면 문화재 계통의 비리는 원전 비리만큼 취급을 받았다. 경찰과 감사원이 대대적인 문화재 비리 수사·감사에 착수하면서 문화재계는 그야말로 쑤셔놓은 벌집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박근혜 대통령과 문화재계의 관계는 출발부터 심상치 않았다. 사실 문화재계는 박 대통령이 취임하자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왜 그랬을까?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 때문이다.

문화재계에 대통령 박근혜의 등장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물론 문화재계에도 다양한 정치 성향의 인물과 흐름이 있기 때문에 하나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저변에 ‘박정희의 재림’이라는 기대가 짙게 깔려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어떤 지도자였나? 독재자, 경제발전의 역군 등 그를 지칭하는 상징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적어도 문화재계에서 그는, ‘단군 이래 그랬던 적이 없었다’고 표현될 만큼 문화재가 각광받는 시대를 연출한 대통령이었다. 문화재계는, 그런 아버지에게 적지 않은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데다 실제로 아버지를 따라서 경주 등 여러 문화재 현장을 다니기도 했던 박근혜 ‘신임 대통령’에게 그 아버지 같은 모습을 기대했던 것이다. 특히 숭례문 복구 완공 기념 행사장에 노란색 한복 차림으로 나타났던 박근혜 대통령의 당시 모습은 문화재계가 또 다른 박정희로 반길 만한 풍모를 지니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문화재계의 기대가 숭례문 부실 사업의 폭로와 그 여파인 수사 확대로 인해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73년 경주의 천마총 발굴 현장을 찾아 상황 보고를 받고 있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가운데, 주머니에 손 넣은 사람). 
ⓒ연합뉴스
1973년 경주의 천마총 발굴 현장을 찾아 상황 보고를 받고 있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가운데, 주머니에 손 넣은 사람).

‘박정희의 재림’을 기대했던 문화재계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실제로 문화재계를 원전 비리급 인사가 득실거리는 공간이라고 생각했을까? 이후 행보를 보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박 대통령은 한동안 문화재 쪽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년4개월여 만에 문화재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 지난해 9월 경주 월성 발굴지였다. 박 대통령의 행보가 그동안 원전 비리급 집단으로 비친 문화재계에 대한 사면복권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속내가 어떠하든, 박 대통령의 경주 월성 발굴 현장 방문 자체는 문화재계에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비로소 완연한 ‘박정희의 재림’으로 보이기도 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고고학 발굴 현장을 찾은 이는 오직 박정희 전 대통령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에 이어 두 번째였다. 더욱이 그 많은 발굴 현장 중에서도, 아버지가 생전에 그토록 지극정성을 기울였던 경주를 그 딸이 다시 밟은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경주 월성 조사는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의 세부 과제 중 하나다. 경주를 ‘역사문화 창조도시’로 조성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 박근혜 후보는 경주 현장에서 “전통문화 자원이 문화 융성을 견인하는 핵심 자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아무튼 박근혜 대통령의 방문은 ‘역사도시 경주’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움직임에 가속페달을 밟아준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문제가 노출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다만 독자들께, 대한민국 역사상 현직 대통령이 고고학 발굴 현장을 찾은 두 번째 사건이 지난해 9월 경주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그 두 대통령이 공교롭게도 부녀간이라는 것도 함께….

박근혜 대통령의 세 번째 문화재 현장 방문은, 올해 3월18일 현충사 참배였다. 아산 경찰대학에서 열린 경찰대학생·간부후보생 합동 임용식에 참석한 뒤, 청와대 참모진을 대동하고 이순신 장군 사당인 현충사를 참배했다. 방명록에는 “충무공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반도의 번영과 평화의 기틀을 만들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이 일을 두고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오늘 참배는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사이버 테러 등으로 안보 현실이 엄중한 상황에서 조국 수호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국민의 단합된 국가안보 의지를 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현충사가 어떤 곳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가를 위해 충(忠)하는 ‘국민’의 이상형으로 이순신을 발견해내면서 이곳을 추모 시설로 재단장했다. 이런 곳을 그의 딸이 찾았다. 대통령 박근혜에게 아버지 박정희의 짙은 그림자가 늘 따라다닌다는 지적을, 우리는 현충사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김태식

경북 김천 출신으로 연세대 영어영문학과를 나와 1993년 1월, <연합뉴스> 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디뎠다. 1998년부터 지난해까지 문화재 역사 전문기자로 일했다. <풍납토성>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직설 무령왕릉> 같은 단행본을 냈으며, 한국 고대사와 문화재 정책 관련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현충사(顯忠祠)의 여러 층위와 박정희 현판 문제(1)

‘이충무공 유허’와 ‘현충사’, 그 괴리 


그의 탄강지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방화산 기슭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해군 총독으로 맹활약한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시설이 있으니, 이를 우리가 현충사(顯忠祠)라 하거니와, 현재 문화재청이 직접 관리하는 이 시설은 우선 면적이 방대하기 짝이 없어, 개인 사당으로 이토록 큰 규모는 없다.

 

시민공원을 겸한 이 현충시설은 또 하나의 국립묘지에 해당한다. 첫째, 그것을 직접 관리하는 곳이 중앙정부요, 둘째 그것이 보존정비된 내력이 이미 그런 특성이 농후하게 관철되었으며, 셋째 그 연례 제례를 관장하는 기관 역시 중앙정부인 까닭이다. 제관은 대통령이 하다가 김영삼 정부 이래 현재까지는 국무총리가 집도한다.

도대체 이런 국가현충시설은 어찌해서 어떤 내력으로 탄생했는가?


현충사 전면 주차장 이순신 기념물.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곧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고 만다는 그의 필적을 새겼다.

   

이를 위해 우선 우리는 이 현충시설의 명패부터 새삼 확인해야 한다. 어떤 시설의 정체성을 간판만큼 적확히 표현하는 존재는 드문 까닭이다.

 

우리는 이곳에 당연히 현충사라는 간판이 있을 줄로 안다. 하지만 막상 그 입구 한 켠을 장식한 안내판을 보면 ‘아산 이충무공 유허(牙山李忠武公遺墟)’라는 대문 편액을 발견한다. 이곳이 더불어 국가 사적 제155호임을 적시한다. ‘현충사’가 아니다.

 

유허란 무엇인가? 남은 흔적이라는 뜻이다. 본래의 시설은 이미 망실되고, 그 터만 남았다는 뜻이다. 우리가 현충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 시설은 왜 이름이 현충사가 아닌가? 그 해명을 위해 우선 이 안내판 본문을 보자.

 

아산 충무공 유허 안내판


“이곳 백암리 방화산 기슭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이 혼인하여 살던 옛집과 공을 기리는 사당이 있는 곳이다. 충무공은 이곳에서 십년 간 무예를 연마하여 서른두 살 되던 해(1576년, 선조9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충무공이 순국하신지 108년이 지난 1706년(숙종 32년), 이곳에 공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웠으며, 1707년 숙종 임금이 현충사(顯忠祠)라 사액하였다. 그 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철되었으나, 일제시대인 1932년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온 겨레의 정성으로 사당을 다시 세웠다. 1945년 광복 후에는 매년 4월 28일에 온 국민의 뜻으로 탄신제전을 올려 공을 추모하여 왔다. 1966년부터 1974년까지 공의 위업을 기리고자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성역화사업을 시행하였으며 2008년부터 2011년까지 현충사 유적 정비 사업을 통해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자, 이를 통해 우리는 왜 이곳이 현충사가 아닌 ‘충무공 유허’임을 안다. 이곳은 그의 넋을 기리는 현충사라는 사당만이 아니라, 그가 기거한 옛집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안내판의 충무공 유허 배치도


  1. 신건지 2018.01.25 10:47 신고

    한량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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