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백제 마지막 의자왕 손자이면서, 태자 부여효의 아들이다. 나당연합군 침입에 사비성이 함락 위기에 처하고, 왕과 태자 효가 웅진으로 달아나고, 의자왕 다른 아들인 태가 마음대로 왕이 되어 성을 지키자, 이에 반발해 성문을 타고 내려가 당군에 항복했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의자왕 : 20년(660)…6월에…당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자 왕은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며 “성충(成忠)의 말을 쓰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 고 말하고는 드디어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정방이 [사비]성을 포위하니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자 융(隆)에게 말하였다. “왕과 태자가 [성을] 나갔는데 숙부가 멋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면 우리들은 어찌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드디어 측근들을 거느리고 밧줄에 매달려 [성밖으로] 나갔다. 백성들이 모두 그들을 따라 가니 태(泰)가 말릴 수 없었다. 정방이 군사로 하여금 성첩(城堞)에 뛰어 올라가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였다.태는 형세가 어렵고 급박하여 문을 열고 명령대로 따를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1 태종무열왕 : 이때 백제에서는 군사를 다 내어 막았지만 패해서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당나라 군사는 이긴 기세(氣勢)를 타고서 성으로 들이닥쳤다. 의자왕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탄식했다. "내가 성충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의자왕이 드디어 태자 륭(隆. 효<孝>라고도 하지만 잘못이다)과 함께 북비(北鄙)로 도망했다. 정방이 그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성을 굳게 지켰다. 이때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태(泰)에게 말했다. "왕이 태자와 함께 성에서 나가 달아났는데 숙부(叔父)가 맘대로 왕이 되었으니,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한 것을 풀고 물러간다면 그때에는 우리들이 어떻게 온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는 좌우 사람들을 거느리고 성을 넘어 나아가자 백성들은 모두 그를 따르니 태(泰)는 이것을 말릴 수가 없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시켜 성첩(城堞)을 세우고 당나라 깃발을 꽂으니 태(泰)는 일이 매우 급해서 문을 열고 항복하기를 청했다. 이에 왕과 태자 륭(隆), 왕자 태(泰), 대신 정복(貞福)과 여러 성이 모두 항복했다. 소정방은 왕 의자와 태자 륭, 왕자 태, 왕자 연(演) 및 대신·장사(將士) 88명과 백성 1만 2,807명을 당나라 서울로 보냈다.


'고대한국인명지명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흠(金欽)  (0) 2018.03.06
도침(道琛)  (0) 2018.03.06
부여문사(夫餘文思)  (0) 2018.03.06
흥수(興首)  (0) 2018.03.06
성충(成忠)  (0) 2018.03.06
의직(義直)  (0) 2018.03.06

백제 멸망기 의자왕 시대 충신으로 평가되는 인물.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치러올 때 좌평으로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으로 유배되어 있다가, 적을 어쩌 막으면 좋을지를 묻는 의자왕 물음에 당군은 백강 어구에서 막고, 신라군은 탄현에서 마주 싸워야 한다고 주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의자왕 : 20년(660) 6월에…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 서쪽의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 신라왕은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 방면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여러 신하를 모아 싸우는 것이 좋을지 지키는 것이 좋을지를 물었다. …왕은 주저하여 어느 말을 따를지 알지 못하였다. 이때 좌평 흥수(興首)는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유배되어 있었다. [왕은] 사람을 보내 그에게 묻기를 “사태가 위급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였다. 흥수가 말하였다.“당나라 군사는 수가 많고 군대의 기율도 엄하고 분명하며 더구나 신라와 함께 모의하여 앞뒤에서 호응하는 형세[角之勢]를 이루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 대하여 진을 친다면[對陣] 승패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백강(白江)<혹은 기벌포(伎伐浦)라고도 하였다.>과 탄현(炭峴)<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하였다.>은 우리나라의 요충지여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으로 막아도 1만 명이 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뽑아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가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대왕은 [성을] 여러 겹으로 막아[重閉] 굳게 지키다가 적의 군량이 다 떨어지고 사졸이 피로함을 기다린 연후에 힘을 떨쳐 치면 반드시 깨뜨릴 것입니다.” 이때 대신들은 믿지 않고 말하였다. “흥수는 오랫동안 잡혀 갇힌 몸으로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가히 쓸 수가 없습니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게 하여 물의 흐름을 따라 배를 나란히 할 수[方舟] 없게 하고, 신라군으로 하여금 탄현을 올라오게 하여 좁은 길을 따라 말을 가지런히 할 수[幷馬] 없게 함과 같지 못합니다 이 때에 군사를 놓아 공격하면 마치 조롱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왕이 그럴 듯이 여겼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태종춘추공 :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 서쪽 덕물도(德勿島)에 이르자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金庾信)을 보내서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싸움에 나가게 했다.  의자왕은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고 지킬 계책을 물으니 좌평(佐平) 의직(義直)이 나와 아뢴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큰 바다를 건너왔고 또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하여, 또 신라 군사는 큰 나라가 원조해 주는 것만 믿고 적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당나라 군사가 싸움에 이롭지 못한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진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決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은 말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왔기 때문에 속히 싸우려고 서두르고 있으니 그 예봉(銳鋒)을 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한편 신라 군사는 여러 번 우리에게 패한 때문에 이제 우리 군사의 기세를 바라만 보아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오니 오늘날의 계교는 마땅히 당나라 군사의 길을 막고 그 군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일부 조그만 군사로 신라를 쳐서 그 예기(銳氣)를 꺾은 연후에 편의를 보아서 싸운다면 군사를 하나도 죽이지 않고서 나라를 보전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왕은 망설이고 어느 말을 따를지 모르고 있었다. 이때 좌평(佐平) 흥수(興首)가 죄짓고 고마며지현(古馬며知縣)에 귀양가 있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물었다.  "일이 급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흥수는 말한다.  "대체로 좌평 성충(成忠)의 말과 같사옵니다."  대신들은 이 말을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죄인의 몸이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오니 그 말은 쓸 것이 되지 못합니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白江; 기벌포伎伐浦)에 들어가서 강물을 따라 내려오되 배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또 신라군은 탄현(炭峴)에 올라와서 소로(小路)를 따라 내려오되 말[馬]을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 놓고 군사를 놓아 친다면 마치 닭장에 든 닭과 그물에 걸린 물고기와 같을 것입니다" 했다.  왕은 "그 말이 옳다" 했다.또 들으니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 한다. 



'고대한국인명지명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침(道琛)  (0) 2018.03.06
부여문사(夫餘文思)  (0) 2018.03.06
흥수(興首)  (0) 2018.03.06
성충(成忠)  (0) 2018.03.06
의직(義直)  (0) 2018.03.06
석남오(石南烏)  (0) 2018.03.06

백제 멸기 의자왕 시대 충신으로 평가되는 인물. 왕이 주색에 빠지가 간언하다가 옥에 갖혀 죽었다. 죽기 전 외적이 백제를 치러온다면 수군은 마땅히 기벌포에서 막고, 육군은 침현(탄현)에서 막아서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의자왕 : 16년(656) 봄 3월에 왕은 궁녀와 더불어 주색에 빠지고 마음껏 즐기며[淫荒耽樂]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좌평 성충(成忠)<혹은 정충(淨忠)이라고도 하였다.>이 극력 간언하자 왕은 분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성충이 옥중에서 굶어 죽었는데[死] 죽음에 임하여 글을 올려 말하였다.“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원컨대 한 말씀 올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늘 때[時]를 보고 변화를 살폈는데 틀림없이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에는 반드시 그 지리를 살펴 택할 것이니, [강의] 상류에 처하여 적을 맞이한 연후에야 가히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서 험난하고 길이 좁은 곳[險隘]에 의거하여 적을 막은 연후에야 가할 것입니다.” 왕은 살펴보지 않았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의자왕 : 20년(660) 6월에…당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자 왕은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며 “성충(成忠)의 말을 쓰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고는 드디어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태종춘추공 : 이 때 백제 마지막왕 의자(義慈)는 곧 호왕(虎王) 맏아들로서 영웅(英雄)스럽고 용맹하고 담력(膽力)이 있었다.  부모를 효성스럽게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 사람들이 그를 해동증자(海東曾子)라 했다.  정관(貞觀) 15년 신축(辛丑.641)에 왕위에 오르자 주색(酒色)에 빠져 정사는 어지럽고 나라는 위태로워졌다.  좌평(佐平. 백제 벼슬 이름) 성충(成忠)이 애써 간했으나 듣지 않고 도리어 옥에 가두니 몸이 파리해지고 피곤해서 거의 죽게 되자 성충은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忠臣)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습니다.  원컨대 한 마디 말만 여쭙고 죽겠습니다.  신(臣)이 일찍이 시국의 변화를 살펴보오니 반드시 병란(兵亂)이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용병(用兵)은 그 지세(地勢)를 잘 가려야 하는 것이니 상류(上流)에 진을 치고 적을 맞아 싸우면 반드시 보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陸路)로는 탄현(炭峴; 침현沈峴이라고도 하니 백제의 요새지要塞地임)을 넘지 말 것이옵고, 수군(水軍)은 기벌포(伎伐浦; 곧 장암長암이니 손량孫梁이라고도 하고 지화포只火浦 또는 백강白江이라고도 함)에 적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험한 곳에 의지하여 적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깨닫지 못했다...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 서쪽 덕물도(德勿島)에 이르자 신라왕은 장군 김유신(金庾信)을 보내서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싸움에 나가게 했다.  의자왕은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고 지킬 계책을 물으니 좌평(佐平) 의직(義直)이 나와 아뢴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큰 바다를 건너왔고 또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하여, 또 신라 군사는 큰 나라가 원조해 주는 것만 믿고 적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당나라 군사가 싸움에 이롭지 못한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진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決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은 말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왔기 때문에 속히 싸우려고 서두르고 있으니 그 예봉(銳鋒)을 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한편 신라 군사는 여러 번 우리에게 패한 때문에 이제 우리 군사의 기세를 바라만 보아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오니 오늘날의 계교는 마땅히 당나라 군사의 길을 막고 그 군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일부 조그만 군사로 신라를 쳐서 그 예기(銳氣)를 꺾은 연후에 편의를 보아서 싸운다면 군사를 하나도 죽이지 않고서 나라를 보전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왕은 망설이고 어느 말을 따를지 모르고 있었다. 이때 좌평(佐平) 흥수(興首)가 죄짓고 고마며지현(古馬며知縣)에 귀양가 있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물었다. “일이 급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흥수는 말한다. “대체로 좌평 성충(成忠)의 말과 같사옵니다.” 대신들은 이 말을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죄인의 몸이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오니 그 말은 쓸 것이 되지 못합니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白江. 기벌포伎伐浦)에 들어가서 강물을 따라 내려오되 배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또 신라군은 탄현(炭峴)에 올라와서 소로(小路)를 따라 내려오되 말[馬]을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 놓고 군사를 놓아 친다면 마치 닭장에 든 닭과 그물에 걸린 물고기와 같을 것입니다”고 했다.  왕은 "그 말이 옳다" 했다. …당나라 군사는 조수(潮水)를 타고 전선(戰船)이 꼬리를 물어 북을 치면서 전진했다.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바로 백제의 도성(都城)으로 쳐들어가 30리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이때 백제에서는 군사를 다 내어 막았지만 패해서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당나라 군사는 이긴 기세(氣勢)를 타고서 성으로 들이닥쳤다. 의자왕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한다. “내가 성충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의자왕은 드디어 태자 융(隆. 효<孝>라고도 했지만 잘못이다)과 함께 북비(北鄙)로 도망했다. 



'고대한국인명지명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여문사(夫餘文思)  (0) 2018.03.06
흥수(興首)  (0) 2018.03.06
성충(成忠)  (0) 2018.03.06
의직(義直)  (0) 2018.03.06
석남오(石南烏)  (0) 2018.03.06
김삼조(金三朝)  (0) 2018.03.0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