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용재(慵齋) 성현(成俔·1439~1504)의 불후한 야담필기류인 《용재총화(慵齋叢話)》 에 보이는 각종 공무원 신참 신고식 백태(百態)다. 신참 신고식을 면신례(免新禮)라 하니, 말 그대로 아마추어 티를 벗는 의식이라는 뜻이다. 그 폐단을 극력 주창하면서 그 개선을 촉구한 율곡 이이의 글은 이 블로그에 따로 있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제1권

○ 옛날에 신입자(新入者 새로 문과에 등과한 사람)를 제재한 것은 호사(豪士)의 기를 꺾고 상하의 구별을 엄격히 하여 규칙에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바치는 물품이 물고기면 용(龍)이라 하고, 닭이면 봉(鳳)이라 하였으며, 술은 청주이면 성(聖)이라 하며, 탁주이면 현(賢)이라 하여 그 수량도 제한이 있었다. 처음으로 관직에 나가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하고 10여 일을 지나 구관(舊官)과 자리를 같이하는 것을 면신(免新)이라 하여 그 정도가 매우 분명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관(四館 성균관ㆍ예문관ㆍ승문관ㆍ교서관)뿐만 아니라, 충의위(忠義衛)ㆍ내금위(內禁衛) 등 여러 위(衛)의 군사와 이전(吏典)의 복예(僕隸)들까지도 새로 배속된 사람을 괴롭혀서 여러 가지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졸라서 바치게 하는데 한이 없어 조금이라도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면 한 달이 지나도 동좌(同坐)를 불허하고, 사람마다 연회를 베풀게 하되 만약 기악(妓樂)이 없으면 간접으로 관계되는 사람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끝이 없다.

古者制馭新來。所以折豪士之氣。嚴上下之分。使就規矩也。其徵物。魚則稱龍。雞則稱鳳。酒則淸稱聖。而濁稱賢。其數亦有限。初出官曰許參。纔過十餘日。與之同坐。則曰免新。其程度甚明。今也非徒四館。如忠義衛內禁衛曁諸衛軍士吏典僕隷。侵毒新屬之人。凡十貴味。皆督徵之。無有紀極。少或不適於己。雖過一朔。不許同坐。人人皆令設宴。若無妓樂。則侵責無已。

○ 감찰이라는 것은 옛날의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의 직책인데, 그 중에서 직급이 높은 자가 방주(房主)가 된다. 상ㆍ하의 관원이 함께 내방(內房)에 들어가 정좌하며 그 외방(外房)은 배직한 순위에 따라 좌차(坐次)를 삼는데, 그 중에서 수석에 있는 사람을 비방주(枇房主)라 하고, 새로 들어온 사람을 신귀(新鬼)라 하여, 여러 가지로 욕보인다. 방 가운데서 서까래만한 긴 나무를 귀(鬼)로 하여금 들게 하는데, 이것을 경홀(擎笏)이라 하며 들지 못하면 귀는 선생 앞에 무릎을 내놓으며 선생이 주먹으로 이를 때리고, 윗사람으로부터 아랫사람으로 내려간다. 또 귀로 하여금 물고기 잡는 놀이를 하게 하는데, 귀가 연못에 들어가 사모(紗帽)로 물을 퍼내서 의복이 모두 더러워진다. 또 거미 잡는 놀이를 하게 하는데, 귀로 하여금 손으로 부엌 벽을 문지르게 하여 두 손이 옻칠을 하듯 검어지면 또 손을 씻게 하는데, 그 물이 아주 더러워져도 귀로 하여금 마시게 하니 토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또 귀로 하여금 두꺼운 백지로 자서함(刺書緘)을 만들어 날마다 선생 집에 던져넣게 하고, 또 선생이 수시로 귀의 집에 몰려가면 귀는 사모를 거꾸로 쓰고 나와 맞이하는데, 당중(堂中)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선생에게 모두 여자 한 사람씩을 안겨주는데, 이를 안침(安枕)이라 하며, 술이 거나하면 〈상대별곡(霜臺別曲)〉을 노래한다. 대관(臺官)이 제좌(齊坐)하는 날에 이르러서 비로소 자리에 앉는 것을 허용한다. 이튿날 아침 일찍 청에 나아가면 상관인 대리(臺吏)가 함께 뜰 안으로 걸어 들어가 뵙는데, 예가 끝나기도 전에 밤에 숙직한 선생들이 방안에서 목침을 가지고 큰 소리를 지르며 치는 짓이 있으므로, 신귀(新鬼)가 달아나다가 지체하면 그 몽둥이에 얻어맞기도 한다. 이런 풍습의 유래는 이미 오래되었는데, 성종(成宗)이 이를 싫어하여 신래(新來)를 괴롭히는 모든 일을 엄하게 금하니, 그 풍습이 조금 숙어졌으나 아직도 구습 그대로 폐하지 않은 것이 많다.

監察者。是古殿中侍御史之職。其中級高者爲房主。與上下有司。入內房正坐。其外房則以拜職久近爲座次。其中居首者。爲枇房主。新入者呼爲新鬼。侵辱萬狀。房中有長木如椽。令鬼擧之。名曰擎笏。不能擧則鬼以膝納于先生前。先生以拳歐之。自上而下。又令鬼作捕魚之戲。鬼入池水中。以紗帽挹水。衣服盡汚。又令作捉蛛之戱。鬼以手捫摩廚壁。兩手如漆。又使盥手。水甚穢黑。令鬼飮之。無不嘔吐。又鬼以厚白紙作刺書緘。日日投先生家。又先生無時到鬼家。鬼倒着紗帽出迎。設酌堂中。先生各挾一女而坐。謂之安枕。酒酣唱霜臺別曲。至臺官齊坐之日。始令許坐。翌日凌晨詣廳。上官臺吏齊行入謁庭中。禮未畢。夜直先生自房內持木枕。大呼擊之。新鬼走出。如或遲回。必遭其捧。風俗所由來者已久。 成宗惡之。凡侵虐新來者痛禁。其風小戢。仍舊不廢者亦多。


제2권

○ 삼관(三館) 풍속에는 남행원(南行員 조상의 덕으로 하던 벼슬아치)이 그 두목을 상관장(上官長)으로 삼아 공경해서 받들었고, 새로 급제하여 분속된 자는 신래(新來)라 하여 욕을 주어 괴롭혔으며, 또 술과 음식을 요구하되 대중이 없었으니 이는 교만한 것을 꺾으려 함이었다. 처음으로 출사(出仕)하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하고, 예(禮)를 끝내면 신면(新免)이라 하여 신면을 하여야만 비로소 구관(舊官)과 더불어 연좌(連坐)해서 잔치를 베풀었다. 말관(末官)이 왼손으로 여자를 잡고 오른손으로 큰 종을 잡아 먼저 상관장을 세 번 부르고, 또 작은 소리로 세 번 불러서 상관장이 조금 응하여 아관(亞官)을 부르면, 아관이 또한 큰 소리로 부른다. 하관(下官)이 이기지 못하면 벌이 있었으나, 상관이 이기지 못하면 벌이 없었다. 지위가 높은 대신이라도 상관장의 위에는 앉지 못하고, 세 관원 사이에 끼어 앉아서 부르되, 정일품에는 오대자(五大字), 종일품에는 사대자(四大字), 이품에는 삼대자(三大字), 삼품 당상관에는 이대자(二大字), 당하관은 다만 대선생(大先生)이라 부르고, 사품 이하는 다만 선생이라 부르되, 각각 성(姓)을 들어 이를 칭하였고, 부르고 난 뒤에는 또 신래자를 세 번 부르고, 또 흑신래자(黑新來者)를 세 번 부르는데, 흑(黑)은 여색(女色)이다. 신래자는 사모(紗帽)를 거꾸로 쓰고 두 손은 뒷짐을 하며 머리를 숙여 선생 앞에 나아가서 두 손으로 사모를 받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였는데, 이것을 예수(禮數)라 하였다. 직명(職名)을 외우되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 순함(順銜)이요,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면 역함(逆銜)이며, 또 기뻐하는 모양을 짓게 하여 희색(喜色)이라 하고, 성내는 모양을 짓게 하여 패색(悖色)이라 하였으며, 그 별명(別名)을 말하여 모양을 흉내내게 함을 ‘3천 3백’이라 하였으니 욕을 보이는 방식이 많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방(榜)을 내걸고 경하(慶賀)하는 날에는 반드시 삼관(三館)을 맞이한 뒤에 연석(筵席)을 베풀고 예를 행하였는데, 만약 신은(新恩)이 불공하여 삼관에게 죄를 지으면, 삼관은 가지 아니하고 신은도 또한 유가(遊街 급제자가 풍악을 앞세우고 웃어른이나 친척들을 찾아보는 것)하지 못하였다. 삼관이 처음 문에 이르러 한 사람이 북을 치면서 ‘가관호작(佳官好爵)’이라고 부르면, 아전들이 소리를 같이하여 이에 응하고 손으로 신은을 떠받쳐 올렸다 내렸다 하는데, 이를 경하(慶賀)라 하였고, 또 부모와 친척에게 경하하는 것을 생광(生光)이라 하였으며, 또 최후에 여인(女人)을 받들어 경하하는 것을 유모(乳母)라 하였다. 또 신은(新恩)은 방(榜)이 나는 대로 의정부ㆍ예조ㆍ승정원ㆍ사헌부ㆍ사간원ㆍ성균관ㆍ예문관ㆍ교서관ㆍ홍문관ㆍ승문원 등 여러 관사의 선배를 배알하고, 포물(布物)을 많이 걷어 이것으로 연회를 위한 음식을 만드는데, 봄에는 교서관이 먼저 행하되 홍도음(紅桃飮)이라 하고, 초여름에는 예문관이 행하되 장미음(薔薇飮)이라 하였으며, 여름에는 성균관이 행하되, 이를 벽송음(碧松飮)이라 하였다. 을유년 여름에는 예문관이 삼관(三館)을 모아 삼청동(三淸洞)에서 술을 마셨는데, 학유(學諭) 김근(金根)이 몹시 취하여 집으로 돌아가다가 검상(檢詳) 이극기(李克基)를 길에서 만났는데, “교우(交友)는 어디서 오는 길이기에 이렇게 취하였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장미(薔薇)를 먹고 온다.” 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 냉소(冷笑)하였다.

三館風俗。南行員尊其首爲上官長。敬謹奉之。新及第分屬者。謂之新來。侵辱困苦之。又徵酒食無藝。所以屈折驕氣也。始仕曰許參。終禮曰免新。然後與舊官連坐。開筵設酌。則末官以左手執女。右手執大鍾。先呼上官長者三。又細聲呼者三。上官長微應呼亞官。則亞官亦大聲呼之。下官不勝則有罰。上官不勝則無罰。雖位高大臣。不得坐上官長之上。與三官間坐呼。正一品五大字一品四大字二品三大字三品堂上二大字。堂下官只呼大先生。四品以下泛呼先生。各擧姓而稱之。呼畢。又呼新來者三。又呼黑新來者三。黑者女色也。新來倒着紗帽。以兩手負背低首至就先生前。以兩手圍紗帽而上下之。名曰禮數。誦職名。自上而下則順銜。自下而上則逆銜。又令作喜形曰喜色。作怒形曰悖色。言其別名。使爲其狀曰三千三百。其侵辱多端。不可勝言。放榜慶賀之日。必邀三館。然後設筵行禮。若有新恩不恭。得罪於三館。則三館不往。新恩亦不得遊街。三館初到門。一員擊鼓唱佳官好爵。諸吏齊聲應之。以手擎奉。新恩下上之曰慶賀。又慶父母族親曰生光。最後又奉女人。而慶之曰乳母。又新恩聯榜。拜謁于議政府禮曹承政院司憲府司諫院成均館藝文館校書弘文館承文院諸司先生。多徵布物。以爲飮宴之需。春時校書館先行之。曰紅桃飮。初夏藝文館行之。曰薔薇飮。夏時成均館行之。曰碧松飮。乙酉夏。藝文館聚三館飮于三淸洞。學諭金根泥醉還家。檢詳李克基路遇之。問交友從何來。何醉之至此。根答曰食薔薇而去。人有聞者皆齒冷。


제4권

○ 새로 급제한 사람으로서 삼관(三館)에 들어가는 자를 먼저 급제한 사람이 괴롭혔는데, 이것은 선후의 차례를 보이기 위함이요, 한편으로는 교만한 기를 꺾고자 함인데, 그 중에서도 예문관(藝文館)이 더욱 심하였다. 새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배직(拜職)하여 연석을 베푸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하고, 50일을 지나서 연석 베푸는 것을 면신(免新)이라 하며, 그 중간에 연석 베푸는 것을 중일연(中日宴)이라 하였다. 매양 연석에는 성찬(盛饌)을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시키는데 혹은 그 집에서 하고, 혹은 다른 곳에서 하되 반드시 어두워져야 왔었다. 춘추관과 그 외의 여러 겸관(兼官)을 청하여 으레 연석을 베풀어 위로하고 밤중에 이르러서 모든 손이 흩어져 가면 다시 선생을 맞아 연석을 베푸는데, 유밀과(油蜜果)를 써서 더욱 성찬을 극진하게 차린다. 상관장(上官長)은 곡좌(曲坐)하고 봉교(奉敎) 이하는 모든 선생과 더불어 사이사이에 끼어 앉아 사람마다 기생 하나를 끼고 상관장은 두 기생을 끼고 앉으니, 이를 ‘좌우보처(左右補處)’라 한다. 아래로부터 위로 각각 차례로 잔에 술을 부어 돌리고 차례대로 일어나 춤추되 혼자 추면 벌주를 먹였다. 새벽이 되어 상관장이 주석에서 일어나면 모든 사람은 박수하며 흔들고 춤추며 〈한림별곡(翰林別曲)〉을 부르니, 맑은 노래와 매미 울음소리 같은 그 틈에 개구리 들끓는 소리를 섞어 시끄럽게 놀다가 날이 새면 헤어진다. 

新及第入三館者。先生侵勞困辱之。一以示尊卑之序。一以折驕慢之氣。藝文館尤甚。新來初拜職設宴。曰許參。過五十日設宴。曰免新。於其中間設宴。曰中日宴。每宴徵盛饌於新來。或於其家。或於他處。必乘昏乃至。請春秋館及諸兼官。例設宴慰之。至夜半諸賓散去。更邀先生設席。用油蜜果尤極盛辦。上官長曲坐。奉敎以下與諸先生間坐。人挾一妓。上官長則擁雙妓。名曰左右補處。自下而上。各以次行酒。以次起舞。獨舞則罰以酒。至曉。上官長乃起於酒。衆人皆拍手搖舞。唱翰林別曲。乃於淸歌蟬咽之間。雜以蛙沸之聲。天明乃散。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 卷之上 융경(隆慶) 4년 庚午(1570·선조 3) 3월조에 보이는 기사 중 하나다. 


○ 임천(林川)에 임금님 태(胎)를 묻었다. 임금께서 처음 즉위하실 때 조정 공론이 선대 전례에 따라 땅을 골라 태를 묻고자 하여 잠저(潛邸)에다가 태의 소재를 물어 그 동산 북편 숲 사이에서 찾아서는 그것을 묻을 곳을 가렸다. 강원도 춘천 땅에 묻으려고 산역(山役)을 거의 끝내고 정혈(正穴)을 살폈더니 그곳은 옛날 무덤이었다. 그래서 다시 황해도 강음(江陰 지금의 금천(金川))으로 옮겨 터를 닦으니 정혈 수십 보 밖에 작은 항아리가 묻힌 것을 발견해, 그곳도 옛날 무덤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관찰사 구사맹(具思孟)이 “이는 정혈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단지 작은 항아리뿐이요 다른 것은 없으니 이것 때문에 대역(大役)을 폐할 수는 없다”고 하고, 의논한 결과 그곳에 태를 묻기로 했다. 산역을 거의 마칠 무렵 조정에 이 소식이 알려져 헌부(憲府)에서는 구사맹을 아뢰지 아니한 죄로 논핵하여 파면하고, 또 대신들이 더럽혀진 곳에다 태를 묻을 수 없다 해서 충청도 임천(林川)으로 옮긴 것이다. 그때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었는데, 돌을 운반하느라 고생했다. 한번 임금의 태를 묻는 일로 세 도(道)가 피해를 보았으니 식자들이 탄식했다. 

삼가 생각건대, 임금은 그 숭고함이 이미 극에 이르러 있다. 때문에 신하된 이는 임금의 뜻대로 받들기만 하는 것을 존경이라 여기지 않고 좋은 일을 실행하도록 책망하는 것을 공손으로 여겨야 한다. 흉년을 당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진 때에 대신과 대간(臺諫)이 임금을 바로잡아 민생을 구제하는 데 급급하지 못하고, 태경(胎經)의 설(說)에 현혹되어 누차 임금의 태를 옮겨 삼도의 민력을 다하고도 가엾게 생각하지 않으니, 무어라 해야 하겠는가. 산릉(山陵)을 택하는 일이 태를 묻는 일보다 더 중요한데도 오히려 옛날 무덤을 피하지 않고 남의 분묘(墳墓)를 파내기까지 하는데, 태를 묻는 데만 옛 무덤을 피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또 국내의 봉만(峯巒)은 수효가 한정되고 임금의 역대(歷代)는 무궁할 것이니, 태 묻는 곳을 두 번 쓰지 못한다면 나중에는 태 묻을 곳을 국외(國外)에서 구할 것인가, 이는 계승해 나갈 일이 아님이 분명하다. 

○ 藏胎於臨川。初 上卽位。朝議欲依 祖宗例擇地藏聖胎。求於潛邸。得之園北松間。乃擇地。將藏于江原之春川地。功役垂畢。審其正穴。是古藏也。乃移于黃海之江陰。開基之際。去正穴數十步外。有埋小甖者。或疑其古藏。觀察使具思孟曰。此非正穴。且只有小甖無他物。不可以此輕廢大役。衆議乃定。功役亦垂畢。朝廷聞其事。憲府論思孟不啓稟之罪罷之。大臣以爲不當藏于汙穢之處。仍移于忠州之林川。于時百姓飢饉。勞於運石。一藏聖胎。害遍三道。識者嘆之。

謹按。人君崇高已極。故人臣不以承奉爲敬。以責難爲恭。當凶荒生民塗炭之際。大臣臺諫不汲汲於匡 上救民。而惑於胎經之說。屢移聖胎。竭三道民力。而莫之恤。謂之何哉。山陵卜兆。重於藏胎。而猶不避古藏。至於掘人墳墓。而藏胎獨避古藏何歟。且國內峰巒。只有此數歷世無窮。藏胎不可再用。則抑求之境外乎。其非可繼之道明矣。


태를 묻는 일을 안태(安胎)라고 한다. 이에서 안은 안장 혹은 매장한다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비단 율곡의 증언이 아니라 해도, 그 행위는 여러 모로 임금님 시체를 묻는 매장 행위와 계속 비교되곤 했다. 선조는 독특하다. 그 내력이 도저히 임금이 될 자격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었다. 느닷없이 마른하늘 날벼락처럼 각중에 왕이 되어 용상에 앉았다. 그 이전 왕들은 장자가 아닌 일이 많았지만, 예외 없이 적통 왕자들이었다. 그런 까닭에 초창기 왕을 제외하고는 태어나자마자 왕자의 예로써 태를 안장했다. 하지만 선조는 달랐으니, 자격이 없는 왕실 떨거지 상태에서 느닷없이 왕이 되니, 그 태를 도로 찾아내어 이젠 왕에 걸맞는 안태 의식을 치러야 했다. 

율곡은 이에서 그 과정을 정리한다. 우여곡절이 있었던 듯, 초반기 두 군데 안태할 장소로 택한 곳이 묘하게도 이전에 쓴 무덤이 있던 곳이었다. 그것이 불길하고 불결하다 해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한데 율곡은 이를 비판한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폐를 백성들에게 끼쳤기 때문이다. 안태보다 더 중요한 의식인 왕릉 조성에는 남의 무덤이라 해서 자리를 피하지 않는데, 그보다 덜 중요한 안태를 하면서 왜 이런 지랄발광을 떠냐는 요지다. 

일반 사대부가에서는 태를 집안 어딘가에 묻었음을 추찰한다. 안태 의식이 한국사에서는 고려시대 이전에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가장 확실한 출발은 김유신이거니와, 그의 열전에서 김유신 태는 출생지인 진천에다가 묻었다 삼국사기 그의 열전에서 이르거니와, 그것이 지금도 남아있다 했으니, 김부식이 증언한 그의 태실은 지금도 엄존한다. 

기타 고려시대엔 안태 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그 가장 확실한 증좌가 마왕퇴 백서에 보인다. 그것이 생성된 연대는 대략 기원전 2세기 초중반이거니와, 이로써 잡는다면 태를 안장하는 의식은 중국에서는 적어도 서한시대 초기 이래에는 있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 卷之上 융경(隆慶) 3년 기사(己巳·1569·선조 2) 9월조에 보이는 기사 중 하나다. 

○ (선조 임금이) 사관(四舘 성균관ㆍ예문관ㆍ승문원ㆍ교서관)에서 새로 과거에 합격하여 들어온 신진들에게 침학(侵虐·학대)하던 풍습을 혁파토록 명하셨다. 이이가 임금께 아뢰기를 “인재를 양성하는 효과는 비록 하루아침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나, 다만 교화(敎化)를 해치는 폐습은 개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처음 과거에 합격한 선비들을 사관(四舘)에서 ‘신래(新來·처음 온 사람이라는 뜻)’라 지목하여 곤욕을 주고 침학(侵虐)하는데 하지 않는 짓이 없습니다. 대체로 호걸의 선비는 과거 자체를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도 않는데, 하물며 갓을 부수고 옷을 찢으며 흙탕물에 구르게 하는 등, 체통을 완전히 잃게 하여 염치를 버리게 한 뒤에야 사판(仕版·벼슬아치 명부)에 올려주니, 호걸의 선비치고 누가 세상에 쓰이기를 원하겠습니까. 중국에서는 새로 급제한 사람을 접대하는 것이 매우 예모(禮貌)를 지킨다 하니, 만일 이 일을 듣게 되면 반드시 오랑캐 풍속이라 할 것입니다”고 했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침학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어느 때부터 시작한 것인가” 하니, 이이가 대답하기를 “글에 전하는 것은 없습니다. 단지 고려 말에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고, 과거에 뽑힌 사람이 모두 귀한 집 자제(子弟)로 입에 젖내 나는 것들이 많아, 그때 사람들이 ‘분홍방(紛紅榜)’이라 지목하고 분격하여 침욕(侵辱)하기 시작하였다 합니다”고 했다. 임금께서는 “이는 개혁해야 한다” 하시고는 드디어 통절(痛切)하게 개혁토록 명하셨다.

○ 命革四館侵虐新進習。李珥白 上曰。作人之效。雖非一朝可見。但弊習傷敎者則不可不革。今者士之初登第者。四館目爲新來。汙辱侵虐。無所不至。夫豪傑之士。尙不以科擧爲念。況使之毀冠裂服。宛轉泥水中。盡喪威儀。以棄廉恥。然後乃登仕版。則豪傑之士孰肯爲世用乎。 中廟接待新恩。頗加禮貌。若聞此事。則必以爲胡風矣。 上曰。侵虐何意。昉於何代耶。珥曰。於傳無徵。但聞麗末科擧不公。登第者多貴家子弟。口尙乳臭者。故時人目之曰粉紅榜。人情憤激遂肇侵辱云。上曰此可革也。遂傳敎痛革。

이는 과거에 합격하고서 일선에 배치된 공무원 생활의 시작에서 당시 광범위하게 유통한 폐습 혁파를 논의한 것이니, 신참 신고식이 혹되었음을 말해주는 증좌로써 자주 끌어대곤 한다. 이에서 율곡은 그 실상으로써 갓을 부수고 옷을 찢으며 흙탕물 구르기를 들거니와, 그 실상은 이보다 더 참혹했음을 알 수 있거니와, 그 구체 실상은 율곡보다 꼭 백년 전을 살다간 성현의 증언을 통해서 우뚝하게 관찰한다. 

그렇다면 이이가, 그리고 그에 부응해 선조 또한 혁파하고자 한 신참신고식 전통은 이때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는가? 그것이 아님은 딴 데 볼 것 없이 저 유구한 전통이 아주 최근까지 한국 군대문화에 남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알리라. 그때 뿐이었다. 잠시 그 폐습이 자취를 감추었을지 모르나, 그 전통은 이내 살아났다. 

이이가 말한 구체의 실상과 그 이후 유존하는 악습은 계속 보강키로 한다. 

+ Recent post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