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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ㅇ 종합정비계획에 따라 남문지~북문지 성벽 구간에 대한 시굴조사를 실시하여 성격 규명 등 정비·복원에 필요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함"

학술발굴은 거의 예외없이 이런 식으로 이유를 달아 발굴신청을 한다. 한데 그 상당수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봉분이 있는 고분 발굴을 예로 들어보자. 발굴을 하건 말건, 어차피 정비 복원은 똑같다. 봉분 흙으로 덮어 봉긋하게 만들고 잔디 심는다. 유물 모조리 꺼내어 빈깡통 만든 다음 엎던 혹은 무너진 봉분 세우는 일이 발굴이랑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성벽 복원 정비? 같잖아서 이건 말이 더 안나온다. 뭐? 정비복원을 위해 발굴해? 그래서 그에서 얻은 정보를 활용해서 성벽 다시 쌓니? 그거랑 관계없이 아무렇게나 쌓자나? 뭐 그렇게 복원한 성벽이 삼국시대 성벽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어? 발굴을 위한 발굴을 하자나?

말도 안되는 이유 이제는 달지 마라. 그냥 궁금해서 판다 해라.

김태식의 考古野談

한겨울 한밤중에 맨손으로 건진 백제금동대향로

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문화재 전문언론인

2017년 06월 호

사비 도읍기 백제 왕가의 공동묘지로 지목되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 서쪽 지점에 ‘능산리 고분군 전시관’이 있다. 모양이 조금은 독특해 전체로 보면 둔덕을 파고 들어간 땅굴 형식이다. 아마도 사비 시대 백제 무덤 전형이 주로 산기슭을 파고 들어가 그 안에다 돌을 쌓아 묘실(墓室)을 마련한 데서 착상한 디자인일 것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벽면엔 능산리 고분군 중 유일한 벽화 고분인 소위 동하총(東下塚)에서 발견된 벽화 소재 중 연꽃과 구름무늬를 잔뜩 그려놓았다. 그 내부에는 부여 일대 지형도와 능산리 일대 지형도를 안치하고, 그 뒤 중앙에는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 모형물을 놓았다.  

이 전시관의 주인공이 금동대향로임을 보여주는 배치다. 하지만 지금은 백제문화의 아이콘처럼 통하는 이 향로가 고분 전시관과 직접 연관이 있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왜냐면 향로는 고분이 아닌 그 인근 지역 능산리 사지(寺址·절터)에서 출토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향로의 발견을 이끈 사건은 다름 아닌 이 전시관 공사였다는 점에서 아예 무관한 것도 아니다.  

1985년 부여군은 고분 전시관을 지으면서, 공사장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빼내기 위한 배수로를 만들게 된다. 이 과정에 백제 시대 연화문 와당(蓮花文瓦當) 몇 점이 발견된다. 이런 와당을 쓴 건물이라면 품격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에 당국에서는 1990~91년 중서부고도(古都)개발계획과 맞물려 능산리 고분군과 부여 나성(羅城) 사이 계곡에 위치한 능산리 394번지 등 13필지 사유지 약 3000평을 매입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곳은 계단식 논밭이었다. 그리고 이 일대에 대해 1992년 12월 4일부터 이듬해 1월 7일까지 유적 분포 범위와 양상 확인을 위한 문화재 시굴조사를 실시한다. 

때는 엄동설한 혹한기였다. 그 결과 건물터와 초석(礎石)을 비롯해 연꽃무늬 수막새를 포함한 기와와 토기가 다량 발견됐다. 지하에 심상치 않은 백제 시대 유적이 존재한다는 징후였다. 이렇게 되자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기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훗날 이곳이 ‘능산리 사지’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중요한 백제 시대 유적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논밭에서 출현한 백제

시굴조사를 토대로 하는 첫 발굴조사가 마침내 닻을 올렸다. 사역 전체에 대한 추후 발굴조사가 대략 완료되면서 밝혀졌지만, 첫 발굴 대상지는 사찰 중심에 해당하는 탑과 금당(金堂)이 있는 구역 양쪽을 담장처럼 막아선 복도형 건물인 회랑(回廊) 중 서쪽 회랑이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때 조사 구역을 서회랑지(西回廊址)라고 한다. 

조사는 충청남도와 체결한 학술조사 용역에 따라 국립부여박물관이 맡았다. 투입 조사비는 2800만 원. 조사기간은 10월 26일부터 같은 해 12월 24일까지 대략 2개월이었다. 계절로 보면 늦가을에서 한겨울에 걸치는 시기인 데다 혹한기가 포함된 까닭은 긴급히 발굴 예산이 책정되고, 그것을 연말까지 소진해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당시 물가 수준을 고려한대도 3000만 원도 되지 않아 턱없이 부족한 조사비다. 당시 부여박물관장이자 조사단장인 신광섭 현 울산박물관장의 말. 

“그 예산은 나중에 초대 문화재청장이 될 노태섭 당시 문화재관리국 기념물과장이 지원한 겁니다. 과장 전결 예산 지원 한도가 아마 3000만 원이었을 거예요. ‘금동대향로 발굴은 내가 지원해서 된 거다’는 말을 그분이 지금도 하는데, 이때 향로를 찾았어요.” 

향로가 발견되고 수습된 시점은 12월 12일 한밤중. 조사 내력을 더 파고들면, 이상한 점이 더 있다. 조사 종료 시점이 성탄절 이브인 12월 24일이라 하지만, 문화재관리국이 허가한 조사 종료 시점은 12월 5일이었다. 더구나 실제 조사한 발굴 면적도 정확한 수치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당초 허가받은 면적보다 훨씬 넓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다시 신 관장의 말.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지금 같으면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제가 고발당할 일이었어요. 허가받은 기간을 넘기면서 조사했고, 허가받지 않은 지역까지 발굴했으니까요. 그 예산으로는 시굴조사밖에 못해요. 무리해서 조사했지요. 그러다가 금동대향로를 찾았어요. 그 반향이 워낙 컸으니, 이런 일들은 다 조용히 지나갔고, 더구나 이후 능산리 사지 발굴조사에서는 연간 발굴조사비가 1억 원 넘게 지원됐어요.”  

그러고 보면 백제 금동대향로는 어쩌면 배짱 발굴이 준 선물인 셈이다. 어떻든 이때 조사 결과 백제 시대 건물지로는 나중에 공방지(工房址)Ⅰ이라 일컫게 되는 제3 건물지와 서회랑지 일부인 제2 건물지, 그리고 서회랑지 바깥 소형 건물지인 제1 건물지의 3개 동이 확인됐다. 문제의 금동대향로는 이 중에서 공방지Ⅰ에서 드러났다. 이곳 유물 출토 양상이나 바닥면 상태로 볼 때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던 공간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조사단은 공방지로 본 것이다. 

공방지는 건물 전면이 동쪽을 바라보는 동향(東向). 규모는 남북 길이 18.12m에 동서 폭 11.18m였다. 나아가 이곳은 대략 같은 크기의 3칸 방으로 구획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위치에 따라 이들 방은 남실(南室)·중앙실(中央室)·북실(北室)로 명명했다. 이들 중 중앙실 내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구덩이 흔적 두 곳이 드러났다. 한 구덩이는 남북 길이 72㎝, 동서 너비 48㎝, 깊이 10㎝의 타원형으로, 그 안에서는 제비 꼬리 모양 풍경판과 당초(唐草)무늬를 그린 채색 칠기 파편이 수습됐다. 

배짱 발굴로 찾은 금동대향로

한데 다른 구덩이가 문제였다. 이는 위에서 내려다본 모양이 모서리 각도를 죽인 긴 네모꼴인 말각(抹角) 장방형에 가까웠다. 긴 쪽을 기준으로 길이 135㎝에 너비 55㎝, 깊이 50㎝였다. 이곳에서 바로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것이다. 조사 당시 상태와 거기에서 각종 유물이 출토되던 양상을 부여박물관이 펴낸 공식 발굴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상부는 황갈색 점토에 모래가 섞인 층으로 덮여 있었다. 이 흙을 제거하자 잘게 부수어진 와편(瓦片·기와조각)과 토기편, 토사(土沙)가 가득 채워져 있었고, 사이사이에 각종 금동제품, 금동재료, 칠기편, 토기편, 옥제품 유물 등이 섞여 있었고 그 하부, 즉 바닥 위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가 뚜껑과 몸체가 분리된 채 출토되었다. 그리고 이 수혈(竪穴·구덩이)의 바닥에는 길이 100㎝ 내외, 너비 9.5~13㎝, 두께 5㎜의 나무판자가 4줄로 나란히 깔려 있었다. 이 수혈의 측벽(側壁·양쪽 벽)도 나무판자를 이용하여 벽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나 남아 있지 않았으며, 북서쪽 모서리에서 나무판을 결구(結構·이음)했던 철제 못이 발견되었다. 이 수혈은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해 두는 수조(水槽)로 보인다.” 

이로 미루어 백제금동대향로를 이 목제 박스 안에 넣어 놓았다는 뜻이다. 보고서는 이 박스를 수조(水槽), 즉 물을 채우는 상자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향로는 발견 당시 상태가 어떠했을까? 다음은 발굴보고서의 그 대목이다.    

“향로는 뚜껑과 몸통이 분리된 채로 출토되었는데, 뚜껑은 주연부(周緣部·테두리)가 북쪽을 향한 채 비스듬히 놓여 있어 봉황이 하늘을 향하도록 되어 있었고, 몸통은 대좌(臺座·받침)가 북쪽을 향한 채 완전히 바닥에 누인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런 상황은 향로가 몸체와 뚜껑이 조립식으로 만들어진 까닭이다. 이어지는 보고서 증언. 

 “이 향로는 향로의 높이와 출토 상황 등으로 볼 때 본래 세워놓았던 것이 넘어지면서 몸통과 뚜껑이 분리된 것이 아니고, 수조 속에 집어넣을 때 뚜껑을 몸통과 분리해놓은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향로를 수조에 매장할 때 일부러 분리해 안치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향로를 제외한 다른 유물 출토 상황은 어땠을까? 다시 발굴보고서.  

“그리고 향로가 놓인 부분에는 각종 금속편, 자기편, 토기편, 기와편, 옥제품 등으로 충전(充塡)되어 있었으며, 특히 기와편은 차곡차곡 쌓여 있어 향로를 고의로 퇴장(退藏·묻어 저장)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한편 수조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 중 일부는 (공방지Ⅰ의) 본채 중앙실 바닥에서 출토된 것과 접합되는 것도 있어 이 수조 내부가 채워진 것이 이 건물이 폐기된 시점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말은 향로를 포함한 수조 내부 유물들이 폐기된 시점과 폐기된 정황을 추정하는 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보고서 기술을 신뢰한다면 향로를 비롯한 유물은 누군가가 무슨 사연으로 일부러 묻었다. 건물이 폐기된 시점이라 했으니, 아마도 화재 등의 비상시국에서 그것을 지키고자 묻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귀중품이라 생각해서, 그런 비상사태가 수습되고 난 뒤 어느 시점에 다시 꺼내려 했을지 모를 일이다. 

‘능산리 고분군 전시관’ 일대 전경 ‘능산리 고분군 전시관’ 일대 전경 [부여군 제공]

부처님 보관인가 했더니…

그렇다면 향로 발견 당시 실제 현장 사정과 그 공개를 둘러싼 상황은 어떠했을까? 당시 부여박물관 학예연구사로서 실제 현장을 조사한 김종만 국립제주박물관장은 금동대향로를 발견하고 수습한 12월 12일 그날 상황에 대해 “최초 발견 시각은 오후 세 시쯤 넘어서”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사자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장면이 처음 나왔어요. 향로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부처님 보관(寶冠)이 아닌가 생각했지요. 한데 조금 더 파보니깐 보관은 아니더라고요. 향로라는 건 네 시 반쯤 알았을 겁니다.”  

그날 저녁 무렵 박물관으로 들어간 그는 이런 사실을 신광섭 관장한테 보고한다. 

“당시 관장님 댁은 대전이라, 대전에서 출퇴근하셨거든요. 한데 눈이 온다 했는지 어땠는지 해서 그날따라 집에 안 가시고 관사에 계시더라고요. 보고드리니 신 관장님이 ‘그럼 내가 현장에 가봐야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현장 나오셔서 발굴을 직접 지휘하셨지요. 이렇게 해서 현장에서 수습한 향로를 (부여)박물관으로 수습해 온 게 저녁 9시 무렵이었을 겁니다.” 

이에 대해 신 관장은 “그날 대전에 있던 집사람하고 애들이 부여로 오는 바람에 내가 대전을 안 가고 관사에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 다른 조사원들이 말하는 그날의 회상은 조금 더 상세하다. 이들의 신원을 지금 밝히기는 곤란하므로 일단 익명 처리한다. A씨의 증언.  

“12월 12일 오후 점심 먹고 나서 두세 시쯤 됐을 거예요. 수혈 2개 중 하나는 제가 파고, 다른 한 곳을 B 선생이 팠지요. 저는 일찍 조사가 끝났어요. B 선생이 불러 그쪽으로 가보니 그 수혈에서 동물무늬가 노출되기 시작했어요. 나중에 밝혀졌지만, 향로 뚜껑을 장식하는 동물이었어요. 그래서 김종만 학예사님께 보고했지요. 아마 제 기억에는 현장에는 신광섭 관장님보다 김정완 당시 부여박물관 학예실장님이 먼저 오셨던 거 같아요. 현장에서는 추우니깐 현장을 얼지 않게 잘 덮고 내일 파자고 얘기했던 거 같은데, 관장님이 나오셔서 상황이 변해 그날 밤 다 발굴하고 향로를 수습하고는 박물관으로 옮겼어요.” 

이들 조사원에 의하면, 신 관장이 커피 포트랑 랜턴을 들고 나타났을 적에는 이미 조사 인부들은 다 퇴근한 뒤였다. 믹스 커피 한 잔씩 종이컵에 타서 마시고는 랜턴을 들고 비추는 가운데 간간이 사진촬영까지 해가며 발굴을 계속했다. 수조는 흙이 가득 찬 상태였고 더구나 물까지 차 있었다. 조사원들은 순서를 바꿔가며 맨손으로 정신없이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솟아오르는 물을 커피 종이컵으로 퍼내면서 말이다. 그 추운 엄동설한 밤중에 맨손으로 차가운 물이 나오는 진흙을 연신 퍼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향로가 모습을 드러내자, 이를 오동나무 상자에다 옮겨 넣어 차에 싣고는 그날 밤 박물관에 들어갔다. 흙으로 범벅인 향로는 박물관에서 따뜻한 물로 세척했다.  

문화부 장관까지 출동한 발굴 현장

그다음 날 아침, 현장은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먼저 출근한 작업반장이 “발굴 현장에 도둑이 들어 유물을 파갔다”면서 얼굴은 사색이 되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장에는 속이 텅 빈 구덩이와 그 속 나무상자가 덩그러니 노출된 데다가, 그 주변의 간밤에 퍼낸 흙더미에는 각종 금붙이가 나뒹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습한 향로가 언론을 통해 공식 공개되기는 열흘이 지난 그달 22일이다. 발견·발굴로부터 무려 열흘이 지난 시점이다. 보통 이런 고고학 발견의 대사건은 정부 당국이 즉각 공개하려 하기 마련이다. 정권 홍보에 고고학 발굴만큼 좋은 소재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때는 김영삼 문민정부가 출범한 첫해였다. 그런데도 정권 홍보에는 제격일 법한 향로 발굴 사실은 상당한 시일이 지난 뒤에야 공개됐다. 그 이유에 대해 신 관장은 “상부와 공개 시점과 공개 방식을 두고 조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부여박물관이 독단적으로 공개를 결행할 수는 없으니,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부, 그리고 청와대로 이어지는 라인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지체되었다는 것이다.  

부여박물관에서 진행된 대향로 실물 공개 현장과 발굴 현장에는 이민섭 당시 문화부 장관이 참석했다. 장관이 발굴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기는 아마도 박정희 시대 이후 처음이었다는 점에서 정부 차원에서도 향로 발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엿보기에 충분하다. 

이런 대향로 발굴 과정을 보면서 못내 궁금한 점 하나를 신 관장에게 직접 물었다. 왜 향로를 한겨울 한밤중에 발굴하고 수습했느냐고. 

“무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요즘 같으면 그리 해서도 안 되지요. 다만 그것이 출현할 때만 해도 그리 귀한 것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그런 귀중한 유물을 현장에다가 그대로 두고 내일을 기약할 수는 없었습니다. 발굴 현장에는 조사원도 있고 발굴 인부도 많습니다. 중요한 유물이 나왔다는 정보가 언제 어디로 새어나갈지도 몰랐고 그리되면 도굴을 부를지 모른다는 우려도 컸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조금은 무리해서라도 그날 밤 발굴하고 수습한 것입니다. 좀 더 정밀하게 조사하지 못한 책임은 제가 통감합니다.”  

1993년 12월 12일 첫 발굴 당시 대향로. 몸체와 뚜껑(아래)이 분리돼 있다.1993년 12월 12일 첫 발굴 당시 대향로. 몸체와 뚜껑(아래)이 분리돼 있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김태식  

● 1967년 경북 김천 출생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학사, 선문대 고대사·고고학 석사 

● 저서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직설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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