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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목태후4

[마질차] (5) 신목태후의 등장, 싹트는 반란의 씨앗 이에 앞서 소명태자昭明太子가 무열제武烈帝의 명으로 흠운欽運의 딸을 아내로 맞기로 약속했으나 일찍 죽으니 흠운의 딸은 스스로 소명제주昭明祭主가 되고자 하니 자의후慈儀后가 허락하니 이가 곧 소명궁昭明宮이다. (정명政明) 태자와 더불어 모후母后가 자주 소명궁으로 거둥하니 태자가 소명궁을 좋아하여 마침내 이공전군理恭殿君을 낳았다. (이에) 후后가 소명궁에게 명하여 동궁東宮으로 들어가게 하고 선명궁善明宮으로 이름을 바꾸니 총애함이 흠돌의 딸보다 크기 흠돌의 딸이 투기를 했다. 화랑세기 제32세 풍월주 신공信功 전에 보이는 이 구절이야말로 곧이어 펼쳐질 일대 피비린내나는 내전을 예고하는 암시다. 당시 왕실 권력구도를 보면 이미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죽고 없는 가운데 가장 큰 어른으로 그의 정비이면서 김유신과 김흠순 .. 2024. 3. 9.
[마질차] (4) 형수가 되었을 여인을 노리는 시동생 그때 태손太孫 소명전군昭明殿君이 이미 태어난 상태였고, 무열제는 (며느리인) 자의慈儀의 현숙함을 매우 아꼈다. (27세 흠돌欽突 전) 그때란 26세 풍월주인 진공이 흠돌한테 풍월주 자리를 물려준 때다. 이때가 656년 태종무열왕 재위 3년째다. 따라서 이로 보면 문무왕 김법민과 그의 정비 자의 사이의 맏이인 소명태자는 656년 혹은 그 직전에 태어났다. 소명을 전군이라 부르는 까닭은 아직 정식 왕자 혹은 태손으로 임명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전군은 정식 왕자보다는 한 등급 낮은 왕의 아들을 지칭하는 호칭이다. 이 두 가지 증언과 삼국사기 김흠운 열전을 종합할 때, 여기서 일어나는 일대 의문이 있다. 앞서 보았듯이 김흠운은 655년 백제와의 조천성 전투에 출전했다가 장렬히 전사했고, 그때 관위가 어느 정도.. 2024. 3. 8.
신문왕 새장가 들기 삼국사기 신라 신문왕본기 3년(683) 조에는 현직 왕이 왕비를 채납하는 기사가 희유하게 실렸으니,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봄 2월)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작은딸을 맞아 부인으로 삼기로 하고, 그에 앞서 이찬 문영(文穎)과 파진찬 삼광(三光)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 지상(智常)을 보내 납채(納采)하게 했으니, 예물로 보내는 비단이 15수레이고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 젓갈이 1백3십5수레였으며, 벼가 1백5십 수레였다.5월 7일, 이찬 문영과 개원(愷元)을 김흠운 집에 보내 책봉하고는 부인(夫人)으로 삼았다. 그날 묘시에 파진찬 대상(大常)ㆍ손문(孫文), 아찬 좌야(坐耶)ㆍ길숙(吉叔) 등을 보내 각각 그들의 아내와 량(梁)과 사량(沙梁) 두 부(部) 여자 각 30명과 함께.. 2018. 3. 7.
신목(神睦) 황복사석탑금동사리함기(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記. 706년. 신라 성덕왕 5년, 당 중종 신룡 2년) : 신문대왕(神文大王)이 오계(五戒)로 세상에 응하고 십선(十善)으로 백성을 다스려 통치를 안정하고 공(功)을 이루고는 천수(天授) 3년(692) 임진년 7월 2일에 돌아갔다. 신목태후(神睦太后)와 효조대왕(孝照大王)이 받들어 종묘(宗廟)의 신성한 영령(英靈)을 위해 선원가람(禪院伽藍)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성력(聖曆) 3년(700) 경자년 6월 1일에 신목태후(神睦太后)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 높이 극락에 오르고 대족(大足) 2년(702) 임인년 7월 27일에는 효조대왕(孝照大王)도 승하하였다. 신룡(神龍) 2년(706) 경오년 5월 30일에 지금의 대왕이 부처 사리 4과와 6치 크기의 순금제 미타상 1구와 .. 2018.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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