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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내리’ 남자 셋 들이고도 임신 못한 선덕여왕

[중앙선데이] 입력 2016.09.18 00:46 | 497호 23면 

  

“신이 듣기에 옛날에 여와씨(女媧氏)가 있었으나, 그는 진짜 천자가 아니라 (남편인) 복희(伏羲)가 구주(九州)를 다스리는 일을 도왔을 뿐입니다. 여치(呂治)와 무조(武?) 같은 이는 어리고 약한 임금을 만났기에 조정에 임해 천자의 명령을 빌린 데 지나지 않아, 사서에서는 공공연히 임금이라 일컫지는 못하고 다만 고황후(高皇后) 여씨(呂氏)라든가 즉천황후(則天皇后) 무씨(武氏)라고만 적었습니다. 하늘로 말한다면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부드러우며, 사람으로 말한다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법이니, 어찌 늙은 할망구(??)가 규방을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하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신라는 여자를 추대하여 왕위에 앉히니 이는 실로 난세(亂世)에나 있을 법한 일이라, 그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에 먼저 울면 집안이 망한다(牝鷄之晨)’고 하고, 『주역(周易)』에는 ‘암퇘지가 두리번두리번 거린다’고 했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국사 최초의 여주(女主)인 신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재위 16년째인 647년 봄 정월 8일에 죽은 사실을 『삼국사기』가 적으면서 그 편찬 총책임자인 김부식이 덧붙인 역사평론인 사론(史論) 전문이다. 아주 혹독한 평가다. 한데 같은 『삼국사기』 선덕왕본기에는 원래 이름이 덕만(德曼)인 그가 아버지 진평(眞平)을 이어 즉위한 사실을 전하면서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니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고 해서 이율배반의 평가를 한다. 성조황고는 그 의미가 확연하지는 않지만, 요컨대 성스러운 덕성을 지닌 후덕한 어머니 혹은 할머니 같은 존재 정도를 의미한다.

  

여자가 군주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불만은 당시 신라 내부에서도 팽배했던 듯하다. 국제사회에서 빈축을 사기도 했던 모양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선덕이 여자라 해서, 당 황실에서 배필을 골라줄 테니 정치는 그 남자한테 맡기라 빈정대기도 했다. 선덕이 죽음을 앞두자 왕위 계승권이 없는 이들이 왕좌 탈취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니, 이해 봄 정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상대등(上大等) 직위에 있던 비담(毗曇)이 염종(廉宗)과 함께 일으킨 내란이 그것이다. 비담이 내세운 논리가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였다. 아마도 비담은 선덕이 곧 죽을 것이 확실한 와중에 그 후임을 같은 여자인 진덕(眞德)으로 확정하자 다시 여자가 임금이 돼선 안 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권좌를 탈취하고자 했던 듯하다. 

  

비담 “여왕은 나라 못 다스려” 난 일으켜하지만 혹평과는 달리 선덕은 매우 똑똑한 여자였던 듯하다. 즉위 당시 나이가 얼마인지 알 수는 없지만, 중년을 넘어선 것만은 확실하다. 김부식 사론에선 그를 ‘늙은 할망구(??)’라 했고, 그가 즉위하자 신라사람들이 ‘성조황고(聖祖皇姑)’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선덕은 노련하면서도 덕을 갖춘 정치인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선덕의 총명함을 말해주는 일화가 나란히 등재돼 있다. 특히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 수록된 이야기는 아예 제목부터가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다시 말해 선덕왕이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일이다. 두 가지는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女根谷)이라는 곳으로 백제군이 몰래 침습한 걸 알아내 그들을 몰살하고,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았다는 것이다. 선덕왕이 예지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나머지 하나가 모란 사건이다. 먼저 『삼국사기』 선덕왕본기 첫 대목에 수록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앞선 왕(진평왕-인용자) 때 당나라에서 가져온 모란꽃 그림과 그 꽃씨를 덕만에게 보이니, 덕만이 말하기를 ‘이 꽃이 비록 지극히 요염하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고 했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는 까닭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에게 국색(國色)이 있으면 남자들이 따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 꽃은 무척 아름다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향기가 없는 꽃임에 틀림없습니다’고 했다. 그것을 심었더니 과연 말한 바와 같았으니 미리 알아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이는 선덕이 진평왕의 공주이던 시절의 일화로 보인다. 『삼국유사』의 ‘선덕왕 지기삼사’엔 이렇게 적혀있다.

  

“당 태종이 모란을 세 가지 색깔, 즉 붉은색·자주색·흰색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 씨앗 석 되를 보내왔다. (선덕)왕이 꽃 그림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오’라고 했다. 이에 명하여 뜰에다 (그 씨를) 심게 했다가 그것이 피고 지기를 기다렸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중략) 이로써 대왕이 신령스럽고 신령함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뭇 신하가 왕께 아뢰기를 ‘어떻게 (모란) 꽃과 개구리 두 사건이 그렇게 될 것을 아셨습니까?’ 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꽃을 그렸으되 나비가 없으니 거기에 향기가 없음을 알았소. 이는 곧 당나라 황제가 과인에게 배필이 없음을 놀린 것이오.’ (중략) 이에 뭇 신하가 모두 그의 성스러운 지혜에 감복했다. (모란) 꽃 세 가지 색을 보낸 것은 아마도 신라에 세 여왕이 있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선덕·진덕(眞德)·진성(眞聖)이 그들이니 당나라 황제도 미래를 아는 명석함이 있었다.”

  

『삼국사기』와 비교해 몇 가지 미세한 차이점을 지적하면, 우선 이 사건이 발생한 때가 선덕이 왕으로 있던 시절이다. 또 『삼국유사』 쪽 기술이 훨씬 생생하며 문학적이다. 이런 차이는 참조한 원전이 각기 달랐을 가능성도 있지만 같은 원전을 참조하면서 이를 전재하는 과정에서 현재와 같은 차이가 빚어졌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건이 역사성을 반영한 것일까. 필자는 이 일이 선덕여왕 혹은 선덕공주 시대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한다. 그 근거는 이야기의 소재로 등장하는 모란 때문이다. 공주 시절이건, 여왕 시절이건 이 시대에는 모란이 등장할 수 없었다. 모란은 이보다 대략 100년 뒤에나 등장하기 때문이다. 당 태종이 모란 그림과 모란 씨를 보내왔다고 하는데, 이세민 시대에 중국에 모란은 없었다는 역사성의 차이를 어찌 증명할 것인가.

  

중국사에서 볼 때 당 제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모란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진평왕, 혹은 선덕여왕 시대보다 무려 100년이나 뒤인 서기 750년 무렵 이후다. 아무리 일러도 730년 이전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중국의 관련 기록을 모조리 검토하면 모란은 중국 대륙 북부 사막 지역에서 이 무렵에 들어왔으며, 더구나 그런 모란이 광적인 열풍을 일으킨 것은 800년 이후, 백거이가 이 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떠오른 무렵이다. 실제 중국 청나라 때 당나라 시인 2200여 명이 남긴 시 4만8900여 수를 묶은 방대한 시집 『전당시(全唐詩)』를 훑어봐도 당 현종 개원 연간(713~741) 이전에는 모란을 소재로 하는 시가 단 한 편도 등장하지 않는다. 모란이 그 무렵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각종 기록을 봐도 이 꽃은 개원 연간에 장안에 비로소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니 진평왕 시대에 당나라에서 신라에 모란씨나 모란 그림을 선물로 보낼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화랑세기』에 여왕 둘러싼 ‘삼서지제’ 소개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무엇을 모티브로 한 것일까. 이 점을 해명하기 위해선 이 이야기가 선덕왕(혹은 선덕공주)을 감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꽃이 피었는데 향기가 없고, 그래서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다거나 열매를 맺지 않았다는 것은 남자가 없거나, 남자가 있어도 자식, 특히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은유에 다름 아니다. 각기 다른 세 가지 색깔의 모란씨를 심었지만 향기가 없다는 것은 혹시 선덕왕에게 세 명의 남자가 있었지만 누구에게서도 자식을 두지 못했다는 뜻이 아닐까.

  

의문의 실마리는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라는 사람이 필사본 형태로 남긴 『화랑세기(花郞世紀)』에서 찾을 수 있다. 『화랑세기』는 우두머리 화랑을 역임한 역대 풍월주 32명에 대한 전기물이다. 13세 풍월주 용춘공(龍春公) 열전을 보면 다음 왕위를 이을 아들을 생산하지 못한 선덕여왕을 둘러싸고 벌어진 ‘삼서지제(三?之制)’라는 제도가 다음과 같이 흥미롭게 소개되고 있다.

  

“(선덕) 공주가 즉위하자 (용춘) 공을 지아비로 삼았지만 공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물러나고자 했다. 이에 뭇 신하가 삼서(三?)의 제도를 의논하여 흠반공(欽飯公)과 을제공(乙祭公)으로 하여금 왕을 보좌토록 했다. (용춘) 공은 본디 (아버지인) 금륜(金輪)이 색(色)에 빠져 폐위된 일을 슬퍼하여 성품이 색을 좋아하지 않아 왕에게 아첨할 생각이 없었기에 물러날 뜻이 더욱 굳어졌다. 선덕은 이에 정사를 을제에게 맡기고 공에게 물러나 살도록 했다. (물러난) 공은 천명공주(天明公主)를 처로 삼고는 태종(太宗·김춘추)을 아들로 삼았다.”

  

선덕왕은 아들을 두고자 용춘·흠반·을제 세 명의 남자를 잠자리로 불러들였으나, 모두 임신에 실패했다. ‘삼서지제’는 여자가 적통 아들을 두기 위해 남자를 세 명까지 불러들이는 제도였던 것이다. 이들은 정식 남편이 아니라 씨내리 남자들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이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해서 나중에 모란 이야기로 둔갑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백제 멸망, 김춘추 사위의 치정이 부른 복수극

[중앙선데이] 입력 2016.08.21 00:46 | 493호 23면

  

백제는 660년 음력 가을 7월 18일, 사비성(泗?城)에서 북쪽 웅진성(熊津城)으로 도망친 의자왕이 나당(羅唐)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700년 사직에 종언을 고했다. 이때 일은 『삼국사기』 신라 태종무열왕본기 7년(660)조에 자세하게 나와있다. 이에 의하면 의자왕은 이달 13일 포위망을 뚫고서 가까운 신하들만 데리고 야음을 타 웅진성으로 들어갔다. 현지에 남은 의자왕의 아들 융(隆)은 대좌평 천복(千福) 등과 함께 나와 항복했다. 그리고 닷새가 지난 18일, 의자왕마저 태자를 데리고 웅진성을 나와 항복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같은 달) 29일 금돌성(今突城)에서 소부리성(所夫里城)에 도착해 제감 천복(天福)을 당에 보내 싸움에서 이겼음을 보고했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금돌성은 지금의 경북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에 있었고, 소부리성은 백제 마지막 수도로 지금의 충남 부여에 있던 사비성을 말한다.

  

그에 앞서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 치욕의 현장을 태종무열왕 본기는 이렇게 적었다.

  

“법민(法敏)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는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기를 ‘예전에 네 아비가 억울하게 내 누이를 죽여 옥중(獄中)에 파묻은 일이 나를 20년 동안 마음이 고통스럽고 머리가 아프도록 하더니, 오늘에야 네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게 되었구나’라고 하니, 융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김법민, 항복하는 부여융에게 침 뱉어우리는 백제 개로왕에게 앙심을 품고 고구려로 도망가서 나중에는 그 침략군 앞잡이가 되어 나타난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萬年)이라는 두 사람이 개로왕을 사로잡고는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임금 얼굴을 향해 침을 세 번 뱉고는”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인 장면을 기억한다. 실상 그와 똑같은 치욕을 훗날의 문무왕이 되는 신라 태자 김법민은 백제 왕자 부여융(夫餘隆)에게 가한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개로왕을 모욕한 이들은 말에서나 내렸지, 김법민은 말 위에 그대로 걸터앉은 채 침을 뱉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20년 전 ‘네 아비가 내 누이를 죽인 일’이란 무얼 말하는가.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 백제 의자왕 2년(642)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난 대야성 전투를 마주한다.

  

이 무렵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양국의 협공에 내내 시달리는 중이었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몰아치고, 백제는 신라 서쪽 변경을 들이쳤다. 이해만 해도 7월에 의자왕이 병사를 크게 일으켜 미후(??)를 비롯한 신라 서쪽 변경 40여개 성을 빼앗았는가 하면, 그 다음 달에는 백제가 다시 고구려와 합세해 신라가 당과 교유하는 서해안 창구인 당항성(?項城)을 침범해 당과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한 일도 있었다. 이 와중에 저 유명한 대야성 전투가 있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신라는 치열한 공방 끝에 대야성을 내준 것은 물론 이곳을 지키던 성주(城主) 품석(品釋) 부부가 죽임을 당하고, 남녀 1000명이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 대목을 『삼국사기』 백제 의자왕 본기는 이렇게 전한다.

  

“8월에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 대야성을 치니 성주인 품석이 처자식을 데리고 나와 항복했다.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품석은 목을 베어 그들의 서울로 보냈다. 남녀 1000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 지방 주(州)와 현(縣)에다가 나누어 살게 하고는 병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했다. 임금이 윤충이 공로가 있다 해서 말 20필과 곡식 1000섬을 주었다.”

  

더 상세한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와 있다. 당시 대야성을 지키던 품석 외에도 그를 보좌한 사지(舍知) 죽죽(竹竹)과 용석(龍石) 등이 함께 죽었다. 사지란 17등급으로 나뉜 신라 관위(官位)의 제10번째 명칭이다. 죽죽의 용맹함을 『삼국사기』는 별도로 그의 열전을 세워 표창했다. 한데 이 대야성 전투의 패배가 김춘추에게 준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던 듯 싶다. 한국사의 흐름을 바꿔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명장면이 여기 펼쳐진다.

  

“(대야성 전투에서 패배한 그해) 겨울, 임금이 장차 백제를 정벌하여 대야성 패배를 보복하고자 이찬(伊飡)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대를 청하고자 했다. 그에 앞서 대야성이 패배했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그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는 딸의 죽음을 듣고는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자기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김춘추의 딸이자 품석의 부인은 누구인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으로 가보자.

  

“선덕대왕 11년 임인(642)에 백제가 대량주(大梁州)를 격파했을 때 춘추공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남편 품석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한스럽게 여겨 고구려에 청병함으로써 백제의 원한을 갚으려 하자 왕이 허락했다.” 

  

딸 죽음 듣고 하루종일 기둥에 기대 슬퍼해그는 다름아닌 고타소였다. 고타소는 김춘추의 딸이지만 그의 생모가 누군지는 베일에 가려있었다. 고타소 역시 김법민·인문 형제나 마찬가지로 김유신의 동생 문희(文姬) 소생 정도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고타소의 생모가 문희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타소가 만약 문희의 소생이라면 오빠 김법민(626년생)보다 늦게 태어났다는 얘기가 된다. 그 이듬해에 태어났다 손치더라도 대야성에서 죽을 때 고타소는 기껏해야 만 15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고타소가 많아봐야 죽을 때 15세라는 뜻이며, 그보다 더 어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그가 김품석과 혼인해 대야성을 지키는 성주의 부인이 돼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고타소는 문희의 딸이 아니었다는 얘기가 된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김춘추의 딸 고타소는 문희의 소생이 아닌 정실부인과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대목을 예리하게 간파한 것이 『화랑세기』다. 춘추공(春秋公) 열전에는 문희와의 결혼을 미적댈 당시 김춘추에게는 보량(寶良)이라는 아름답기 짝이 없는 부인이 있어 그와의 사이에는 고타소라는 딸이 있었다고 전한다. 20년 뒤, 더 정확히는 그로부터 18년 뒤에 김춘추의 아들이자 태자인 김법민이 백제를 멸하면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붙잡아 말 아래 꿇게 하고는 침까지 뱉은 이유를 비로소 헤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김법민에게 고타소는 이복 누이였지만, 고타소의 죽음으로 인한 아버지의 고통을 지켜보았기에 이리 행동했으리라.

  

대야성 전투 패배가 김춘추에게 안긴 ‘내상(內傷)’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다른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죽죽 열전에 의하면 대야주 현지 출신인 죽죽은 선덕여왕 때 사지(舍知)가 돼 대야성 도독 김품석 휘하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642년 가을 백제군에 대야성이 함몰할 때 죽는다. 한데 이 열전을 보면 대야성 함락을 부른 장본인은 다름 아닌 김품석임을 알 수 있다.

  

내막은 이렇다. 품석이 거느린 막객(幕客)으로 역시 사지(舍知)인 검일(黔日)이란 사람이 있었다. 품석은 검일의 아내의 빼어난 미모에 반해 그만 아내를 빼앗아버렸다. 이를 갈던 검일은 마침 윤충이 거느린 백제군이 대야성을 공격해 들어오자 적과 내응해 창고를 불태우며 성안을 혼란에 빠뜨린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품석은 고타소와 아이들을 죽이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이후 죽죽은 용석과 함께 마지막까지 대야성을 지키며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포로가 된 의자왕에게 술 따르게 해 이 전투에서 검일 이외에도 백제와 내응한 자가 있었는데, 바로 모척(毛尺)이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본기 7년(660) 조에 의하면, 백제를 멸한 직후인 그해 8월 2일, 김춘추는 주연을 크게 베풀어 나당 참전 용사들을 위로했다. 이때 김춘추는 당나라 사령관인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단상에 앉고 포로가 된 의자왕과 그 아들 부여융은 그 아래 앉히고는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게 하니 이를 지켜보던 다른 백제 신하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얼마나 비참한 장면인가.

  

한데 김춘추는 모척을 붙잡아 목을 베게 했다. 나아가 검일도 잡아다가 문초하기를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해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 질러 없앰으로써 온 성 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해서 싸움에 지도록 했으니 그 죄가 하나요, 품석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요, 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했으니 그것이 세 번째 죄다”라고 하면서 사지를 찢어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고 한다. 아내를 빼앗긴 검일은 모척과 함께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군과 내응해 성이 함락되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뒤 백제로 들어가 호의호식하다가 18년 뒤에 백제가 함락될 때 붙잡혀 능지처참을 당한 것이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했던가. 김춘추는 사랑하는 딸을 백제에 잃은 복수심에 불타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는 굳은 다짐을 한다. 돌이켜 보면 다름 아닌 사위가 빌미를 준 셈이지만 김춘추에겐 그보다 복수가 더 중요했다. 복수심에 불타 숙적 백제를 멸한 신라는 이어 고구려까지 멸함으로써 일통삼한(一統三韓)을 달성했다. 한국사의 획을 가른 위대한 역사가 치정(痴情)이 부른 복수극의 결말이었다는 건 아이러니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ts14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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