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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금갑이 유통한 경로>


같거나 비슷한 내용 혹은 같거나 비슷한 사건을 전하는 기록물 A와 B가 있을 때, 역사학도를 비롯한 텍스트 연구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오류가 그 편찬 선후를 배열하고선 그것을 계승 관계로 간주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A가 먼저 나온 기록물이라면 덮어놓고 B는 A를 베꼈다고 본다. 하지만 이는 안이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A와 B가 그 선대에 존재하는 각기 다른 C와 D를 각각 참조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가 사금갑 이야기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증거에 의하는 한, 현존 문헌 중에 이 이야기를 수록한 가장 이른 시기 문헌은 《삼국유사》 기이편이다. 이후 이 이야기는 각종 후대 문헌에 빈번히 등장한다. 한데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후 문헌들이 모조리 《삼국유사》》를 참조한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런 전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거니와, 

첫째, 이 이야기가 후대 문헌이 등장하는 시점에서는 오직 《삼국유사》만이 그 이야기를 수록해야 하며, 둘째 무엇보다 《삼국유사》가 가독성이 뛰어나야 한다. 쉽게 말해 널리 읽히고 있었어야 한다. 


하지만 사금갑 이야기는 이 조건 어디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당장 《삼국유사》 사금갑과 《삼국사절요》 및 《동국통감》》의 사금갑이 왕청 나게 다르니 이는 각기 모종의 원전이 있었다는 한 증거가 된다. 둘째, 《삼국유사》는 생각보다 독자가 거의 없었다. 


사금갑 이야기는 내가 연전에 텍스트 분석을 해보니 여러 버전이 있다. 《동사강목》을 보면 《삼국유사》》를 원전으로 삼은 듯 하지만, 실은 《절요》와 《통감》 등을 종합한 새로운 버전이더라. 나아가 그것을 수록한 《용재총화》가 다르고 《점필재집》도 다르더라. 이로써 볼 때 신라 소지왕 시대 왕비, 혹은 후궁의 간통사건을 빌미로 삼아 정월 대보름 약밥 만들기 전통을 정리한 저 유명한 사금갑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정리 저록되기 전에 적어도 2개 이상의 버전이 전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삼국유사》를 필두로 하는 후대 문헌들이 그것을 재정리 재수록하면서, 각기 다른 버전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종래와 같은 편찬연대순을 수학적으로 배열한 다음, 그 후대 나온 문헌이 전대에 나온 문헌의 관련 기록을 전사傳寫했다고 간주함으로써 빚어진 패악의 또 다른 보기로 범엽의 《후한서》 중 한전韓傳이 있거니와, 유송(劉宋)시대에 범엽이 정리한 이 한전이 종래의 압도적인 견해로는 그 전대인 서진西晉시대 진수의 《삼국지》 중 위서魏書) 한전을 압축해서 베꼈다고 본다. 하지만, 두 한전을 교감하면, 결코 《후한서》가 《삼국지》를 베끼지 않았음은 명명백백하다. 


《후한서》와 《삼국지》 이전에 이미 후한시대 정사가 8종이나 현전하고 있었고, 그것을 《후한서》는 《후한서》대로, 《삼국지》는  《삼국지》대로 각기 전사 재배열 재정리했을 뿐이다. 


돌이켜 보면, 순서대로 나열하고 나아가 이를 통해 그 선후를 배열하고는, 후대가 선대를 베꼈다고 간주하는 방식은 개돼지도 3년만 교육하면 아는 일이다. 이것이 무슨 대단한 발견인양 호들갑 떠는 일이 다대하거니와, 이것이 무슨 대단한 새로운 발견이겠는가? 가장 저급한 수준의 이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저급한 학문이 고고학에서도 실로 광범위하게 횡행한다.  


이와 더불어 비슷한 맥락에서 학계에 빠진 텍스트론 고질 중 하나가 문헌끼리 편찬연대를 배열하고선, 같은 내용을 전하는 대목을 비교하고는 그 차이가 보일 적에 덮어놓고 선대 문헌이 정확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들 수 있다. 하지만, 후대에 내려오면서 전대의 오류를 바로잡는 일이 많아, 외려 후대 문헌이 정확한 일이 많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진先秦시대 문헌을 보면, 가장 안정된 판본은 중화서국이나 상해고적출판사에서 근자에 나온 교감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신라 왕실 뒤흔든 비처왕비 간통 스캔들

[중앙선데이] 입력 2017.02.05 05:35 수정 2017.02.05 06:40 | 517호 23면


조선 초기에 완성된 편년체 역사서인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와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 해당 연월(年月)을 보면 안정복이 말한 사건과 분명히 대응되는 사건이 보인다. 한데 자세히 살피면 이는 『삼국유사』기이(紀異)편에 ‘사금갑(射琴匣)’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것과 같은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사냥 갔던 비처왕 까마귀 말 듣고

궁궐로 돌아와 거문고 상자에 화살

사랑 나누던 왕비 선혜·승려 적발

승려는 죽이고 왕비는 폐위 시켜


사금갑은 신라를 배경으로 한 설화성 짙은 이야기다. 간단히 골자를 추리면 비처왕(毗處)이라고도 하는 신라 제21대 소지왕(炤知王·재위 479~500) 때, 궁주(宮主)가 왕궁 내부에 설치한 불당에서 일하는 승려인 내전분수승(內殿焚修僧)과 몰래 정을 통하다가 함께 복주(伏誅·목 베어 죽임을 당함)되었다는 내용이다. 사금갑은 ‘거문고 박스를 쏘라’라는 뜻이다.


이에 의하면 소지왕은 이해 정월 15일에 천천정(天泉井)이라는 곳에 행차했다가 까마귀가 하는 말을 따라 궁궐로 돌아와 거문고 보관 상자를 향해 화살을 쏘았더니, 그 안에서 몰래 사랑을 나누던 궁주와 승려를 현행범으로 체포해 죽음을 내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정월 보름날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해서 찹쌀로 밥을 지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소위 약밥의 유래를 설명하는 이야기다.

  

정월 대보름날 약밥의 유래 설명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에도 이 같은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다만 간통을 하다 목베어 죽음을 당한 왕실 여인을 『삼국유사』에서는 ‘궁주(宮主)’라 했지만,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은 ‘왕비(王妃)’라고 표기한 미세한 차이가 보인다. 궁주의 실체를 둘러싼 논란이 있다. 고려시대에 널리 쓰이다가 조선 초기에 와서 사라지기 시작한 궁주는 처음에는 후궁을 지칭하다가 후기에 가면 왕비를 지칭하게 된다. 따라서 사금갑 이야기에 등장하는 궁주는 소지왕의 후궁일 수도 있고, 왕비일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 실체가 무엇이건 『삼국유사』와 『삼국사절요』 『동국통감』은 내전분수승과 간통 사건을 일으킨 여인 실명을 공개하지 않았다. 한데 이보다 훨씬 뒤에 나온 『동사강목』에서 안정복은 대담하게 그가 바로 소지왕비인 선혜라고 선언한 것이다.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주장했을까.


이 수수께끼를 풀려면 소지왕비가 누구이며, 또 선혜는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즉위년조를 보면 왕은 “자비왕의 맏아들이고 어머니 김씨는 서불한 미사흔의 딸이다. 왕비는 선혜부인(善兮夫人)으로 이벌찬 내숙(乃宿)의 딸이다”고 돼 있다. 소지왕비는 이벌찬 내숙의 딸 선혜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삼국유사』 왕력(王曆)편에서는 비처마립간(소지마립간)이 “자비왕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미사흔 각간의 딸이다. 기미년에 왕위에 올라 21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왕비는 기보 갈문왕(期寶葛文王)의 딸이다”고만 했을 뿐, 실명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왕의 장인은 갈문왕 기보라고 해서, 이벌찬 내숙이라고 밝힌 『삼국사기』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비처왕비 문제를 어떻게 봐야할까. 우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동일한 인물을 지칭했을 가능성이다. 이렇게 놓고보면 이벌찬 내숙과 기보 갈문왕은 동일인이 된다. 다시 말해 이벌찬 내숙이 죽고 난 뒤에 갈문왕으로 추봉되고 이름도 기보로 바뀌었다는 얘긴데, 여러모로 봐도 비합리적이다.


다음은 이 둘이 서로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다. 다시 말해 비처왕비는 이벌찬 내숙의 딸 선혜일 수도 있고, 이름은 알 수 없는 기보 갈문왕의 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신라는 일부일처제 사회였다. 따라서 한 남자에게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면 이는 시기를 달리하는 부인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누가 먼저이고, 나중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비처왕에게는 선혜와 기보 갈문왕의 딸이라는 부인 두 명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선혜가 언제 비처왕비로 간택되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결정적인 흔적이 『삼국사기』에 보인다. 신라 소지왕본기 8년(486) 조에는 “2월에 내숙(乃宿)을 이벌찬으로 삼아 나라 정치에 참여케 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내숙은 선혜의 아버지다. 신라 관위 체계 중 제1위인 이벌찬에 내숙이 임명됐다는 건, 딸 선혜가 왕비로 간택됐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내숙은 왕의 장인이자 왕비의 아버지라는 혈연관계를 발판으로 이벌찬까지 오른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선혜가 왕비로 간택되는 소지왕 재위 8년 이전까지 소지왕비는 누구였는가. 그가 바로 『삼국유사』가 말하는 기보 갈문왕의 딸이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선혜는 왕비에 간택되고 나서 불과 2년 뒤인 소지왕 10년(488) 정월 15일에 발생한 소위 사금갑 사건으로 왕비 자리에서 쫓겨난 셈이 된다.


사금갑 사건을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 『화랑세기』엔 여럿 보인다. 비처왕비 선혜가 폐위된 사실이 곳곳에 나오는데, 이를 종합하면 선혜 황후는 묘심랑(妙心郞)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왕비 자리에서 쫓겨나고 만다. 왕비가 간통 사건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 왕비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대목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꽃미남 묘심과 왕비, 딸까지 낳아


7세 풍월주 설화랑(薛花郞) 전기는 설화랑의 어머니인 금진(金珍)의 계보를 설명하면서 “금진은 아버지가 위화랑(魏花郞)이고, 어머니는 오도 낭주(吾道娘主)다. 오도는 어머니가 선혜 황후이고, 아버지는 묘심랑이다”고 전하고 있다. 이어 묘심랑은 “천주공(天柱公) 아들인데 얼굴이 잘 생기고 색사(色事)를 잘 해서 (비처왕의) 후궁들과 사사로이 정을 통한 일이 많았다. (선혜 황후가) 복을 빌러 절을 찾아 법으로써 약속하기를 삼생(三生)…. 묘심이 주살됐다”고 한다. 중간에 텍스트가 뭉개져 나가 아쉽기만 하지만 어떤 내용이 들어가 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는 않다.


묘심랑은 요즘 말하는 소위 ‘얼짱’ 청년으로, 여자들을 후리고 놀아났다. 선혜 또한 그에게 반했다. 둘이 만난 곳을 절이라고 했다. 이것으로 볼 때 묘심랑은 아마도 절의 스님이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이 절에서 몰래 왕비를 만나 사랑을 나눈 것이다. 한데 이 사건이 그만 발각되어 묘심랑은 목 베임을 당하고, 선혜는 왕비 자리에서도 쫓겨나고 만다. 둘 사이에는 오도라는 딸까지 있었다고 한다.


묘심이 사찰 혹은 승려와 관계있는 인물이었다는 다른 증거는 『화랑세기』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으니, ‘묘심사(妙心事)’와 ‘천주사(天柱事)’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둘은 지칭하는 대상이 같다. 똑같은 사건을 문맥에 따라 어떤 곳에서는 ‘묘심이라는 남자와 관련되는 사건’이라 하고, 다른 곳에서는 ‘천주사(天柱寺)라는 사찰을 무대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묘사했을 뿐이다. 사금갑 관련 기록을 참조해보면 천주사는 신라의 궁궐 안에 있던 불당이다.


이런 『화랑세기』의 내용을 종합해보면,사금갑 이야기를 비로소 역사적 사건으로 완전하게 풀 수 있게 된다. 즉, 간통 사건이 발생한 주된 무대는 천주사라는 궁궐 내 사원이며, 왕비의 간통 상대는 그곳 승려인 묘심이라는 남자였고, 간통이 발각됨으로써 남자는 죽임을 당하고 왕비는 폐위됐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 신라 왕실을 뒤흔든 간통 스캔들이었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전대미문의 이 사건은 후대에 ‘사금갑’이라는 설화성 짙은 이야기로 포장돼 후세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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