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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은 갑골문으로 유명한 중국 은허(殷墟) 유적 발굴 8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 무렵 이를 기념하는 각종 학술대회가 세계 곳곳에서 열렸거니와, 개중에서도 은허 현지에서 중국 당국이 개최한 그것이 주축이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대회는 이해 10월 30~31일 이틀간 이 유적이 위치한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시(安陽市) 중심가 안양호텔(安陽賓館)에서 열렸다.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와 안양시 인민정부, 허난성문물국(河南省文物局), 안양사범학원(安陽師範學院), 중국은상문화학회(中國殷商文化學會)가 공동 주최한 이 자리에는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미국 등지의 외국 연구자를 합쳐 총 180여 명이 참가했다. 한국에서는 2006년 7월13일 은허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시, 유적 실사를 담당한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이형구 선문대 교수 등이 참가했다. 


이 대회에 나도 끼었다. 고고학 전문잡지 《한국의 고고학》을 발간하는 도서출판 주류성 초청 형식으로, 나는 기자로서 경향신문 이기환, 서울신문 서동철과 자리를 함께했다. 이 학술대회에 대해서는 추후 다른 자리를 빌려 말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 대회를 통해 만난 어떤 할매 이야기를 당시 현지에서 타전한 내 기사를 통해 새삼 상기하고자 한다. 딱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존해 활동 중인지 궁금하다. 


은허 부호묘 발굴 고고학도 정전샹(鄭振香/정진향)

            


<사람들> 은허 유적의 산증인 정전샹

'부호묘' 발굴한 신중국 1호 여성고고학자


2008.11.03 18:11:08


(안양<중국>=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핀을 꽂은 머리에 수더분한 옷차림. 키는 155㎝가 될까 말까 한 작은 체구. 은허 유적에서 만난 정전샹(鄭振香·79)에게 평범한 한국 할머니와 다른 구석이라곤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중국 고고학계와 세계 고고학계를 놀라게 한 '작은 거인'이다. 그에게 붙은 수식어는 화려하다. 그중에는 1949년 신중국 성립 이후 최초의 중국 여성 고고학자라는 타이틀이 있다. 


그와 친분이 남다른 선문대 이형구 교수의 주선과 통역으로 만난 이 작은 거인에게 우선 정말로 그가 제1호 중국 여성고고학자인지를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1949년 이전에 하남박물원에 고고학에 종사하는 여성 한 분이 계셨던 것으로 압니다. 아마 그 분이 최초가 아닐까 합니다." 


부호묘 발굴 고고학도 정전샹(鄭振香/정진향) 선생(오른쪽)과 이형구 선생.



하지만 그의 추가 설명을 들으니, 이 여성이 직접 고고학 조사를 벌인 적은 없고, 단순히 박물관에서 일한 경험만 있는 듯했다. 따라서 정전샹이 중국 제1호 여성고고학자라는 세간의 평가는 틀리지 않는 듯했다. 


갑골문이 쏟아지기 시작한 허난성(河南省) 안양시(安陽市) 소둔촌(小屯村)이란 고즈넉한 농촌마을에 대한 공식 발굴조사가 시작된 것은 1928년.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까지 총 15차에 이르는 발굴조사 결과 이 소둔촌 지역은 상(商)나라 마지막 도읍인 은허(殷墟)가 있던 곳으로 판명났다. 


정전샹은 은허 유적 발굴이 시작된 이듬해인 1929년 10월15일 허베이성(河北省) 둥광현(東光縣)에서 출생했다. 


은허 부호묘 발굴 현장. 부호를 이미지화한 조각이 섰고, 화면 왼편 작은 건물 출입구가 부호묘로 들어가는 입구다.



여든을 앞둔 그의 인생 절반 이상은 은허와 함께한 나날이었다. 1954년 베이징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59년 같은 대학 역사학 고고계(고고학 전공)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직후 중국의 유서 깊은 고도 뤄양(洛陽) 지역 발굴을 책임지는 '뤄양고고공작대'에 배치되어 일하게 된다. 


"그러다가 1962년 안양공작대로 옮겼지요. 1977년에는 공작대 발굴단장으로 승진했으며, 2002년 남편의 병 시중을 위해 베이징으로 옮겨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연구원이 되기 전까지 꼭 40년을 은허 유적 발굴조사에 종사했습니다." 


은허 생활 40년의 하이라이트는 1976년 '부호묘'(婦好墓) 발굴이 꼽힌다. 


부호묘 순장인골


이 묘는 부호(婦好)란 여성이 묻힌 곳이라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발견 위치는 은허 궁전종묘지구 중에서도 병조(丙組)라고 일컫는 유적의 서남쪽이며, 2008년 현재 이곳은 현장 박물관 형태로 발굴현장과 그 출토 유물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은허 유적지 중에서도 관람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부호는 문헌에는 보이지 않으나, 갑골문과 이 고분에서 출토된 청동기에 적힌 명문을 통해 존재가 확인된 여성으로 대략 기원전 1250년 이후 1192년까지 59년간 재위한 상나라 왕 무정(武丁)이 거느린 60여 명에 이르는 부인 중 한 명으로 나중에 무정을 뒤이어 즉위하는 조경(祖庚)과 조갑(祖甲)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모신'(母辛)이라 불리기도 한 부호는 갑골문에 나타난 행적을 조사한 결과 당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정치가이면서 특이하게도 군사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부호를 중국에서는 중국사 최초의 여성 군사전략가로 부르기도 한다. 


여느 상나라 때 무덤과 마찬가지로 땅을 깊이 파고들어가 조성한 이 부호묘는 발굴 결과 묘실 규모가 남북 5.6m, 동서 4m, 최대 깊이 7.5m로 밝혀졌으며 그 지상에는 향당(享堂)이라고 하는 능상(陵上) 건축물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발굴이 놀라웠던 점은 무덤 주인공이 확실히 밝혀지고 그 주인공이 왕실 최고권력자인 데다 무엇보다 도굴되지 않은 무덤이라는 데 있었다. 이런 위상에 걸맞게 이곳에서는 각종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옥기 755점, 뼈 제품 564점, 청동기 468점, 석기 63점, 도기 11점, 상아제품 5점 등이었다. 특히 명문이 있는 청동기가 190점이었으며 이 중 '부호'(婦好)라는 글자가 적힌 유물이 109건에 달했다. 이 외에 순장자가 16명에 개 6마리를 죽여서 묻은 것으로 밝혀졌다. 


부호묘 묘광 내부 청동기물 출토 양상. 청동기물은 모조품이며, 진품은 인근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1976년 안양공작대 부단장으로서 부호묘를 발견하고 발굴한 그 때 경험이 아직도 생생한 듯 정전샹은 "격동(激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1975년 겨울이었습니다. 농민이 이 부호묘가 잠자던 곳을 개간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판축(版築·켜쌓기) 대지가 노출됐습니다. 그래서 당국에 현장 조사 필요성을 요청하고 이듬해에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지표를 약 40㎝가량 파고 들어가니 바로 건물터가 나왔어요. 상나라 시대 주거지였지요. 주거지 조사를 끝내고 그 밑에서 저장구덩이를 찾았지요." 


이것으로 조사를 끝낼 예정이었다. 한데 심상치 않은 징후가 감지됐다. 


"저장구덩이 밑에서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무덤(부호묘) 상면이 노출됐습니다. 저장구덩이가 무덤 입구를 파괴하고 조성된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무덤 입구가 작아서 큰 발굴성과를 기대한 건 아닙니다. 그랬는데 실로 엄청난 유물이 쏟아졌으니, 당시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특히 이 부호묘 출토 청동기에 보이는 '부호'라는 글씨가 기존에 출토된 갑골문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흥분은 배가 됐다.      


은허 생활 40년 중 문화대혁명이란 회오리는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그땐 주로 발굴 유물들을 정리하는 일만 조용히 했습니다. 다른 활동이 불가능했으니까요." 


이형구 교수는 정전샹 교수를 일러 "은허 발굴의 산증인"이라고 평가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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