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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영국사 은행나무>

지금의 서울 성균관대학교는 그 이름을 성균관에서 따왔다. 그런 까닭에 그 역사 전통 또한 조선시대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에서 구하기도 하거니와, 하지만 이는 역사를 늘리기 위한 엿가락 조작의 결과이니, 이런 논리대로라면, 그런 국립대학이 모름지기 조선시대이겠는가? 고려시대에도 그런 학교가 있었고, 신라시대에도 그 원조로써 국학(國學)이 있었으며, 그것을 더욱 거슬러가면 고구려 소수림왕 때 국학으로 역시 뿌리를 구할 수 있거니와, 하지만 뿐이랴? 그 뿌리 역시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으로 쳐들어가니, 성균관은 공자를 시조로 삼거니와, 공자학단 그 자체가 곧 성균관인 셈이다. 

지금은 삼성그룹으로 재단이 넘어간 성균관대학은 그 직접 뿌리가 해방 직후인 1946년에 있으니, 이때 저명한 유학자 출신 꼬장꼬장한 독립운동가 문존 김창숙(金昌淑·1879∼1962)이 주도한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에서 역사를 시작한다. 이런 까닭에 건학 이념 역시 유교가 내세우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거니와, 마침 그 캠퍼스 위치 역시 조선시대 문묘와 성균관이 있던 곳이다. 지금도 이 대학 정문에는 문묘가 있으니, 문묘(文廟)란 문성공을 모신 사당과 학교를 말함이니, 문성공이란 곧 공자를 말한다. 이는 모든 불교사찰이 석가모니 싯타르타를 교주로 삼고, 모든 교회 성당이 예수를 근원으로 삼는 이치랑 같다. 

공자를 교주로 삼은 조선시대 모든 학교는 교육기관이라는 기능과 더불어 그것을 있게한 뿌리로서의 공자를 기리는 사당을 항상 갖추게 되거니와, 공자를 필두로 하는 유교의 성인들 신주를 받들어 모시고는 때마다 제향을 거행하는 공간을 대성전(大成殿)이라 하거니와, 이것이 불교 사찰에서는 석가모니를 봉안한 대웅전(大雄殿)에 해당한다. 대성大成이란 글자 그대로는 크게 이룬 사람이니, 이것이불교로 가면 대각大覺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달성 도동서원 은행나무>

공자를 시조로 삼는 학교로 같은 국립대학으로 서울에 있는 대성전 말고도, 지방 주요 거점 도시에는 모름지기 있는 공립학교로 향교(鄕校)가 있고, 이런 국공립에 대비되어 사립학교로 서원이 있다. 항교 역시 그 운영주체만 중앙정부에 대비한 지방정부라는 점만 달라 실은 일란성쌍둥이를 방불하거니와, 그런 까닭에 향교에도 반드시 대성전이 있기 마련이다. 

서원은 공자의 가르침을 봉행하는 학교 겸 사당이라는 점에서는 하등 이들 국공립대학과 다른 점이 없으나, 그래도 결정적으로 갈 길을 달리하는 대목이 공자 대신 그 재단 이사장 혹은 창업주로써 그것을 있게 한 다른 성현들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퇴계 이황이 개창한 사립학교에서 역사를 시작하는 안동 도산서원은 당연히 그 제향 공간에 퇴계를 모시며, 율곡 이이가 일으킨 파주 자인서원은 당연히 율곡을 제향한다. 

성균관이건 향교건, 그리고 서원이건 이들 시설에는 모름지기 그 앞마당 같은 데서 은행나무 노거수老巨樹를 발견할 수 있거니와, 이들 중에서도 특히 역사가 오래된 것들은 상당수가 국가지정문화재 중 하나인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이들 유학의 교육시설 겸 제단에는 모름지기 은행나무가 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공자의 가르침을 베푸는 전당을 행단(杏壇)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행단이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는 은행나무가 우거진 단상이라는 뜻이다. 실제 공자가 은행나무 그늘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쳤는지는 《논어》나 《맹자》, 《순자》 혹은 《예기》와 같은 소위 유가 문헌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다. 다소 뜻밖에도 공자가 제자들을 행단에서 교육했다는 뿌리는 유가와는 시종일관 사생결단식 패권 쟁투를 벌인 도가계 문헌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장자》에 있다. 

이 《장자莊子》 현존본은 내편과 외편, 그리고 잡편(雜篇)의 3부로 구성되거니와, 이는 위진남북조시대 저명한 도가 사상가인 곽상이라는 사람이 그때까지 전해지던 다양한 《장자》 판본들을 결집하면서 갖춘 모습이거니와, 그 전 시대 《장자》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이 시점에서 하나 확실한 점은 지금의 3부 체계는 곽상이라는 사람이 손댄 결과라는 사실이다.

이 3부작 중 마지막 잡편에 어부(漁父)라는 타이틀을 단 우화 모음집이 있다. 다음은 개중 한 대목과 그에 대한 옮김이다.  

孔子遊乎緇帷之林, 司馬云:“黑林名也.” 休坐乎杏壇之上. 司馬云:“澤中高處也.” 弟子讀書, 孔子絃歌鼓琴, 奏曲未半. 有漁父者下船而來, 須眉交白, 被髮揄袂, 行原以上, 距陸而止, 左手據膝, 右手持頤以聽.

공자가 치유지림(緇帷之林·司馬가 이르기를 “흑림黑林의 이름이다”고 했다)에서 노닐다가 행단(杏壇·司馬가 이르기를 “연못 가운데 높은 곳이다”고 했다) 위에서 앉아 쉬고 있는데, 제자들은 독서하고 공자는 노래를 부르면서 거문고를 탔다. 연주하는 곡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부(漁父)가 배에서 내려 다가오는데, 구레나룻과 눈썹이 모두 하얕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소매를 휘젓고는 언덕(늪지대)을 걸어올라 뭍에 이르러 멈춰서는 왼손을 무릎 위에 얹고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대목 몇 구절을 주석한다. 

치유림(緇帷之林) : 치유(緇惟)와 같다. 결국 치유림이란 숲이 휘장처럼 펼쳐져 어두운 곳을 말한다. 成玄英은 “숲이 울창하여 해를 가려 음침하고 잎사귀가 펼쳐지고 가지가 드리워져 마치 휘장과 같기 때문에 緇帷之林이라 했다”고 했다. 陸德明은 惟에 대하여 “어떤 판본에는 帷로 되어 있다”(本或作帷)라고 했다. 惟와 帷는 가차로 보는 편이 좋다.

행단(杏壇) :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공자 후손에 그곳에 단(壇)을 만들어 杏을 심고 비석을 세웠다는 견해가 있는데 뒤에는 학문을 가리치는 곳의 범칭이 되었다. 또 도사가 수련하는 곳을 행단이라고도 한다.

수미교백(須眉交白) : 판본에 따라 鬚로 된 곳도 있다. 구레나룻을 말한다. 交는 皎를 말하니 결국 희다는 뜻이다. 판본에 따라 이렇게 표기하기도 한다.

피발유몌(被髮揄袂) : 揄(유)란 끌다, 휘두르다, 휘젓다는 뜻이다.

행원이상 거륙이지(行原以上, 距陸而止) : 《이아爾雅》·〈석지(釋地)〉에 이르기를 “넓고 평평한 곳을 원(原)이라 하고, 높고 편평한 곳을 륙(陸)이라 한다”(廣平曰原, 高平曰陸)고 했다. 이로 보아 原보다 陸이 높은 곳으로 인식됐다. 강가에 올랐다가 더 높은 언덕에 오른 것으로 봐야 한다. 距를 ‘至’로 풀이한다. 

공자의 가르침을 전수한다는 전당에다가 은행나무를 심은 뿌리는 바로 이 구절에 있다. 한데 그의 전당을 행단이라 했지만, 杏이 은행나무인가 아니면 살구나무인가는 두고두고 논란이 된다. 杏은 은행나무라는 뜻과 더불어 살구나무를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에서 빚어진 막대한 논란은 추후 별도로 정리하고자 한다. 




영동 영국사 은행나무


공자를 추숭하는 유교 학교를 흔히 행단(杏壇)이라 하거니와, 이는 공자가 제자들을 杏나무 아래서 교육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래서 이런 공자학교 마당에는 杏나무를 심는 일이 많아, 우리네 서원이나 향교 같은 마당에서 오래된 은행나무를 만나는 이유가 바로 이에서 말미암는다. 

한데 杏이라는 글자는 언제나 논쟁을 유발했으니, 다름 아니라 은행나무라는 뜻도 있고, 아울러 살구나무를 의미하기도 한 까닭이다. 그래서 은행나무를 심을 것인가? 아니면 살구나무를 심을 것인가 하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공자의 고향 중국 산동성 곡부 문묘에는 살구나무가 있다. 

조선에서는 은행나무가 압도적으로 많다. 한데 은행나무는 결정적인 하자가 있어, 가을철 꼬랑내가 문제였다. 지금도 가로수로 애용하는 은행나무는 이 꼬랑내 문제가 심각해, 숫나무를 심는 일이 많다. 조선 사람들이라고 그들이 별나서 은행 열매 꼬랑내가 좋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들도 역시 그 냄새가 참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18141888)임하필기(林下筆記)13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태학(太學)의 은행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다(太學銀杏樹不實)’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일화다.

옛날 사람들이 행단(杏壇) 제도를 모방해 문묘(文廟) 앞에 두 그루 은행나무를 마주하여 심었는데, 그 열매가 땅에 떨어지면 냄새가 나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떤 반관(泮官 성균관 관원)이 나무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 후로 다시는 나무에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이를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 홍승균 () | 1999) 

그러고 보니, 현재의 성균관 마당에 거대하게 자라는 은행나무가 열매를 맺는지 아닌지 내가 확인하지 못했다. 혹, 그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알려주었으면 한다. 

덧붙임) 주변 지인 몇 사람이 알려준 바에 의하면, 이 대성전 마당 은행나무는 숫나무라, 은행이 열리지 않는다 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도 은행 꼬랑내로 고생하는 경험과 어우러져 이런 이야기가 생겨났음을 추찰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은행나무가 수술을 감행한 트란스젠더일 수도 있다.  



뭐 공자와 맹자, 그리고 주희가 절대의 이데올로기로 등극한 조선시대 지식인 사회는 시종 근엄했다고 생각한다. 그 전당인 성균관은 공자 사당인 대성전까지 있으니, 더욱 그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공자? 웃기는 소리다. 

물론 시대별 넘나듦이 있겠지만, 조선중기를 살다간 심수경(沈守慶․1516~1599)이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남긴 성균관 관련 다음 한 토막을 보면 공자는 먼나라 딴나라 얘기임을 안다. 성균관은 단순한 입시학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수업 일수 채우기 위한 식당 출석체크가 전부였다.  

문과 식년 초시(文科式年初試)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가 성균관에서 생활한 지 3백 일이 넘는 자를 50명 뽑으니, 이는 생원과 진사가 성균관에서 지내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양현고(養賢庫)를 성균관 옆에 설치하고 따로 미두(米豆)를 저장하여 매일 2백 명 분의 식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생원과 진사들은 성균관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또 원점 부시법(圓點赴試法 지낸 일수에 따라 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법)을 세워 성균관에서 있은 지 3백 일이 넘는 자는 관시(館試 성균관에서 행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하고, 1백 50일이 되는 자는 한성시(漢城試 서울에서 행하는 시험)나 향시(鄕試 지방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하니, 생원ㆍ진사를 배양하고 권면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성균관에서 지낸다는 것은 주야로 있으면서 공자(孔子)를 모시고 독서를 부지런히 하는 것이 원칙인데, 지금 성균관에서 지내는 것은 유명무실하고, 다만 과거에만 응시하기 위해서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조석으로 식당에 가서 식사가 끝나면 책에 서명하고 그 서명한 것을 계산해서 장부에 올리는 것을 원점(圓點)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하루도 성균관에서 기숙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조석으로 와서 식사만 하고 책에 서명한 후 곧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런 식으로 3백 일을 채우니, 이것을 성균관에서 지냈다고 하겠는가. 임진난 후에는 식년시도 거행하지 않고 원점마저 폐지되었으니, 더욱 개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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