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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제9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79~197년). 신대왕 둘째아들이며 이름은 남무(南武)다. 이이모(伊夷模)라는 기록도 있지만, 중국측 기록에는 산상왕 이름이라 혼란이 있다. 국양왕(國壤王)이라고도 한다. 불초한 형 발기(拔奇)를 제치고 태자에 책봉되어 왕위를 이었다. 왕비는 제나부(堤那部) 우소(于素)의 딸 우씨(于氏). 재위기간 후 후한(後漢) 요동(遼東)태수 침입을 받기도 했고 외척들의 반란을 만나기도 했다. 평민인 을파소(乙巴素)를 일약 국상(國相)에 등용하는 파격을 보였고 그의 진언으로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했다. 죽어 고국천원(故國川原)에 묻혔다

삼국사기 권 제16(고구려본기 제4) 고국천왕 조 :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이름이 남무(男武)이니<이이모(伊夷謨)라고도 한다>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죽자, 국인들은 맏아들 발기(拔奇)가 불초하므로 함께 이이모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초에 발기가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해 소노가(消奴加)와 함께 각각 하호(下戶)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公孫康)에게 가서 항복하고는, 돌아와 비류수 가에 머물렀다. 왕은 키가 아홉 척이고 자태와 겉모습이 크고 위엄이 있었으며 힘이 능히 솥을 들 만 했고, 일에 임해서는 다른 사람 말을 듣고 결단했으며 관대하고 엄함에 있어 중용을 지켰다. 2년(180) 봄 2월에 왕비 우씨(于氏)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 왕후는 제나부(堤那部) 우소(于素)의 딸이다. 가을 9월에 왕은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4년(182) 봄 3월 갑인 밤에 붉은 기운이 뱀처럼 태미(太微)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살별[星]이 태미를 지나갔다. 6년(184) 한나라 요동태수가 군대를 일으켜 우리를 쳤다. 왕은 왕자 계수(=須)를 보내 막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왕이 친히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나라 군대와 좌원에서 싸워 이기니 벤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8년(186) 여름 4월 을묘에 형혹이 심성을 지켰다. 5월 그믐 임진에 일식이 있었다.12년(190) 가을 9월에 서울에 눈이 여섯 자나 내렸다. 중외대부 패자 어비류(於留),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가 모두 왕후의 친척으서 나라의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그 자제들이 모두 세력을 믿고 교만하고 사치했으며 남의 자녀와 전택을 빼앗으므로, 국인들이 원망하고 분하게 여겼다. 왕은 이를 듣고 노하여 죽이려 하니, 좌가려 등이 4연나와 더불어 반란을 꾀했다. 13년(191) 여름 4월에 좌가려 등이 무리를 모아 왕도를 공격했다. 왕은 기내(畿內) 군사를 동원해 평정하고는 마침내 명령을 내렸다. “근래에 총애하는 바에 따라 관직을 주고 덕이 없어도 자리에 나아가니, 해독이 백성에게 미치고 우리 왕실을 흔들어 대니, 이는 과인이 똑똑하지 못한 까닭이다. 이제 너희 4부는 각각 어질고 착한 사람이면서도 아래에 있는 자를 천거토록 하라”. 이에 4부가 함께 동부(東部)의 안류(晏留)를 천거하니, 왕이 그를 불러 국정을 맡겼다. 안류가 왕에게 말했다. “미천한 신은 용렬하고 어리석어 본래 큰 정치에 참여하기에 부족합니다. 서압록곡(西鴨谷) 좌물촌(左勿村) 을파소(乙巴素)란 사람은 유리왕 때 대신 을소(乙素)의 손자로서, 성질이 굳세고 지혜와 사려가 깊으나, 세상에서 쓰여지지 못하고 힘들여 농사지어 자급합니다. 대왕께서 만약 나라를 다스리려 하신다면 이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왕은 사신을 보내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로써 모셔 중외대부로 임명하고는 작위를 더해 우태로 삼고 말했다. “내가 외람되이 선왕의 업을 이어 신민(臣民)의 위에 있으나, 덕이 부족하고 재주가 짧아 정치에 익숙하지 못하오. 선생은 능력을 감추고 지혜를 나타내지 않으면서 궁색하게 시골에서 지낸 지 오래 되었소. 이제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바꿔 왔으니, 내 기쁨과 다행일 뿐만 아니라, 사직과 백성의 복이오. 가르침을 받으려 하니 공은 마음을 다하기를 바라오”. 파소가 뜻은 비록 나라에 허락했으나 받은 관직이 일을 다스리기에 부족하다 생각해서 대답했다. “신의 둔하고 느린 것으로는 엄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질고 착한 사람을 뽑아 높은 관직을 주어서 대업을 이루십시오”. 왕은 그 뜻을 알고 곧 국상으로 임명하고 정사를 맡게 했다. 이리하여 조정의 신하와 왕실의 친척들이 소가 신진으로서 구신(舊臣)들을 이간한다고 하며 미워했다. 왕은 교서를 내려 "귀천을 막론하고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멸족시키겠다"고 했다. 소가 물러나와 어떤 사람에게 말했다.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마땅한 도리이다. 지금 임금께서 나를 후의로써 대하니 이전에 숨어 지내던 것을 어찌 다시 생각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지성으로 나라를 받들고 정교(政敎)를 밝게 하고 상벌을 신중히 하니, 인민이 편안하고 안팎이 무사했다. 겨울 10월에 왕이 안류에게 말했다. “만약 그대의 한마디 말이 없었다면 나는 파소를 얻어 함께 다스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 많은 공적이 쌓인 것은 그대의 공이다.” 그리고는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논하여 말한다. 옛날의 밝은 임금이 어진 이를 대할 때, 등용하는 데에 구애됨이 없고 등용하면 의심하지 않았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의 부열(傅說)에 대한 것이나, 촉(蜀)나라 선주(先主)의 공명(孔明)에 대한 것이나, 진(秦)나라 부견(堅)의 왕맹(王猛)에 대한 것이 그와 같다. 그런 후에야 어진 사람이 자리에 앉고 능력있는 사람이 직분을 맡아 정교가 밝게 닦아져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왕이 결연히 홀로 결단하여 파소를 바닷가에서 뽑아 여러 사람의 입놀림에도 흔들리지 않고 모든 관료의 윗자리에 두었으며, 또 천거한 자에게도 상을 주었으니 선왕의 법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16년(194)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쳐서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진휼했다. 겨울 10월에 왕이 질양으로 사냥나갔다가 길에서 앉아 우는 자를 보고 “왜 우느냐?”고 물으니 대답했다. “신은 가난하고 궁해 항상 품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올해 흉년이 들어 품 팔 데가 없어, 한 되 한 말 곡식도 얻을 수 없으니 그래서 우는 것입니다”. 왕이 말하기를 “아!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들을 이런 극도의 상황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내 죄다”고 하고는 옷과 음식을 주어 안심시키고 위로했다. 그리고 서울과 지방 담당 관청에 명해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늙은이, 늙어 병들고 가난해 스스로 살아 갈 수 없는 자들을 널리 찾아 구휼케 했다. 담당 관청에 명해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에 이를 때까지, 관의 곡식을 내어 백성의 가구의 다소에 따라 차등있게 진휼 대여케 하고, 겨울 10월에 이르러 갚게 하는 것을 항례(恒例)로 삼게 삼으니 서울과 지방에서 크게 기뻐했다. 19년(197)에 중국에서 큰 난리가 일어나 한나라 사람으로 난리를 피해 투항해 오는 자가 매우 많았다. 이 때가 한나라 헌제 건안 2년이었다. 여름 5월에 왕이 죽었다. 고국천원(故國川原)에 장사하고 왕호를 고국천왕이라 했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9대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이름이 남호(男虎)인데 이모(夷謨)라고도 한다. 을미년에 즉위해 20년을 다스렸다. 국천(國川)은 국양(國壤)이라고도 일컫는데 장지(葬地) 이름이다. 

삼국사기 권제45 (열전 제5) 을파소 : 을파소(乙巴素)는 고구려 사람이다. 국천왕(國川王) 때 패자(沛者) 어비류(於留)와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 등이 모두 [왕후] 외척으로서 권세를 휘둘러 옳지 못한 짓을 많이 하니,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히 여겼으므로 왕은 노하여 그들을 목베려 하였다. 좌가려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그 일당을] 목 베기도 하고 혹은 귀양보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영을 내렸다. “요즈음 벼슬이 총애로써 주어지고 직위에 덕이 없는 사람이 진출하여 그 해독이 백성에게 퍼지고 우리 왕실은 동요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과인이 밝지 못한 탓이다. 지금 너희 4부(四部)는 각기 아래에 있는 어질고 착한 사람을 천거하라!” 이에 4부는 동부(東部)의 안류(晏留)를 공동으로 천거하였다. 왕이 그를 불러 국정을 맡기려 하였더니 안류가 왕에게 아뢰었다. “저는 용렬 우둔하여 참으로 큰 정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서압록곡(西鴨谷) 좌물촌(左勿村)의 을파소라는 이는 유리왕의 대신 을소(乙素)의 후손입니다. 성질이 강직하고 지혜와 생각이 깊은데도 세상에 등용되지 못하고,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이 사람이 아니고는 될 수 없습니다.” 왕이 사람을 보내 겸손한 말과 정중한 예로 초빙하여 중외대부(中畏大夫)에 임명하고, 작위를 올려 우태(于台)로 삼으며 말하였다.“내가 외람되이 선왕의 자리를 이어 받아 신민의 위에 처하게 되었으나 덕이 적고 재능이 모자라서 잘 다스리지 못하고 있소! 선생은 재주를 감추고 시골에 파묻힌 지 오래이나 지금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바꾸어 이렇게 오니, 이것은 나의 기쁨과 다행일 뿐만 아니라, 사직과 생민의 복이오!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공은 마음을 다하여 주시오.”[을]파소의 생각은 [몸을] 나라에 바치기로 하였으나, 받은 바 직위가 일을 하기에는 좀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대답하기를 “노둔한 신으로서는 감히 엄명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대왕께서는 현량한 사람을 뽑아 높은 벼슬을 주어서 대업을 이루게 하소서.” 하니, 왕은 그 뜻을 알고 이에 국상에 제수하여 정사를 맡게 하였다. 이때 조정 신하들과 국척(國戚)들은 [을]파소가 새로이 들어와 이전 대신들을 소원하게 한다 하여 미워하니, 왕이 하교하되 “귀천을 막론하고 국상에게 복종치 않는 자가 있으면 족을 멸하리라!” 하였다. [을]파소가 물러나와 사람에게 말하였다.“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서 살고, 때를 만나면 나아가 벼슬하는 것은 선비의 당연한 일이다. 지금 임금께서 후의로 나를 대우하니, 어찌 전일의 은거를 다시 생각하랴?”이에 지성으로 나라에 봉사하여 정치와 교화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중앙과 지방에 일이 없었다. 왕이 안류에게 말하였다.“만일 그대의 말이 없었다면, 내가 능히 [을]파소를 얻어서 함께 다스릴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모든 치적이 이루어진 것은 그대의 공이다.” 그를 대사자(大使者)로 임명하였다. 산상왕 7년 가을 8월에 [을]파소가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슬피 울었다.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동천왕 : 8년(234) 가을 9월에 태후 우씨(于氏)가 훙했다. 태후가 죽음에 이르러 유언했다. “내가 바르지 못한 행동을 했으니 앞으로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국양(國壤)을 뵈올 것인가? 여러 신하가 만약 차마 구렁텅이에 떨어뜨리지 않으려거든 나를 산상왕릉 곁에 묻어주기 바란다”. 마침내 그 유언대로 장사했다. 무당[巫者]이 말했다. “국양이 내게 내려와 말씀하였습니다. ‘어제 우씨가 산상에게 돌아감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해 결국 서로 싸웠다. 돌아와 생각하니 낯이 두꺼워도 차마 국인들을 볼 수 없다. 네가 조정에 알려, 물건으로 나를 가리게 하라’”. 이리하여 능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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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 권30 魏書 30 東夷傳 高句麗 : 백고(伯固)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발기(拔奇), 작은 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 拔奇는 어질지 못하여, 國人들이 함께 伊夷模를 옹립하여 王으로 삼았다. 伯固 때부터 자주 遼東을 노략질하였고, 또 流亡한 胡[族] 5백여 戶를 받아들였다. 建安 연간(196~219. 高句麗 故國川王 18~山上王 23)에 공손강(公孫康)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拔奇는 兄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涓奴部)의 [大]加와 함께 각기 下戶 3만명을 이끌고 [公孫]康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沸流水 유역에 옮겨 살았다. [지난 날] 항복했던 胡[族]도 伊夷模를 배반하므로 伊夷模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拔奇는 드디어 遼東으로 건너가고, 그 아들은 [高]句麗에 계속 머물렀는데, 지금 고추가(古雛加) 교위거(駮位居)가 바로 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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