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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백암사 쌍계루에 붙이는 노래[長城白嵒寺雙溪寄題] 

[高麗] 정몽주(鄭夢周·1337~1392) / 기호철 譯評 





지금 시를 지어 달라는 백암산의 중을 만나니

붓을 잡고 시구 읊조리며 재주 없어 부끄럽소

청수가 누각 세워 비로소 훌륭한 이름이 났고

목옹이 기문을 지었으니 값어치 더욱 더하네

노을빛 저 멀리 어렴풋이 저무는 산이 붉었고

달빛이 왔다갔다 흔들리는 가을 물이 맑구나

오래도록 인간 세상에서 근심으로 애타는 고뇌

언제나 옷자락 걷고서 그대와 함께 올라갈까


求詩今見白巖僧, 把筆沉吟愧未能。淸叟起樓名始重, 牧翁作記價還增。烟光縹緲暮山紫, 月影徘徊秋水澄。久向人間煩熱惱, 拂衣何日共君登。


이 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6 장성현(長城縣) 불우(佛宇) 정토사(淨土寺)에 실려 있으며 《포은집(圃隱集)》 권2에 〈장성백암사쌍계기제(長城白嵒寺雙溪寄題)〉라는 제목으로도 실려 있다. 3행의 청수는 경술년(1370, 공민왕19) 여름에 큰물이 져 무너진 백암산 정토사의 쌍계루를 중건한 삼중대광(三重大匡) 복리군(福利君) 운암(雲巖) 징공(澄公) 청수(淸叟)를 이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6 장성현(長城縣)불우(佛宇) 정토사(淨土寺)에 수록된 이색의 기문에는 ‘운암(雲巖)’으로 되어 있고, 《목은집(牧隱集)》 권3과 《동문선(東文選)》 제74권에 수록된 〈장성현 백암사 쌍계루기(長城縣白巖寺雙溪樓記)〉에는 ‘운암(雲菴)으로 되어 있다. 청수는 운암의 호로 이름은 징이었다. 나잔자(懶殘子)를 자칭하였다. 천태종(天台宗) 판사(判事)를 지내고 복리군(福利君)을 받았는데, 시중(侍中)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아우였다. 6행의 목옹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을 이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6 장성현(長城縣) 불우(佛宇) 정토사(淨土寺)에 그의 기문이 수록되어 있고, 《목은집(牧隱集)》권3과 《동문선(東文選)》 제74권에도 〈장성현 백암사 쌍계루기(長城縣白巖寺雙溪樓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부부 탄생을 축하하는 풍악 뒤로하고는 비자나무 숲을 지나 약사암 향해 산길 오른다.


저 비자나무 숲은 천연기념물이라, 현지서 만난 장성군 담당 공무원이 이르기를, 저 나무는 죽어도 베어내지 못한단다. 썩은 시체 용케 얻어걸리면 바둑판 몇개라도 만들려 했더니 예선 걸러먹었으니, 지정되지 않는 구역에서 찾아봐야겠다. 저 나무 주된 용처가 바둑판이다.


오후 세시가 넘었으므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선사하는 끝물단풍은 홍등가요 갓잡은 소에서 썰어낸 살코기 빛이다. 붉음 노랑 교집합 화려하다. 문득문득 돌아보며 저를 찬탄한다.



땀 많은 체질 탓이기도 하려니와, 금새 온몸은 땀 범벅이라, 찌린내 몸에 밸까 약사암 올라 훌러덩 잠바때기 벗어제끼니 이파리 향기 머금은 계곡 바람 쏴 하니 피부를 훝는다.

이 약사암은 저 계곡 아래 백양사 전경을 조망하는 곳이라 해서 백양사에 들르는 이는 모름지기 찾아야 하는 곳으로 통하거니와 말하자면 참새한테 방앗간 같은 곳이라, 다만 이날은 약간 늦어 백양사는 그늘에 든 시간이었다. 


오는 길 되짚어 뚜벅투벅 걸어내리며 이번엔 전면 산아래로 펼친 노랑밭을 전면으로 응시하고, 계곡도 쳐다보고, 비자나무도 어루만져 본디. 


올해는 놓치는가 했더랬다. 지난 여름이 기록적인 폭염을 선물한 만큼 겨울 역시 그만큼 걸음걸이가 빠른 듯한 까닭이었다. 다행히 막차를 탔으니 끝물은 겨우 부여잡은 셈이다.



남도 장성 땅, 백암산이 품은 백양사 쌍계루에선 주말 지인의 결혼식이 있었다. 단풍 축제가 끝물이라 그런지 백양사로 들어가는 외길 일차선은 차량으로 범벅이나, 거북이 걸음이 좋은 까닭은 그래도 몇가닥 남지 않은 단풍 끝물을 느긋이 감상케 하기 때문이다.


경내로 들어서니 곶감을 깎고 말린다. 처마밑 곶감이 주변 단풍과 하모니를 맞춘다.


좌판 벌여놓곤 모시 송편을 파는데, 빚어 찌기 시작한 송편이 김이 모락모락한다. 녹색이 빛을 발하는데 참기름을 발라서인지 아님 빛이 그랬는지 알 수는 없다. 듣자니 송편 만드는데 쓰는 모시는 영암이 산지라 한다. 


결혼하는 지인은 직전 부석사에 관한 역저를 냈다. 하객들한테 그 책을 싸인을 해서 증정한다. 그 모습 보며 빙그레 말한다.

"장개 가는 거요? 출판기념식 하는 거요?"

좀 아쉬운 듯해 한마디 더 보탰다.

"초판은 결혼식장에서 다 소진하는구만?" 


신부도 아는 분이라 반갑게 인사한다. 실은 장성에 도착한 간밤에 예비신랑한테 전화를 했더랬다.

"오늘 장개가는 거 맞소? 그새 찢어진 건 아니유? 장개 가는 시간은 몇시요?" 

난 몰랐다. 전화한 시간이 새벽 한시반이란 걸. 뭐 그럴수도 있지 신부가 그 늦은 밤에 전화해서 깨우냐며 파안대소한다. 알콩달콩 재밌게 해로 하소서라는 말로 받아치며 "아니 요새는 말세라더니, 결혼식도 하기 전에 같이 잠을 잔단 말이요?"라고 묻고 말았다. 


부조금도 냈겠다 인사도 했겠다 떡본 김에 제사 지내기 시작한다. 겨울로 가는 길목, 그 마지막을 불태우는 가을을 부여잡아 본다. 바짓가랭이 붙잡는 심정이다. 보통은 저쪽 맞은편 징검다리에서 쌍계루룰 찍으나, 오늘은 날이 날이만치 이곳에서 저들을 감상한다. 


가자, 이젠 약사암으로 발길을 돌린다.


  1. 글쓰는 엔지니어 2018.11.12 13:46 신고

    아름다운 결혼식 풍경이네요 ㅎㅎㅎㅎ 보기 너무 좋아요 ㅎㅎ

  2. 먹튀 2018.11.12 14:56 신고

    우와 좋네요 ㅎㅎ

단풍철이다. 그런 대명사로 내장산을 으뜸으로 꼽는다. 그 내장산에 백양사가 있다. 


조선초기 사가정 서거정의 다음 증언은 현재의 내장산 백양사 내력 중 고려말~조선초 일단을 증언하거니와, 이에 의하면, 당시에는 백암사라 일컬은 백양사가 실은 행촌 이암 집안 고성이씨 원찰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런 성격이 언제까지 지속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사가정 당대까지 100년이나 이어졌다는 사실을 소홀히 보아넘길 수는 없다. 이는 당대 불교사를 고찰할 때도 여러 문제의식을 고취하거니와, 불교가 일방적인 탄압대상이었다는 데 대한 반론 역시 요즘 만만치 않거니와, 불교가 그리 호락호락하니 당하지는 아니했다. 강고한 유교사회에서도 불교는 여전히 효용이 있었으며, 특히나 가정 주도권을 장악한 이는 남자가 아니라 여성들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승 판서도 바깥에서나 정승 판서였지, 집안에서는 종에 지나지 않았다. "애비는 종이었다"? 모든 남자는 종이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백암사로 돌아가는 도암 상인(道庵上人)을 보내다[送道庵上人還白奄寺]〉


백암사는 고려(高麗) 시중(侍中) 행촌(杏村) 이 문정공(李文貞公·이암(李嵒))의 원찰(願刹)인데, 그의 아들 평재(平齋) 문경공(文敬公 이강(李岡, 1333~1380))과 손자 용헌(容軒 이원(李原, 1368~1429)) 국로(國老)가 각기 선인(先人)의 뜻을 이어서, 출가한 자손 중에 조행(操行)이 있는 자를 가리거나 혹은 승려 중에 명망이 있는 자를 간택하여 이 절을 주관하게 함으로써 서로 전하여 수호해 온 지가 이미 100여 년이다. 지난번에는 행촌의 외증손(外曾孫)인 판선종사(判禪宗事) 송은(松隱) 몽대사(蒙大師)가 이 절을 주관하였고, 그의 고제(高弟)가 바로 도암(道庵) 성 상인(成上人)인데 송은이 도암에게 이 절을 전하였으니, 도암 또한 산문(山門)에서 숙망(宿望)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이 절에 머무른 지 지금 거의 30여 년에 이르는 동안, 도풍(道風)을 크게 선양함으로써 명성 높은 고승(高僧)이 마치 비린내를 좋아하여 달려드는 개미처럼 도암을 흠앙(歆仰)하여 서로 다투어 달려왔다. 거듭 생각하건대 거정(居正)이 예전에 흥천사(興天寺)로 송은을 찾아뵈었더니, 송은이 거정을 족질(族姪)이라 하여 정성껏 대우해 주고 이어 송은에 대한 설(說)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송은이 다시 백암사로 가게 되었다. 그 후 거정이 설을 지어 도암을 통해 부쳐 드렸더니, 뒤에 송은이 거정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설이 노승(老僧)의 기본 취지에 잘 부합한다.” 하고는 도암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반드시 기록해 놓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송은이 시적(示寂)하였으므로 지금은 송은을 생각만 할 뿐 만날 수가 없었는데, 도암을 만나니 애오라지 스스로 위로가 된다. 

도암은 본디 양주(楊州) 불암리(佛巖里) 사람인데, 거정의 별업(別業) 또한 그 이웃에 있었다. 도암은 나이 나보다 다섯 살이 아래인데, 왕래하며 서로 종유한 지가 거의 50년이 되었다. 상인은 항상 백암사에 머무르다가 혹 경사(京師)에 오거든 반드시 먼저 나를 방문하곤 했는데, 금년 봄에는 흥천사에 와서 결하(結夏)를 하고 가을 기후가 점차 서늘해지자 또다시 산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재차 찾아와서 나에게 이별을 고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백암사는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원(李原)의 자손들이 대대로 수호하는 원찰인데 공(公) 또한 행촌의 외현손(外玄孫)이니, 공의 한마디 말씀을 얻어서 길이 산문의 광영으로 삼고 싶습니다.” 하므로 거정이 말하기를 “행촌의 내외 자손으로 지금 조정에서 벼슬한 이는 수천 수백 인이요, 심지어는 왕실의 외척이 된 이도 있으니, 거정 같은 하찮은 외손(外孫)이 아니라도 반드시 그 일을 크게 빛내 줄 이가 있을 터인데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우선 절구(絶句) 5수를 써서 보내 드리고 겸하여 지주(地主) 조 사문(曺斯文)에게 부치는 바이다.


白奄寺, 高麗侍中杏村李文貞公願刹也。子平齋文敬公, 孫容軒國老, 承先志, 擇子孫之出家有操行者, 或選緇徒之有聲望者, 主寺, 相傳護守, 百有餘年。頃者。杏村外曾孫判禪宗事松隱蒙大師, 住是寺。其高弟曰‘道庵成上人’, 松隱傳之道庵, 道庵亦山門之有宿望者。駐是寺, 今幾三十餘年, 宣揚道風, 高禪韻釋, 歆仰爭趍, 如蟻慕羶。仍念居正昔謁松隱興天寺, 松隱以居正爲族姪, 待遇欵至, 仍索松隱說, 松隱還向白庵。居正作說, 因道庵奉寄。後松隱語居正曰:“子之說, 深得老僧本趣。” 顧語道庵曰:“當誌之。” 未幾, 松隱示寂, 今思松隱不得見, 見道庵, 聊復自慰。道庵本楊州佛巖里人, 居正別業, 亦在其鄰。道庵, 弟於我五歲, 往復相從, 幾五十年。上人常駐錫白庵, 或來京師, 必先訪我, 今春, 來興天寺結夏, 秋序漸凉, 亦復還山, 再來留別。且曰:“白庵, 鐵城子孫世守之願刹, 公亦杏村之外玄孫, 願得一語, 永爲山門之榮。” 居正曰:“杏村內外子孫, 今簪紱立朝者幾千百人, 至有貴接椒房戚里者, 雖非眇末外孫如居正者, 亦必有張皇者, 復何言哉?” 姑書絶句五首奉送, 兼寄地主曹斯文云。

 

 

남쪽에 이름난 가람이 이곳 백암이거늘   南國名藍是白庵,

누대엔 조금쯤 옅푸른 이내 서리었겠지   樓臺多少間晴嵐。

언제나 짚신 버선 차림으로 스님을 찾아  何時鞋襪尋師去,

밝은 달밤 쌍계에서 상냥한 얘기 나눌까  明月雙溪共軟談?* 

* 이 절에 쌍계루(雙溪樓)가 있는데, 이 목은(李牧隱) 선생이 그 기문을 썼다.   

 

가을바람 잦아들어 호수는 잔잔하거늘     秋風欲落湖水澄

머나먼 길 행장은 등나무 지팡이 하나      去去行藏一瘦藤。

온 산에 원학이야 당연히 창망할 테고      猿鶴滿山應悵望

청산은 전과같이 흰 구름 겹겹이겠지       靑山依舊白雲層。

 

천하에 명성 드날렸던 행촌 이 선생의      天下聲名李杏村

원찰을 지켜 길이 보존해야 당연하지       宜教願刹鎮長存。

자손들 나라 가득 얼기설기 하 많지만      子孫滿國多於織

묻노니 어떤 이가 성실하게 수호하리       且問何人衛守勤。

 

송풍과 나월이 이 산문 보호하여주거늘    松風蘿月護山門,

더구나 지주의 깊은 은혜까지 받았어라    何況深蒙地主恩。

사문 조 태수에게 한마디 알려드리노니    為報斯文曹太守,

나 역시 행촌 선생의 외현손이 된답니다   杏村吾亦外玄孫。

 

목은의 힘찬 문장 절 누각 잘 표현했고    牧老雄文賁寺樓,

삼봉의 뛰어난 필치도 풍치있고 멋지네   三峯妙筆亦風流。 

내 졸렬한 시구 소리높여 읽지마오         莫將拙句高聲讀,

산신령이 고개 끄덕이지 않을 줄 안다오  知有山靈不點頭。

 

《사가집(四佳集)》 권45 〈백암사로 돌아가는 도암 상인(道庵上人)을 보내다[送道庵上人還白奄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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