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이색6

왜 조선의 이데올로그들은 이색을 개망신 주었는가? 역성혁명에 동참도, 동의도 못한 목은 이색은 충신의 길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신왕조 개창에 죽음으로 저항할 수 있었지만 그는 나약한 지식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성계에 차지하는 위치는 실로 막중해 이미 당대에 유학의 종장, 오야붕으로 통했다. 역성혁명 무렵 이색을 죽이라는 주장이 빗발쳤지만 이성계가 죽일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명분이었다. 죽여서 골치 아픈 지식인 한 명 처단하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명분이 약했다. 여진족에 다름 없는 성계는 찬탈이란 오명을 두려워했다. 그 찬탈을 선양으로 미화하려면 목은이라는 이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역시 목은은 거부했다. 실로 소극적이었지만 그는 결코 찬동하지 않았다. 이런 그는 씁쓸히 고려가 패망하는 장면을 목도하고는 4년인가를 더 살다 생을 마감.. 2024. 2. 13.
목은 이색을 어찌 볼 것인가? 고려사 전공 A 교수의 목은 이색에 관한 책을 붙잡고 연짱 두세 시간 동안 본문 280쪽 중 120쪽을 독파했다. 중간 감상을 적는다. 1. 이색은 최치원의 복사판이다. 필자가 말하는 이색은 삶이 내가 일필휘지로 탈초하여 신라사학보인가 한국고대사탐구를 통해 공간한 '황금방 최치원의 비애' 그 복사판이다. 최치원이 그러했듯이 이색 역시 화려한 금뱃지를 무기로 세상을 경영하고자 고국에 돌아왔지만, 세상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경륜이 아니라 외교문서 수발에 지나지 않았다. 최치원은 쏟아지는 중놈들 전기 써달라는 청탁을 견디지 못하고 가야산으로 들어가서는 아무도 몰래 죽어버렸다. 마찬가지로 화려한 옥스브리지 하버드예일 장학생 출신 이색에게 권력이 요구했던 것은 너는 외교 문서나 짓고, 그거 데스킹이나 하고 자빠.. 2024. 2. 1.
고려 묘지명 최고 인기 작가는 누구? 고려 후기 묘지명은 한 30%가 목은 이색(1328-1396) 작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목은의 글이 많다. 물론 그가 워낙 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글을 받아 망자의 가는 길을 보다 영광스럽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겠다. 하지만, 이색이 정치가이자 관료이기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과연 그에게 서로 다른 가문의 행장들을 봐가면서 이렇게 많은 산문을 쓸 시간은 있었던가 의문스럽다. 혹 아들이나 제자에게 대필을 시키지는 않았을지, 틀을 갖춰놓고 그에 맞춰서 필요한 표현이나 사건들을 끼워맞춘 것은 아닐지 궁금해지는데, 진실은 저 너머에라도 과연 있을까. *** 편집자注 *** 글, 특히 비문 잘 쓴다 소문나는 일이 달갑지만은 않아 거꾸로 생각하면 얼마나 큰 고통이겠는가? 첫째 거짓말을 해야 한다. 묘지명이.. 2023. 2. 9.
이색李穡 서문으로 추찰하는 주관육익周官六翼 동문선 제87권 / 서(序) 주관육익서周官六翼序 이색(李穡) 천지 사이에 나라를 세우고 하늘을 대신하여 행사하는 이를 천자天子라 이르고, 천자를 대신하여 분배받은 땅을 맡아서 다스리는 자를 제후諸侯라 하니, 지위는 상하가 있고 세력은 대소가 있어 결코 문란할 수 없는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주역周易》 이괘履卦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지가 서로 합심하면 태평함을 이루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비색한 것이니, 그 상하의 정을 통하고 대소의 분을 정하여 하늘의 명령을 보답하고, 사람의 기강을 수립할 것을 구하자면 옛글에서 상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자가 서書를 산정하여 당唐ㆍ우虞에서 시작하였는데, 지금 그 두 전典을 읽어보면 오히려 그 시절에도 관을 명하는 데는 도유都兪ㆍ해양諧讓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 2020. 10. 9.
문집의 유전 : 《가정집(稼亭集)》의 경우 고려말 문사인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왔으며, 어떻게 보완 유전되게 되었는지는 현전하는 이 문집에 붙은 네 시기 발(跋)을 보면 여실하다. 아래는 그 시기별 발문이다.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7에 의한다. 1. 초간본(初刊本)가정 이중보는 나와 똑같이 익재(益齋) 문하 출신이요, 또 한원(翰苑)에서 함께 노닐었던 인연도 있다. 무릇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그에게 물으면서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렀는데, 허망하게도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아, 애석한 일이다. 지금 그의 아들인 밀직 제학(密直提學) 이색(李穡)이 신축년(1361, 공민왕10) 파천(播遷)하는 창황(蒼黃)한 때를 당해서도 유고(遺稿)를 잃지 않고 20권으로 엮은 다음에 매.. 2018. 2. 25.
가정(稼亭) 이곡(李穀·1298~1351) 연보 그의 사후 아들 이색(李穡)과 사위 박상충(朴尙衷)이 엮은 《가정집(稼亭集)》 所收 ‘가정선생연보(稼亭先生年譜)’에 의한 그의 일생은 다음과 같다.(출처 한국고전번역원 DB) 대덕(大德) 2년 무술(1298, 충렬왕 24) : 7월 임인일에 공이 태어나다. 연우(延祐) 4년 정사(1317, 충숙왕 4) :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하다. 박효수(朴孝修)가 감시(監試)하다. 연우 7년 경신(1320, 충숙왕 7) : 가을에 수재과(秀才科)에 제2명(第二名)으로 합격하다. 익재(益齋) 선생 이제현(李齊賢)이 지공거(知貢擧)였고, 박효수가 동지공거(同知貢擧)였다. 복주 사록참군사(福州司錄參軍事)에 조용(調用)되다. 태정(泰定) 3년 병인(1326, 충숙왕 13) : 가을에 정동성(征東省) 향시(鄕試)에 제3명으로.. 2018. 2. 25.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