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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없다. 해외로 나간 우리 문화재라 해서 그것이 약탈이란 방식으로 나간 경우는 매우 드물고 실상은 합법적인 통로를 통해 반출된 것이 대부분이라 해도 도통 믿으려 하지 않는다. 더구나 약탈당한 것으로 의심을 산다 해서 그것이 곧장 약탈로 치환되어 인식되곤 한다. 그렇지 않단 말 수십 번 수백 번 골백 번 해도 말귀가 도통 통하지 않는다. 서산 부석사 보살상만 해도 헛소리가 난무한다.

약탈?
약탈 의심?
그건 우리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실제 약탈당했다 해도 그 사실이 증명되지 않으면 말짱도루묵이다. 조선시대엔 대마도가 조선 일본 무역중개기지다. 두 나라 사이에는 국가 혹은 민간차원에서 수많은 물자가 오갔다. 요즘은 문화재라는 가치가 투여된 물품이 이 방식으로 교류됐다.

조선초기 일본이 매양 요구한 품목 중에 대장경판이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을 달라했다. 이게 한때 심각히 조선 조정에서 논의된 적도 있다. 세종이 왜 거절했는가? 
문화재 애호?그땐 문화재라는 관념도 없을때다. 

세종이 말한다. 저거 줘 버리면 일본놈들 더는 우리 안 찾아와 굽신굽신대지 않는다.
이것이 반대 이유다.

일본에 나간 문화재는 덮어놓고 피약탈품이라 하는데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 대부분은 합법적으로 나갔다. 개중 일부가 약탈되었다 해서 그걸 일반화할 수는 없다.

문화재가 그리 만만한가?
애국주의에 기대어 뭐 한두마디 지껄이면 되는 거 같애?
난 공부하면 할수록 어렵기만 하더라.
이 짓거리 이십 년인데 아직도 모르는거 천지더라.


부석사 관음보살상 설사 약탈당했더라도 또다른‘약탈’로 돌려받는 게 정당한가

[중앙선데이] 입력 2017.02.12 00:00 수정 2017.02.12 04:35 | 518호 26면




입춘이던 지난 4일, 충남 서산 비봉산 기슭부석사(浮石寺)는 유난히 부산했다. 입춘 삼재풀이 행사가 겹쳐 액운을 쫓으려 태운 종이 부적 재가 눈처럼 흩날린다. 서해와 산들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이곳은 공교롭게 신라 고승 의상이 창건한 경북 영주 부석사와 이름이 같기 때문인지 창건주를 의상으로 삼는다. 또한 경내 곳곳에는 의상과 선묘라는 여인에 얽힌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선전하는 안내판이 있다. 고색 완연한 건축물로는 지금 종무소로 쓰는 건물과 그 전면 안양루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워낙 전망이 좋다


2013년 절도로 돌아온

금동여래입상은 돌려줬지만

이번 불상은 부석사로 인도 판결


일본으로 넘어간 문화재

정당한 반환 요구에

찬물 끼얹는 역효과 걱정


부석사는 조선초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서산 도비산에 있는 사찰로 등장한다. 지금도 뒷산을 그리 부른다. 의상 창건설은 아무래도 영주 부석사와 뒤섞인 듯하지만, 부석사는 조선 초기에도 있었고 1330년 이전에도 있던 고찰(古刹)임은 분명하다.


확정 판결 전까진 부석사로 인도 금지

지난 주말 이곳을 찾았다. 최근 한·일간 약탈 문화재 반환을 둘러싼 논란의 한 복판에 부석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부석사와 조계종, 그리고 일부 미술사학도는 그들의 바람대로 일본 쓰시마섬 간논지(觀音寺)라는 사찰에서 한국 절도단이 훔쳐 국내로 반입한 고려시대 금동 관음보살 좌상을 일단 국내에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부석사는 경찰이 도굴단을 검거하면서 압수한 이 불상이 부석사에서 제작되었음이 명백하고, 더구나 그것이 고려말 왜구에 의해 약탈당했으니, 본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며 그것을 압수한 우리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 유체동산인도 소송에서 대전지법 제12 민사부(재판장 문보경)는 지난달 26일 부석사 손을 들었다. 법원은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보관 중인 불상을 부석사에 인도하라고 판결했다. “원고(부석사)의 소유로 넉넉히 추정할 수 있고 과거에 증여나 매매 등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도난이나 약탈 등의 방법으로 일본 쓰시마 소재 관음사로 운반되어 봉안되어 있었다고 봄이 상당하다”는게 판결의 요지다. 도대체 이 불상이 무엇이기에?


경내를 거닐고 있는데, 중년 남자 세 명이 나누는 대화가 들린다. “나쁜 ×들, 우리 걸 왜 자꾸 지들 것이라고 한데? 불상은 어디에 있지?” 아마 뉴스를 통해 소식을 접한 듯하며, 불상이 부석사로 온 줄 아는 모양이다. 어떤 방식이건 일본에서 돌아온 그 불상은 약탈당한 것이니, 돌려줄 필요가 없다는 이들의 생각은 어쩌면 국민 대다수의 여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법원의 판결이 부른 후폭풍은 심상치 않다. 당장 일본 정부가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은 물론, 우리 정부도 즉각 항소했다. 대전지법은 최종 확정 판결이 날 때까지는 부석사로 불상이 가서는 안 된다는 강제집행정지 소송에서 정부 손을 들어줬다. 불상이 부석사로 인도되면, 항소심에서 이긴다 해도 회수가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번 판결을 놓고 문화재 분야 전문가 상당수는 ‘애국 판결’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불상이 설혹 약탈당해 일본으로 반출됐다 하더라도 그것을 또 다른 약탈이라는 방식으로 돌려받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또한 왜구에 의한 약탈은 심증만 있을 뿐이고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면에서 ‘애국’을 앞세운 판결이 더 큰 화를 부를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법원은 고려말 왜구들의 잦은 서산 지역 침입 기록이 있고, 현재의 불상에서 화상 흔적과 보관(寶冠)과 대좌(臺座)가 결실됐으며, 그리고 이 불상에 대해 일본 학자도 약탈품이라고 주장했다는 점 등을 인용하며 “불상이 정상적인 경로로 이전됐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판단했다. 요컨대 왜구 침략이 빈번했던 고려말에 약탈됐을 것이란 추정을 근거를 이 같은 판결을 내린 것이다.


법원이 인용한 자료 중에는 일본 규슈대학 기쿠다케 준이치(菊竹淳一) 명예교수가 1978년 펴낸 ‘쓰시마의 미술’이라는 보고서가 있다. 여기선 불상을 왜구에 의한 약탈품으로 간주하면서, 이를 봉안한 간논지 또한 왜구 집단이 건립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불상 반출 경위와 현재의 상태 등을 조사한 문화재청은 “정상적인 문화 교류나 외교 교섭을 통해 전래됐을 가능성은 적다고 판단된다”면서도 약탈됐다는 직접적 증거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1 북관대첩비 환송 고유제(告由祭)가 2006년 2월20일 서울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 뜰에서 열려 참석자들이 전통 제례복장을 하고 북한으로 이송될 북관대첩비를 향해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법원 판결이나 부석사 주장을 100% 수용한다 하더라도 약탈 시기는 고려말, 다시말해 14세기가 된다.지금부터 무려 60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는 중세에 벌어졌던 일을 지금의 법률적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느냐의 문제도 남는다.


높이 59.5㎝, 무게 38.6㎏인 이 보살상은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유형문화재(1973년5월)로 지정됐다. 대좌와 광배는 없어졌고 보관과 지물(持物·손에 든 물건)도 없으며 보존 상태가 불량한 편이다. 도금은 극히 일부에서만 확인된다. 보살상 내부에서 발견된 복장(腹藏) 유물 중에 조성 내력을 종이에 묵으로 적은 결연문(結緣文)이 1951년 우연히 발견됐다. 이를 통해 제작된 시기와 봉안한 사찰, 그리고 조성 발원자들을 알 수 있어 고려시대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이에 의해 이 보살상을 1330년 서산 부석사에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2 외규장각 의궤 5책 중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상권) 1688년(숙종14), 어람용 유일본. [중앙포토]


문제는 이것이 언제 어떤 경로로 일본으로 가게 되었는지 하는 점이다. 고려 말 서산 일대에 자주 왜구가 침략했다는 『고려사』기록과 1526년 무렵 간논지에 이를 봉안했다는 사찰 내부 기록을 토대로 1526년 이전에 일본으로 반출됐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1526년 이래 500여 년 동안 간논지에 봉안돼오던 이 보살상은 같은 쓰시마 가이진신사(海神神社) 소장 통일신라시대 금동여래입상과 함께 2012년 10월경 국내 도굴단에 의해 약탈되어 국내로 반입됐다. 절도범이 훔쳐온 ‘장물’인 셈이다. 대전 경찰청 광역수사대와 문화재청 사범단속반 조사 결과 절도범 총책 A씨가 주도해 저지른 일로 드러났다. A씨는 절도단에 각기 역할을 분담한 다음 범행 현장을 사전 답사했다. 이들은 절도품을 쓰시마에서 바로 국내로 반입하지 않고 우회하는 방법을 택했다. 즉 후쿠오카 항으로 운반한 다음 거기에서 다시 부산항을 통해 들여온 것이다. 후쿠오카 항은 문화재 검색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하지만 절도한 문화재를 국내에 팔아야 했기에 자연히 고미술계에 소문이 났고, 이것이 빌미가 돼 경찰과 문화재청은 2013년1월 23일 경남 마산의 한 냉동창고에서 불상 두 점을 압수하고 일당 대부분을 검거했다. 일본 경찰 역시 인터폴을 통해 한국 경찰에 수사 협조를 요청해왔다. 이런 과정을 거쳐 금동여래입상은 2015년 7월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이번에 문제가 된 관음보살상은 부석사가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반환’에 제동이 걸렸다. 법원이 1심에서 부석사 손을 들어줬지만 한·일간 외교 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위안부와 소녀상 문제 등으로 가뜩이나 서로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고 있는 것과 맞물려 양국간 민족감정까지 자극하기에 이르렀다.


외규장각 도서 반환 사례와 달라


한국내 여론은 1심 판결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구속돼 재판을 받는 절도범들조차 “우리는 애국자”라고 외치면서 국민참여재판까지 신청하려 했을 정도다. 하지만 구체적 증거없이 당장의 국민 감정과 여론에 의존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번 일로 일본을 비롯한 해외에 반출된 우리 문화재를 반환해달라는 우리의 정당한 요구가 매도되거나, 이런 노력에 자칫 찬물을 끼얹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일본으로 넘어간 한국 문화재는 수십만 점에 달할 것이란 추산이다. 이중 대부분이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 때 약탈된 것들이다.

이번 판결은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군대가 약탈한 외규장각 도서 반환이라든가 이토 히로부미가 대출한 일본 궁내청 소장 한국 도서 반환, 그리고 러일전쟁기에 일본으로 유출되어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가 돌아온 북관대첩비 반환 사례와는 다르다. 이것들은 명백히 그 유출 과정이 불법이었음이 드러났고, 이후 지난한 외교 협상을 통해 양국간 합의를 통해 돌아온 것이다. 그에 비하면 부석사 보살상 환수 판결은 도난을 통한 국내 반입이라는 전대미문의 ‘불법 탈환’을 법원이 합법화시켜줬다는 면에서 또다른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브리티시 뮤지엄을 상대로 엘긴 마블을 돌려달라는 그리스의 투쟁, 루브르박물관이나 브리티시 뮤지엄 소장품을 돌려달라는 이집트의 반환 운동 같은 데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하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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