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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7월 4일인가 5일, 독일 본 세계유산위서 일본의 메이지시대 소위 산업혁명 유산군이 질긴 줄다리기 끝에 세계유산에 등재되자마자 중국대표단이 회의장 각국 대표단에 뿌린 유인물이다. 서명도 없고 대표자 명단도 없으며 날짜도 없으니 공문서로서의 그 어떤 효력도 지니지 못한다. 본국 외교부에서 훈령도 받지 못했으므로 이런 식으로 분풀이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막강한 중국도 세계유산위 21개 위원국이 아닌 까닭에 그 어떤 발언권도 없어 분통만 터뜨리고 일부 대표단원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 유인물은 당시 내가 폰카로 촬영한 자료만 남고 실물은 멸실했겠거니 했는데 어제 서재를 청소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작년 세계유산위 찌라시 뭉치에서 찾아냈다. 고화질 스캔을 하러 가는 길에 일감一感을 초草하노라.


전문을 번역한다. 거친 번역임을 감안해줬으면 한다.


제39차 세계유산위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군'에 대한 중국 대표단 성명


중국은 세계유산위 위원국들에게 강제노역과 관련되지만 그런 사실과 그에 대한 책임을 무시하면서 저들 유산을 등재하고자 하는 일본을 반대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저들 유산에는) 도합 2천316명에 이르는 중국인이 수년간 모진 환경에서 강제로 노역해야 했으며 그들 중 323명이 일본 땅에서 목숨을 잃었다. 강제노역은 인류에 대한 중대한 범죄이자 인권 위반이다. 오늘날 일본에서 이런 사실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있다는 사실이 경악스럽다. 

나는 일본 대표단이 그들의 성명에서 많은 한국인과 다른 (나라) 사람들이 1940년대에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저들 유산 중 몇 곳으로 강제동원되어 모진 조건에서 강제 노역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그런 사실이 일본의 등재신청서에서는 무시된 사실을 주시했다. 하지만 강제노역을 둘러싼 총체적 사실에 대한 일본 측의 충분한 설명은 여전히 부족하다. 나는 일본에 대해 역사를 직면하고, 나아가 이코모스와 세계유산위가 요구한 것처럼 각각의 유산에 대한 전체 역사를 이해하게끔 하는 구체적 조치들을 취할 것이며, 또한 모든 개별 강제노역 피해자의 고통이 기억되고, 더불어 그들의 존엄성이 지켜질 수 있도록 확실히 해줄 것을 촉구한다.


** 이는 꼭 2년 전인 2016년 9월 6일 내 페이스에 게재한 글이다. 

  1. yisabu 2018.09.09 12:43 신고

    사진속 글을 쓴 이는 Zhang Xiuqin라고 합니다.

<라인강의 노을>


아래는 <독일 본 라인강변에서 노을을 바라보며>라는 제목으로, July 6, 2015 at 5:37 AM에 내 페이스북 계정에 게재한 글이다. 2년 전 오늘에 있었던 일이기는 하나, 그런대로 음미할 대목은 없는 않은 듯해서 관련 사진을 첨부하며 재게재한다. 


독일 본 라인강변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시간의 혼란으로 이곳 독일 본 기준으로 오늘이라 하겠다. 이곳 제39차 세계유산위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일본 산업유산이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가 무엇을 인증하고 증명하는 국제기구는 아니다. 그럼에도 현실 세계에서는 세계유산이 되고, 그것을 뒷받침한 여러 조건이 유네스코라는 이름에 맞물려 그리 통용되는 것 또한 엄혹한 사실이다. 세계유산...나도 아직 그 정체를 모르나, 이 현실세계의 통념이 세계유산의 이념 혹은 이상과 갖은 충돌을 빚기도 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요 괴리이기 때문이리다.


이곳에서 잠깐잠깐 이번 세계유산 등재에 따른 한국과 일본간 합의를 두고 그것을 전하는 각종 뉴스에 오뉴월 소불알처럼 열린 댓글이라는 것들을 보니, 

첫째, 우리가 그 등재를 저지했어야 하고

둘째, 적어도 그것이 아니라 해도 등재 대상 23건 중 조선인 강제징용의 한이 서린 7개 현장은 등재 목록에서 삭제했어야 하며

셋째, 그렇기에 이번 협상은 굴욕이라 하며 

넷째, 이를 종합하여 한국 외교력의 실패를 운운하는 압도적인 논조를 본다.


<독일 본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 


하지만 이번 협상단 한국 어떤 외교관이 쓴 말을 동원하건대 세계유산은 레고 블럭 쌓기가 아니다. 블럭 몇 개를 넣고 빼고 하는 게임이 아니다. 내가 섣부르게 알지만 세계유산이 빵조각 뜯어먹기는 아니다. 그리고 등재 저지는 생각보다도 더 큰 문제를 유발한다.


나는 기자로서 이번 사안에 생각보다는 조금 더 관여했다. 지금 고백하거니와 외교부에 불려간 일도 있고, 그에서 내가 생각하는 방향 세 가지를 제시하기도 했으며, 입에 발린 소리인 줄 모르나 이번 협상단 주축 중 한 명은 오늘 회의장을 나오면서 내 제안이 사태 해결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했다. 이번 대회에 한국 기자로서는 유일하게 나 혼자 현장을 지켰고 혼자서 왔다. 혹자는 어떻게 해서 나 혼자만 여기 오게 되었는가 의아함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나, 우리 언론의 엄혹한 현실이 속된 말로 대통령 해외순방 말고는 회사 자비로 출장을 보내는 곳은 없다.


내가 분에 넘치게 현장에 올 수 있었던 것도 기자로서, 혹은 그것을 벗어난 일종의 세계유산 자문관으로 이번 사태 귀퉁이 0.1%에 발을 걸쳤기 때문이다. 그에서 비롯되어 지금은 밝히기 힘든 어떤 기관의 힘을 빌려 독일까지 날아오게 되었다. 


애초 이번 사태가 커지면서 내가 외교부에 불려갔을 적에도 그렇고 그 초반기 한동안 나는 이번 사태를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다. 피상으로 알던 이른바 한국 외교부의 불난집 호떡구워먹기식 기관이라는 이미지 혹은 선입관이 있기도 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우리는 저 댓글 퍼레이드가 피상으로 말하는 그것보다 훨씬 위대한 성과를 냈다. 


forced to work in harsh conditions 


이 말을 읽는 이는 다름 아닌 일본 정부를 대표한 일본 대표단이었다.


<강제동원 사실을 독일 제안으로 등재 결정문에 반영하는 장면> 


나는 23년전 기자 업계에 투신하고서 이내 이른바 대일전후청산 운동으로 내 전공을 삼은 전력이 있다. 원폭피해자니 위안부니 혹은 관동군포로니 하는 문제에 지금의 내가 생각해도 미친 정도로 기자 생활 초창기를 불살랐다. 그런 나를 늘 환장하게끔 만든 일이 각종 논리로 이를 거부하는 일본 정부의 궤변의 논리였다. 나는 일본정부가 저런 식으로 과거사를 인정하는 일을 본 적이 없다. 내가 한동안 과거사청산 운동을 쳐다보지 않은 까닭은 그것이 주는 좌절감 때문이었다.


혹자는 천황 이름으로 과거 어느 시점에 말한 통석의 념을 들 수 있겠지만, 일본 헌법을 봐라. 천황은 법적으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상징일 뿐이요, 모든 책임은 일본 국회에 귀속한다. 일본은 내각책임제다. 국회가 절대 권능을 갖는 내각책임제 국가다. 그런 일본에서, 내 기억으로 사상 처음으로 태평양전쟁기에 조선인을 비롯한 강제동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내가 죽기 전에 이런 장면을 목도하리라고는 불알이 떨어지기 전에는 없을 줄 알았으니, 

오호라, 

그래서 오늘 본은 나에겐 awakenig city노라. 


<등재 순간 일본대표단과 그 주변>


이로부터 꼭 1년 뒤 같은 날, 나는 같은 페이스북 내 계정에 다음 글을 포스팅 했다. 


일본 산업유산 등재 1주년에 즈음한 소회


아래 공유한 작년 오늘 포스팅에 잠깐 적었지만, 이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질 무렵, 우리 외교부에서 나를 불렀다. 가서 그 한-일 협상단 한국 대표를 면담했다. 가서 이런저런 얘기하다 보니 이 대표가 대학교 선배더라. 나는 내가 생각하는 사태 해결 방안을 A4 용지 두 장 정도 분량으로 정리해 들어갔다. 이 문건이 어디갔는지 찾을 수가 없다. 나로서는 무척이나 소중한 문건인데 말이다. 그러니 기억에 의존해 당시를 증언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때 세 가지 해결 방안을 제안했다.


1. 등재 자체 저지...이건 불가능하다. 

2. 제목 교체...등재 시설물 기간을 아주 제목에다가 1910년 이전까지로 박아서 교체하자. 

3. 등재 결정문statement에 조선인 강제동원이 있었다는 문구를 집어넣자.


이 중에서도 나는 세 번째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제안했다. 내 제안이 무슨 여파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산업유산 등재가 확정되고, 그 협상단 우리측 대표가 입에 발린 소리인지 모르나 "김기자 제안이 결정적이었다"고 했으니,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위안한다.


<유일한 한국기자>


<측면. 왼편은 19세기 증축이고, 가운데는 13세기, 오른쪽은 11세기부터 세웠다>


*** 이 포스팅은 문화재청 학예연구사로 그리스 어떤 대학에 연수 중인 박영록 선생이 April 18 at 10:52pm, 2018에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거니와, 우리로서는 비교적 생소한 새로운 문화유산을 조금은 익살스러우면서도 실용적으로 소개했기에, 본인 의사 여부와 관계없이 내가 무단으로 옮겨와 전재한다. 뭐 설마 표절로 날 고소하진 못하겠지? 문구는 데스킹(desking) 차원에서 내가 아주 약간 손봤음을 밝혀둔다. 괄호 안 파란색 '인용자 주'는 내 평이다. 


사실 이번 부활절 휴일에 다녀온 다른 세계유산들은 거의 관광지화 되어서 언젠가 다시 가볼 기회가 있을 것도 같은데, 여기(그리스를 말함-인용자 주) 있는 김에, 가보기 어려운 세계유산들에도 한번 다녀와 보기로 결심했다. 나중 되면 다녀왔다는 것도 까먹을 것 같아서 메모 차원에서 기록한다. 


불가리아의 세계유산 보야나 교회(Boyana Church)


보야나 교회의 완전성은 완벽하게 보호되고 있다. 1917년 교회 주위에 공원이 조성되면서 현대 교통의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 (발췌:유네스코 한국위원회 홈페이지)


'여기 현대 교통수단으로 찾아 가려면 어려울껄?' 이라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적은 거였나 보다ㅋㅋ 시내 한복판에서 거리는 10킬로 정도밖에 안 되지만 불가리아인 친구가 조언했듯, 찾아가기 정말 복잡했다. 대중교통으로 갔으면 화 날 뻔 했다. 


*팁 : 보야나교회와 소피아국립박물관을 묶어서 하루를 잡되 차량 필수. 보야나교회에서의 체류시간은 길게 소요되지 않지만 길 찾기가 힘들다.


<naos of the church, altar of the church. from 11th century>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외곽에 있는 보야나 교회(Boyana Church)는 각기 다른 시기에 지은 3개 동 건물로 이루어진다. 동쪽 교회는 10세기 무렵에 세웠으며, 13세기 초 세바스토크라토 칼로얀(Sebastocrator Kaloyan)이 교회 옆에 두 번째 건물을 짓도록 지시함으로써 2층짜리로 증축되었다. 세 번째 교회는 19세기 초에 지었다. 


두 번째 교회에 있는 프레스코 화(畵)는 1259년에 완성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중세 회화로 평가된다. 이 유적은 동유럽 중세 미술을 완벽하게 보존한 기념물 가운데 하나다. 11, 13, 15~17세기, 19세기 내부 벽화는 다른 어떤 시기의 벽화보다 높은 수준을 증명하려는 듯 몇 층으로 이루어졌다. 그중 13세기에 그린 벽화가 예술적 가치가 가장 높다. (발췌: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홈페이지-말이 발췌지 우라까이다-인용자 주)


내부는 제한된 인원(10명 내외) 단위로, 10분씩 관람할 수 있다. 더 있고 싶으면 다음 텀에 다시 들어와도 된다. 예약하라고 하진 않으니 최후의만찬 보다는 (관람환경이) 나은 건가 생각도 잠깐 했다. 굳이 여기까지 누가 어떻게 찾아오지? 싶었는데 나같은 사람이 있는지 은근히 관람객이 있었다.(왕릉보다 많았다..흥ㅠㅠ-필자는 현재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사무소 소속이다. 조선왕릉 관람객이 적어 열받았나 보다. 불가리아에 뒤진다니 하는 자괴감이 짙게 뭍어난다-인용자 주)


<external narthex, 19th century>


*팁 : 매표소를 지나면 안내소 없다. 안내원도 찾을 수 없다. 세 번째 사진 가운데서 보이는 검은 문이 입구다. 열어도 안 열린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저 문을 여러 번 당기면서 쿵쾅 대면 안에서 직원이 나와 의자에 앉아 기다리라고 얘기해준다. 즉, 바깥 의자에 앉아서 사람 나올 때까지 그냥 기다리면 한 텀 끝나고 직원이 문열고 나온다. 


내부는 당연히(?) 사진촬영 불가다. 학교 다닐 때 모 교수님께서 남들 다 찍는 사진 말고 못 찍게 하는 걸 찍어야 나중에 써먹는다..고 하셨지만, 난 소심하니까 하라는대로 카메라를 집어넣었다. 안에 들어가면 작은 공간이 나오는데 이게 뭐지 싶은 생각이 들 때쯤 바깥과 통하는 문을 닫고 안으로 통하는 다른 문을 열어준다. 그럼 띠로리~아 입장료값 하는군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저렴한 감상평) 내부에는 공기순환장치가 작동 중이고, 몸에 맨 모든 가방은 모아 두어야 하며, 일종의 중문을 두어 벽화 보존에 신경을 쓴다. 벽화에 유리벽 같은 게 없어서 질감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팁 : 불가리아는 전 지역에서 학생증스럽게 생긴 모든 ID로 학생할인을 해준다. 국제학생증을 요구하는 부다페스트나 자꾸 나이 물어보는 비엔나나 학생증 해석하라고 하는 베를린과 다르다!!! 그리스어만 써 있는 내 학생증으로 모든 곳에서 할인 가능. 아마 한국어도 가능할 듯?


불가리아에서는 내 얼굴보다 더 큰(내 기억을 살리면 필자는 얼굴이 큰 편이다, 그러니 다음에 말하는 피짜는 엄청 크다-인용자 주) 피자가 약 1유로(불가리아 화폐 단위는 레브)다. 근데 이렇게나 물가가 싼 불가리아에서도 여기 입장료는 거의 5유로에 육박한다....(학생은 1유로 정도) 우리나라 입장료 너무 싼거 아닌가...


건물 앞에서 기다리려면 심심하니까 담배도 한 대 필수 있게 재떨이도 잘 갖춰져 있다. 불가리아는 흡연에 관대하다. 사실 그리스는 더 관대하다....


<유적 안내판>


총 감상평 : (이건 100퍼센트 내 주관적 견해) 전문지식이 얕은 나는 여행지를 고를 때 일종의 '국가차원에서 검증한, 밀어 줄만한 관광지 목록'의 일환으로 세계유산목록을 참고할 때가 많다. 등재 시점을 보면서 혼자 미리 판단을 해 보기도 하는데, 보야나교회는 1979년에 등재된 것으로 보아, 


1. 전 세계적으로 너무 너무 유명하거나 

2. 관광지로서 흔히 말하는 '볼만한' 관광객들이 좋아할 경관 요소가 적고 학술적 가치(만?) 가 높은 유적지 성격일 가능성이 있었음. 


역시나 예상대로 찾아가기는 어려웠고 주변에는 아무런 편의시설이 없었으며 북적이지 않았고 내부는 기대 이상의 묵직한 감동이 있었다. 저 멀리 천장 어딘가에 붙어있는 프레스코화들만 보다가, 여기에선 1미리 앞까지 손가락을 뻗어도 보고 숨 참고 얼굴도 들이대 보니 기분이 색달랐다. 


사진은 발로 찍은 것 같지만 손으로 찍었음.(실제 사진 실력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발로 눌러도 저보단 나으리라-인용자 주

너무 대충 찍었네. 두 번 가기는 힘들텐데..(다시 가도 별로 달라지진 않을 듯하다. 교육 불가 판정이다-인용자 주



출처 : 《시사IN》 2016년 09월 02일 금요일 제467호


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를 망가뜨리는 박근혜 정부

박근혜 정부는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 종합기본계획’을 수립하고 경주를 역사문화유산 도시로 개발하려 한다. 이에 따라 황룡사를 ‘복원’하겠다고 나서자 문화재청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2016년 09월 02일 금요일제467호


일제강점기 이후 경주를 지탱한 힘 중 하나가 학생들의 수학여행이었다. 박정희 시대에는 정부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시작해 그 정권이 끝나는 시점까지 추진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은 경주를 역사도시를 넘어 관광도시로 한 차원 높인 계기가 되었다. 이 개발계획을 통해 경주에는 비로소 보문단지가 생겨났다. 국제회의도 개최하고 골프장까지 있는 관광단지 말이다.

하지만 ‘수학여행지=경주’ 등식이 깨지자 경주는 허덕이기 시작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하면서 경주는 급격히 동력을 상실했다. 파르테논과 콜로세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그리고 이웃 나라 만리장성과 진시황제 병마용갱 앞에 경주가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첨성대는 뒷전으로 밀렸고, 경주 시내의 무수한 신라 시대 거대 무덤들은 그보다 몇십 배 크기인 피라미드 앞에 주눅 들고 말았다. 경주는 더 이상 수학여행의 도시가 아니었다. 경주에는 암흑과도 같은 나날들이었다. 천년 왕국 신라의 도읍이라는 경주에 볼거리가 무엇이 있느냐는 지역사회의 볼멘소리가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이다. 경주시가 주축이 된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 종합기본계획’은 그렇게 누적된 불만들이 한군데로 응축되어 폭발한 결과물이었다. 앞선 글에서 소개했듯 이 계획에 따르면 향후 경주는 2035년까지 1조5000억원을 투입해 역사문화유산 도시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경주 사람들은 이 정도 투자는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 뒤에는 문화재에 짓눌린 개발 욕구 억제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동한다. 비록 좌절되기는 했지만, 김영삼 정부가 추진하려 한 경주경마장 건설계획도 보상 측면이 강했으며, 경주 방사성폐기물처분장을 주민들이 압도적으로 찬성해 유치를 결정한 것도 그동안 쌓인 피억압 심리의 표출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신라왕경 종합계획은 대선 공약사업 중 하나다. 이 계획 역시 경주 지역사회 여론 무마용이라는 측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div align = 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79년 4월 박정희 대통령(앞줄 오른쪽)이 박근혜 영애(앞줄 왼쪽)와 함께 경주 보문관광단지 내 유람선에 시승해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1979년 4월 박정희 대통령(앞줄 오른쪽)이 박근혜 영애(앞줄 왼쪽)와 함께 경주 보문관광단지 내 유람선에 시승해 둘러보고 있다.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를 통한 경주 역사문화유산도시 재생사업이 박 대통령 자신의 구상에서 나왔는지 어떤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주에 대한 유별난 관심이라든가 이 계획의 일환으로 이미 진행 중인 경주 월성 발굴 현장을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 직접 찾기도 했다는 점 등을 볼 때 이 사업에 대한 관심이 큰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앞선 글에서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문화재 현장에는 세 번 참석했다고 썼다(<시사IN> 제462호 ‘아버지가 탐닉한 경주, 딸이 다시 찾은 까닭’ 기사 참조). 숭례문 복구 완공식 참석과 월성 발굴 현장 방문, 아산 현충사 참배를 들었다. 하지만 이 외에도 중요한 사건 하나가 빠졌다.

2013년 12월2일, 박 대통령은 안동에서 도지사의 경북도 업무보고를 받고 곧바로 헬기를 이용해 보문관광단지에 도착해 오후 1시30분 석굴암을 찾아 10여 분간 본존불을 참배하고 둘러봤다. 그해 5월에 완공한 숭례문이 부실로 복구되었다 해서 한창 전체 문화재 관리가 부실 논란을 일으킬 때였다. 석굴암 역시 대좌(臺座)에 균열이 가고 천장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만큼 위험하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직후였다. 석굴암을 둘러본 뒤 박근혜 대통령은 밖에서 기다리던 관람객들에게 “걱정이 돼서 왔는데 설명을 들으니까 석굴암이 생각보다는 보존에 어려움이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걱정이 많이 되셨죠?”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방문은 박 대통령이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문화재에 대한

 <div align = 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2013년 12월 박근혜 대통령이 균열 논란을 빚은 석굴암 본존불을 둘러보았다. 
ⓒ연합뉴스
2013년 12월 박근혜 대통령이 균열 논란을 빚은 석굴암 본존불을 둘러보았다.

애착이 더 각별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일 수 있다. 문화재 애호가 유별났던 박정희의 딸이라는 말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적극적인 행보일 수 있다. 

한데 이 방문을 경주 지역 인사들이 지나칠 리 만무했다. 대통령을 향한 전방위 로비에 나섰다. 예컨대 경주가 지역구인 정수성 당시 새누리당 국회의원은 황룡사 복원과 쪽샘지구 정비 등을 건의했다. 최양식 경주시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비롯한 박근혜 대통령 가족이 경주에서 찍은 사진첩을 대통령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경주 지역 인사들의 움직임을 단순히 대통령에 대한 ‘구애’라고 폄훼할 수는 없다. 그만큼 이들에게 경주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은 절박했으며, 그러한 관심은 곧 그들이 꿈꾸는 경주 역사도시의 건설로 가는 디딤돌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버금가는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 종합기본계획’이 박근혜 대통령의 석굴암 방문을 계기로 결정적인 탄력을 받았음은 분명하다. 경주 지역 인사들의 건의에 박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의 건의 내용을 뜯어보면 대통령이 결코 반대할 수 없는 사안들이다. 황룡사를 복원하고 고(古)신라 시대 고분 밀집지역인 쪽샘지구를 정비하겠다는데 이를 어떻게 하지 말라고 하겠는가? 그렇게 하라는 직접 지시는 안 했을지 몰라도, 최소한 잘해보라는 말 정도는 했을 것이다.

문화재위원회, “복원이 아니라 역사 왜곡일 뿐”

실제로 이후 이 사업의 진행 상황을 보면 대통령의 석굴암 방문이 경주를 ‘개조’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게 했음은 분명하다. 저 종합기본계획은 정수성 의원과 최양식 시장 주도로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를 주도하는 경주 지역 인사들이 그리는 경주 그림이 문화재청과 그 주변 문화재위원회(이하 문화재위)가 구상하는 경주 그림과는 매우 달랐다는 점이다. 예컨대 정수성 의원은 지금은 터만 남은 황룡사를 ‘복원’하겠다고 했다. 그 터에 가면 볼거리가 아무것도 없으니 유적의 ‘가시화’를 위해서라도 전체 높이가 80m에 달했다는 목탑도 세우고, 그 뒤쪽으로 금당도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규모로 ‘재건’하며, 이들 전면에다 내부로 통하는 남쪽 대문인 중문(中門)도 만들고, 담장도 둘러쳐서 신라 시대 황룡사라고 할 만한 품격을 갖춘 볼거리를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는 최양식 경주시장 생각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화재위가 이를 용납할 리 만무했다. 그들에게 그것은 복원이 아니라 역사 왜곡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복원한 황룡사, 혹은 안압지 일대 동궁(東宮)은 21세기 상상의 역사 세트장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문화재위는 경주시가 사업 추진 대상으로 삼은 경주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임을 강조한다. 세계유산의 존재 기반이 되는 세계유산협약은 유적의 진정성(authenticity)을 강조한다. 이 진정성이라는 가치로 본다면 복원하는 황룡사나 동궁은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재위가 복원을 포함한 경주시의 신라왕경 종합정비계획을 접수조차 하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가 말하는 세계유산으로 흔히 다음 세 가지를 혼용해서 마구잡이로 씁니다.


1. 세계유산 world heritage 

2. 인류무형유산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

3. 세계기록유산 memory of the world


하지만 이 세 가지는 엄연히 다릅니다. 세계유산과 인류무형유산 두 가지는 국제협약에 근거를 둡니다. 

쉽게 말해 국가들이 이런이런 협약을 만들고 그것을 준수하겠다는 다짐을 하고서 그에 일정 국가 이상이 비준함으로써 발효하는 협약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한 것입니다. 

반면 세계기록유산은 이런 국제협약이 아니라 유네스코 자체로 벌이는 사업입니다. 

유네스코 사무국이 우리도 이런 거 하나 해 보자 해서 만들어낸 사업입니다.

그러니 위상을 비교하면 전자 2가지가 올림픽인데 견주어 맨마지막은 전국체전입니다. 엄연히 권위와 권능은 다르지요. 


그렇다면 유네스코는 왜 이런 사업을 벌이게 되었을까요?

세계유산은 동산 부동산 중에서도 부동산을 대상으로 하고, 그것을 자연유산과 문화유산 두 가지로 나눕니다. 이것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부동산을 제외한 다른 유산들은 뭐냐?

그렇게 해서 바로 별도 국제협약을 만들어낸 것이 무형유산입니다. 무형유산은 잘 아시겠지만 서구 유럽에서는 없던 개념입니다. 주로 한국과 일본에서 태동한 개념이지요. 실제 이를 성사케 한 원동력이 된 국가가 바로 한국과 일본입니다.


자...부동산도 됐고 무형도 됐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문화재라고 하면 이 두 가지로 커버가 될까요? 안 됩니다. 구찌가 큰 다른 하나가 빠졌으니 부동산에 대비되는 동산 문화재를 유네스코가 방치하는 결과를 빚은 겁니다. 그래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동산 문화재도 우리 유네스코가 어떻게든 먹어보자 해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세계기록유산입니다. 


하지만 세계기록유산을 국제협약으로 만들려고 하니, 시일이 걸리고 여러 가지 문제가 남습니다. 그래서 국제협약으로 나중에 가건 말건, 이건 일단 급한대로 유네스코 자체 사업으로 해보자 해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기록유산사업입니다.


이 세 가지를 보면 유네스코가 접근하는 문화재 확장의 역사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세계유산을 통해 종래의 유산이라고 하는 가장 구찌가 큰 것을 선점했고, 

그러다 보니 무형이 빠져서 이것도 먹자 해서 인류무형유산을 만들어내고,  

또 그러다 보니 언제건 옮겨다닐 수 있는 문화재가 빠지니 그 그물망을 치자 해서 세계기록유산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형태가 더 나올 지 모릅니다.

2015.7.10 내 페이스북 포스팅을 약간 손질했다. 


- 세계유산 삭제 드레스덴 엘베계곡을 덧붙여 논함-

역사유산으로 먹고 사는 애들, 예컨대 이탈리아나 프랑스, 스페인 같은 나라에서도 여전히 세계유산 신규 등재에 열을 올립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할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가 접근하는 가장 큰 이유, 관광을 접목한 지역경제 활성화와는 전연 다르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물론 서구유럽이라고 해서 그런 곳이 없겠습니까만은, 이번에 등재된 터키 에페수스만 해도 세계유산이 되건 말건, 이미 관광객으로 미어터지는 곳입니다. 예컨대 루브르박물관을 프랑스가 세계유산으로 등재한다고 치죠. 프랑스가 왜 이곳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자 하겠습니까?

관광?

그거 아니라도 미어터지는데???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중국 같은 데는 접근 목적이 완전히 다릅니다. 세계유산 등재를 통한 역사도시 이미지 확보와 그를 통한 관광객 끌어들이기가 가장 큰 이유입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도 이런 목적에서 추진했으며, 실제 경주 양동마을은 등재 이전과 이후는 천지개벽입니다.


이 차이점은 세계유산 등재 현장을 가 보시면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우리네 세계유산지역은 우선 그 입구에 이곳이 세계유산임을 요란스럽게 선전하는 광고판으로 넘쳐나고, 그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띄게 마련입니다.하지만 서유럽 세계유산 현장 가 보세요. 이곳이 세계유산임을 광고하는 안내판은 어디에 쳐박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숨어 있습니다. 아주 없는 곳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서구 세계는 세계유산을 등재하는 가장 큰 목적이 그 유산의 보존 관리 체계 확립에 있다고 저는 봅니다. 이는 피상적인 관찰이라 자신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내세우는 가장 큰 목적이 관광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독일 드레스덴 엘베계곡이 2009년에 엘베강을 가로지르는 교량 건설 문제로 세계유산 목록에서 삭제됐습니다. 이 일을 국내에서는 무슨 대사건이 되는양 침소봉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도 세운상가 개발했다가는 종묘가 세계유산에서 삭제된다...이건 큰 일이요 국제 망신이다는 논리로 공격을 해대지요. 


하지만 드레스덴 현지에서는 아무도 세계유산 삭제를 굴욕이라거나 치욕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삭제 과정에서 찬반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네들한테는 교량 건설이 더 중요했습니다. 실제 이 교량이란 것도 기존 세계유산 경관에 전연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외려 도시활성화 차원에서 드레스덴에는 이 교량이 필요했습니다. 그 결과 어찌되었는가?


드레스덴 관광객은 세계유산 등재 때보다 삭제 이후에 외려 늘었습니다. 우리의 상식과는 정반대되는 현상입니다. 세계유산을 등재하는 목적과 효과는 일률적이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이 독립국가로 인정받는 곳은 몇 되지 않은 줄로 알며, 개중 하나가 유네스코다. 팔레스타인이라면 내 세대에는 아라파트로 상징한다. 또 에드워드 사이드가 열렬한 팔레스타인 내셔널리스트라는 사실도 팔레스타인을 친숙하게 만들지 않나 한다.


아라파트와 사이드를 양날개로 장착한 팔레스타인이 거의 유일하게 독립국가로 인정받는 국제무대가 유네스코인 까닭에 이들은 외교 총력을 유네스코로 쏟을 수밖에 없다. 그런 팔레스타인이 이번에 그들로서는 세 번째로 세계유산에 등재한 곳이 헤브론 유적(Hebron/Al-Khalil Old Town)이다. 


팔레스타인은 유네스코 가입 이듬해인 2012년 예수 탄생지 베틀레헴(Birthplace of Jesus: Church of the Nativity and the Pilgrimage Route, Bethlehem)을 사상 처음으로 세계유산에 등재한 데 이어 2014년에는 베들레헴 근교 남예루살렘 올리브와 포도 산지 바티르(Battir) 문화경관(Palestine: Land of Olives and Vines – Cultural Landscape of Southern Jerusalem, Battir)도 세계유산에 추가했다. 


팔레스타인은 앞서 2011년 10월 31일,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개최된 이 국제기구 총회에서 회원국 자격을 얻었다.  총회에 상정한 팔레스타인 정회원 가입안은 193개 회원국 중 173개국이 참여한 결과 찬성 107표를 얻어 가결됐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인 중국과 러시아, 프랑스, 그리고 브라질과 인도, 남아공 등은 찬성표를 던졌으며 영국은 기권했다. 반대표를 던진 국가는 미국을 필두로 팔레스타인과 시종 적대적인 이스라엘, 그리고 독일,호주,캐나다를 포함한 14개국에 지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을 정회원국으로 인정한 유엔 산하기구로는 유네스코가 처음이다. 


하지만 이는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다. 무엇보다 유네스코 전체 분담금 중 약 22%를 지원하던 미국이 테러를 지원하는 국가에 대한 지원을 금지하는 국내법을 들어 분담금 지불 정지를 결정했다. 이 일로 유네스코는 극심한 재원 위기에 몰렸으며 이런 사정이 현재까지도 크게 개선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외부 세계가 간절히 자신들을 독립국가로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유네스코는 그 희망의 빛일 수밖에 없다. 유네스코 회원국 자격을 획득한 팔레스틴은 이에 유네스코를 발판으로 삼아 그들이 독립국가임을 더욱 확고히고 하고자 하는 대외적 상징조치를 잇달아 시도하게 되니, 세계유산 등재도 는 그 일환으로 봐야 한다. 


이런 움직임에서 주목할 것은 팔레스타인이 등재한 3건 모두가 그 등재 절차가 비록 세계유산협약의 이행지침이 규정하는 절차를 모두가 비상절차에 가까운 방식을 채택했다는 사실이다. 보통 세계유산 등재는 시일도 많이 걸리고 심사도 까다롭기 짝이 없지만, 팔레스타인은 그들의 처지, 다시 말해 언제나 이스라엘에 당한다는 약자 논리에다가 그들의 위협에 유산들이 위협에 처해 있다는 점을 내세워 fast-track 제도를 교묘히 이용해 언제나 비정상에 가까운 세계유산 등재를 시도했다.  


이것이 훨씬 빠르고,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패스트 트랙, 우선 이름부터 급박한 느낌을 주니, 세계의 시선을 끌기에도 이보다 더 좋은 등재방식을 찾기는 힘들다. 그들의 전략은 내가 보기엔 크게 성공작이다. 

이 제도를 통해 팔레스틴은 이스라엘의 부당성을 널리 홍보했다. 이스라엘 대표단 단장은 이번 세계유산위 의장 단상으로 다가가 의장을 협박하는 장면을 연출했으니, 이보다 더한 이스라엘 부당성을 선전하는 효과가 있을까? 


그런 점에서 어쩌면 더 불쌍한 곳이 이스라엘이라 할 수도 있다. 욕은 욕대로 먹으면서도, 그들로서는 저리 저항하는 방법 말고는 뾰족한 대처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세번째 등재에도 역시나 이스라엘은 온몸으로 저항했다. 


저 등재가 있기 이틀 전, 세계유산 보존문제를 다룬 세계유산위에서 기등재한 유산 중 예루살렘 문제를 이미 다루었다. 이 역시 위험에 처한 유산이기도 하다. 


위험에 처한 유산....

그걸로 계속 예루살렘을 묶어둔다는 것은 이스라엘로는 치욕일 수밖에 없다. 내가 현장을 지켜보지 않아, 또 생중계까지 지켜보지 않아 자신은 없으나, 이를 전하는 유대계 언론과 친아랍계 언론, 그리고 중도적인 외신들 보도를 종합하면, 이스라엘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 분야는 헤브론 유산 등재 자체 보다. 그것의 위험유산 등재다. 이스라엘이 점령한 헤브론 유산은 세계유산 등재와 더불어 곧바로 위험에 처한 유산으로도 동시 등재됐다. 2관왕 타이틀을 쓴 것이다. 실상 위험에 처한 유산이 패스트트랙이라는 등재 편법을 쓰는 일이 많다. 


내 기억이 정확한지 자신이 없지만,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도 이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나 한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이 위험에 처한 유산에 더욱 민감한가? 논리는 실로 간단하다. 내가 점령 혹은 관리하는 유산인데, 그것이 위험에 처했다? 누구의 탓인가? 말할 것도 없이 그 나라 책임으로 귀결한다. 이스라엘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아무 문제 없는데 왜 위험하다 하는가? 바로 이 심리다.


사이드 열풍이 이는 바람에, 그리고 이스라엘은 언제나 침략자, 팔레스타인은 언제나 피해자라는 등식이 우리에게 자리잡았기에(이것도 물론 박정희 시대로 돌아가면 다르지만) 우리 사회 일반은 막연히 팔레스타인=좋은놈, 이스라엘=나쁜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한다. 이는 사이드 시각이다. 물론 국내 기독교인들에게 이는 정반대다. 


하지만 한 발 떨어져서 봐야 한다. 팔레스틴에, 혹은 그 이전 이스라엘에 우리를 투영해 우리가 그리는 팔레스틴, 우리가 그리는 이스라엘에 만족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하필 유네스코일까? 국제관계가 철저한 힘의 논리로 지배된다는 거 반복이 필요없다. 상임이사국 다섯 나라가 깽판치는 유엔이 증명하지 않는가?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산하 기구 유네스코는 좀 묘해서 그런 힘의 지배가 상대적으로 덜하다. 팔레스타인이 회원국 자격을 획득한 가장 큰 힘은 쪽수가 많은 아랍권 국가와 아프리카 국가들 힘이다. 

폴츠카 관광도시 크라코프(Krakow)에서는 현지시간 2일 개막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 제41차 회의(session)가 진행 중이다.

오는 12일까지 계속할 이번 회의에 한국에서는 전연 관심이 없다. 

야심찬 계획에 의하면, 이 회의에서 우리는 한양도성을 세계유산에 등재한다는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자문기구인 이코모스에서 누더기 걸레에 가까운 평가에 최하등급인 '등재불가(not inscribe)' 판정을 받으면서 등재 신청 자체를 자진 철회하고 말았다.

왜 한양도성이 저와 같이 처참한 결과를 빚고 말았는지, 저간의 자세한 사정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내가 이곳저곳 수소문해 알아낸 분명한 사실은 거의 다 F 학점을 맞았고, 개중에 유일하게 진정성(authenticity)에서만 그런대로 좋다는 평가를 받았을 뿐이라는 점이다.

이 평가 내용이 공개되지 않는 까닭에 작금 갖은 억측이 사실처럼 난무한다. 

혹자는 성벽을 다 뜯어고쳤기에 그것이 치명타였다 하기도 하지만, 개소리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는 자세히 공개되어야 한다. 

나아가 그 자세한 실상은 이를 의욕적으로 추진한 박원순 서울시장에게도 낱낱이 보고되어야 한다.

박 시장은 알아야 한다. 

왜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중국은 이번 회의에 자연유산과 문화유산 각각 1건씩 제출해 두 건 모두 등재권고 판정을 받았으며, 일본은 오키노시마 한 곳을 제출해 역시 등재권고를 받았다.

이 등재 시스템도 내년까지만 1국 최대 2건 등재 신청이 가능하며, 그 이후에는 자연 문화유산을 막론하고 1국 1건만 등재 신청이 가능하다.

나로서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골백 번 지적했지만, 여전히 개선되지 않으므로 다시 지적한다. 


현행 문화재보호법 제2조(정의)에서는 문화재를 다음 네 가지로 분류한다. 


1. 유형문화재

2. 무형문화재

3. 기념물

4. 민속문화재


이거 누가 처음에 이리 만들었는지, 논리학의 논자도 모르는 이의 소치라, 중구난방 콩가루를 방불한다.


문화재는 형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유형과 무형 두 가지 범주가 있을 뿐인데, 그에다가 기념물과 민속문화재를 첨가했으니, 닐리리 짬뽕이다. 


문화재는 그 분류 기준에 따라 달리 나눌 수도 있으니, 형태에 따라 유형과 무형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고 나아가 세계유산협약을 존중한다면 그것이 인간이 남긴 것이냐? 아니면 자연이 남긴 것이냐에 따라


1. 자연유산 natural heritage

2. 문화유산 cultural heritage 


이 두 가지로 나눌 수도 있다.

물론 유형과 무형, 자연과 문화의 경계가 애매할 때가 많다. 

그때는 그 중간지대로 복합유산 개념을 도입하면 그뿐이다.


어찌하여 유형과 무형 외에 기념물과 민속문화재가 따로 있다는 말인가?

법률 자체가 불합리의 투성이인데, 이들부터 시급히 손대야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구습과 인습이라는 이름으로 그 불합리를 묵수할 수는 없다. 


이 분류체계에 맞게 문화재 지정 체계도 근간에서 뜯어고쳐야 한다.

'세계유산 정책 이대로 좋은가' 시론이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소식지 올해 6월호에 실렸다. 

이 원고는 최근 문화재청 주최 공청회 발표문을 다듬었음을 밝혀둔다. 

이른바 우라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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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뉴스 2017년 6월호(732호)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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