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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조선후기 영정조 시대 재야 문단의 영수지만, 실은 노론 적통에 재산 졸라리 많은 부자요 권력자였다. 뭐, 과거로 출사하는 길을 포기하고, 그러면서도 안의현감인지는 잘해 잡수시면서, 박제가 놀러 오니 안의현에서 관리하는 기생 중에서도 가장 앳된 애를 골라다 수청 들게 해 주는가 했으니, 이런 식으로 수하엔 말 잘 들을 수밖에 없는 또릿한 똘마니들 몇몇 거느리고 재야를 호령했거니와, 박제가 말고도 유득공도 있었다. 나이도 젤로 많고, 그 자신은 적통이지만, 똘마니들은 다 서출이라, 대장 노릇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럼에도 저이를 높이쳐야 하는 까닭은 그 속내가 무엇이었건, 그래도 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을 인간 대접했다는 점이다. 뭐 이런 동호회 그룹을 요새는 백탑 근처에서 많이 놀았다 해서 백탑파 그룹이라 하는 모양이다. 





한데 이런 연암으로서도 자존심 왕창 상하는 일이 있었으니, 그 똘마니 시다들이 모조리 중국 가서 선진문물 맛보고 온 데다 그걸 기초로 《북학의》니 하는 책 먼저 내서 왕창 성공을 거두었는데, 정작 오야붕인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니, 그래서 할 수 없이 본인도 나중에 연행길 나서는 육촌형님인지 쫄라서 쫄래쫄래 종사관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따라나선다. 


부담이 컸다. 엄청난 부담이었다. 왜인가? 이미 먼저 다녀온 박제가 유득공은 물론이요, 그 선배들이 기라성 같은 연행록을 냈기 때문이다. 늦게 갔으니, 그들을 모조리 뛰어넘어야 했다. 


그의 《열하일기》는 그래서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고충이 토로한 기행문이다. 이 《열하일기》를 대할 적에 나는 그의 이런 부담감을 고려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데 이런 그에게 천만다행인 점은 《열하일기》로 전대를 모조리 갈아 엎었고, 후대에도 그것을 뛰어넘는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열하일기》는 글자 그대로 선풍이었다. 대성공이었다. 다만, 이 때문에 그에 구사한 문체가 순정하지 못하다 해서 정조한테 쿠사리 쫑크 먹고 협박까지 받는 처지에 내몰렸지만, 그는 알았다. 정조가 그런 일로 사람을 죽이거나 유배에 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조는 성질이 더럽고 욱하면서 걸핏하면 화를 내곤 했지만, 그는 역시 호학의 군주요, 그런 까닭에 재목들은 잘 알아보았으니, 그러면서도 내가 저런 연암 같은 놈 유배 보내거나 죽여 역사의 오점을 남길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연암은 참말로 시대를 잘 만났다. 

연암처럼 공식 사절단 일원이 아니면서, 문물 맛보러 가는 사람들한테는 하나의 강박이 있었으니, 중국에서 문명으로 이름 떨치는 한 놈쯤은 사귀어야 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동아시아 세계의 간판급 주자라는 점을 각인해야 했다. 이를 위해 이들은 대개 그때까지 자신이 지은 시문 중에서도 짱꼴라들한테 내놓아서 부끄럽지 않은 것을 골라 여러 장 베껴가야 했다. 이걸 내밀며 나 이런 사람이요라고 소개하고, 그런 공작이 성공하면 "아! 동방에 이런 군자도 있었네"라는 소리 듣기 십상이니, 이런 방식으로 연암보다 후대에 대성공을 획책한 자가 추사 김정희다. 


그렇다면 연암은 무엇을 가져갔는가? 자기 자랑할 글을 한 편 골랐으니, 이것이 바로 아래 내가 2006년 기사에서 소개한 누이 제문이다. 이 제문은 그야말로 명문 중의 명문인데, 하필 연암이 이 글을 골라 베껴 간 까닭이 바로 이 정도 글이면 중국 식자층에서 뻑 갈 것이라 확신한 까닭이다.  


북역본 열하일기. 헌책방에 나온 것을 내가 쌔벼왔다.



<산문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

2006.04.05 15:36:30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강가에 말을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銘旌)이 펄럭이고 배 그림자는 아득히 흘러가는데 강굽이에 이르자 그만 나무에  가려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문득 강너머 멀리 보이는 산은 검푸른  빛이  마치 누님이 시집가는 날 쪽진 머리 같았고 강물 빛은 당시의 거울  같았으며,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수채화 같이 명징(明澄)하면서도 레퀴엠만큼 장중하다. 먼저 세상을 등진  손윗누이를 실은 상여가 배에 실려 사라져 가는 모습을 이렇게 읊고는 다시 노래한다.


"떠나는 이 정녕코 다시 오마 기약하지만/보내는 자 눈물로  옷깃  적시거늘/이 외배 지금 가면 언제 돌아오리/보내는 자 쓸쓸히 강가에서 돌아가네."


다시 돌아온다 약속하지만, 그 떠남이 죽음이며, 그가 떠나는 길이 상여이고 보면 어찌 떠난 자가 돌아오겠는가? 


300자에도 모자라는 이 짧은 만가(輓歌)에서도 왜 연암(燕巖)인지가 드러난다.


연암을 중점적으로 공부하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희병 교수는 이렇게 묻는다.


"이런 글을 명문이라 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글을 명문이라 할 것인가?"


하지만 이 글을 강평한 그의 문하생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1741-1793)도 만만치는 않다.


"지극히 작은 겨자씨 안에 수미산(須彌山)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겠다."


37세가 된 영조 37년(1773) 무렵, 박지원(朴趾源)은 이덕무 등과 함께 통행금지가 내려진 밤 12시가 넘어 운종가(雲從街)로 나아가 종각(鍾閣) 아래서 달빛을 받으며 거닐다가 수표교(水標橋)에 이르러 다리를 죽 뻗어 걸치고는 야경을 감상했다.


"개구리 소리는 완악한 백성들이 아둔한 고을 원한테 몰려가 와글와글 소(訴)를 제기하는 듯하고, 매미소리는 엄하게 공부시키는 글방에서 정한 날짜에  글을  외는 시험을 보는 것만 같고, 닭의 소리는 임금에게 간언하는 일을 자기의 소임으로 여기는 한 강개한 선배의 목소리만 같았다."


절친하게 지내던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1730-72)가 죽었다. 당파로는 소북(小北)이며 남인(南人) 계열 이가환(李家煥)의 처남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持平) 정언(正言)과 같은 간관직에 있었으니 친구만큼이나 적도 많았다.


이에 그의 죽음을 두고 연암은 이런 제문(祭文)을 지었다.


"석치에게 원한이 있던 자들은 평소 석치더러 병들어 죽어버려라고 저주를 퍼붓곤 했거늘 이제 석치가 죽었으니 그 원한을 갚은 셈이다. 죽음보다 더한 벌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는 한편) 세상에는 참으로 삶을 한낱 꿈으로 여기며  이  세상을 노니는 사람도 있거늘 그런 사람이 석치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껄껄 웃으며 '진(眞)으로 돌아갔구먼'이라 말할 텐데, 하도 크게 웃어 입안에 머금은 밥알은 벌처럼 날고 갓끈은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지고 말테지."


사람이 죽는 일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해 부인의 죽음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장자(莊子)의 우화를 빌려 연암은 석치의 죽음을 표현하고 있다.


'연암을 읽는다'(돌베개)는 박지원을 영문학의 셰익스피어나  독문학의  괴테에 비견하는 한국문학의 대문호로 간주하는 박희병 교수가 그의 산문 20편 가량을 골라 우리가 왜 연암을 다시금 봐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말로만 "연암! 연암!"을 외치면서도 정작 그를 외면하는 현재의 우리에 대한 저돌이기도 하다. 연암의 문학이 이토록 천의무봉(天衣無縫)한데, 어찌하여 당신들은 이걸 모르느냐는 박 교수의 분통이 느껴진다. 464쪽. 1만5천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1. 연건동거사 2018.10.21 19:57 신고

    이런 심리는 2018년 오늘날도 한반도에 사는 식자층에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한국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지도.

  2. 2018.10.22 14:32

    비밀댓글입니다


내장한 사진 정보를 보니, 촬영일자가 2007년 10월7일이라 박힌다. 중국 사천성 아미산 인근 낙산대불樂山大佛이라는 당나라 시대 거대한 강안江岸 불상을 친견하러, 배를 타고 가는 길이다. 강이 아니라 바다처럼 보이나, 이곳은 종국에는 장강長江이라는 거대한 강을 형성하는 지류 중에서도 세 강 줄기가 합쳐지는 지점이라, 벽돌탑이 희미하게 돌출한 저 강안 작은 산 오른편 강안에 전면을 바라보는 낙산대불이 서 있다. 내가 이곳은 아마 세 번인가 찾았다고 기억하거니와, 개중 첫번째 아닌가 한다. 이때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과 월간조선 사진부장 출신 퍼타그러퍼 이오봉 선생, 《한국의 고고학》 발행인이자 도서출판 주류성 업주 최병식, 그리고 나를 포함한 네 명이 동행했다. 대불 현장으로 접근하는 배는 이곳 건너편에 선착장이 있기도 하고, 저 맞은편에도 있으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탐방객은 안전장비를 착장해야 한다. 



같은 배에 탄 일행 중에 언뜻 일가족으로 보이는 중국인이 있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예상대로 일가족이었고, 아미산시에 사는 일가부치라 했다. 뒷모습을 보이는 이가 이오봉 선생이라,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지켜보며 연신 웃었다는 기억이 있다. 뒷머리 상단부만 노출된 이 친구는 저 귀엽기 짝이 없는 '자매'의 남동생이었다. 내가 저들에게 말을 건 까닭은 저 자매가 그리 이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사진 두어 장 찍을 요량이었으니, 이곳이 관광지라 그런지, 아니면 선상이라 더 그랬다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그런 전반의 여러 분위기가 뻘쭘함을 금방 말살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다고 기억한다. 



사진이 포착한 몇몇 장면을 보면, 시종일관 내가 대화를 주도한 듯이 보이며, 이오봉 선생이 몇마디를 거들었고, 자매가 상당히 즐거운 표정을 보인다. 


나는 중국어를 못한다. 어느 정도 못하는가 하면, 내 희랍어, 러시아어 실력과 진배 없다고 보면 대과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저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나 역시 아주 흥겨웠던 기억이 난다. 저들은 영어를 못한다. 둘다 대학 재학생이었으니, 왼편 파마머리가 인상적인 친구가 언니요, 오른편 생머리 통통이가 동생이다. 둘 다 성도 지역 이름께나 있는 대학 재학생이라, 영어는 어느 정도 된다 생각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친구들 영어 실력은 내 중국어 실력이나 피장파장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저들이 자매요, 일가족이며, 어느 대학에서 무슨 공부를 하는지 알아냈다. 기억에서는 지워졌지만, 저 두 자매 중 한 친구는 중의학 전공이라, 내가 이쪽에 관심이 특히 지대한지라 그것을 여전히 기억한다. 


쏼롸쏼라 한마디 하지 못해도, 그런대로 까르륵 서로 웃어가며 이런저런 대화가 가능한 힘은 필담筆談이다. 내 손에 든 것이 기자수첩과 펜인데, 저걸로 나는 저들의 이름과 심지어 이메일까지 땄다. 내가 찍은 너희 사진을 전해주겠다는 미명이었으니, 실제로 나중에 귀국해서 저들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고맙다는 답장이 왔던 기억이 있다. 


한자와 한문을 공통의 자산으로 삼는 전근대 동아시아는 적어도 문자를 아는 지식인 그룹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생각보다는 훨씬 광범위하게, 그리고, 훨씬 내밀한 감정과 사상까지 전달과 교유가 가능했으니, 이 역시 그 힘은 필담이었다. 이 필담을 실로 요긴하게 활용해 자신의 사상체계를 구축한 인물이 조선후기에는 쏟아져 나오거니와, 이른바 연경사라 해서, 조선왕조에서 정기 혹은 부정기로 중국 청나라에 파견하는 외교사절단에 포함되어 중국 지식인과의 교유와 그것을 토대로 하는 새로운 사상을 선전하는 그룹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른바 북학파라는 인물들이 거개 이에 속하거니와, 그 초창기 멤버 중 중국을 네 번 댕긴 박제가가 대표적이었고, 이후 그 절친 유득공도 북경을 다녀왔고, 이들 그룹의 대왕초인 박지원 역시 그 끝물에 딱 한 번 중국을 구경한다. 


저들 중에서 박제가는 중국에 환장해 자신이 구축한 인망을 통해 이런저런 최신 정보를 중국에서 시시각각 접하고 그것을 조선 지식인 사회에 퍼뜨렸거니와, 박지원은 북학파 수괴라는 별칭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그가 중국을 선진으로 간주하고, 그 동향에 지대한 관심을 시종일관해서 기울인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접하는 방식이나 태도에는 좀 묘한 구석이 있다. 그는 시종 조선인의 자존심이랄까 하는 것들을 지키고자 하는 모습이 특출나게 간취된다. 


이들이 물러난 자리에 우리가 익히 아는 김정희가 등장하거니와, 추사는 근현대기 미국물 먹고 환장한 미국쟁이보다 더욱 심각한 중국주의의 포로가 되었으니, 그에겐 조선의 스승은 없었고, 그가 스승으로 간주한 이들은 하나같이 중국사람들이었다. 옹방강이며 필원이며 하는 이들이 그의 스승이었거니와, 아무튼 그의 중국 사랑은 지금의 내셔널리즘 시각으로 본다면 구토가 날 정도였다. 


이들 중국에 환장한 사람 중에 중국어 능통자는 내가 알기로 없다. 박제가가 아마 기초 중국어 회화는 익힌 듯한데, 이 역시 자신은 없고 아무튼 능통한 수준이 아니었음은 확실하다. 추사는 중국어를 전연 몰랐다. 


앞에서 언급한 이들 말고도 같은 북학파 일원이면서 중국에 환장한 연암 연배 인물이 있으니 담헌 홍대용이라, 이 사람은 자기 저술을 나중에 자기 호를 따서 《담헌서》 라 뭉뚱거리거니와, 이 방대한  《담헌서》 는 간단히 정리하자면, 내가 중국을 통해 보고 들은 견문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국에 대한 비중 혹은 의존도가 높다. 어느 정도인가? 그 전부가 중국을 통해 습득한 새로운 지식의 보고라고 해도 하나도 틀림이 없다. 담헌 역시 중국어는 깡통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중국 지식인들과 활발히 교유하면서 새로운 지식과 사상을 접한 비밀은 바로 필담이다. 이 필담이 얼마나 거추장스럽겠는가? 무엇보다 지필묵이 필참도구였으니, 무엇보다 종이와 먹은 핵심이었다. 이 필담에 얼마나 많은 종이가 허비되었을 것인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며, 나아가 먹물은 어찌 조달했을지 그 애로를 눈앞에서 보는 듯하다. 먹물은 미리 갈아서 통에다가 담아 휴대하고 다니기도 했겠지만, 일단 본격 필담에는 먹물을 연신 갈아대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고 봐야 한다. 


담헌은 아예 중국 방문에서 만난 중국인과의 필담을 나중에 아예 따로 저술로 정리하기도 했으니,  《담헌서》 에 실린 많은 글이 실은 이 필담록이다.  그의 유명한 저술로  《담헌서》 에 편입된  《의산문답》 은 지동설을 주창한 혁신적 저술로 간주되거니와(맞나? 자신이 없어진다 각중에), 이 역시 연행길에 만난 가상의 중국인과 주고받는 대화체 형식이다. 


근대기 총칼과 아편을 앞세우고 동아시아로 몰려든 유럽인과 미국인들은 동아시아 사회가 언어가 전연 통하지 않는데도 사상이 통한다는 점을 무척이나 흥미로워했다. 이는 그 이전 유럽 사회에서 라틴어가 수행한 역할과는 분명히 달랐다. 라틴어는 일부 성직자에 국한한 공통어였을 뿐이며, 더구나 그것은 말을 기반으로 했으니, 철저히 문자와 필담 기반인 한문과는 그 결이 완전히 달랐다. 


필담, 이는 말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힌 동아시아 세계를 하나로 뚫은 구마라집이요, 거대한 빵꾸였다.  

  1. 연건동거사 2018.07.29 12:42 신고

    잘 읽었습니다.

  2. yisabu 2018.07.29 22:37 신고

    원어민 아가씨들은 막 웃는데 필자는 진지하니까 더 우껴요.

  3. 한량 taeshik.kim 2018.07.30 09:06 신고

    ㅋㅋ 왜 웃는지 나도 몰라여

조선 후기 실학을 논하면서 개중 하나로 박제가를 언급하면서 
그가 수레 사용을 적극 주창한 점을 높이 평가하지만 
이는 얼토당토 않는 주장이다. 
한반도 사람들이 수레를 몰라 수레를 사용하지 않은 것 아니다. 
산이 전국토 7할이었기 때문이다


수레를 사용하려면 
첫째. 지금의 고속도로 같은 도로가 구비되어야 하며 
둘째, 그런 도로는 높낮이 차이가 현격히 낮아야 하니
셋째, 그런 까닭에 소백이며 태백이며 차령산맥 등지는 터널을 뚫어야 했다.


이것 없이 수레 사용 운운은 다 개소리라, 설혹 수레가 있다한들 도로를 만들지 못하니 무슨 소용이 있으리리오?


박제가의 꿈은 그 200년 뒤에 이룩하게 되니
첫째, 일본넘들이니, 그들이 만든 경인선이며 경부선하는 철도가 그것이고 
둘째, 박정희니, 1970년 개통한 경부고속도로가 그것이다.


이런 제반 사정 고려 없이 그가 어떠한 소리 지껄였다 해서 그를 선각자였느니 하면서 운운해서는 결코 안된다.

요즘 한국사회에서도 전후사정 고려치 아니하고 이상론만 펴는 자들이 있으니 대체로 이런 이놈들을 일러 알량한 지식분자라 한다.

(2017. 0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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