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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13년(930), 왕건은 고창(안동) 전투에서 견훤에 대승하면서 승기를 완전히 잡는다. 한데 이 사정을 전하는 기록이 심상치 않다. 이때 왕건은 지금의 경상도 중북부와 영동을 다 손아귀에 넣고 지금의 포항에까지 진출했다. 

《삼국사기》 지리지가 정리한 고구려 영토는 얼토당토않다. 영일현, 그러니깐 지금의 경북 포항까지, 어느 때인지는 모르나 고구려 수중에 있었다고 한다. 이는 택도 없는 소리다. 함에도 이런 택도 없는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무모한 시도도 없지는 않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인가? 나는 《삼국사기》가 고려와 고구려를 헷갈리는 바람에 저리 잘못 정리했다고 본다. 아래는 《고려사절요》 해당년 기록이다. 

봄 정월에 재암성(載巖城․경북 청송 진보) 장군 선필(善弼)이 와서 의탁하였다. 예전에 왕이 신라에 통호하려 할 제, 도둑이 일어나 길이 막히자 왕이 걱정하고 있었는데 선필이 기이한 계책을 써서 인도하여 통호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가 와서 항복하니, 후한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그가 나이가 많다 하여 상보(尙父)라고 일컬었다.

○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고창군(古昌郡)의 병산(甁山)에 진을 치고 견훤은 석산(石山)에 진을 치니, 서로 거리가 5백 보쯤 되었다. 드디어 서로 싸우자, 견훤은 패하여 달아나고,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사로잡았으며, 죽은 자가 8천여 명이었다. 고창군에서 아뢰기를, “견훤이 장수를 보내어 순주(順州)를 쳐서 함락시키고 인호(人戶)를 약탈하고 갔습니다.” 하니, 왕이 곧 순주로 가서 그 성을 수축하고 장군 원봉(元奉)을 죄주었으며, 다시 순주를 하지현(下枝縣)으로 강등시켰다. 고창 성주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으로, 권행(權行)과 장길(張吉)을 대상(大相)으로 삼고, 그 고을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했다. 이에 영안(永安)ㆍ하곡(河曲)ㆍ직명(直明)ㆍ송생(松生) 등 30여 군ㆍ현이 차례로 와서 항복하였다.

○ 2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고창 싸움에서 이겼다고 알리니,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답례하고, 글을 보내어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다. 이때 신라 동쪽 주(州)ㆍ군(郡) 부락(部落)이 다 와서 항복하니 명주(溟州)에서 흥례부(興禮府 안동)까지 모두 110여 성이었다.

○ 일어진(昵於鎭)에 행차하여 성을 쌓고 이름을 신광진(神光鎭)이라 고치고 백성을 옮겨서 이곳에 채웠다. 남미질부(南彌秩夫)와 북미질부(北彌秩夫 영일군 의창면(義昌面)) 두 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에서 말하는 왕건이 점령한 땅이 신통방통하게도 바로  《삼국사기》 지리지가 기록한 고구려 영토 남방 혹은 남서방 경계다. 

나로선 이것이 내가 현재 찾을 수 있는 최선의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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