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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위키피디아를 근거로 해서 김태식이 약간을 덧보태어 재편집했으며, 나아가 그와 관련해 내가 기존에 작성한 기사 몇 건을 첨부한다. 마지막 첨부기사는 내가 문화재 담당기자였을 적에 후배기자를 통해 쓰게 하고, 내가 데스킹한 것이다. 


1908年 8月 28日生인 日本 考古学者다.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 의하면 '사이토 다다시'다. 大正大学 名誉教授이며 財団法人 飛鳥保存財団 理事이기도 하다. 文学博士. 宮城県 仙台市가 태생지다. 1932年, 東京大学 文学部 国史学科를 卒業했다. 文化財保護委員会 主任調査官과 東京大学 教授, 大正大学 教授, 財団法人 静岡県埋蔵文化財調査研究所長 등을 歷任했다. 


2013년 현재 그의 타계 소식은 아직 없으므로, 지금 105세의 장수를 누린다. 그는 얼마 전에 역시 100세를 넘어 타계한 아리미쓰 교이치(유광교일. 有光敎一)과 더불어 대일본 제국시대에는 그 피식민지인 조선에서 고고학 조사에 종사했다. 그가 손댄 유적지로 가장 유명한 곳이 부여 군수리사지다. 


2013년 8월 21일, 향년 105세로 타계했다.  


첨부 사진은 2005년 11월 3일 국립부여박물관 초청 강연회에서 부여 군수리사지 발굴 회고담을 강연할 때 모습이다.   


單獨著書로 다음이 있다. 

朝鮮古代文化の研究 地人書館 1943

日本古代社会の葬制 高桐書院 1947

上代における大陸文化の影響 大八洲出版[大八洲史書] 1947

朝鮮仏教美術考 宝雲舎 1947

朝鮮仏教美術考 寳雲舎 1948

考古学の研究法 吉川弘文館 1950 / のち改訂版 1959

装飾古墳の研究 吉川弘文館 1952

日本考古学図鑑 吉川弘文館 1955 / のち新訂版 1965

日本古墳の研究 吉川弘文館 1961

木内石亭 吉川弘文館[人物叢書] 1962 / のち新装版 1989

日本の発掘 東京大学出版会[東大新書] 1963

古代の装身具 塙書房[塙選書] 1963

古墳文化と古代国家 至文堂[日本歴史新書] 1966

日本の誕生 原始・古墳時代 ポプラ社[日本の歴史1] 1968

日本古代遺跡の研究 総説 吉川弘文館 1968

日本の美術 1 小学館[ブック・オブ・ブックス] 1972

新羅文化論攷 吉川弘文館 1973

日本装飾古墳の研究 講談社 1973

日本考古学史 吉川弘文館[日本歴史叢書 34] 1974 / のち新装版 1995

日本の歴史文庫 1 講談社 1975

図録東洋仏教遺跡 日本仏教文化の源流を訪ねて 吉川弘文館 1975

古代史と考古学 吉川弘文館 1976

日本古代遺跡の研究 論考編 吉川弘文館 1976

図録東西文化交流史跡 吉川弘文館 1978

日本人はどこから来たか 講談社学術文庫 1979

古墳の視点 学生社 1980

考古学と現代 日本評論社[日評選書] 1980

年表でみる日本の発掘・発見史 1 日本放送出版協会[NHKブックス] 1980

考古学への道 学生社 1980

古代朝鮮文化と日本 東京大学出版会[UP選書] 1981

日本の発掘増補版 東京大学出版会[UP選書] 1982

日本考古学概論 吉川弘文館 1982

年表でみる日本の発掘・発見史 2 日本放送出版協会[NHKブックス] 1982

古代の遺跡 写真集 学生社 1983

装飾古墳・図文からみた日本と大陸文化 日本書籍 1983

歴訪世界の博物館 六興出版[ロッコウブックス] 1984

日本考古学史辞典 東京堂出版 1984

考古学史の人びと 第一書房 1985

東アジア葬・墓制の研究 第一書房 1987

日本考古学研究 1 学生社 1988

日本考古学研究 2 学生社 1989

日本考古学研究 3 学生社 1990

日本考古学用語辞典 学生社 1992 / のち軽装版 1998 / のち改訂新版 2004

日本考古学史年表 学生社 1993

斎藤忠著作選集 全6巻 雄山閣出版 1996-1998

北朝鮮考古学の新発見 雄山閣出版 1996

日本考古学文献総覧 学生社 1997

遺跡 今と昔 写真集 学生社 1997

中国天台山諸寺院の研究 日本僧侶の足跡を訪ねて 第一書房 1998

中国五台山竹林寺の研究 円仁(慈覚大師)の足跡を訪ねて 第一書房 1998

古代遺跡の考古学者 学生社 2000

郷土の好古家・考古学者たち 東日本編 雄山閣出版 2000

郷土の好古家・考古学者たち 西日本編 雄山閣出版 2000

日本考古学の百年 東京新聞出版局 2001

日本考古学史年表軽装版 学生社 2001

仏塔の研究 アジア仏教文化の系譜をたどる 第一書房 2002

考古学とともに七十五年 斎藤忠自伝 学生社 2002

日本考古学用語小辞典 学生社 2003

幢竿支柱の研究 第一書房[アジアの特殊仏教石造文化財の系譜 1] 2003

六地蔵幢の研究 第一書房[アジアの特殊仏教石造文化財の系譜 2] 2004

日本考古学人物事典 学生社 2006

古都扶余と百済文化 2005年11月国立扶余博物館講演記念 第一書房[Academic series new Asia ; 46] 2006

中国・韓国・北朝鮮の古跡への回想 漢詩の情感に触れつつ 第一書房[Academic series new Asia ; 47] 2007

古都慶州と新羅文化 第一書房[Academic series new Asia 49] 2007古都開城と高麗文化 第一書房[Academic series new Asia 53] 2007

斎藤忠著作選集 続編 全?巻 雄山閣 2007-


共著로는 다음이 있다. 

小田原市久野諏訪の原古墳調査報告 小田原市 1953

地下に歴史を掘る 日本の考古学100年 朝日新聞社 1978

稲荷山古墳と埼玉古墳群 大塚初重共著 三一書房 1980

那須国造碑・侍塚古墳の研究 出土品・関係文書 大和久震平共著 吉川弘文館 1986


編著로는 다음이 있다. 

日本古墳文化資料綜覧 3分冊 吉川弘文館 1952-1956

信濃国分寺跡 上田市教育委員会 1967

日本古代遺跡の研究 文献編 吉川弘文館 1971

日本考古学の視点 日本書籍 1974

日本考古学史資料集成 吉川弘文館 1979

日本古墳文化資料綜覧 明治初年〜昭和26年 臨川書店 1982

中世の考古学 遺跡発掘の新資料 名著出版 1983

古代朝鮮・日本金石文資料集成 吉川弘文館 1983

日本考古学論集 全10巻 吉川弘文館 1986-1987

続日本古墳文化資料綜覧 昭和30年〜昭和55年 全2巻 臨川書店 1985-1988

高麗寺院史料集成 大正大学綜合仏教研究所 1997

書簡等からみた史学・考古学の先覚 雄山閣出版 1998


共編으로는 다음이 있다. 

日本史図録 全4巻 児玉幸多・久野健共編 吉川弘文館 1960-1964

日本横穴地名表 古墳化基礎資料 杉山博久共編 吉川弘文館 1983

先史・古代の韓国と日本 江坂輝弥共編 築地書館 1988

考古学から古典を読む 坂誥秀一共編 雄山閣出版[季刊考古学・別冊 4] 1993


監修로는 다음이 있다. 

江見水蔭『地底探検記』の世界 解説・研究編 中山清隆編 雄山閣出版 2001

日本考古学を語る 捏造問題を乗り越えて 小林達雄ほか編 雄山閣[季刊考古学・別冊 11] 2003


參考文獻

考古学叢考 上中下巻 斎藤忠先生頌寿記念論文集刊行会編 吉川弘文館 1988

先学に学ぶ日本考古学 坂誥秀一 雄山閣 2008


이상은 2013. 04. 05 15:49:01 과거 블로그 포스팅인데 추후 보강한다. 


<1930년대 경주박물관장 사이토 다다시> (2005.11.03 18:53:03)  

올해 97세, 1935-36년 부여 군수리 절터 발굴


    (부여=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와!"

    국립부여박물관(관장 이내옥)이 3일 오후 박물관 강당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마련한 '일본 원로 고고학자 초청 강연'에 앞서 사회자가 강연자  나이를  소개하자 청중석에서는 이런 탄성이 쏟아졌다.

    "사이토 다다시(齋藤忠) 선생님은 올해 만 97세시며 우리 나이로는 98세가 되십니다. 건강 유지를 위해 매일 새벽 5시에 기상하신다고 합니다."

    백수를 바라보는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이토 씨는 정정했다. 강연 1시간과 휴식 시간, 그리고 관련 슬라이드 상영 40분을 합쳐 2시간 가량 계속된 이날 강연회 내내 그의 자세는 똑같았다. 간간이 기침이 섞여 나오긴 했으나 발음도 또렷했고 보청기를 낀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건강에 별다른 이상 징후도 없는 듯했다.

    1일 일본에서 부여에 도착한 사이토 씨를 안내해 2일 낮 부소산성을 돌아봤다는 김종만 부여박물관 학예실장은 "나보다 빨리 등반하더라"고 전했다. 

    이런 건강함 때문일까? 지금까지 낸 책이 단행본 기준으로 150권 가량.  그것을 다 쌓으면 160㎝가 될까 말까한 자신의 키보다 더 높다고 한다. 앞으로도 3권은  더 낼 작정이라고 말했다. 

    95세 때인 2003년 2월에는 불교국가 중에서도 오직 한국에만 있는  당간지주(幢竿支柱)를 전문적으로 파고든 '당간지주의 연구'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당간지주는 절에 당(幢)을 세운 다음 그것을 덧대는 석조물로서  인도,  태국, 중국 등 불교가 번성했던 나라들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유독 한국에만 많이 남아 있어 2001년 11월과 2004년 4월, 5월에 걸쳐 (한국) 각지의 절을 돌아보고 이를  조사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한국의 고문화 연구를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1908년 8월28일 생인 그는 1928년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해 32년에 졸업한 다음 1933년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조수를 거쳐 이듬해에 조선에 건너와 각종 고적조사, 즉 고고학 발굴에 투신했다. 

    경주 지역 신라 유적 발굴에 집중된 그의 조선 생활은 1940년 일본으로  귀국하기까지 약 6년 동안 계속됐다. 당시 조선총독부에 의한 고고학  조사가  식민지배를 위한 정치성이 농후했다는 것은 새삼스런 지적도 아니거니와, 그런  활동  일선에서 활약한 사이토 씨 또한 그런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비판과는 별도로 사이토 씨처럼 생존하고 있는 식민지시대 고고학자들에 대한 증언 채록도 중요할 것이다. 

    사이토 씨 보다 나이가 1살 많고 일제가 패망한 1945년 당시  조선총독부박물관 관장이었던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또한 현재 생존해 있으나  이들을  대상으로 한 식민지시대 일본인들의 조선 고적조사 활동에 대한 증언 채록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날 사이토 씨 강연회는 비록 부여 군수리 절터 유적  발굴조사와 관련한 특정 주제에 한정되기는 했으나 한국고고학사 자료  채록이라는  측면에서도 귀중한 자리로 평가된다.

    조선총독부박물관 산하 '조선고적연구회' 소속이었다는 그는  경주에서  지금도 한국고고학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조사로 꼽고 있는 황오리 1호분을 필두로 하는  신라고분 발굴에 주력하던 중 1935년과 36년 2년에 걸쳐 백제 고도인 부여 지역  출장을 명받게 된다.

    "당시 부여에는 '부여고적보존회'라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회원들은 지역  고적 보존에 매우 열성적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이곳 회원들이 군수리라는 곳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백제 기와가 출토되는가 하면 건물 초석  등이  노출돼 있었던 것이지요."

    이곳이 바로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가 70년만에 재발굴 조사를 벌이고 있는  군수리 절터. 이 유적은 남쪽 정림사 터 석탑을 서쪽 방향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 때나 지금이나 소나무 숲이 자리 잡고 있다. 

    사이토 씨에 의하면 군수리 일대 발굴조사는 35년과 36년 가을에 불과 20일  정도씩만 진행됐다. 1차로는 35년 9월25일부터 10월11일까지 북쪽 기단(탑이 있던  자리)과 중앙 기단(금당 터)을 조사했다. 이듬해 9월14일부터 10월14일까지 2차  조사에서도 전면 조사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군데군데 부분적인 조사를 하는데 그쳤다.

    "조사주임은 이시다 모사쿠(石田茂作) 박사셨죠. 당시  도쿄박물관에  근무하고 계셨는데 불교고고학 전문가로서 '아스카 시대 (일본의) 절터 연구'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나라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하셨죠. 1차 조사 당시 이시다 선생은 41세였고 저는 겨우 27세 였습니다."

    자신이 발굴한 이 군수리 절터가 70년만에 재조사에 착수한 현장을 돌아본 사이토 씨는 "그 사이에 서너 번 군수리 절터를 찾았으나 (발굴현장을 본 오늘은)  감개무량하기 그지없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그는 당시 조사를 이렇게 회상했다.

    "70년 전 발굴조사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곳이 절터인 줄도 몰랐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이곳에 절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지요. 하지만 금당 터와  탑 터를 확인함으로써 절터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한편 지금은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된 금동보살입상(330호)과 납석제불좌상(329호) 2점을 확인하는 개가를 올렸습니다." 

    당시 발굴조사에 대해서는 "각도를 재기 위한 측량기계나 흙을  운반하기  위한 컨베이어 같은 것이 없이 사람들의 손과 발이 거의 전부였다"면서 "사진도 삼각대에 고정해 사용하는 큰 카메라로 유리 원판을 한 장 한 장 넣어서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1936년에 시도된 2차 조사에서 두 보물 발굴과 관련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한 듯했다.

    "(절터) 중앙에 한 변이 약 2m 정도인 방형 뻘흙을 발견했습니다. 주변 흙과 달랐지요. 그래서 이 뻘흙을 처음에는 꽃삽으로 퍼 올리고 나중에는 손으로 퍼 올리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제 손끝에 걸렸던 것입니다."

    군수리 절터 재조사와 관련, 사이토 씨는 "옛날에 제가 관여한 발굴조사는 참고 정도만 하면 될 것"이라면서도 "그 때 부분 조사만 했으므로 오늘날과 같은  재조사가 가능했다고 생각하며, 후세를 위한 조사 구역을 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는 견해를 덧붙이기도 했다.

    군수리 절터를 통해 부여 및 백제 유적과 인연을 맺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경주, 신라와 관련되는 추억이 많은 듯했다. 경주 얘기를 꺼냈더니 금방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으며 통역자가 말을 끊기기 민망할 정도로 많은 추억담을 털어놓았다.

    "경주 생활에서 제가 가장 보람을 느낀 일 중 하나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석불들을 박물관으로 모은 것입니다. 경주역에 석불 하나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것을 발견하고는 역장과 싸워서 박물관에 옮겨 놓은 일도 있습니다."

    한 사찰 정원에서 새 그림이 도안된 돌판을 수집한 일도 회상했다.

    "경주 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윗도리를 벗고서 경주를 돌아다니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마침 나이  지긋한 분을 만나 길을 여쭈었더니,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윗사람에게 물을 때는  웃옷을 걸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 이후 저는 손님을 접대하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정장을 합니다."

    100세를 바라보는 그는 1930년대 조선총독부박물관 산하 지방박물관 중  경주박물관 관장이기도 했다. 그 때가 언제였느냐는 질문에 처음에는  1938년  무렵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1934년 무렵이라고 했다. 아무리 정정해도 나이와 기억력은 반비례함이 분명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白壽 맞은 마지막 '조선총독부박물관장'> (2006.11.08 11:49:43) 
만99세 아리미쓰 교이치 기념논문 헌정

    (교토=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조선의 식민지배 기구 중 하나인 조선총독부 직제에서 박물관장이란 직함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일제 패망 당시를 기준으로 관장직은 '노무국 사회교육과 고적계 주임ㆍ조선총독부박물관 주임'이 수행했다. 이 주임을 통상 우리는 '조선총독부박물관장'이라 부른다. 
    1941년, 쇼와(昭和) 16년 6월에 취임한 마지막 총독부박물관장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는 21세기에 접어든 지금도 생존해 있다.
    한국이 일제 식민지배에 공식 편입된 1910년보다도 3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 1907년 11월10일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縣) 도요라군(豊浦郡) 조후촌(長府村) 335번지에서 아리미쓰 이치(有光一)-구메에 부부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가 백수(白壽)를 맞았다. 내년이면 정확히 1세기를 채우는 백수(百壽)가 되지만, 百(100)에서 한 살 모자란다는 뜻에서 '一'이란 글자를 뺀 백수(白壽)를 쓴다.
    그의 백수를 기념하는 조촐한 행사가 5일 그의 현재 주거지인 교토(京都)의 동북쪽 교외 다카라가이케의 프린스호텔에서 그의 가족과 지인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자리에 한국에서는 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장과 김리나 홍익대 교수, 유병하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등이 참석해 백수를 축하했다. 김리나 교수는 부친인 김재원 박사(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가 워낙 아리미쓰와 깊은 친분을 쌓은 인연이 있다.    
    일본측에서는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郞) 오사카대학 명예교수, 아키야마 신고(秋山進午) 오테마에(大手前)대학 교수, 니시타니 다다시(西谷正) 규슈대 명예교수, 가나세키 히로시(金關恕) 오사카부립야요이문화박물관장, 곤도 교이치(近藤喬一) 야마구치(山口)대학 교수 등의 학계 인사가 자리를 빛냈다.
    이난영 전 관장은 축사에서 "성수대교 붕괴 때 아리미쓰 선생이 나한테 전화를 해서 '우리도 (도쿄) 올림픽 개최 이전에는 그런 일이 있었다'고 위로하신 기억이 새롭다"면서 "많은 한국인이 성수대교 붕괴에 무덤덤했지만 정작 선생은 이런 일에까지 세심한 배려를 해 주셨다"고 회고했다.
    일본 근대 고고학의 거물이자 식민지 조선 고고학에도 깊이 관여한 우메하라 스에이지(梅原末治. 1893-1983)의 조카는 "삼촌(우메하라)은 성질이 너무 고약해 나는 죽어도 고고학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나 아리미쓰 선생을 만나 그의 훌륭한 인품에 감화되어 결국 고고학을 택하게 되었다"는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나오키 교수는 "한국에서 저렇게 (백수를 축하하러) 손님이 많이 오는 것을 보면 (아리미쓰 선생이)    한국에 가면 더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날 행사의 주인공인 아리미쓰는 최근 몇 년간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고 알려져 있었다.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낸 아리미쓰는 역시 1세기에 달하는 나이의 무게를 견디기가 못내 버거운 듯했으나, 소문보다는 더 정정한 인상을 주었다.
    축하에 화답하기 위해 아리미쓰는 교토의 고려미술관 유물 2점에 얽힌 인물과 관련한 일화를 슬라이드 상영을 섞어가며 소개하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에 의하면 조문경(粗文鏡)은 우메하라, 향완(香碗)은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와 각각 깊은 관계가 있다. 두 사람 중 후지다는 아리미쓰의 대학원 지도교수였으며, 우메하라는 조선총독부 시절 상관이자, 일제 패전 뒤에는 교토대학 동료교수이기도 했다.
    백수기념식에서는 '아리미쓰 교이치 선생 백수 기념논총'이 헌정됐다. 이 논총에는 한국고고학과 관련한 논문 23편이 투고됐다. 발행은 교토 소재 한국 고고미술품 전문박물관인 고려미술관. 아리미쓰는 1989년 11월 이후 현재까지 고려미술관연구소장이란 직책을 맡고 있다.
    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기념논총에는 으레 주인공의 스승이나 선배가 축사를 쓰지만, 아리미쓰는 그런 축사를 해 줄 만한 사람들은 모두 고인이 됐다. 대신 축사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는 한일고대사가이자 현재 고려미술관장인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79) 씨가 서문을 쓰는 것으로 갈음했다.
    수록 논문은 아리미쓰의 주된 전공인 한국고고학과 관련한 주제로 한정했으며 필자 또한 한국과 일본 연구자를 절반 가량씩 배치했다. 한국에서는 김정기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이건무 전 국립박물관장, 김리나 교수 등이 논문을 올렸다.
    일본측 고고학 연구자인 히구치 다카야스(桶口隆康) 일본 나라현립(奈良縣立.88) 가시하라고고연구소장은 1942년 그 자신이 직접 참여한 평양의 낙랑고분인 석암리 293호분 발굴조사에 관한 논고를 발굴 일화와 곁들여 소개했다.  
    아리미쓰보다 한 살 적어 내년에 백수를 맞게 되는 사이토 다타시(齋藤忠) 다이쇼대학 명예교수는 식민통치시대 그 자신이 직접 조사한 경주 신라 봉덕사종(성덕대왕신종)의 실측도를 기념논총집을 통해 공개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99세 일본 고고학자의 신라학 강의> (2006.12.07 17:57:08) 
사이토 다다시 경주서 강연 

    (경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저는 이 종의 소리를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를 귀중하게 지니고 있으며 매년 12월31일에는 제야의 종으로 이를 듣고 있습니다."
    1930년대에 경주박물관장을 역임한 일본 고고학자 사이토 다다시(齋藤忠) 다이쇼대학 명예교수. 우리 나이로 99세, 내년 백수(白壽)를 앞둔 이 고고학자는 지난해 국립부여박물관 초청 강의 때보다 외려 더 정정한 모습이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송의정)가 신라고분 발굴 1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7일 오후 국립경주박물관 강당에서 마련한 단독 강연회에서 시종 '신라사랑'의 열변을 토했다. 매년 제야에 녹음 소리를 듣는다고 그가 고백한 종이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봉덕사 성덕대왕신종을 말한다. 
    그는 불과 1달 전에는 그보다 1살이 많은 조선총독부박물관 마지막 관장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씨의 '백수기념논총집'에 '경주 신라 봉덕사종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투고하기도 했다.  
    지난해 부여 강연이 군수리 절터를 필두로 그 자신과 부여 고적 발굴조사에 얽힌 일화에 집중됐다면, 성덕대왕신종에 관한 강의가 보여주듯이 이날 강연은 자연 신라, 특히 경주와의 인연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사이토가 경주박물관에 부임한 것은 1934년 5월이었다. 경주 생활에서 그는 "박물관 일도 하고 고분 발굴도 하면서 신라문화 연구를 계속해 왔다"면서 "그 때 경주는 아직 작은 마을이라 길을 가는 아이들도 바로 제 얼굴을 기억해 주었고 저를 보면 '박사'라고 말을 걸어준 것도 그리운 추억이다"라고 회고했다.
    1908년 8월28일 생인 그는 1928년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해 32년 졸업한 다음 1933년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조수를 거쳐 이듬해 조선에 건너와 각종 고적조사, 즉 고고학 발굴에 투신하기 시작했다. 도쿄대에 '신라문화의 고고학적 연구'라는 제목으로 제출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개인 소회를 많이 곁들인 이날 강연회에서 이 노학자는 신라문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강조했다. 예컨대 신라 신덕왕릉으로 알려진 경주 남산 삼릉 중 고분 1기와 관련, "1935년 도굴범이 내부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현장으로 급히 달려가, 내부로 들어가서는 곧바로 도면을 작성한 일이 있다"면서 "이 무덤 안 입구 근처에 일종의 동물그림이 있음을 확인했고 이를 도면에 기입하기도 했으며, 이것이 혹시 백호(白虎)의 일부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신라왕경의 도시구획에서는 바둑판처럼 일정구역을 구분하는 소위 '조방제'(條坊制)가 실시되었다는 종래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일제시기에 600분의 1로 작성된 경주 시내 지적도를 활용한 결과 한 구간은 동서 84칸(약 152m), 남북 78칸(약 141m)이 기준이었음을 알아냈다고 회고했다. 
    이런 추정은 1990년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한 황룡사지 인근 신라왕경 유적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한 구역 크기, 즉, 동서-남북 각각 142m라는 수치와 거의 합치된다.
    석굴암에 대해서는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문화유산"이라고 평가하면서, 중국의 용문석굴을 그 원류로 지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경주박물관 소장 수렵 무늬 전돌 출처에 대해 사이토는 "1934년 (경주) 사정동 어린이박물관에서 가져온 것"이며, 같은 기관 소장 쌍조문(雙鳥文) 전돌은 같은 해 그가 "남산의 불교유적을 조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언양가도를 지나 들른 본원사라고 하는 절 경내에서 발견해 입수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이토는 임신서기석을 인용하면서 "경주의 산이여, 사람들이여, 그 조상들이 키운 신라문화의 자존심을 지니고 언제까지나 영광이 빛나도록 저는 빌어마지 않습니다"는 말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2013.08.05 09:52:18 

1930년대 경주박물관장 사이토 다다시 별세

    (서울=연합뉴스) 신창용 기자 = 1930년대에 경주박물관장을 지낸 일본 고고학자 사이토 다다시(齋藤忠) 다이쇼대학 명예교수가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5일 교도통신에 따르면 일본 근대 고고학의 산 역사이자 손꼽히는 지한파 학자였던 다다시 교수가 지난달 21일 별세했다. 향년 105세.
    1908년 일본 미야기(宮城)현 센다이(仙台)시에서 태어난 고인은 1932년 도쿄제국대학(현 도쿄대)을 졸업한 뒤 1933년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조수를 거쳐 이듬해 조선에 건너와 고고학 발굴에 투신했다.
    고인은 1940년 일본으로 귀국하기까지 약 6년 동안 조선에서 유적 발굴에 집중했다. 1935-1936년 충남 부여 군수리 옛 절터에서 '백제인의 얼굴'로 불리는 납석제불좌상(보물 329호)과 금동보살입상(보물 330호)을 발굴한 주역이었다.
    도쿄대에 '신라문화의 고고학적 연구'라는 제목으로 제출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고인은 문화재보호위원회 주임조사관 등을 거쳐 도쿄대 교수, 다이쇼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일본 고고학 용어사전', '일본 고고학사 연표', '일본 고고학 문헌총람' 등을 펴내 일본 고고학 연구의 체계화에 힘을 기울였다.
    고인은 이른바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리는 봉덕사 성덕대왕신종의 소리를 녹음해 매년 제야에 듣는다고 할 정도로 한국 사랑이 각별했다.
    '세계의 박물관 탐방'의 저자이기도 한 고인은 평양을 두 차례 방문하고 쓴 '북조선 고고학의 신발견'(1996년)에서 북한의 조선중앙력사박물관과 조선미술박물관에 대해 언급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95세 때인 2003년 2월에는 불교국가 중에서도 오직 우리나라에만 있는 당간지주(幢竿支柱)를 전문적으로 파고든 '당간지주의 연구'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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