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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7세 풍월주다. 나중에 설화랑(薛花郞)으로 바꾸었다. '薛'은 성씨이며, 원효의 조상이다. 

화랑세기 설화랑 전 : 7세 설화랑(薛花郞)은 처음 이름이 설원랑(薛原郞)이다. 금진낭주(金珍娘主) 사자(私子)이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미륵선화(彌勒仙花)·미시랑(未尸郎)·진자사(眞慈師) :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은 성이 김씨요 이름은 삼맥종(彡麥宗)이니, 심맥종(深麥宗)이라고도 한다. 양(梁) 대동(大同) 6년 경신(庚申.  540)에 즉위(卽位)했다. 백부(伯父)인 법흥왕(法興王)의 뜻을 사모해 한 마음으로 부처를 받들어 널리 절을 세우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중이 되기를 허락했다. 왕은 또 천성이 풍미(風味)가 있어 크게 신선을 숭상하여 민가(民家) 처녀로 아름다운 이를 뽑아 원화(原花)를 삼았으니, 이는 무리를 모아 사람을 뽑고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을 가르치려 함이었으니, 이는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요(大要)이기도 했다. 이에 남모랑(南毛娘)과 교정랑(姣貞娘)의 두 원화를 뽑으니, 이에 모인 사람이 3~4백 명이나 되었다. 교정(姣貞)이 남모(南毛)를 질투하여 술자리를 마련하여 남모에게 취하도록 먹인 후에 남몰래 북천(北川)으로 데리고 가서 큰 돌을 들고 그 속에 묻어 죽였다. 이에 그 무리는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서 슬피 울다가 헤어졌다. 그러나 그 음모를 아는 자가 있어 노래를 지어 거리의 어린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남모 무리가 듣고는 그 시체를 북천(北川)에서 찾아내고 교정랑을 죽여 버리니, 이에 대왕(大王)은 令을 내려 원화 제도를 폐지했다. 그런 지 여러 해가 되자 왕은 또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영을 내려 양가(良家) 남자 중에 덕행(德行)이 있는 자를 뽑아 이름을 고쳐 화랑(花娘(郞))이라 하고, 비로소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花郞) 국선(國仙)의 시초다. 그런 까닭에 명주(溟洲)에 비(碑)를 세우고, 이로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것을 고쳐 착한 일을 하게 하고 웃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유산하게 하니 오상(五常)ㆍ육예(六藝)와 삼사(三師)ㆍ육정(六正)이 왕의 시애에 널리 행해졌다(국사國史에 보면, 진지왕眞智王 대건大建 8년 경庚(병丙)신申에 처음으로 화랑花郞을 받들었다 했으나 이것은 사전史傳의 잘못일 것이다). 진지왕(眞智王) 때에 이르러 흥륜사(興輪寺) 중 진자(眞慈. 정자貞慈라고도 한다)가 항상 이 당(堂)의 주인인 미륵상(彌勒像) 앞에 나가 발원(發願)하여 맹세하기를 “우리 대성(大聖)께서는 화랑(花郞)으로 화(化)하시어 이 세상에 나타나 제가 항상 수용(수容)을 가까이 뵙고 받들어 시중을 들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기원하는 마음이 날로 더욱 두터워지자, 어느 날 밤 꿈에 중 하나가 말했다. “네가 웅천(熊天) 수원사(水源寺)에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자(眞慈)가 꿈에서 깨자 놀라고 기뻐하여 그 절을 찾아 열흘길을 가는데 발자국마다 절을 하며 그 절에 이르렀다. 문 밖에 탐스럽고 곱게 생긴 한 소년이 있다가 예쁜 눈매와 입맵시로 맞이하여 작은 문으로 데리고 들어가 객실로 안내하니, 진자가 올라가 읍(揖)하는 말하기를 “그대는 평소에 나를 모르는 터에 어찌하여 이렇듯 은근하게 대접하는가”라고 하니 소년이 대답했다. “나 또한 서울 사람입니다. 스님이 먼 곳에서 오시는 것을 보고 위로했을 뿐입니다.” 이윽고 소년이 문 밖으로 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자는 속으로 우연한 일일 것이라 생각하고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절의 중들에게 지난밤 꿈과 자기가 여기에 온 뜻만 얘기하면서 또 이르기를 “잠시 저 아랫자리에서 미륵선화를 기다리고자 하는데 어떻겠소”라고 하니 절에 있는 중들은 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근실한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천산(千山)이 있는데 예부터 현인(賢人)과 철인(哲人)이 살고 있어서 명감(冥感)이 많다고 하오. 그곳으로 가 봄이 좋을 게요.” 진자가 그 말을 쫓아 산 아래에 이르니 산신령(山神靈)이 노인으로 변하여 나와 맞으면서 말했다. “여기에 무엇 하러 왔는가.” 진자가 대답하기를 “미륵선화를 보고자 합니다”고 하니 노인이 또 말했다. “저번에 수원사(水源寺)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보았는데 다시 무엇을 보려는 것인가.”  진자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이내 달려 본사(本寺)로 돌아왔다. 그런 지 한 달이 넘어 진지왕(眞智王)이 이 말을 듣고는 진자를 불러 그 까닭을 묻고 말했다. “그 소년이 스스로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니 성인(聖人)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왜 성 안을 찾아보지 않았소.” 진자는 왕의 뜻을 받들어 무리들을 모아 두루 마을을 돌면서 찾으니 단장을 갖추어 얼굴 모양이 수려한 한 소년이 영묘사(靈妙寺) 동북쪽 길가 나무 밑에서 거닐며 놀고 있었다. 진자가 그를 만나보자 놀라서 말하기를 “이 분이 미륵선화다”고 했다. 그가 나가 묻기를 “낭(郎)은 댁이 어디시며 성(姓)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고 했다. 낭이 대답하기를 “내 이름은 미시(未尸)며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여의어 성이 무엇인지 모릅니다”고 했다. 이에 진자가 그를 가마에 태워 들어가 왕을 뵈니 왕은 그를 존경하고 총애하여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았다. 그는 자제(子弟) 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예의(禮儀)와 풍교(風敎)가 보통사람과 달랐다. 그의  풍류(風流)가 빛남이 거의 7년이나 되더니 어느날 갑자기 간 곳이 없어졌다. 진자가 몹시 슬퍼하고 그리워했다. 그러나 미시랑(未尸郎)의 자비스러운 혜택을 많이 입었고 맑은 덕화(德化)를 이어 스스로 뉘우치고 정성을 다하여 도(道)를 닦으니, 만년(晩年)에 그 역시 어디 가서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명하는 이가 말했다. “미(未)는 미(彌)와 음(音)이 서로 같고 시(尸)는 역(力)과 글자 모양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그 가까운 것을 취해서 바꾸어 부르기도 한 것이다. 부처님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 감동된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가끔 나타났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가리켜 미륵선화라 하고 중매하는 사람들을 미시(未尸)라고 하는 것은 모두 진자의 유풍(遺風)이다. 노방수(路傍樹)를 지금까지도 견량(見郎)[樹]이라 하고 또 우리말로 사여수(似如樹; 혹은 인여수印如樹)라고 한다. 찬(讚)한다. “선화(仙花) 찾아 한 걸음 걸으며 그의 모습 생각하니, 곳곳마다 재배함이 한결같았네. 문득 봄 되돌아가고 찾을 곳 영영 없으니, 누가 알았으랴, 상림(上林)의 一時春을” 

☞원랑(原郞) ☞설화랑(薛花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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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중대 고승인 원효가 환속한 뒤 스스로 일컬은 이름. 

삼국사기 권 제46(열전 제6) 설총 열전 : 설총(薛聰)은 자가 총지(聰智)고 할아버지는 나마 담날(談捺)이다. 아버지는 원효(元曉)이니, 처음에 승려가 되어 불경을 두루 통달하고 얼마 후에 환속해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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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중대 고승 원효의 아버지. 나마를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46(열전 제6) 설총 열전 : 설총(薛聰)은 자가 총지(聰智)이고 할아버지는 나마 담날(談捺)이며 아버지는 원효(元曉)인데, 처음에 승려가 되어 불경을 두루 통달하고 얼마 후에 환속하여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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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중대 고승으로 담날의 아들이고 설총의 아버지

삼국사기 권 제46(열전 제6) 설총 열전 : 설총(薛聰)은 자가 총지(聰智)이고 할아버지는 나마 담날(談捺)이며 아버지는 원효(元曉)인데, 처음에 승려가 되어 불경을 두루 통달하고 얼마 후에 환속하여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였다..(중략)..세상에 전하기는 일본국 진인(眞人)이 신라 사신 설 판관(判官)에게 준 시의 서문에 『일찍이 원효거사가 지은 금강삼매론(金剛三昧論)을 읽고 그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을 깊이 한탄하였는데, 신라국 사신 설씨가 거사의 손자라는 것을 듣고, 비록 그 할아버지를 보지는 못하였어도 그 손자를 만나니 기뻐서 이에 시를 지어 드린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1 태종무열왕 :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총장(總章) 원년(元年) 무진(戊辰; 668, 총장總章 무진戊辰이라면 이적李勣의 일이니 하문下文에 소정방蘇定方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만일 정방定方의 일이라면 연호는 용삭龍朔 2년 임술壬戌에 해당하며 평양平壤을 포위했을 때의 일이다)에 신라에서 청한 당나라 군사가 평양 교외에 주둔하면서 글을 보내 말하기를, '급히 군자(軍資)를 보내 달라'고 했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묻기를, '고구려에 들어가서 당나라 군사가 주둔한 곳으로 간다는 것은 그 형세가 몹시 위험하다.  그러나 우리가 청한 당나라 군사가 양식이 떨어졌는데 군량을 보내 주지 않는다는 것도 옳지 못하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했다.  이에 김유신이 아뢰었다. ‘신 등이 군자(軍資)를 수송하겠사오니 대왕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유신(庾信)ㆍ인문(仁問) 등이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국경 안에 들어가 곡식 2만 곡(斛)을 갖다주고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했다.  또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사와 합하고자 할 때 유신이 먼저 연기(然起)ㆍ병천(兵川) 두 사람을 보내서 그 합세할 시기를 물었다. 이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종이에 난새[鸞]와 송아지[犢]의 두 그림을 그려 보냈다. 신라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사람을 보내서 원효법사(元曉法師)에게 물었다. 원효는 해석하기를, '속히 군사를 돌이키라는 뜻이니 송아지와 난새를 그린 것은 두 물건이 끊어지는 것을 뜻한 것입니다' 했다.  이에 유신은 군사를 돌려 패수(浿水)를 건너려 할 때 명(命)을 내려 '뒤떨어지는 자는 베이리라' 했다. 이리하여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반쯤 건너자 고구려 군사가 쫓아와서 아직 건너지 못한 자를 잡아 죽였다.  그러나 이튿날 유신은 고구려 군사를 반격하여 수만 명을 잡아 죽였다.”

삼국유사 제3권 흥법(興法) 제3 동경흥륜사(東京興輪寺) 금당십성(金堂十聖) : 동쪽 벽에 앉아서 서쪽으로 향한 이상(泥像)은 아도(我道)ㆍ염촉(염촉)ㆍ혜숙(惠宿)ㆍ안함(安含)ㆍ의상(義湘)이다.  서쪽 벽에 앉아서 동쪽을 향한 이상(泥像)은 표훈(表訓)ㆍ사파(蛇巴)ㆍ원효(元曉)ㆍ혜공(惠空)ㆍ자장(慈藏)이다.

삼국유사 제3권 흥법(興法) 탑상(塔像) 제4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 :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의상전(義湘傳)을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의상은 영휘(永徽) 초년(650)에 당나라에 들어가 지엄선사(智儼禪師)를 뵈었다"한다.  그러나 부석사(浮石寺) 본비(本碑)에 의하면, "의상은 무덕(武德) 8년(625)에 태어나 어려서 중이 되었다.  영휘(永徽) 원년 경술(庚戌; 650)에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려고 고구려에 갔다가 어려운 일이 있어서 그대로 돌아갔다.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에 당에 들어가 지엄법사에게 배웠다. 

삼국유사 제3권 흥법(興法) 탑상(塔像) 제4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觀音)ㆍ정취(正趣), 조신(調信) : 그 후에 원효법사(元曉法師)가 뒤를 이어 와서 여기에 예(禮)를 올리려 하였다.  처음에 남쪽 교외(郊外)에 이르자 논 가운데에서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法師)가 희롱삼아 그 벼를 달라고 청하니, 여인은 벼가 잘 영글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니 한 여인이 월수백(月水帛)을 빨고 있다.  법사(法師)가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은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바친다.  법사(法師)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그를 불러 말한다.  "제호(醍호)스님은 쉬십시오."  그리고는 갑자기 숨고 보이지 않는데 그 소나무 밑에는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법사(法師)가 절에 이르자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의 자리 밑에 또 전에 보던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으므로 그제야 전에 만난 성녀(聖女)가 관음의 진신(眞身)임을 알았다.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했다.  법사는 성굴(聖窟)로 들어가서 다시 관음의 진용(眞容)을 보려고 했으나 풍랑(風浪)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떠났다.. 중략...이에 간자(簡子)를 만들어 절을 지을 곳을 점쳤더니 낙산(洛山) 위가 제일 좋다고 하므로 여기에 불전(佛殿) 3간을 지어 그 불상을 모셨다(고본古本에는 범일梵日의 일이 앞에 있고, 의상義湘과 원효元曉의 일은 뒤에 있다.  그러나 상고해 보건대, 의상義湘과 원효元曉 두 법사法師의 일은 당唐나라 고종高宗 때에 있었고, 범일梵日의 일은 회창會昌 후에 있었다.  그러니 연대年代가 서로 120여 년이나 차이가 난다.  그런 때문에 지금은 앞뒤를 바꾸어서 책을 꾸몄다.  혹은 범일梵日이 의상義湘의 문인門人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삼국유사 제4권 의해(意解) 제5 이혜동진(二惠同塵) : 이때 원효(元曉)가 여러 가지 불경(佛經)의 소(疏)를 찬술(撰述)하고 있었는데, 언제나 혜공 스님에게 가서 묻고 혹은 서로 희롱도 했다.  어느날 혜공과 원효가 시내를 따라 가면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다가 돌 위에서 대변을 보았다.  혜공이 그를 가리키면서 희롱의 말을 했다.  "그대가 눈 똥은 내가 잡은 물고기일 게요."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절을 오어사(吾魚寺)라 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원효대사의 말이라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세상에서는 그 시내를 잘못 불러 모의천(芼矣川)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제4권 의해(意解) 제5 원효불기(元曉不羈) : 성사(聖師) 원효(元曉)는 속성(俗姓)이 설씨(薛氏)다.  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하는데 지금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 사당이 있다.  아버지는 담날내말(談捺乃末)이다.  원효는 처음에 압량군(押梁郡) 남쪽(지금의 장산군章山郡) 불지촌(佛地村) 북쪽 율곡(栗谷)의 사라수(裟羅樹) 밑에서 태어났다. 그 마을 이름은 불지(佛地)인데 혹은 발지촌(發智村; 속언俗言에 불등을촌弗等乙村이라 한다)이라고도 한다.  사라수란 것을 속언에 이렇게 말한다.  "스님의 집이 본래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다.  그 어머니가 태기가 있어 이미 만삭인데, 마침 이 골짜기에 있는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였으므로 몹시 급한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속에서 지냈기 때문에 이 나무를 사라수라 했다."  그 나무의 열매가 또한 이상하여 지금도 사라율(裟羅栗)이라 한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옛적에 절을 주관하는 자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었다.  종이 적다고 관청에 호소하자 관리는 괴상히 여겨 그 밤을 가져다가 조사해 보았더니 한 알이 바리 하나에 가득 차므로 도리어 한 알씩만 주라고 판결했다.  이런 이유로 율곡(栗谷)이라고 했다. 스님은 이미 중이 되자 그 집을 희사(喜捨)해서 절로 삼고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했다.  또 사라수 곁에 절을 세우고 사라사(裟羅寺)라고 했다.  스님의 행장(行狀)에는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조부가 살던 곳을 따른 것이고, <당승전(唐僧傳)>에는 본래 하상주(下湘州) 사람이라고 했다.  상고해 보건대, 인덕(麟德) 2년 사이에 문무왕(文武王)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삽良州)를 두었는데 하주는 곧 지금의 창령군(昌寧郡)이요, 압량군(押梁郡)은 본래 하주의 속현(屬縣)이다. 상주는 지금의 상주(尙州)이니 상주(湘州)라고도 한다.  불지촌은 지금 자인현(慈仁縣)에 속해 있으니, 바로 압량군에서 나뉜 곳이다.  스님의 아명(兒名)은 서당(誓幢)이요, 또 한 가지 이름은 신당(新幢; 당幢은 우리말로 모毛라고 한다)이다. 처음에 어머니 꿈에 유성(流星)이 품 속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태기가 있었으며, 장차 해산하려 할 때는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으니, 진평왕(眞平王) 39년 대업(大業) 13년 정축(丁丑; 617)이었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나서 스승을 따라 배울 것이 없었다.  그의 유방(遊方)의 시말(始末)과 불교를 널리 편 큰 업적들은 <당승전(唐僧傳)>과 그의 행장에 자세히 실려있으므로 여기에는 모두 싣지 않고 오직 향전(鄕傳)에 있는 한두 가지 이상한 일만을 기록한다. 스님이 일찍이 어느날 풍전(風顚)을 하여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리겠는가/나는 하늘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 사람들이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太宗)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貴婦人)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賢人)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이때 요석궁(瑤石宮; 지금의 학원學院이 이것이다)에 과부 공주(公主)가 있었는데 왕이 궁리(宮吏)에게 명하여 원효(元曉)를 찾아 데려가라 했다. 궁리가 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 그는 이미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 사천沙川이니 사천沙川을 속담에는 모천牟川, 또는 문천蚊川이라 한다.  또 다리 이름을 유교楡橋라 한다)를 지나다가 만났다. 이때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궁리가 원효를 궁에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곳에 쉬게 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더니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여 경서(經書)와 역사에 널리 통달하니 신라 10현(賢) 중 한 사람이다. 방언(方言)으로 중국과 외이(外夷)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도 통달하여 육경(六經)과 문학(文學)을 훈해(訓解)했으니, 지금도 우리 나라에서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이 이를 전수(傳受)해서 끊이지 않는다. 원효는 이미 계(戒)를 잃어 총(聰)을 낳은 후로는 속인(俗人)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이름했다. 그는 우연히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상했다. 원효는 그 모양을 따라서 도구(道具)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한 "일체 무애인(無애人)은 한결같이 죽고 사는 것을 벗어난다"는 문구를 따서 이름을 무애(無애)라 하고 계속하여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어느날 이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敎化)시키고 읊다가 돌아오니, 이 때문에 상추분유(桑樞분유) 확후(확候)의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타佛)을 부르게 하였으니 원효(元曉)의 교화야말로 참으로 컸다 할 것이다.  그가 탄생한 마을 이름을 불지촌(佛地村)이라 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 하였으며 스스로 원효라 한 것은 모두 불교를 처음 빛나게 했다는 뜻이다.  원효도 역시 방언이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향언(鄕言)의 새벽이라고 한다. 그는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살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었는데, 제4권 십회향품(十廻向品)에 이르러 마침내 붓을 그쳤다.  또 일찍이 송사(訟事)로 인해 몸을 백송(百松)으로 나눴으므로 모든 사람이 이를 위계(位階)의 초지(初地)라고 말했다. 또한 바다 용의 권유로 해서 노상에서 조서(詔書)를 받아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었는데,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았으므로 각승(角乘)이라 했다. 이것은 또한 본시이각(本始二覺)이 숨어 있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법사(大安法師)가 이것을 헤치고 와서 종이를 붙였는데 이것은 또한 지음(知音)하여 서로 창화(唱和)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총이 그 유해(遺骸)를 부수어 소상(塑像)으로 진용(眞容)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종천(終天)의 뜻을 표했다. 설총이 그때 곁에서 예배하자 소상이 갑자기 돌아다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다본 그대로 있다.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이 살던 집 터가 있다고 한다. 찬(讚)한다. 각승(角乘)은 처음으로 <삼매경(三昧境)>의 축(軸)을 열었고 / 무호(舞壺)는 마침내 1만 거리 바람에 걸었네 / 달 밝은 요석궁(瑤石宮)에 봄 잠 깊더니 / 문 닫힌 분황사(芬皇寺)엔 돌아다보는 소상(塑像)만 비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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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46(열전 제6) 설총 열전 : 설총(薛聰)은 자가 총지(聰智)이고 할아버지는 나마 담날(談捺)이며 아버지는 원효(元曉)인데, 처음에 승려가 되어 불경을 두루 통달하고 얼마 후에 환속하여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였다. 총은 성품이 총명하고 예민하여 배우지 않고도 도술(道術)을 알았고, 방언(方言)으로서 구경(九經)을 읽어 후생을 가르쳤으므로 지금[고려]까지 학자들이 그를 높이 받든다. 또 능히 글을 잘 지었으나 세상에 전해오는 것은 없다. 단지 지금[고려] 남쪽 지방에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으나 글자가 마멸되고 떨어져나가 읽을 수 없으므로 끝내 그의 글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없다.신문대왕(神文大王)이 한 여름[5월]에 높고 밝은 방에 거처하면서 설총을 돌아보며 말하였다.“오늘은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처음으로 그치고 향기로운 바람이 살랑살랑 부니 비록 좋은 반찬과 애처로운 음악이 있더라도 고상한 말과 좋은 웃음거리로써 울적한 회포를 푸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대는 틀림없이 기이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을 것이니 나를 위해서 이야기 해주지 않겠는가?”설총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는 이야기를 하였다.“신이 들으니 옛날 화왕(花王)이 처음 전래하였을 때 이를 향기로운 정원에 심고 비취색 장막을 둘러 보호하자 봄 내내 그 색깔의 고움을 발산하니 온갖 꽃을 능가하여 홀로 빼어났습니다. 이에 가까운 곳과 먼 곳에서 아름답고 고운 꽃들이 달려와 찾아 뵙고 오직 자기가 뒤질까 걱정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한 아리따운 사람이 나타났는데 붉은 얼굴에 옥같이 하얀 잇발에, 얼굴을 곱게 단장하고 예쁜 옷을 입고 하늘거리며 와서 천천히 다가서며 말하였습니다. ‘첩(妾)은 눈처럼 흰 모래를 밟고 거울처럼 맑은 바다를 대하면서 봄비에 목욕을 하여 때를 벗기고 맑은 바람을 쏘이며 스스로 즐기는 장미인데, 왕의 아름다운 덕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실까 하오니 왕께서는 저를 받아 주시겠습니까?’또 한 대장부가 있어 베옷을 입고 가죽 띠를 둘렀으며, 흰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노쇠하여 비틀거리며 굽어진 허리로 걸어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저는 서울 성 밖의 큰 길 가에 살면서 아래로는 넓은 들 경치를 바라보고, 위로는 뾰죽히 높다란 산에 기대어 사는 백두옹(白頭翁)이라 합니다. 저으기 생각하옵건대 좌우에서 공급하는 것이 비록 풍족하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하고 옷장에 옷을 가득 저장을 하고 있더라도 반드시 좋은 약으로 기운을 북돋우고 아픈 침으로 독을 없애야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실을 만드는 삼[麻]이 있더라도 띠를 버릴 수 없다고 합니다. 무릇 모든 군자는 어느 세대나 없지 않으니 모르겠습니다만 왕께서도 그러한 뜻이 있으신지요?’그때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왔는데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리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화왕이 말하기를 ‘장부의 말에도 합당한 것이 있으나 아름다운 사람은 얻기 어려운 것이니 이를 어떻게 함이 좋을까?’ 하니 장부가 다가가 말하였습니다.‘저는 왕께서 총명하셔서 이치와 옳은 것을 알 것으로 생각하여서 왔는데 이제 보니 그것이 아닙니다. 무릇 임금된 자가 사특하고 아첨하는 자를 친근히 하고 정직한 사람을 멀리하지 않음이 드뭅니다. 이런 까닭에 맹가(孟軻)가 불우하게 몸을 마쳤고, 풍당(馮唐)은 낮은 낭중(郎中) 벼슬에 묶여 늙었습니다. 옛부터 이러하니 저인들 이를 어찌하겠습니까?’화왕이 말하기를 ‘내가 잘못 하였구나! 내가 잘못 하였구나!’ 하였답니다.”이에 왕이 슬픈 얼굴빛을 지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우화의 말 속에는 실로 깊은 뜻이 있으니 청컨대 이를 써서 임금된 자의 교훈으로 삼도록 하라.” 하고 드디어 설총을 발탁하여 높은 벼슬을 주었다. 세상에 전하기는 일본국 진인(眞人)이 신라 사신 설 판관(判官)에게 준 시의 서문에 『일찍이 원효거사가 지은 금강삼매론(金剛三昧論)을 읽고 그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을 깊이 한탄하였는데, 신라국 사신 설씨가 거사의 손자라는 것을 듣고, 비록 그 할아버지를 보지는 못하였어도 그 손자를 만나니 기뻐서 이에 시를 지어 드린다.』고 하였다. 그 시가 지금[고려]까지 전하는데 단지 그 자손의 이름을 알지 못할 뿐이다. 우리 현종 재위 13년 천희(天禧) 5년 신유(1021)에 이르러 홍유후(弘儒侯)로 추증되었다. 어느 사람은 말하기를 설총이 일찍이 당나라에 가서 공부를 하였다고 하나 그런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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