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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은 외국어 습득 능력이 꽝이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아버지 이곡이 벼슬살이를 하는 연경燕京으로 유학가서 그쪽에서 삼년 정도 생활을 하고는 외국인 특별전형에도 합격했지만 말이 도무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글은 좀 되고 외국생활이란 프리미엄이 붙으니 귀국 뒤에는 외교분야에서 맹활약하게 되고 이것이 그의 출세 수단이 된다.

원이 회복 불능으로 쇠미하고 남경에 기반을 둔 명 왕조가 개창하자 외교사절로 목은이 남경에 간다. 그를 면담한 무뢰배 출신 황제 주원장은 양다리 걸치기 하는 고려에 야마가 한껏 돌았다. 대뜸 욕찌꺼리 퍼붓고는 "네놈이 중국 유학을 했다니 중국말로 대답해 보라"니 목은이 몇 마디 떠듬거린 모양이다. 그걸 듣던 깡패 원장이가 목은을 다시 경멸한다.

"네 놈 중국어는 나하추의 중국어 같구나" 

나하추는 전쟁영웅 구국영웅 이성계를 만드는 신화에 그 결정적인 찬조자로 자주 등장한다.

역성혁명에 동참도, 동의도 못한 이색은 충신의 길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신왕조 개창에 죽음으로 저항할 수 있었지만 그는 나약한 지식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성계에 차지하는 위치는 실로 막중해 이미 당대에 유학의 종장, 오야붕으로 통했다. 역성혁명 무렵 이색을 죽이라는 주장이 빗발쳤지만 이성계가 죽일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명분이었다. 죽여서 골치 아픈 지식인 한 명 처단하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명분이 약했다.


여진족이나 다름없는 성계는 찬탈이란 오명을 두려워했다. 그 찬탈을 선양으로 미화하려면 목은이라는 이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역시 목은은 거부했다. 불쏘시개가 되는 일을 그는 거부했다. 실로 소극적이었지만 그는 결코 찬동하지 않았다. 이런 그는 씁쓸히 고려가 패망하는 장면을 목도하고는 4년인가를 더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태조실록 목은 졸기를 보았는가? 사람을 이리도 조롱할 수는 없다.


그 졸기에 왜 목은이 중국어 실력 개판이라 나하추에 빗대어 주원장한테 개망신을 당한 사건을 굳이 넣었겠는가? 이 왜를 생각하지 않고 이 왜를 묻지 않는 역사는 눈뜬 당달봉사다. 한데 아무도 이 왜why를 묻지 않았다. 

왜?

하필 조선의 이데올로그들은 목은 졸기에 나하추 운운을 왜 넣었을까?

고려말 지성계 주류로 침투한 주자성리학은 그 태생이 반불교다. 실제 주자의 각종 어록엔 요즘 이단에 대한 극언을 서슴지 않는 한국사회의 개독 윤리와도 흡사하다. 하지만 이들이 옹립한 성계 이씨는 성리학과는 거리가 전연 멀었으니 첫째 공부를 안했으며 둘째 생평을 전장에서 말 위에서 보냈다. 더구나 그는 철두철미 고려인이다. 이건 여진족 계통이냐는 문제와는 관계없다.


고려시대 지배계층에는 불교에 대한 증오가 거의 없다. 이들에겐 공자와 석가가 한몸이다. 부식 김씨가 그랬고 제현 이씨가 그러했으며 더구나 고려말 유학의 종장이라는 목은 역시 철두철미 석가의 재가 신도였다. 이는 석가를 증오한 소위 신지식인들에게 포박된 성계도 마찬가지라 망나니 아들 방원이한테 쫓겨난 뒤엔 회암사로 들어가 아주 중이 된 성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계는 중이다. 이 점 망각하면 안된다. 머리 기른 중..이것이 성계의 정체다. 신왕조 개창 이후 불교를 폐하라는 상소가 빗발치자 야마 돈 성계가 말한다.

"유학의 종장인 이색도 부처 신도다. 씨잘데기 없는 말 마라. 한번만 더 지껄이면 죽여버린다"

척불에 맞서 호불을 해야 하는 성계에게 목은은 한줄기 빛이었고 탈출구였다. 목은을 죽이지 않은 한 이유다.


태조실록 권제7, 태조 4년(1395) 3월 4일 정유 첫 번째 기사로 이성계가 자기가 묻힐 묏자리를 둘러본 일이 다음과 같이 실렸다. 

상께서 과주(果州)로 거둥하여 수릉(壽陵) 자리를 살폈다. 돌아올 때 도평의사사 주최로 두모포(豆毛浦) 선상(船上)에서 술상을 차리고 여러 신하가 차례로 술잔을 올렸다. 정도전이 나와서 말하기를 “하늘이 성덕(聖德)을 도와 나라를 세웠으매, 신들이 후한 은총을 입고 항상 천만세 향수(享壽)하시기를 바라고 있사온데, 오늘날 능 자리를 물색하오니, 신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하고 흐느껴 눈물 흘리니, 임금이 말했다. “편안한 날에 미리 정하려고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우는가?” 왕심촌(往尋村) 노상(路上)에 이르러 임금이 말을 달려 노루를 쏘려 했지만, 마부 박부금(朴夫金)이 재갈을 잡고 놓지 아니하므로, 임금이 그만두었다. 

上如果州, 相壽陵地。 將還, 都評議使司享于豆毛浦船上, 群臣以次獻觴。 鄭道傳進曰: "天佑聖德, 肇建丕基, 臣等蒙恩至厚, 常願千萬歲壽。 今日相地, 臣不勝感愴。" 因泣下, 上曰: "欲於平安之日, 預定之耳, 何泣爲!" 至徃尋 村路上, 上欲馳馬射獐, 僕隷朴夫金執鞚不放, 上乃止。 

같은 실록을 더 따라가면 같은 해 7월 11일 임인에는 

“상께서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과 좌사 남재(南在)와 참지문하 남은(南誾)과 중추원사 이직(李稷)에게 명하여 광주(廣州)에 가서 수릉(壽陵)을 살피게 했다” 

上命判三司事鄭道傳、左使南在、參知門下南誾、中樞院使李稷, 相壽陵地于廣州。 

고 하며, 이듬해 5년 4월 6일 계사에는 “상이 광주(廣州)를 지나다가 수릉(壽陵)의 땅을 보았다(上過廣州, 相壽陵之地。)”고 했으며, 이어 같은 해 9월 28일 계미에는 “전라도 역부(役夫)들이 수릉(壽陵)의 개석(蓋石)을 운반하다가 넘어져서 손발을 부러뜨린 자가 89인이나 되었다(全羅道役夫輸壽陵蓋石, 顚仆傷折手足者, 八十九人。)”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광주에다가 묏자리를 정하고, 그 조성에 나섰음을 본다. 

또 같은 해 11월 19일 계유에는 이성계가 직접 “태평관에 거둥하여 사신을 연회하고, 수릉(壽陵)에 갔다(幸太平館宴使臣, 遂如壽陵。)”고 하니,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바깥 행차를 이용해 냅다 자기가 묻힐 곳을 직접 돌아봤다. 

이어 같은 해 12월 24일 무신에 다시 한 번 수릉(壽陵)에 직접 거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자신이 직접 골라 만든 땅에 묻힐 수가 없었다. 태종 8년 5월 24일, 그가 죽었다.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 8년 6월 12일 기축에 산릉 자리 물색에 나선 조정의 부산한 움직임이 감지된다. 이에 의하면 검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유한우(劉旱雨)·전 서운 정(書雲正) 이양달(李陽達) 등이 원평(原平)의 예전 봉성(蓬城)에서 길지(吉地)를 얻었다는 말을 듣고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윤(河崙) 등이 직접 해당 지역을 돌아본 결과 봉성 땅은 쓸 수 없고, 해풍(海豐)의 행주(幸州)에 있는 땅이 쓸 만하다고 보고한다. 하지만 이방원 맘에 들지 않았는지 다시 산릉 자리를 물색할 것을 주문한다. 

산릉 자리는 6월 28일 을사에야 정해진다. 이 날짜 실록에는 

“산릉을 양주(楊州)의 검암(儉巖)에 정하였다. 처음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윤(河崙) 등이 다시 유한우(劉旱雨)·이양달(李陽達)·이양(李良) 등을 거느리고 양주(楊州)의 능 자리를 보는데, 검교 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 김인귀(金仁貴)가 하윤 등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사는 검암(儉巖)에 길지(吉地)가 있다“고 하므로 하윤 등이 가서 보니 과연 좋았다. 조묘 도감 제조(造墓都監提調) 박자청(朴子靑)이 공장(工匠)을 거느리고 역사(役事)를 시작했다.” 

고 한다. 

실제 산릉 공사는 7월에 시작했다. 이달 5일 신해 실록에 “여러 도(道)의 군정(軍丁)을 징발하여 산릉 역사(役事)에 부역(赴役)케 하니, 충청도에서 3천 5백 명, 풍해도(豐海道)에서 2천 명, 강원도에서 5백 명이었다. 7월 그믐날을 기(期)하여 역사를 시작하게 하였다.”고 하거니와, 아마도 제반 징발 과정 등을 거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공사는 한창 진행되어 7월 26일 임신에는 마침내 석실을 만들라는 명령이 나온다. 이 날짜 실록은 陵制와 관련해 매우 중대한 증언이다. 

“석실(石室)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산릉의 기일(期日)이 가까웠는데 고사(故事)를 따르는 자는 석실을 만들자고 하고, 《가례(家禮)》에 의거하는 자는 회격(灰隔)을 쓰자 해서 두 설 중 어느 것을 택할지가 결정되지 않았다. 임금이 세자(世子) 이제(李禔)를 명하여 종묘에 나아가 점[栍]을 쳐서 석실로 정했다.” 

命造石室。 山陵期近, 遵故事者, 欲作石室; 據《家禮》者, 欲用灰隔, 兩說未定, 上命世子禔詣宗廟探栍, 定爲石室。 

주자가례도 관습 앞에는 이때까지만 해도 맥을 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제는 점점 세력을 확보해 이데올로기로 정착해 가는 과정을 우리는 목도한다. 

이어 7월 29일 을해에는 “산릉의 재궁(齋宮)에 개경사(開慶寺)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조계종(曹溪宗)에 붙여서 노비(奴婢) 1백 50구(口)와 전지(田地) 3백 결(結)을 정속(定屬)시켰다. 연경사(衍慶寺)의 원속(元屬) 노비(奴婢)가 80구(口)인데 이번에 20구를 더 정속(定屬)시켰다. 임금이 황희(黃喜)에게 이르기를, ‘불씨(佛氏)의 그른 것을 내 어찌 알지 못하랴마는, 이것을 하는 것은 부왕(父王)의 대사(大事)를 당하여 시비(是非)를 따질 겨를이 없다. 내 생전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제정하여 후손에게 전하겠다’고 했다”고 했으니, 이를 통해 우리는 조선왕국 건국 이후에도 불교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장면을 목도한다. 더불어 산릉을 관리하는 사찰인 원찰(願刹)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그 장면도 같이 본다. 

이어 같은 날에 이방원은 산릉 수호군(守護軍) 1백 명을 두라고 했으므로, 이들이 일종의 수릉인임은 말할 나위가 없겠다. 

8월 7일 임오에는 이성계에게 계운 성문 신무 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는 존호와 태조(太祖)라는 廟號를 올렸으며, 8월 25일 경자에는 산릉사(山陵使) 이직(李稷)을 보내 산릉의 참초제(斬草祭)와 개토제(開土祭)를 행한다. 

9월 4일 기유에는 대신을 보내 산릉의 발인(發引)을 종묘(宗廟)·사직(社稷)에 고했는가 하면, 섭태부(攝太傅)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지(李至)와 섭중서령(攝中書令) 한성윤(漢城尹) 맹사성(孟思誠)을 보내어 시책(諡冊)·시보(諡寶)를 빈전(殯殿)에 올리니, 시보(諡寶)에는 전자(篆字)로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 지보(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之寶)’라 썼다. 

9월 5일 경술에는 백일재(百日齋)를 흥덕사(興德寺)에 베풀고, 이틀 뒤인 7일 임자에는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殯殿)에 나아가 견전례(遣奠禮)를 행하고, 영구(靈柩)를 받들어 발인(發引)했다. 같은 날 오시(午時)에는 영구가 검암(儉巖) 동구(洞口)에 이르러서, 시신은 악차(幄次)로 옮겨진다. 

이튿날인 8일 계축에는 임금이 상왕 정종과 함께 산릉을 살피고, 그 이튿날인 9일 마침내 이성계는 건원릉(健元陵)에 영원히 잠든다. 이 장면을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자시(子時)에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임광제(臨壙祭)를 행하고 현궁(玄宮)을 봉안(奉安)하고 나서, 곧 하직하고 신주(神主)를 썼다. 백관은 최복을 벗고 오사모(烏紗帽)에 흑각대(黑角帶)로 입시(入侍)했다. 다음에 반혼 동가제(返魂動駕祭)를 행하고 우주(虞主)를 받들고 돌아오는데, 길장(吉仗)이 앞서고 문무백관이 앞에서 인도하며, 상왕과 주상은 소연(素輦)을 타고 반혼거(返魂車) 뒤를 따르고, 군위(軍威)는 뒤에서 옹위(擁衛)하였다. 사헌집의(司憲執義) 이관(李灌)을 머물게 하여 현궁(玄宮)의 봉함을 감독케 하고 엄광제(掩壙祭)를 행하게 하였다. 도성에 머물러 있던 각사(各司)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등이 동교(東郊)에서 봉영(奉迎)하여 흥인문(興仁門)으로 들어와, 오시(午時)에 우주(虞主)를 문소전(文昭殿)에 봉안하고,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초우제(初虞祭)를 행하고 환궁(還宮)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권도(權道)로 최질(衰絰)을 벗고 소복(素服)을 입을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子時, 上率百官行臨壙祭, 奉安于玄宮, 遂奉辭題神主。 百官釋衰服, 以烏紗帽黑角帶入侍, 次行返魂動駕祭, 奉虞主而還。 吉仗居前, 文武百官前導, 上王及上乘素輦, 隨返魂車之後, 軍威擁後。 留司憲執義李灌, 監鎖玄宮, 行掩壙祭。 留都各司閑良耆老等, 奉迎于東郊, 入自興仁門, 午時, 奉安虞主于文昭殿。 上率百官行初虞祭, 還宮。 議政府請權釋衰絰著素服,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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